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닥불
백석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수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한 이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어휘풀이]
-새끼오리 : 새끼줄의 가닥
-갓신창 : 부서진 갓에서 나온, 말총으로 된 질긴 끈의 한 종류
-개니빠디 : 개의 이빨
-너울쪽 : 널빤지쪽
-짗 : 깃
-개터럭 : 개의 털
-초시(初試) : 조선시대에 서울과 지방에서 과거에 처음으로 합격한 사람.
-문장 : 한 문중에서 항렬과 나이가 제일 위인 사람.
-갓사둔 : 이제 막 사돈이 된 사람.
-몽둥발이 : 떨려 붙었던 것이 다 떨어지고 몸뚱이만 남은 물건
[작품해설]
이 시는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닥불’을 소재로 하여 공동체적 삶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추운 겨울날, 빨갛게 피어오르는 모닥불은 그 주위에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음으로써 그들로하여금 구김살 없는 대화를 나누게 하는 만남의 장 구실을 한다. 즉 계층이나 차별없이 모든 사람들과 동물들이 모여들 수 있는 공동체 사회의 훈훈한 정감이 살아 있는 원초적 공간의 구실을 한다.
먼저 1연에서는 모닥불 피우기 위해 태우는 땔감을 나열하고 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부스러지고 버려지고 잊혀졌던 하찮은 것들이지만, 그런 것들이 모여 따뜻한 모닥불을 이루고 있다. 그 땔감들을 나열하는 조사 ‘-도’는 점점 커가는 모닥불의 이미지를 환기시켜 준다.
2연은 모닥불 주위에 모여들어 불을 쬐는 한 무리 사람들과 그들을 따르는 짐승들을 나열하고 있다. 그들은 화자와 한 핏줄이며, 같은 마을의 구성원이며, 마을을 드나들며 서로 친밀히 인연을 맺고 있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하찮은 사물과 사물이, 사람과 짐승이아무런 구별이나 차등이 없이 하나로 아우러져 만들어낸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농촌 공동체가 이상으로는 삼는 최상의 풍경인지도 모른다.
3연에서는 모닥불 속에 숨겨져 있는 한 내력을 떠올린다. 화자의 ‘할아버지’는 어버이를 여윈 ‘서러운 아이’로 돌아보는 주는 이 없이 자라났는데, 추운 겨울날 모닥불을 피워놓고 잠들다 그 불에 발을 태워 ‘몽둥발이’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화자가 들려주는 ‘이 슬픈 역사’는 비록 화자의 할아버지 개인적 이야기이지만, 그것은 한 집안, 한 마을의 이야기로만 머물지는 않는다. 그 ‘할아버지’는 우리 농촌의 공동체의 한 전형으로 ‘어미 아비 없는’ 할아버지의 ‘슬픈역사’를, 나라를 빼앗긴 우리의 ‘역사’로 확대해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작품의 의도는 그 ‘슬픈 역사’를 들추고 되새기고자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슬픔마저도 넉넉하게 포옹하고 하나로 일체화시키는 모닥불의 따뜻함과 그것이 표상하는 농촌 공동체의 화해의 세계에 대한 공감을 보여 주고자 하는데 있다.
이제 모닥불은 이제 더이사 자제구레한 것들이 타면서 이루는 단순한 불꽃이 아니다. 잡다한 것들이 불속에 던져져 하나의 거대한 모닥불을 이루어 내는 것처럼, 타는 물건과 쬐는 사람이, 사람과 짐승이, 사람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화합과 친밀의 공간이다.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주며 가슴속의 서러움마저도 녹아내리게 하는 것이 바로 모닥불이다. 그러므로 모닥불과 같이 화해의 공동체 의식이 살아 있는 세계 안에서는 ‘할아버지’의 ‘슬픈 역사’ 같은 고통스럽고 서러운 역사일망정 끈끈한 내적 충일감 하나로 녹아 버리게 되는 것이다. 다시말해, 어려서 고아가 되아 갖은 고초를 겪으며 살아온 ‘할아버지’의 슬픈 개인사가 모닥불을 피워내는 근원적인 힘이자 그것들이 다시 사물들과 사람들을 하나의 유대로 엮어내는 힘이라는 상상적 동일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시는 비록 짧은 시행이지만 모닥불을 대하는 화자의 차분한 눈길은 일제의 폭압속에서도 우리의 것을 알뜰히 지켜낼 있게 한 하나의 버팀목으로 자리 잡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작가소개]
백석(白石)
본명 : 백기행(白夔行)
1912년 평안북도 정주 출생
1929년 오산보고 졸업, 동경 아오야마(靑山)학원에서 영문학 공부
1934년 귀국 후 조선일보사 입사
1935년 시 「정주성(定州城)」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며 등단.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
1942년 만주의 안동에서 세관 업무에 종사
1945년 해방 후 북한에서 문학 활동
1995년 사망
시집 : 『사슴』(1936), 『백석시전집』(1987), 『가즈랑집 할머니』(1988), 『흰 바람벽이 있어』(1989), 『멧새소리』(1991), 『내가 생각하는 것은』(1995),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1997), 『집게네 네 형제』(1997), 『백석전집』(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