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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30. 묵상글 ( 부활 제6주간 금요일. - 기쁨? 사랑할만한 것을 사랑함으로써. 등 )
^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글 일부 : 아직 / 07:15 추가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아직 / 05:15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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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3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5.30 02:27
-기쁨? 사랑할만한 것을 사랑함으로써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떠나시는 것 때문에 제자들이 근심하지만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다 오늘 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근심이 다 기쁨으로 바뀔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실제로 기쁨으로 바뀌는 근심이나 고통이 있는가 하면,
근심과 고통으로 끝나고 마는 근심과 고통도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행불행이 여기에 달렸는데
그런 인생은 얼마나 억울하고 불행합니까?
그런데 우리 주변을 보면 그런 인생이 의외로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기쁨이란 내가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것을 얻을 때 오는 것인데,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일지라도 아무 고통 없이 얻게 되면
그 기쁨이 작거나 아무 기쁨이 되지 못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통과 기쁨은 정비례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오래 고생하고 고통이 크면
그만큼 더 기쁘고 오래 지속되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진 애를 썼건만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수도 있고,
얻긴 했지만 아무 기쁨이 되지 못하는 수도 있습니다.
힘이 없어서 얻지 못하거나
헛것을 얻으려고 했기에 그런 건데 어쨌거나 헛고생입니다.
그러니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고,
불행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론으로는 간단합니다.
힘이 없으면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힘이 없는데도 자기의 무력함을 인정하지 않기에
무진 애를 고집스럽게 쓰는 것이고 헛고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력함을 인정하고 도움을 청하긴 하는데
똑같이 무력한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여
그도 힘들게 하고 헛고생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니 도움을 청할 곳에 청해야겠지요.
하느님께.
그런데 불행의 더 많은 경우는 헛것을 얻으려다 헛고생하는 것입니다.
기껏 얻었지만 기쁨이 되지 못하거나 오래 가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헛것을 얻으면 소유하고 난 뒤 묘하게도 허무 또는 허탈합니다.
이것을 위해 그토록 애를 썼나 하는 감정이 몰려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고 소유하려는 많은 것이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 좋아하는 것을 소유하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사랑할만한 것을 사랑함으로써 소유하고 도움을 받아 소유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고자 하면
이 모든 것이 일거에 다 이뤄지고 기쁨도 인격적인 기쁨이 될 것입니다.
사랑의 기쁨이 최고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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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3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집단 그림자: 사랑으로 가장한 미움
하느님의 숨
2025.05.29. 16:54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5월 29일 목요일 - 스물두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그림자를 끌어안기
악의 가장 큰 가장은 빛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AI 활용
에고와 탐욕과 미움은 종교로 가장하기 때문에 저는 우리가 그것에 큰 신뢰를 두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가 그것에 '아니오'라고 강하게 말하면서 진정한 종교가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면 좋겠습니다! - 오미드 사피(Omid Safi)
[모든 것은 제 자리에 있으면서 서로에게 속한다](Everything belongs)라는 CAC의 팟캐스트에서 CAC 운영진 중 한 사람이자 시인인 드류 잭슨(Drew Jackson)은 시인이자 이슬람 학자인 오미드 사피(Omid Safi)와 대화를 나눕니다. 잭슨이 묻습니다: 시가 특별히 종교들 간에 분쟁이 일고 있는 지역에서 어떻게 평화를 위한 우리의 노력을 지지해 줄 수 있겠습니까? 오미드 사피는 분쟁 중에 있는 것이 종교들이 아니라 종교로 가장한 미움과 심한 해를 끼치는 잘못된 믿음의 그림자 자아들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합니다:
저는 근본적으로 이 세상에 종교 분쟁이나 갈등이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분쟁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인종 학살이 있고 - 우리는 그것을 1년 반 동안 지켜보아 왔습니다. 인종차별, 기아, 사람들의 의도적인 굶주림도 존재합니다. 서로를 점령하고 있고, 끔찍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형제가 말하곤 했듯이,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국가적으로, 인종적으로 자그만 자아를 잘못된 왕좌에 앉혀 놓고 옳은 것을 영원한 단두대에 올려 놓는 것이 우리의 에고이고, 우리의 탐욕이며, 우리의 이기심이라고 생각합니다. [1] 탐욕과 에고와 미움은 코스프레하기를 좋아합니다. [2]....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의상은 종교를 포함한 빛의 옷들입니다.
저는 우리가 다음의 질문을 정말로 고심해 보기를 바랍니다: 우리 종교 전통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 때문에 이 세상에 종교 분쟁이 정말로 존재하는가요? 유대인들의 신앙 한가운데에는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한 전통이 있습니다: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신명 10,19).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그리스도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이들과 고아들, 궁핍한 이들, 과부들에게 잘해 주어라;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또한 우리가 사랑하는 예언자 마호메트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아들의 울부짖음이 하느님의 왕좌에까지 올라와 그 좌의 토대까지 흔들고 있다. [3] 이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샘의 물을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같은 빛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예언자 마호메트의 아름다운 기도의 의미를 잘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의 주님, 모든 존재를 당신 안에 있는 것으로 보게 해 주소서. 그들이 진리 안에 있는 것으로 보게 해 주소서." 에고와 탐욕과 미움은 종교로 가장하기 때문에 저는 우리가 그것에 큰 신뢰를 두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가 그것에 '아니오'라고 강하게 말하면서 진정한 종교가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면 좋겠습니다! 또 진정한 신앙이 있으며 그것은 참으로 겸손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면 좋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신앙에는 같은 류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 인류 전체를 향한 사랑과 배려의 향기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어렸을 적부터 질병을 안고 살아왔는데, 이는 마치 리처드 신부님이 최근에 '예언자의 길'에서 설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계구역에서 그림자의 계곡을 헤매며 사는 것과 같았습니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질병을 경험했고, 가족의 희생 염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10대 때에는 제 삶이 완전히 몰락해 버렸습니다. 저는 제가 걸어 온 길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의 글을 읽으면서 그 길의 아름다움까지도 보는 공동체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Cindy W.
References
[1] Safi refers to the line “Truth forever on the scaffold, / Wrong forever on the throne,” from James Russell Lowell’s poem “The Present Crisis,” often mentioned by Dr. King; see Lowell, The Complete Poetical Works (Houghton Mifflin, 1925), 67.
