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민의 스토리가 있는 여행] 제자 신의에 탄복… 초가 유배지서 완성된 추사의 붓
[논어 따라 떠나는 우리 땅 역사기행] ⑦제주
입력 2021-08-17 07:00
어려울 때 참모습이 드러난다 ‘세한후조(歲寒後彫)’
子曰(자왈), 歲寒(세한) 然後知松柏之(연후지송백지) 後彫也(후조야)
공자께서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셨다.
◇ 세한후조(歲寒後彫)… 군자의 의리를 지킨다
‘세한(歲寒)’이란 ‘설 전후의 한겨울 추위’란 뜻으로, 매우 추운 시기 혹은 힘든 시기를 말한다. 송백(松柏)은 소나무와 잣나무로, 변하지 않는 지조를 상징한다. 추운 겨울에도 소나무와 잣나무는 독야청청 푸르다.
‘세한후조’는 태평을 누릴 땐 고마움을 모르다가 역경에 처하면 그 시절 지도자를 그리워한다는 의미도 있다. ‘조(彫)’는 ‘시들다’란 뜻이다. 진정한 군자는 눈앞의 이익을 좆지 않고 끝까지 의리로써 신뢰를 보내는 바, 혹독한 날에도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자는 시류에 편승해 겉으론 군자인 척해 주변의 칭송을 받지만 실은 덕을 해치는 도둑이 있다며, 그들을 ‘향원(鄕原)’이라고 했다. 겉으로 드러난 평판을 이용해 뒤로는 영달을 추구하는, 처세술에 능한 사이비 군자다. 조선시대엔 이런 선비를 속유(俗儒)라고 불렀다. 우리 역사에서는 추사 김정희(金正喜)와 애제자 우선 이상적과의 사이가 어떤 상황에서도 군자의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세한후조(歲寒後彫)의 표상이다.
◇ ‘시대의 지성’ 추사를 도운 사람들
1840년 6월. 55세의 김정희는 동지부사로 30년 만에 다시 ‘신지식의 보고(寶庫)’ 연경(베이징)을 찾게 될 꿈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10년 전 ‘윤상도 옥사 사건’이 정치적으로 악용돼 다시 소환되는 바람에 경주 김씨인 추사의 연경행 꿈은 깨지고 국문을 당하게 된다.
오랜 국문 끝에 죽음이 임박한 그때, 다행히 북한산에 올라 진흥왕 순수비를 함께 확인했던 벗 우의정 조인영(趙寅永)의 상소로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으로 유배형을 받아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곳은 겨울이면 거센 찬바람에 사람이 ‘못살 곳’이라 해서 ‘모슬포’라 불리던 험지였다. 마당 울타리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위리안치(圍籬安置) 형벌은 더욱 큰 고통이었다.
재상 채제공은 추사가 6살에 대문에 써 붙인 ‘입춘대길(立春大吉)’ 글씨를 보고 “이 아이는 명필로 크게 이름을 떨칠 것이지만 운명이 기구할 테니 붓을 잡게 하지 말라. 대신 문장으로 한다면 세상을 크게 울릴 것이다”라고 했다. 기구한 운명대로 예언이 들어맞았다. 유배 중 아끼던 제자 소치 허련(許鍊)이 세 번 바닷길을 건너왔고, 절친인 초의(初衣)선사가 찾아와 6개월 간 함께했다.
누구보다 추사를 감동시킨 인물은 역관(譯官)인 이상적(李尙迪)이었다. 청나라에서 스승에게 필요한 귀한 책을 구입해 전달했다. 조정 고관들에게 상납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도(道)’를 택했고, ‘시대의 지성’ 추사는 크게 감동했다. 이상적이 선사한 책은 만학집(晩學集)과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藁)를 비롯해 120권에 이르는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 등이었다. 당시로선 셀 수 없을 만큼 큰 금액이다. 경제적으로 풍족했던 역관이었기에 가능했다.
추사는 고마운 마음에 문인화 한 폭을 그려 화제(畵題)를 ‘세한도(歲寒圖)’라 쓰고 그의 호 ‘우선’이란 말과 함께 발문을 적어 그에게 준다. “천만 리 먼 곳에서 사와야 하는 책들이다. 세상 인심이란 물처럼 흘러 권세와 이익을 따라가는데, 권세가에게 주지 않고 바다 너머 초라한 내게 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추운 겨울이 된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드는 것을 뒤로 제쳐둔다(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고 하셨는데….”
