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들어온다. 검은 색 선글라스를 끼고 어깨엔 긴 코트를 걸친 채 천천히 손을 휘저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느리게 내딛는 그, 홍콩 느와르에 등장하는 암흑가의 거물처럼 한껏 폼 나는 모습이다. 그런데 잠깐! 어딘가 어색한 느낌에 자세히 살펴보면 천천히 걷고 있는 사람은 그 혼자일 뿐, 주변 사람들은 모두 정상적으로 움직인다. 게다가 이마엔 땀방울까지 송골송골 맺혀 있지 않은가...
영화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기상천외한 이 장면, 이른바 '인간 슬로우 모션'이라 불리는 이것은 주성치의 첫 출세작 <도성>의 한 장면이다. 알려진 대로 <도성>은 주윤발의 <도신>을 패러디한 영화다. 80년대말, 온 장안은 이쑤시개를 물고 검은 색 코트를 휘날리며 '강호의 도'를 논하는 주윤발의 열풍으로 들끓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막 초짜티를 벗은 파릇파릇한 신인 주성치가 '감히' 홍콩영화계의 제왕 주윤발의 아성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코미디판 도박의 신는 오리지널의 성공을 뛰어넘는 대히트를 기록했다. 지금의 주성치가 패러디의 황제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홍콩 고전에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영화는 없을 정도다. 그의 패러디 실력은 <천왕지왕 2000>에 등장하는 <링>이나 <매트릭스>처럼 방금 발표된 전세계의 따끈따끈한 신작은 물론 <희극지왕>에서처럼 자기 자신을 패러디하는 경지에까지 이르고 있다. 장르와 시대, 국경을 초월하는 그의 놀라운 잡식성은 그러니까 이렇게 처음부터 충분히 예견되었던 것이다.
최근 국내에서도 주성치에 대한 관심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그래서 과거 "그것도 영화냐? 어떻게 그런 황당한 영화를 볼 수 있냐'는 비웃음 속에서도 꿋꿋하게 주성치의 영화를 섭렵하고 칭송해 오던 '성치교도'들에겐 이런 때아닌 대접이 반갑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어리둥절하기도 할 정도다. 하지만, 사실 홍콩영화계에서 주성치는 오래 전부터 이미 엄청난 인기를 누려왔다. 과거 10년간의 홍콩 박스 오피스를 잠깐만 보더라도 그의 위력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90년 홍콩 최고의 흥행성적을 거둔 <도성>을 비롯해 <도신2> <무적행운성> 등 90년만에만 3편의 영화가 10위에 올랐고 92년에는 <심사관> <가유희사> <녹정기> 등 영화 베스트 10의 절반이 주성치의 영화였다. 그의 이러한 행보는 90년대 내내 계속되었으며, 99년 최고의 히트작인 <희극지왕>까지 그칠 줄 모르고 있다. 반환 이후 눈에 띄게 침체된 현재의 홍콩영화계에서 유일하게 위력을 잃지 않은 영화가 있다면 바로 주성치의 영화일 것이다.