[2] Cosplay is a type of “costume play” or performance art where individuals wear fashion accessories or costumes to represent specific characters. The term has been adopted as slang, often in politics, to mean someone pretending to play a role or take on a personality disingenuously.
[3] Muhammad ibn ‘Ali ibn Bābawayh al-Qummī, Hadith 573. See Man lā yahduruhu al-faqīh, vol. 1 (United Kingdom: Bab Ul Qaim Publications, 2024), 247.
Adapted from Mike Petrow and Drew Jackson, hosts, Everything Belongs, podcast, season 2, ep. 11, “Entering the World of Another with Omid Safi,”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October 3, 2024. Available as audio download and PDF transcript.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Flavie Martin,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는 조심스러운 호흡을 통해 희미한 빛을 받고 그림자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그림자가 지닌 선물에 이끌려 거기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명명할 수 있는 명확성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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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하느님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이 참으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숨
2025.05.30. 05:22
저는 오늘 미사 복음에는 빠져 있는 요한 복음 16,23의 뒷 부분을 넣었습니다. 22절부터 23절까지의 예수님 말씀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보게 될 때 아무것도 물을 필요없이 너희가 무언가를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너희 가운데 있는 내 현존을 뚜렷이 의식하며 아버지께 직접 청할 것이고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는 그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영국 태생이지만 미국에서 활동하여 미국의 국민 시인으로 알려진 에드가 앨버트 게스트(Edgar A. Guest)는 이런 시를 썼습니다.
"난 어느 날 설교를 듣기 보다는 보고 싶습니다; / 난 단순히 길에 대해 말하는 설교보다는 나와 함께 걸어줄 신앙을 원합니다."
참으로 기도하지 않고, 또 다른 이들을 위해 순수하게 봉사하지 않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겠지요?! 그것은 말뿐인 신앙, 즉 공허한 신앙일 것입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런 신앙은 생명과 사랑과 은총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믿는 게 아니라 '나'를 믿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나'를 내려놓고 희생하는 삶, 참으로 사랑하는 삶에 기꺼이 투신할 수 있을까요?! 아니 적어도 우리가 이렇게 하는 데 늘 성공하지는 못하더라도 끈기 있게 다시, 또다시 그런 삶을 살기 위해 계속해서 도전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갖고 주님의 현존을 의식하는 삶을 살기 위해 시시각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그저 생각에 머무는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추진력을 주는 확신으로 마음에 깊이 깊이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기도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요, 또한 기도의 가장 높은 단계라고 믿습니다. 굳은 신뢰를 두지 않는 기도에는 힘이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늘 올바르게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우리를 세상에 있게 해 주시고, 우리의 이 세상 삶의 여정에서 한결같이 동반해 주시며, 다시 당신 곁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모아 들이고자 하시는 참 사랑의 하느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넘어지고 또 넘어지더라도 우리의 참 어머니요 참 아버지이신 하느님 사랑에 의탁하며 다시 일어서고 또 일어서서 꿋꿋이 사랑의 길을 걷고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낳으시기 위해 진통을 겪으시지만 사랑의 생명을 낳으시면 그 모든 고통을 잊고 기뻐하시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내'가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갖는다고 해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절대 주제넘은 생각이거나 뻔뻔한 생각이 아닙니다. 하느님 사랑을 깊이 의식하게 되면 우리는 참으로 겸손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런 상태인데도 하느님께서는 '나'를 한없이 사랑해 주시니 겸손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우리가 조금 더 힘차게 하느님 사랑을 의식하며 다시 일어서는 하루를 시작하도록 합시다. 어떤 상황이라도 절대 끝난 상황은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시작할 은총을 계속해서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가장 간절히 원하시는 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7).
진정한 회개는 이 엄청난 하느님 사랑으로 돌아서는 것이지, '내'가 해 내지 못한 것에 대해 실망하며 죄책감 속에 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토마스 머튼의 묵상 글 하나를 나누며 오늘 복음 묵상을 마치겠습니다.
– 좌절 –
좌절(실망)은 자기본위(이기심–self–love)의 완전한 극단이다.
이 좌절은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것을 아는 그런 부패한 사치를 즐기기 위해 다른 이들로부터 오는 도움에 대해 일부러 등을 돌릴 때 생기는 것이다.
모든 사람 안에는 어떤 좌절의 뿌리가 숨겨져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 안에는 자기가 갖고 있는 힘으로 되지 않을 때 곧바로 자기연민이라는 잡초와 천한 꽃들을 무성하게 하고 싹트게 하는 자만심이란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갖고 있는 힘이 어쩔 수 없이 우리로 하여금 실패를 맛보게 할 때,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의 낙담과 좌절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꼭 명심해야 한다.) 좌절은 너무도 엄청나고 또 너무도 완고한 자만심의 극한의 단계라서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행복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분께서 우리 위에 계시며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우리의 힘으로써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저주라는 완전한 비참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좌절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겸손한 사람 안에는 자기연민과 같은 그런 것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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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3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5.30 04:24
1954년 전까지는 인간이 1마일(약 1.6km)을 4분 이내로 달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전문가는 물론이고 의사까지 나서서 그 정도로 몸을 혹사하면 심장이 터질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대중들은 이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뢰도가 높은 전문가와 의료진의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로저 배니스터가 1954년에 1마일을 3분 59초 4라는 기록으로 통과했습니다.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뀔 수 있음을 입증한 선수가 된 것이었습니다.