추사 사망 후 이상적은 ‘추사를 위한 만시(輓詩)’를 읊었는데 역시 ‘세한(歲寒)’이다. “지기로서 한평생 간직해온 유묵은, 맑은 난과 겨울 추위에도 변치 않는 소나무일세.” 스승에 대한 변치 않은 신의와 존경심이자, 이익을 계산 않고 의리를 지킨 참 인간의 모습이다.
하지만 세한도는 이상적 사후 수난을 겪는다. 주인이 숱하게 바뀌면서 일본인 후지츠카 지카시의 손에 넘어가 도쿄로 건너갔다가 손재형(孫在馨) 선생의 끈질긴 설득에 돈 안 들이고 찾아왔지만 또 다시 떠돌다 간신히 국립중앙박물관 품에 안겼다.
◇ 낡은 조선의 ‘혁신’을 갈망한 신지식인
김정희(1786~1856)는 충남 예산 용궁리에서 김노경(金魯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8살 때 백부 김노영(金魯永)의 양자로 들어간 이후 서울 영조대왕의 잠저 창의궁(현 서촌 통의동)에서 자랐다. 71세이던 1856년 10월 7일 봉은사 ‘판전(板殿)’ 현판을 쓰고 사흘 후에 과천에서 숨을 거두었다.
금석 고증학의 대가인데다 주역에도 매우 뛰어났다. 명나라 동기창(董其昌), 청나라 옹방강(翁方綱)은 물론 북송의 소동파(蘇東坡)와 미불, 당나라 구양순(歐陽詢)의 서체까지 두루 섭렵해 자신만의 독창적 ‘추사체’를 완성했다. 꾸밈 없이 소박하며 맑고 고아해 졸박청고(拙樸淸高), 졸박청수(拙樸淸瘦)로 표현되었다. 역설적이지만 오랜 유배 시간이 그런 예술의 극한 경지에 이르게 한 밀알이 되었다.
추사체를 사대주의 등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추사는 성리학의 폐단에 갇힌 조선 유학, 세도정치에 농락되던 당시 사회 속에서 유학의 본질을 찾고자 고증학에 심취했다. 그리고 송나라와 원나라를 주목했다. 매우 진보적인 사고였다. 실용 학문에 앞서가던 청나라 서적도 찾았다. ‘우리 것’을 위해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고자, 중국이 갖고 있던 ‘그것’을 갈망했다.
추사체는 ‘글씨’를 넘어 ‘그림’이었다. 그의 글씨체는 어떤 장소에 어떤 의미의 글씨를 걸어둘 것인지에 따라 획이나 모양새가 완전히 달라진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림에 수많은 ‘암호’를 남겼듯이 추사 또한 글씨를 통한 그림 속에 다양한 ‘암호’를 남겼다. ‘추사 코드’다. 그 암호를 우리는 다 풀 수 있을까?
◇ 제주 유배지 … 인내의 열매는 달았다
제주도는 너무 멀고 사람이 살기 힘들어 원악도(遠惡島)라고 불렸다. 작은 배로 풍랑을 헤치려면 목숨도 걸어야 한다. 하지만 추사는 살 운명이었다. 해남에서 제주까지 뱃길로 사흘 이상 걸리는 거리를 당일에 도착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거센 풍파에 배가 휘청거림에도 뱃머리에 앉아 의연했다. 공자의 ‘군자는 곤궁에 처해도 의연하다’는 말 그대로였다.
위리안치 형벌이었지만 지방관의 도움으로 유배 기간에 많은 곳을 다녔다. 인근 대정향교는 물론 산방산, 한라산 등반도 했다. 뜻 있는 많은 이들이 찾아와 제자가 되었다. 대정읍에 재현한 ‘추사 유배지’도 제자 강도순의 집을 복원한 것이다.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제주 추사관’도 있다. 옆 모습이 ‘세한도’ 그림 속 집과 닮았다.