그렇다면 주성치의 성공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특별히 잘 생긴 것도 아니요, 어찌 보면 평범하기까지 한 작고 귀여운 이 남자의 매력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다시 앞에서 본 <도성>의 장면을 떠올려 보자. 이 장면에서처럼 주성치 영화에서의 웃음은 대부분 주성치라는 인물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다. 홍콩느와르나 카지노 무비, 쿵푸영화 같은 다른 홍콩영화들이 스타와 장르를 결합한 흥행전략을 전면에 내세운다면 주성치의 영화는 특유의 몸짓, 수다, 걸음걸이 같은 독특한 캐릭터에서 전반적인 스타일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그의 영화는 <월광보합> <선리기연>처럼 과거를 배경으로 했든, <식신> <희극지왕> <파계지왕>처럼 현대를 배경으로 했든, SF 영화를 찍든, <007 북경특급>같은 첩보물이든, <신정무문>같은 쿵푸영화든, 장르나 시대에 상관없이 항상 똑같다. 그래서 이 영화들은 단순히 주성치가 출연한 영화들이 아닌 '주성치 영화'로 불릴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주성치 영화에는 주성치 영화만의 특징이 있다. 그의 영화를 몇 편만이라도 눈여겨본 관객이라면 그의 영화엔 주성치 만큼이나 낯익은 얼굴들이 등장함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주성치의 영원한 파트너인 오맹달, 장민, 막문위, 오군려, 감독이자 배우인 이력지처럼 그의 영화에는 언제나 고정적으로 작업하는 배우와 감독들이 있다. 주연, 조연을 가리지 않고 비슷한 배우가 비슷한 배역을 연기하는 이들의 존재는 마치 '007 시리즈'에 등장하는 첨단무기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이들은 극중 인물을 연기하지만 주성치 영화를 계속해서 보아온 관객에게는 극중 인물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극중 배역이 무엇이든 '오맹달', '이력지'라는 자체로 관객들은 충분히 웃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짚고 넘어갈 점은 이들이 대부분 서민계층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주성치는 영화 속에서 잘난 인물로 나온 적이 거의 없다. 부잣집 아가씨를 꼬셔서 팔자 한번 고쳐보려는 날건달(무적행운성), 여자 때문에 목숨 걸고 '무적풍화륜'이라는 비기를 익히는 배달맨(파계지왕), 시골에서 막 올라온 촌뜨기 청년(신정무문), 외국에서 학위를 받고 왔어도 엑스트라 자리 하나 얻지 못하는 별볼일 없는 배우(희극지왕)처럼 어딘가 모자라고 인생을 힘들게 사는 인물이다. <식신>이나 <홍콩마스크>, <무장원소걸아>처럼 처음엔 잘 나갔어도 정신 차리고 새사람이 되기까지 세상의 쓴맛, 단맛을 호되게 맛보기도 한다. 사정은 다른 주, 조연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수위, 엑스트라, 술집종업원, 부랑자, 사기꾼, 시장 잡상인처럼 주류사회에서 소외되고 하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영화 속에서 말도 안 되고 지저분하며 만화 같은 황당한 행동을 일삼지만 이들의 이미지는 관객들에게는 오히려 서민적이고 친숙하게 다가온다. 주성치의 영화가 대부분 홍콩사람들이 사용하는 광동어로 되어 있으며 유행어나 속어를 많이 사용하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렇듯 주성치 영화가 홍콩 대중들에게 높은 인기를 얻는 이유는 황당한 내용과 상황이 언뜻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현실과 멀지 않은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홍콩 바깥에 사는 우리 같은 외국의 관객들에겐 그의 영화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주성치 영화는 한마디로 황당하다. 폭탄이 터지거나 온 몸에 불이 붙어도 멀쩡하는 등 현실에선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상황들이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벌어진다. 게다가 배우나 영화 자체도 시치미를 뚝 떼고 이것이 현실이라고 말한다. 인물들은 한결같이 뻔뻔하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전세계의 모든 문화가 잡탕처럼 섞여 있다. 하지만, 일단 이런 세계에 익숙해진다면 그의 영화는 묘한 해방감으로 다가온다. 현실로부터 뚝 떨어져서 겪는 일탈의 경험, 그래서 그의 영화는 일종의 '카니발' 같은 쾌감을 주기도 한다. 이렇게 본다면 주성치 영화에서 국경의 경계나 객관적인 평가 같은 건 별다른 의미가 없을 듯 하다. 주성치 영화에는 '좋다/싫다'의 구분만이 존재한다. 관객이 고르는 영화가 아니라 스스로 관객을 고르는 영화, 이 독특하고 특별한 영화가 바로 주성치 영화다. 그래서, 주성치의 세계를 즐길 수 있는 관객이라면 누구라도 기꺼이 이렇게 외칠 것이다. "멋지다!! 주성치" -주말-
첫댓글 어허 따진다 그냥 암소리말구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