이 위대한 기록은 얼마 뒤에 새롭게 갱신되었을까요? 사람들은 이 기록이 앞으로 절대 깨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기록은 불과 3개월 만에 다른 선수가 두 번째로 4분의 벽을 깼고, 그 뒤로 2년 동안 무려 300명의 선수가 1마일을 4분 안에 주파하게 되었습니다. 전문가와 의사들의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인간이 갑자기 강하고 빠른 존재로 진화한 것일까요? 아니면 폐활량이 커진 것일까요? 이것도 아니면 과학적인 훈련 방식의 새로운 도입 때문일까요? 정답은 자기 한계를 생각하는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한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계에 머물면 안 됩니다. 한계에 머물면 불가능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한계에서 벗어날 때,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주님의 일은 모두 한계를 뛰어넘어야 했습니다. 사랑의 실천도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면서 원수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느님 나라는 이 한계를 뛰어넘어야 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한계를 만들면서 불가능하다고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해산의 고통과 기쁨을 말씀하시면서, 수난의 고통 다음에 오는 부활의 기쁨은 클 것이며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이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제자들은 이 가르침에 낙담과 걱정,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한계가 없음을 당신 부활로 직접 보여주셨고, 제자들도 이로써 한계에서 벗어나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인 한계를 뛰어넘어야 들어갈 수 있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간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한계에 갇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한계에 갇히면, 근심이 우리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한계에서 벗어나는 순간, 커다란 기쁨 안에서 큰 희망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멀리에만 있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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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우리는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지만, 다른 사람은 내가 가진 것을 부러워하고 있다(푸블릴리우스 시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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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3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날에는 아파하고 고통 받는 이들이 유난히도 많아 보입니다.
그런데 누군들 슬픔에서 해방되고 싶지 않는 이가 있을까요?
누군들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요?
기쁨을 향해 달려가지 않으려 하는 이가 있을까요?
그런데, 대체 ‘참된 기쁨’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오늘날 세상의 슬픔과 고통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가장 깊이 공감하며 함께 아파하셨던 프란치스코 교종의 권고문헌인 <복음의 기쁨>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1항)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된 기쁨’을 예수님에게서 만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내 안에서’ 탄생되는 기쁨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제자들은 지금 신음하며 해산중입니다. 해산을 마치면 그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기쁨이 너무 커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고 하십니다. 그때에는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이 기뻐하는 것은 한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서가 아니라, ‘자신의 아기’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기쁨은 아기가 ‘내 안에서’ 태어나야 오는 기쁨입니다. 그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것은 내가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새로 탄생하는 것’이 곧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그렇습니다. 부활이 ‘내 안에서’ 탄생하는 이 기쁨은 빼앗겨 질 수 없는 기쁨입니다. 사실, 내가 기쁨을 낳은 것이 아니라, 기쁨이 나를 낳은 것입니다. 이것야말로 바로 예수님께서 주신 ‘참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죽음이 생명임을, 패배가 아니라 승리임을 말해줍니다. 그 기쁨은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그 속에서도 주님은 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놓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고별담화의 마지막을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주님!
바로 이것이 저의 기쁨입니다.
그 어떤 불길도 태울 수 없고
그 어떤 슬픔도 해칠 수 없고
비록 흔들리더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그 어떤 방벽으로도 막을 수 없고
그 어떤 감옥으로도 가둘 수 없고
그 누구도 빼앗지 못할
결코 빼앗겨 질 수 없는 ‘임의 사랑’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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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3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통이 다하면, 기쁨이 온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처럼 우리의 신앙도 때로는 기다림과 인내의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며칠 전 본당 홍보분과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편집하고, 음향을 관리하는 일은 보통 정성과 시간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기술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공동체를 위한 사랑과 헌신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저는 인내 속에 피어나는 기쁨을 보았습니다. 아이들의 첫영성체 사진을 정리하며 흐뭇해하고, 음향 테스트를 반복하며 고쳐가고, 송년 미사 영상을 밤새워 편집하면서도 미소 짓는 모습 말입니다. 처음에는 2명이 시작했는데 지금은 7명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모임에는 가족도 함께 하기에 더욱 친밀해 보였습니다. ‘스테파노, 마태오, 레오, 요세피나, 글라라, 대건 안드레아, 아우스팅’, 여러분의 땀과 노력 속에 하느님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홍보분과 위원에게 감사드립니다.
생각하나 바꾸면 불편함이 나를 성찰하는 묵상이 됩니다. 아기의 출산은 분명 고통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곧 기쁨의 시간이 됩니다. 한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박해와 순교는 고통의 시간이며, 절망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곧 행복의 시간이 됩니다.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물리적인 시간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의미의 시간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치의 시간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헤어짐의 슬픔은 기쁨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가치의 시간에서는 가난함도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가치의 시간에서는 아픈 것도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은총이 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단절과 허무입니다. 세상에서 이룬 모든 것들과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가치의 시간에서는 죽음도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죽음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에로의 초대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두렵고 떨리는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이며, 기쁨입니다.
고통은 외면하고 싶은 것이지만, 사랑이 있는 고통은 생명을 낳고, 기다림이 있는 인내는 기쁨의 결실로 이어집니다. 마치 아이를 낳는 산모처럼 말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겪는 가장 깊은 고통은,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무력감에서 나온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무력한 사랑도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무력하게 돌아가셨지만, 그 사랑은 인류 전체를 구원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와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걸어서 먼 길을 갔으며, 때로는 매를 맞기도 하고, 멸시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처럼 주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치의 시간을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가치의 시간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신앙을 지키고, 사랑을 실천하고, 공동체를 섬기며 사는 것이 때로는 고단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수고는 헛되지 않으며, 언젠가 하느님께서 달고 깊은 기쁨으로 보상해 주신다는 것을 믿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번, 홍보분과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우리가 모두 고진감래의 신앙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해산할 때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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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3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감당해야 하는 근심과 걱정은 왜 그리 많은지요? 어느 날은 아침에 눈을 뜨며 근심을 시작해서 잠들기 전까지 근심 속에 사는 날도 있습니다. 그런 날에는 꼭 근심하기 위해 눈을 뜨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세상이 만들어놓은 틀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이 세상 안에 살면서 많은 것을 근심하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목적지는 따로 있습니다. 살기 위해 근심하지만, 우리 근심이 끝나는 날이 온다는 것과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는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은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하늘나라의 기쁨이라는 아이를 품게 됩니다. 하늘나라를 품고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어갑니다. 어느 때는 지치고 어느 때는 쉬고 싶기도 합니다. 신앙의 무게가 무거워 다 벗어 던져버리고 싶기도 할 것입니다. 품고 있는 하늘나라가 아닌 지금, 이 세상을 내 멋대로 살고 싶은 치기도 생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나라를 품고 묵묵히 살아갑니다. 주님의 말씀이 자라나도록 힘씁니다. 그 말씀대로 실천하려 애를 씁니다. 용서가 어려운데도 부단히 노력합니다. 이렇게 하늘나라는 자라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삶이 끝나는 날 하늘나라는 열립니다.