풍토병 등 척박한 환경 속에서 추사는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완숙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살아있는 권력에 아첨하지 않고 유배객 노 스승을 챙겨준 이상적 등 제자와 벗들의 도움으로 추사체를 완성해 간 것이다. 그 열매를 맺게 해 준 강도순의 집에 추사는 ‘귤중옥(橘中屋)’이라는 당호를 지어주었다. “겉과 속이 깨끗하고 빛깔은 푸르며 누런데, 우뚝한 지조와 꽃답고 향기로운 덕은 비교할 바가 아니니 그로써 내 집의 액호로 삼는다”고 했다.
추사는 자신보다 200년 앞선 1614년에 유배 왔던 동계 정온(鄭蘊)을 기리며 제주 목사 이원조(李源祚)를 설득해 ‘동계정선생유허비’를 세우게 했다. 유배객 추사의 입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추사관 근처 보성초교 뜰에 있다. 정온은 도가 없는 세상을 등지고 덕유산에 은둔해 살다 굶어 죽은 기개 있는 선비다.
이곳에서 도보로 30분 거리의 대정향교는 추사가 제자들을 가르치러 종종 들렀던 곳이다. 기숙사인 동재(東齋)에 ‘의문당(疑問堂)’이라 써준 현판은 ‘늘 의문을 갖고 학문에 임하라’는 의미로, 이 또한 공자의 말씀이다. 현판은 현재 제주 추사관에 있다. 서쪽 담장 너머 길가에는 추사가 차를 마시기 위해 길었던 세미물 샘터가 남아 있다.
제주도 유배 8년 3개월 만에 석방 명령이 떨어져 1849년 새해에 64세로 제주를 떠나게 된다. 뭍으로 향하는 제주시내 화북포구 해신사(海神祠)에서 그는 용왕에게 제물을 올리고 무사히 건널 수 있기만을 빌었다. 얼마나 간절했을까. 추사도 이렇게 나약해질 때가 있었다.
◇ 함께 둘러보면 좋을 제주의 명소
제주도는 유배지나 전쟁터 등 암울했던 현장을 여행하는 ‘다크 투어리즘(darktourism)’의 필수 순례지가 많다. 조선의 내로라 하는 거물급 인사, 심지어 왕도 이곳으로 유배를 왔다. 제주 읍내와 대정현이 그들의 주요 유배지였다.
1519년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한 충암 김정(金淨)은 이곳에서 <충암집>을 남겼다. 광해군 때는 영창대군 살해의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동계 정온이 유배를 왔다. 광해군 역시 인조반정으로 내쫓겨 강화도를 거쳐 1636년에 이곳으로 오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광해군의 적거지는 제주목 관아 옆 중앙사거리와 남문사거리 중간 정도에 있었다.
우암 송시열(宋時烈)도 제주행 배를 탔다. 1689년 장희빈이 아들(훗날 경종)을 낳자 세자 책봉에 반대하다 83세에 유배당해 제주 시내 산지골로 왔다. 제주에 머문 기간은 불과 두 달 20여 일이었고, 돌아가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박영효(朴泳孝)는 고종 때 대신들의 암살을 음모했다는 혐의로 유배를 와 이곳에서 뮈텔 신부와 함께 근대여학교인 신성여학교 개교와 원예농업 보급에 힘썼다. 최익현(崔益鉉)은 제주도에 위리안치 됐다가 2년 후 돌아갔다. 이때 한라산을 등반한 후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를 남겼다.
이들 가운데 김정 정온 송시열 3인은 제주시내 이도1동 옛 귤림서원 터의 ‘오현단(五賢壇)’에 모셔져 있다. 제주 주민들이 제주를 위해준 다섯 분의 현인을 추모한다는 의미다. 송시열이 서울 명륜동 자신의 집터에 써놓은 ‘증주벽립(曾朱璧立, 증자와 주자의 학문이 쌍벽)’이란 큰 글자가 이곳에도 모각돼 있다. 오현 중 나머지 두 명은 안무사(按撫使, 지방 특사)로 제주 주민을 도우러 왔던 청음 김상헌(金尙憲)과 1534년 제주목사로 임명된 규암 송인수(宋麟壽)다.
남민 인문여행 작가 suntopia@hanmail.net
🙏
2020. 6. 10
제주도 무심재 여행에서...
대정향교(大靜鄕校) 의문당(疑問堂) /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무심재 이형권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