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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원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3남 익안대군 16세손이며, 논산의 가난한 농군의 아들이었다. 그가 태어날 당시 그의 집은 얼마나 가난했던지 월사금이 없어서 9살이 되도록 초등학교에도 입학을 못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이럽게 논산 백석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어려웠던 가정환경 때문에 중학교 진학이 어렵게되자, "시험을 잘봐서 5등 안에 들면 돈 없이도 학교에 다닐 수 있다"고 부모를 설득, 논산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논산중학교 재학시절 그는 학교 도서관의 문학전집을 모두 통독할 정도로 독서에 심취, 각종 백일장과 독후감상문 대회에서 여러 번 장원을 차지했다. 또 웅변을 좋아하던 그는 교내 대회는 물론 충남도내 각종 웅변대회에서 우승을 독차지했다. |
그는 대학입시를 앞두고 소년시절 꿈인 이순신이나 나폴레옹 같은 장군이 되기 위해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는 것과 아브라함 링컨의 전기를 읽으면서 꾸기 시작한 링컨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변호사로서 다양한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는 것을 두고 적잖은 고민을 하기도 했다. |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군에 입대했다. 1976년 육군 사병으로 입대, 전방의 30사단 90연대에서 행정병으로 근무한 후 1978년 육군 병장으로 제대했다. |
그의 정계진출은 변호사로서 어려운 처지에 놓인 한 명을 상대하기 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위해, 1987년 9월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에 취임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는 1988년 4.26 총선에서 39세의 젊은 나이로, 안양갑구(현 안양만안)에서 국회의원에 당선, 1988년에 열린 '국회 5.18 광주청문회'에서 체계적이고, 논리 정연한 질문을 통해 소위 '청문회 스타'로 부상했으며, 대변인 등을 거쳤다. |
경기도지사 시절 그는 경기도정의 목표를 「일등경기 일류한국」으로 정하고, 도정방침인 「경제제일」,「환경우선」,「문화근본」이란 목표에 따라 15대 정책 50대 중점사업을 추진 잘사는 경기 건설에 앞장 섰다. 그는 1997년 3월, '정치의 명예혁명'을 슬로건으로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에 이어, 같은 해 8월 경기도지사직을 사임하고, '세대교체를 통한 변화와 창조'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국민신당 제15대 대통령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버스 한대로 전국을 돌며, 유권자들의 지지를 호소, 같은 해 12월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500여만표를 획득했다. |
이의원은 5개월간의 미국 생활을 마친 뒤, 귀국길에 이탈리아 밀라노 첨단패션산업지역과 영국 런던 증권거래소, 프랑스의 산업현장 등을 비롯, 통일 독일과 일본 등을 거쳐 돌아왔다. 이어 그는 1999년 9월에는 중국을 방문, 북경대학에서 '21세기 세계경제와 한중 경제협력'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했다. 이 밖에도 이 의원은 2001년 3월에는 인도의 방갈로르 IT산업단지를 방문,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인도 소프트웨어 산업을 시찰한데 이어, 5월에는 러시아의 IMEMO(세계경제 및 국제관계연구소)초청으로 러시아를 방문, 러시아의 정재계 인사들과 폭넓은 교류를 나눴다. |
이어 지난 2000년 8월 30일 실시된 새천년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원들의 지지를 얻어 최고위원에 당선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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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성가
똑똑하고
서민의편
첫댓글 이사람 사법고시 10번인가 15번 떨어졌었다든데.. 근데 서민의 편이라는 생각은 안든다.
28살떄까지 백수짓꺼리 하다가 사시안되고...이후에 군대 제대하고 32살에 합격했지.그리고 이인제하면 인권변호사 시절에 무료변호로 아주 유명했다...그시절에 무료변호사 한거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그자신도 가난한 농민의 자식이었고,서민을 위해서 많은일을 했다...
이인제 하면 배신의 귀재에 97 대선에서 이새끼때문에 이회창이가 피눈물을 흘렸지.. 사사건건 초를 치는 놈
전형적인 생계형 우파 쓰레기지.
97대선 그냥 이회창밀어주고 그다음 먹었으면 될것을... 괜히 배반때렸다가 김대중한테 팽당하고 ㅉㅉ
이인제씨 대사를 치룰때마다 진짜 절친하게 지내는 무슨 도사한테 자문구하는데..그때 나오라고그랬데 지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