우리가 품었던 하늘나라는 열매가 되어 우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늘나라의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주님께 어떤 것도 묻지 않을 것입니다. 고통에 관해서도 기쁨에 관해서도 말입니다. 하늘나라가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품은 하늘나라가 우리 안에서 잘 자라나가기를 바랍니다. 사랑으로, 선으로, 겸손으로 말입니다.
⭐메시지와 메신저
메시지가 있습니다.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평화의 메시지입니다.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이것을 전하는 것은 메신저입니다.
메시지도 중요하지만 메신저도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메시지도 메신저가 제대로 전하지 못하면
그 의미가 달라지거나 퇴색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입니다.
우리가 성실한 메신저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의 메시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전할 수 있는
주님 마음에 드는 메신저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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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3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 삶의 중심, 영혼의 안식처
“거룩하고 아름다운 하느님의 집인 성전”
오늘은 우리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성전 봉헌 대축일입니다. 2006년 5월 30일 건립 봉헌되어 올해로 제19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참으로 감개무량합니다. 새 성전 봉헌을 계기로 요셉수도원이 도약기로 진입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의 은총에 저절로 겸손과 감사의 마음 가득하게 됩니다. 이때를 회고하며 쓴 기록을 나눕니다.
“잠시 멈춰 뒤돌아보니 굽이굽이 하느님의 때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1987년3월19일 개원전 준비기간의 태동기, 초창기, 정착기, 발전기, 그리고 2006.5.30.일 성전 건립후로의 도약기의 때가 흡사 살아 있는 산맥의 다섯 개 산 능선처럼 장관이다. 2005년 8월부터 시작되어 2006년 5월초에 끝났고, 5월30일 이 시몬 베드로 아빠스 주례로 300여명의 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수도원 성전 및 본원 건물의 축복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화려하지도 거대하지도 않은 반 조립식 단순소박한 성전 건물은 현재, 모두의 사랑을 받는 하느님의 처소가 되었다. 새 성전 건립으로 전례도 더욱 충실하고 풍요로워졌다. 예전에는 주례사제가 앉아서 미사를 봉헌했으며 복사도 독서대도 없었다. 수도원 설립 20년째, 제대로 된 성전에서 처음으로 수도형제의 미사복사 도움을 받으며 제대 앞에 서서 미사를 드릴 때의 감동이 새롭다.”
그후 2014년3월19일 자치수도원으로 승격된 후 명실공히 내외적으로 착실히 성장성숙되어가는 요셉수도원 공동체입니다. 성전 봉헌 축일 때 마다 감사패를 드리고 싶은 분들이 참 많지만 세분은 특히 그러합니다. 수도원에 땅을 반기증하다시피한 지금은 이미 고인이 된 ‘박병래 요셉’과 ‘최구 레지나’ 부부와 성전건축에 최선의 정성을 다한 ‘이승용 아우구스티노’ 형제입니다. 이분들 세 이름은 성전안 감사패에도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에 한 분을 추가한다면 우리 수도형제 안대해 마르코 수사입니다.
참으로 자랑스럽고 놀라운 것은 1987년 개원후 2025년 지금에 이르기 까지 수도원 정문도, 성전 문도 늘 열려 있었다는 것이며, 아마 세상에서 이런 수도원도 성전도 없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불암산을 배경한 수도원과 성전은 그대로 만인의 사랑을 받는 하느님의 공원이자 집이 되었고 수도원을 찾는 이들을 끊임없이 위로하고 환대하는 하느님의 품이, 안식처가 되고 있습니다. 저절로 오늘 화답송 시편 감미로운 고백에 공감하게 됩니다.
“만군의 주님, 당신 계신 곳 사랑하나이다.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하느님의 집 문간에 서 있기가
악인의 천막 안에 살기보다 더 좋사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듯 교회를,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사랑합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의 묘사에서처럼 우리는 보이는 성전을 통해 보이지 않는 새하늘과 새땅의 천상교회를 내다 보며 깊은 희망과 위로와 치유를 받습니다. 그대로 오늘 미사에 참석한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바로 이런 하늘나라의 천상꿈이, 희망이, 비전이 우리에게는 활력의 샘, 치유의 샘이 됩니다. 바로 이런 천상의 꿈을 앞당겨 살게 하는 이 거룩한 성전에서의 미사전례은총입니다. 이런 천상에 깊이 뿌리내린 하느님의 집 성전이, 세상을 성화(聖化)해야할 마지막 보루와도 같은 성전이 타락하여 속화(俗化)된다면 이보다 더 큰 재앙이자 불행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전정화활동 과정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열화와 같은 분노도 이런 맥락에서 충분히 이해됩니다.
