216. 베다니아와 라자로의 집으로 가시면서 예수께서는 어디서 만나셨는지 알 수 없는 제자들 레위와 요셉과 마티아와 요한을 떠나보내시며, 그들에게 새 제자 바르톨마이라고 하는 사도니아를 맡기신다. 이 일은 베다니아의 첫 번째 집들이 있는 곳에서 생긴 일이다. 그러니까 목자인 제자들은 새로 온 사람과 그들이 데리고 있던 다른 일곱 사람과 같이 간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떠나는 것을 바라보시다가 돌아 서시어 사도들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신다. “그럼 이제는 여기서 시몬의 유다를 기다리자.” “아! 그가 간 것을 알아차리셨군요?” 다른 사람들이 놀라서 묻는다. “저희들은 선생님이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신 줄 알았습니다. 사람이 대단히 많았고, 또 선생님은 처음에 젊은이와, 그 다음에는 목자들과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셨으니까요….” “나는 그가 떠나갔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다. 나는 아무 것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친한 집들에 들어가서 유다가 나를 찾으면 베다니아로 보내달라고 말했다….”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하고 알패오의 유다가 입 속으로 중얼거린다. 예수께서 그를 바라보신다. 그러나 그 말을 들추어내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보이신다. 그리고 모두가 타대오와 같은 의견임을 보시기 때문에 -때로는 얼굴이 말보다 더 웅변이다. - 모두에게 말씀하신다.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이렇게 쉬는 것은 좋은 일일 것이다. 이 휴식으로 모두가 기운을 차릴 것이다. 그런 다음 데쿠아로 가자. 날씨는 차지만 맑아간다. 나는 이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겠다. 그런 다음 예리고로 해서 다시 올라와서 강 건너편으로 가자. 목자들이 많은 병자가 나를 찾는다고 말하기에, 그들에게 여행의 위험을 무릅쓰지 말고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라고 말하라고 일러 보냈다.” “가세” 하고 베드로가 한숨을 쉬며 말한다. “자넨 라자로의 집에 가는게 좋지 않은가?” 하고 토마가 묻는다. “나도 좋아.” “그런데 그걸 말하는 투가 이상하네.” “나는 라자로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닐세. 유다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거야….” “너는 죄인이다. 베드로야” 하고 예수께서 그에게 주의를 주시려고 말씀하신다. “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떠나가고, 무례하고, 고통거리인 가리옷의 유다는 죄인이 아닙니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는 베드로가 격렬하게 말한다. “그 사람도 죄인이다. 그러나 그가 죄인이라 하더라도 너는 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중의 아무도 죄인이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해명을 요구하시리라는 것을 기억하여라. 우리에게 요구하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너희들에게 보다도 먼저 내게 그 사람을 맡기셨고, 그 사람을 구제하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해명을 요구하시겠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일을 성공하시리라고 믿으시는 것입니까? 저는 그렇게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십니다. 이것은 믿습니다. 따라서 선생님은 그 사람에 관해서 틀리게 생각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나 그 나머지는 말하지 않은 것이 더 낫습니다” 하고 타대오가 말한다. “사실, 입을 다물 줄 아는 것도 큰 덕행이다. 그러나 더 정확하건 덜 정확하건 어떤 마음에 대한 예측은 그 마음을 파멸에서 구해내기 위하여 끝까지 꾸준해야 하는 의무를 아무에게도 면제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라. 너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숙명론에 빠지기 말아라. 그들은 운명으로 정해져 있는 것은 이루어져야 하고, 운명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런 이유로 그들의 잘못을 변명하고, 내게 대한 그들의 극도의 증오의 행위도 변명한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빠져 들어가는 늪에서 그 사람을 구해내기 위하여 구역질과 분격과 당연하기까지 한 반감을 극복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의 희생을 기다리시는 일이 매우 많다. 그렇다, 이것은 내가 너희들에 분명히 하는 말이다. 전능하시고 전부이신 하느님께서 아무 것도 아닌 한 인간이 희생 한번, 기도 한 번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기다려서 어떤 영의 유죄판결에 서명을 하시는 일이 매우 많다. 어떤 영혼을 구하려고 애쓰고 구하기를 바라는데 늦었다는, 너무 늦었다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리고 나는 너희들에게 거기 대한 증거를 보여 주겠다. 죽음 직전에, 죄인이나 자기를 위하여 괴로워하는 의인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의 첫번째 심판에 가려고 하는 때에도 언제나 구원을 하거나 받을 수가 있다. 잔과 입술 사이에는 항상 죽음을 위한 자리가 있다고 격언은 말한다. 그러나 나는 반대로 임종의 끝과 죽음 사이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용서 받기를 우리가 바라는 사람들을 위하여 용서를 얻을 시간은 언제나 있다고 말하겠다.” 아무도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이제는 육중한 격자문에 이르셔서 문을 열게 하려고 큰소리로 하인을 부르신다. 예수께서는 들어가셔서 라자로의 소식을 물으신다. (하느님이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 개신교 예정론은 바리사이가 주장하는 숙명론과 동일한 오류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시고 돌아온 탕자와 같이 죄인의 회개를 고대하시는데 예정론(숙명론, 운명론)에 따르면 이런 일을 하실 필요가 없는 것이죠. 어차피 천국이나 지옥갈 자가 예정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성경에 아비의 죄를 후손 삼사대까지 묻는다는 말씀은 조상 죄의 악영향이 후손에 미친다는 말씀으로 봅니다. 예를들어 맨날 술먹고 자녀들 학대하는 아비는 그 악한 영향이 자녀들에게 파급되어 (자녀들은 많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으니) 삶에 나쁜 작용을 보인다는 말씀이죠.
우리들이 각자의 운명은 가지고 있지만 전생의 업 탓으로 말하는 것은 교의에 어긋난 이교도 사상이고 이 운명은 하느님 은총으로 얼마든지 좋은 자유의지의 열매를 맺어 행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짐진자들에게 가볍고 편한 내 멍에를 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우리는 만가지 해결책을 가지신 아버지께 어린이처럼 탁 맡기고 구원에 매진하면 나머지는 덧붙여 받게 됩니다. 하느님은 조금만 드려도 크게 갚으시는 분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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