“이것들을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예수님의 하느님을 향한 불타오르는 사랑이 성전정화 활동으로 표출된 것이며, 제자들은 즉시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는 성경말씀을 연상합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화두처럼 들립니다만 얼마나 은혜스런 말씀인지, 제자들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통해서 확연히 깨달아 알고 믿게 되었으며 우리 또한 그러합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이제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성전을 넘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인 살아 있는 지체들인 우리 모두가 주님의 살아 있는 성전이 되었다는 것이며 이 거룩한 미사전례은총을 통해 체험하는 진리입니다. 보이는 가시적 성전이 거룩함과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것은 그 안에서 날마다 성체성사를 통해 공동체 성전이 정화되고 성화되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형제들의 공동체 성전이 없는 빈 건물의 성전뿐이라면 그냥 죽어있는 유적에 불과할 뿐이겠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 깊은 진리를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아무도 이미 놓인 기초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 기초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르십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킬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성전이 거룩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니 형제들의 공동체 성전을 파괴하는 분열과 불의, 불화와 불목, 혐오와 증오가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성전정화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몸인 형제공동체 성전정화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공동체 성전을 끊임없이 정화하시고 성화하시고 치유하시어 당신 중심의 아름답고 거룩한 사랑의 일치를 이뤄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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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3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눈길>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사악을 좇는 무리에게
거칠게 빼앗긴
우리를 향한
당신 선한 눈길이
끝내는 다시
우리에게 닿으리니
지금 비록
당신을 볼 수 없어도
당신을 향한
우리 선한 눈길
결코 거두지 않으리이다
어둠에 주린 무리에게
거칠게 빼앗긴
우리를 향한
당신 빛나는 눈길이
끝내는 다시
우리에게 닿으리니
지금 비록
당신을 볼 수 없어도
당신을 향한
우리 빛나는 눈길
결코 거두지 않으리이다
우상에 홀린 무리에게
거칠게 빼앗긴
우리를 향한
당신 믿음의 눈길이
끝내는 다시
우리에게 닿으리니
지금 비록
당신을 볼 수 없어도
당신을 향한
우리 믿음의 눈길
결코 거두지 않으리이다
절망을 다그치는 무리에게
거칠게 빼앗긴
우리를 향한
당신 희망의 눈길이
끝내는 다시
우리에게 닿으리니
지금 비록
당신을 볼 수 없어도
당신을 향한
우리 희망의 눈길
결코 거두지 않으리이다
탐욕에 게걸들린 무리에게
거칠게 빼앗긴
우리를 향한
당신 사랑의 눈길이
끝내는 다시
우리에게 닿으리니
지금 비록
당신을 볼 수 없어도
당신을 향한
우리 사랑의 눈길
결코 거두지 않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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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3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요한 16,21)
순교자들의 생일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여자가 기뻐하듯이, 믿는 이들의 무리가 장차 올 세상 안으로 태어날 때 교회도 그 여자처럼 기뻐하며 환호합니다. 교회는 그들이 태어나도록 현세의 시기에 수고하고 크게 신음하며, 출산하는 여인처럼 근심합니다. 사람이 이승에서 떠나는 것을 탄생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상하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어머니 태에서 나와 여기 지상의 빛 속으로 오는 것을 ‘태어난다’고 통례적으로 표현함이, 사람이 육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원한 빛 속으로 들어 올려지는 것을 ‘태어난다’고 표현하는 것은 매우 적절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된 순교자나 고백자가 세상을 떠난 날을 그들의 생일로 부르며, 그들의 축일을 ‘장례일’이 아니라 ‘생일’로 표현하는 관례를 따릅니다.
-존자 베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9
버림의 열매는 지혜와 불타는 사랑이지 억압이 아니다
얘야, 일어나거라(루카 8,54).
우리의 근원들로 되돌아가는 것 가운데 가장 궁극적인 귀환은 만물이 하나가 되는 자리인 신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과 더불어 나누어 가지고 있는 우리의 신성으로 귀환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것은 온전함으로 귀환하는 것이기도 하다. 구원이 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귀환, 곧 온전함의 회복이다. “하느님은 영혼을 온전하게 창조했다. 영혼이 깨끗해지려면 먼저 자신의 온전함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온전함이야말로 거룩함이다. 바로 이 귀환이 우리의 새로운 창조를 일으킨다. “하느님은 ‘시작’이다. 우리는 그분과 하나가 될 때만 다시 ‘새로워질’ 것이다.” 완전히 귀환할 때만 충만히 깨달을 수 있고 죽음에서 일어날 수 있다. 완전한 귀환은 우리의 모상으로 귀환하는 것이고 신성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형상이 되살아나는 것과 같다. 하느님의 형상이 회복되었음을 알리는 표지는 이분법적 의식이 아니라 전일적인 의식이다. 설교 12에서 살펴보았듯이, 순수함은 “모든 둘 됨”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본 설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깊은 잠에서 깨어날 때, 곧 우리가 정말로 “일어날” 때, 인성과 신성을 가르고, 삶과 죽음을 가르고, 나와 너를 가르던 둘 됨이 사라질 것이다.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노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 130
IV. 당신은 어떤 자세를 취하면서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해 이미 들었습니다. 이제 당신이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해 들으시오. 당신이 저에게 기도하는 것에 대해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주로 이것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란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을 새겨들으십시오.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주십니다(로마 8,26).
당신은 차라리 기도하지 않는 것보다 잘못된 방법으로 기도하는 것이 당신에게 더 나쁠 것이라는 두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간단히 한마디로 말하겠습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원합니다. 파멸의 길로 들어서는 나쁜 방법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그러한 방법의 삶이 그를 행복하게 해줄 것으로 믿고 그렇게 살아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다 같이 추하지만 결국 선한 사람이 얻게 되는 것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V 여기서 당신은 행복한 삶이 어디에서 성립하는지 묻고 싶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수많은 철학자들이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깊은 고찰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 문제를 를 올바르게 풀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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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3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고통 속에 묻어나오는 사랑의 찐한 향기
박윤식 [big-llight] 2025-05-29 ㅣNo.182534
예술적 영감과 철학적 사고는 슬픔이나 비극에서 싹트는 경우가 많다나. 불행해야만 행복을 그리워하고 슬퍼하여야 기뻐할 수 있기에. 모든 생명은 죽을 만큼의 고통에서 태어난다. 이런 과정 거치지 않는 기쁨은 가식적 행복일 수 있고, 언제 슬픔으로 바뀔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있다. 이처럼 영적 기쁨도 아무 문제가 없을 때 생기는 것이 아닌, 고통을 이겨내고 하느님 현존을 체험하며, 자신의 아픈 두려움에서 용기를 내어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갖는 은총이다.
“해산할 때에 산모는 심한 고통 속에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에.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난 기쁨으로 그 고통을 아예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이지만, 내가 너희를 다시 보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해산의 고통만큼 큰 고통은 없단다. 아이를 낳아 본 여자는 그 아픔을 생생하게 기억할 게다. 그러기에 어머니는 남다른 애정으로 자식을 대한다. 아픔이 컸던 만큼 애정도 큰 까닭이리라. 그렇지만 요즈음은 마취제를 이용하는 무통 분만도 있다나. 아픔이 없이 낳은 아기와의 대면은 어떠할까? 산고를 겪을 때만큼의 ‘그 눈물’을 또 흘릴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온갖 모욕과 고통, 수난 이후의 참된 고통 뒤에 찾아오는 기쁨은 부활로써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신단다. 사실 우리가 현재 체험하는 이 고통도 더 이상의 고통이 아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이 현재의 고통을 더 이상 알 게 내버려두지 않을 수 있기에. 따라서 주님께서 마련하신 만남의 기쁨인 희망의 날을 생각하면, 현재의 고통은 더 이상 큰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으리라. 고통도 삶의 불가결한 한 요소일 테니까. 삶이란 아름답지만, 산다는 게 어쩌면 연속적으로 찾아오는 고통스러운 일들을 감당하는 것일 수 있으리라.
말년에 파킨슨병으로 고통을 당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병자와 고통 받는 이들에게 “여러분의 고통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수행하시는 구원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진정 가치 있는 것입니다.” 라고 이르셨다. 수난 다음 오는 부활의 기쁨은 클 것이며, 그건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란다. 이러한 고통을 우리 이성만으로 결코 해결할 수 없고 대처할 묘한 답도 없다. 그래서 자연 신앙의 영역으로 넘어갈 수밖에. 고통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길들여진 이들은, 그 무시무시한 죽음마저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게다.
우리는 가끔 예수님께서 매달린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께서는 왜 저렇게 고통스러운 곳에서 어리석게 돌아가셔야 했을까?’ 라고 가끔은 생각하곤 한다. 사실 제자들의 마음도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들었을 때, 낙담과 걱정,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찼으리라.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수난 후의 부활의 기쁨을 꼭 기억하라시며, 그것은 아무에게도 빼앗길 수도 없는 것이라나.
이와 같이 우리가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려면, 영적인 해산의 기쁨의 순간이 있어야만 한다. 고통 없이 안락함만을 좇으며 산다는 건, 어쩌면 거짓으로 몸에 베인 자신만을 붙잡는 삶만 되리라.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고통이 깊은 사랑일수록 그 향기는 짙다나. 신앙인에게는 이러한 고통 속에 피어나는 사랑의 향기가, 곳곳에서 묻어나야만 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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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3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요한 16,16.2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의 “조금 있으면”은 예수님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더 이상 눈으로는 예수님을 볼 수 없는 상황인 것이지요.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은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을 통한 예수님의 현존을 가리키며, 이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다시 볼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그것들을 다 겪어 내야 하는 제자들로서는 참으로 큰 근심이고, 울며 애통해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때 주님을 놓치고 안절부절못하던 제자들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리라 말씀하십니다.
나아가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16,22)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기쁨으로 바뀐다는 것일까요? 주님을 새롭게 만나고, 그 마음에 깊은 깨달음과 확신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고, 그분께서는 온갖 죽음을 이겨 내시고, 더 이상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 계시다.’라는 참된 믿음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16,23).
주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바탕을 두고, 기쁨과 사랑으로 지상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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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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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3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슬로우 묵상] 꺼지지 않는 불
서하 [nansimba] 250530 13:40 ㅣNo.182550
부활 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요한 16,22)
기쁜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제 축일이거든요.
성녀 잔다르크 (Jeanne d’Arc, Saint Joan of Arc)
잔다르크는 프랑스 시골 소녀였어요.
어린 시절부터 신심이 깊었고, 교회에서도 기도하면 자랐습니다.
13살 때부터 미카엘 대천사, 성녀 카타리나, 성녀 마르게리따로부터 음성을 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시골 소녀였지만 하느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영적 민감성을 가졌지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수많은 의심과 방해를 뚫고 프랑스 군과 함께 전투에 참여했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전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끕니다.
잔 다르크는 전쟁에 나섰지만 누군가를 죽이거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다른 이를 해치지 않았습니다.
잔 다르크는 적을 미워하기보다는, 프랑스를 자유롭게 하고자 했고
항상 병사들에게 약탈, 강간, 불의한 행위를 금지하라고 명령함으로
전쟁 중에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어린이와, 여성, 노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전쟁터에서조차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고 금식하며 싸웠다고 해요.
잔은 여성이고, 농민 출신이고, 신비가 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잔다르크는 직접 무기를 들고 적을 공격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깃발을 들고 '명령권'을 행사했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황에게 기름부음을 받게 하고 군사 움직였다는 사실은 당시 정치적 교회적으로 큰 위협이었을 겁니다. 결국, 1430년 적국에 잡혀 영국과 교회의 정치적 재판에 넘겨집니다.
저는 사랑하는 성인, 잔 다르크가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기쁨으로 가득찼다고 확신합니다.
그 기쁨은 하느님의 말씀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적 기쁨과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으로써 느끼는 깊은 충만감이었을 것입니다.
잔은 칼을 들지 않고, 가장 날카로운 무기였단 '믿음'을 들었습니다.
그러기에 승리의 기쁨이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하느님과 일치하는 기쁨이 충만했고,
고문과 화형, 무엇보다도 끔찍했던 '이단'이라는 죄명까지도 잔다르크의 기쁨과 평화를 빼앗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사랑하는 성녀, 잔 다르크의 기쁨에 닿았습니다.
그리고 저마다의 전쟁터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성녀 잔다르크의 믿음과 기쁨이 닿기를 기도합니다.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그 기쁨,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된 그 기쁨을 이어가며
오늘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꺼지지 않는 불』
외부의 억압과 시련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내면의 빛, 믿음, 존재의 불꽃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불’, ‘물’, ‘뚜껑’이라는 상징을 통해 인간 존재가 겪는 억압을 보여주고,
그 안에서도 스스로를 지켜내는 영혼의 힘을
‘작지만 꺼지지 않는 불’로 표현했습니다.
이 불은 결코 크거나 화려하지 않지만, 어둠을 물리치고 세상을 밝히는 희망이 됩니다.
조용하지만 단단한 저항의 언어로, 우리 안의 꺼지지 않는 빛을 되새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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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3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제자들은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돌아가시는 과정 속에서
제자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할 것이고
세상은 승리를 자축할 것입니다.
진실이 지고 거짓이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거짓이 거짓으로 드러나지 않고 잘 감추어져서
오히려 그것이 사실처럼 보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어리석은 행동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진실을 말하려 하면 할수록
고통스럽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근심을 말씀하시지만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의 근심은 기쁨으로 넘어가기 위한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실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제자들은 기쁨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아무리 거짓이 세상에서 주도권을 가진 것처럼 보여도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은 우리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지지하는 사람이 없어도
우리의 노력이 헛된 것처럼 보여도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를 응원해 주시는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세상이 말하는 것과 다른 방식을 택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많은 사람의 생각을 거슬러 선택하는 것은
그들을 반대하고 무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공격의 대상이 되고
그 안에서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나의 선택이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점점 용기를 잃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느님께서는 힘을 불어 주십니다.
한 번 더 시도해 볼 수 있는 용기를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는 것이며
그렇게 우리 삶을 지지해 주시는 분께서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용기를 잃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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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3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고통이 없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찾아오는 것이 고통입니다.
마치 불청객 같습니다.
초대도 하지 않았는데,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불시에 찾아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을 한 바탕 휘저어놓습니다.
또한 고통의 강도가 셀 때나 오래 지속될 때, 우리네 삶은 얼마나 피폐해지는지 모릅니다.
고통의 종류도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물질적 가난으로 인한 고통, 나와 다른 그로 인한 고통, 즉 존재로 인한 고통, 병이나 장애로 인한 고통, 이유를 끝끝내 알수 없는 고통, 노화나 죽음으로 인한 고통...
마치 큰 산 하나를 종주하는 느낌입니다.
고통의 산봉우리를 하나 겨우 넘어섰다 싶었는데, 또 다른 산봉우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혹독한 고통이 얼마나 더 계속될 것인가? 언제쯤 끝날 것인가?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고통과 관련해서 한 가지 특권이 있습니다.
고통 겪고 있는 우리 곁에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비록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봄바람에 눈 녹듯이 순식간에 없애주시지는 않지만, 우리보다 더 큰 고통을 겪으시며 우리를 위로해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고통이 끝나는 길목에 고통을 잘 견뎌온 댓가로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축복과 상급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상, 그 누구도 고통에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제가 수많은 사람들 만나봤지만, 고통이 하나도 없다고 행복해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못만났습니다.
결국 고통은 우리네 인생의 선택 과목이 아니라 필수 과목입니다.
관건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을 보다 큰 시선, 영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고통이 없기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고통을 친구처럼 여기며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겪고 있는 이 고통에 반드시 의미와 가치가 있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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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3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체성사 때 내가 만나는 예수님은 부활 전인가, 후인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부활 제6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이별이 가까이 왔음을 아시고, 그들이 겪게 될 슬픔과 혼란을 넘어서는 희망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치 해산할 여인이 출산의 고통 중에는 근심에 싸이지만, 아이를 낳으면 그 기쁨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고통을 기억하지 않는 것처럼, 제자들 역시 지금은 근심하겠지만 부활하신 당신을 다시 만날 때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 16,21-22 참조)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요한 16,23)
이 말씀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면 더 많은 것을 묻고
대화하고 싶지 않을까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단순히 질문이 사라지는 것을 넘어, 의심과 불안이 해소되고 충만한 신뢰와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의 깊은 의미를 묵상하며,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의심의 단계를 지나 하느님 현존에 대한 확신으로 나아가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체성사와 성령께서 어떤 역할을 하시는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의 주인공 브루스 놀란은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과 어려움을
하느님 탓으로 돌리며 끊임없이 불평하는 지역 방송국 기자입니다.
그는 중요한 뉴스 진행자 자리를 놓치자 길거리에서 하느님을 향해 "당신은 도대체 내 기도를 듣고 있기는 한 겁니까? 나를 제대로
보고 있기는 한 거냐고요!"라며 소리치고, 심지어 하느님을 향해 조롱과 시험의 말을 쏟아냅니다.
마치 오늘 강론의 주제처럼, 하느님의 존재와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정말 당신이 전능하다면 내 삶을 이렇게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하느님을 시험하는 우리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로 하느님께서 브루스 앞에 나타나십니다.
하느님은 브루스의 불평에 지쳤다며, 그에게 당신의 모든 권능을 일주일간 맡겨볼 테니 한번 세상을 다스려보라고 제안합니다.
신이 난 브루스는 처음에는 이 엄청난 능력을 자신을 괴롭혔던 동료에게 복수하고, 직장에서 성공하며, 애인의 사랑을 얻는 등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는 데 사용합니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가 강력한 장난감을 얻은 것처럼 신기해하며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려 합니다.
그러나 곧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그는 모든 기도에 "예스"라고 답해버려 세상은 순식간에 대혼란에 빠집니다.
복권 당첨자가 수만 명씩 나오고, 소행성이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등 걷잡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아무리 전능한 힘을 사용해도 진정한 사랑, 특히 연인 그레이스의 마음을
강제로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의 이기적인 행동과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레이스는 그를 떠나버립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오히려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잃게 된 브루스는 절망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어리석음과 교만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는 길거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쓰러진 채, 다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기적은 세상을 뒤흔드는 거창한 능력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작은 친절을 베풀며,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는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는 더 이상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묻거나 하느님을 시험하는 대신,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작은 일부터 사랑을 실천하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권능을 내려놓고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온 브루스는 비로소 내면의 평화를 찾고, 떠나갔던 그레이스와도 진정한 사랑으로 다시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을 의심하고 있을 때는 자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에 관해 묻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 문득 지금의 어머니가 친어머니가 아니실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강하게 들었던 때, 저는 직접 “어머니, 정말 제 어머니 맞으세요?”라고 묻지는 못했지만, 마음속 질문은 늘 그것 하나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제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실 때는 ‘그래, 역시 우리 엄마가 맞아’ 하며 안도하다가도, 제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역시 친어머니가 아니어서 그런 거야!’라는 엉뚱한 결론을 내리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당신이 아침참으로 드시려고 아껴두셨던 따뜻한 단팥빵과 흰 우유를 제게 건네주셨을 때, 저는 그 사랑 앞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다른 어떤 증거나 설명도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기쁨에 차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는 하느님의 존재와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때로는 그분을 시험하려 들기도 합니다.
"정말 저를 사랑하신다면, 이번 일은 꼭 이루어지십시오!" 와 같은 조건부 기도를 바치기도 합니다.
이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이집트를 탈출하는 엄청난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의 여정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시험했습니다.
물이 없을 때, 먹을 것이 없을 때마다 모세와 하느님께 불평하며 "주님께서 과연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 (탈출 17,7) 하고 시험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만나를 내려주시고(탈출 16장 참조), 바위에서
물을 내시어(탈출 17,1-7; 민수 20,2-13 참조) 당신의 현존과 사랑을 끊임없이 보여주셨습니다.
심지어 백성이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 장대 위에 구리 뱀을 만들어 매달게 하시고 그것을 보는 이마다 살아나게 하시는 놀라운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민수 21,4-9 참조)
이보다 더 확실한 하느님 사랑의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 가운데는
여전히 믿지 못하고 하느님을 시험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의심 없이 믿고, 당신과 온전히 하나 되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으며,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사랑의 증표로 우리에게 성체성사를 남겨주셨습니다.
성체성사는 단순한 기념 예식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어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의 생명에 동참하는 거룩한 성사입니다. (1코린 10,16-17 참조)
우리가 성체를 영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제가 신학교 시절, 성체를 영하고 조용히 기도하는 중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래, 너는 나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었느냐? 나는 너에게 내 전부를 주었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저는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의심하거나 여쭐 수가 없었습니다.
제 삶 전체를 뒤흔드는 엄청난 사랑의 확신 앞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 이 크신 은혜에 제가 어찌 보답해야 합니까?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라는 응답의 질문뿐이었습니다.
주님의 현존과 사랑이 너무나 명확했기에, 그분을 증명해달라고 다른 어떤 것을 청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그분의 상처를 만져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던 토마스가, 예수님을 뵙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며 모든 의심을 떨쳐버립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그분과의 깊은 일치입니다.
이때 "이 은혜에 어찌 보답할까?" 하는 사랑의 응답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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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3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6,20-23: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가는 것은 제자들에게 슬픔이 되겠지만 그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게 되리라는 것을 산모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스승을 잃는다는 고통은 두려움을 느끼게도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될 때는 고통이나 두려움은 모두 잊게 되고 다시 만난 기쁨만 남게 될 것이며,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다. 그 고통은 기쁨을 낳는 고통이다. 이것이 부활 의미이다. 우리도 이러한 고통을 통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다. 아기가 태어날 때, 어머니가 기뻐하듯, 우리도 장차 우리가 차지할 세상으로 태어날 때 교회도 기뻐한다. 교회는 우리가 그렇게 태어나도록 현세에서 수고하고 신음하며, 출산하는 여인처럼 근심한다. 교회는 세상을 떠나는 것을 천상 탄생으로 이야기한다. 우리는 성인들의 축일을 그분들이 돌아가신 날을 천상 탄일로 표현하며 지내고 있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22절) 희생과 고통이 수반되지 않은 기쁨은 내 마음 안에 오래 남지 못하고 없어진다. 내가 희생과 고통을 바친 결과로 기쁨을 갖는다면, 그 기쁨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은총이기 때문에,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주님에게서 오는 기쁨은 그렇기에 자기가 바친 고통을 잊게 하고, 자기가 바친 고통보다도 더 큰 보상을 받은 것 같아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게 된다. 이때, 우리는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갈 것이며 하느님의 지혜로 가득 찰 것이다. 이것으로 하느님과 더 깊은 일치를 이루는 기쁨을 갖게 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데는 고통이 없으면 나아갈 수가 없다. 이 고통과 희생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그 고통은 내가 극복해야 할 나 자신과 싸움이다. 나 자신과 싸움이 가장 큰 희생이며, 고통이다. 이 고통을 바칠 수 있을 때, 새로운 생명인 기쁨이 우리에게 태어날 것이고, 우리의 고통을 모두 잊게 할 것이며, 새 생명은 나를 하느님 앞에 더 가까이 이끌어 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충실히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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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3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참되고 절대적이고 영원한 기쁨이 신앙생활의 목표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요한 16,20-23ㄱ).”
1)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 제자들은 큰 슬픔과 충격에 빠졌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큰 기쁨과 행복’을 얻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모습이 좋은 예입니다.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갈 때에는, 메시아로 믿었던 예수님께서 허망하게 돌아가신 것에 대한 충격과 슬픔과 실망감에 사로잡혀 있었고, ‘침통한 표정’이었습니다(루카 24,17).
그랬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마음이 타올라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증언했습니다(루카 24,32-35).
마음이 타올랐다는 말은, ‘큰 기쁨과 감동’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기쁨’은 ‘새 생명이 태어났을 때의 어머니의 기쁨’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이 출산과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고통을 잊어버린다.” 라는 말씀은, 고통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기쁨이 크다는 뜻입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긴 한데,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는 신앙여정은 고통과 고난과 슬픔의 연속입니다.
그렇지만 그곳에 도착한 뒤에는, 지상에서 겪었던
고통과 고난과 슬픔보다 훨씬 더 큰 기쁨과 행복을 얻어 누리게 된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3) 복음서들을 보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길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는 수난과 죽음 이야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짧고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서 저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 또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고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던 때에 복음서를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이미 ‘부활의 기쁨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었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은 자세하게 기록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점과 관련해서, ‘기억’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부활의 기쁨’이 빛을 잃어버립니다.
우리 교회가 해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하면서 크게 기뻐하는 것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의
‘큰 슬픔’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천국과 연옥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지상에서 사는 동안 겪었던 고생을 기억하는 영혼은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행복한 곳인지를 잘 알겠지만, 만일에 고생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 나라가 얼마나 행복한 곳인지를 모를 것입니다.
사실 고생했던 일의 기억 자체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 덕분에 자신이 받은 은총을 깨닫게 되고,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되고,
큰 기쁨과 행복 속에서 살게 됩니다.
연옥에서 보속을 하는 영혼들 경우에, 자기가 어떻게 살았는지, 무슨 죄를 지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면, 보속을 할 수도 없고, 한다고 해도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한 일을 전부 다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어야 보속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연옥 영혼의 가장 큰 고통은 바로 ‘기억’입니다.
4)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참되고 절대적이고 영원한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그 기쁨은,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은 이들이 누리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목표는 기쁨의 완성”입니다.
묵시록을 보면, 그 기쁨이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4).”
하느님 나라는, 슬픔은 없고 기쁨만 있는 나라입니다.
지금 슬퍼하며 울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시는
예수님께서는(마태 5,4), 지금 웃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다음과 같은 경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루카 6,25).”
이 경고는, 하느님을 등지고 살면서, 세속의 쾌락에 빠져서 웃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그 웃음은, 선도 사랑도 없는 ‘악마적인 웃음’입니다.>
5)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모든 것을 다 깨닫고 이해하게 된다는 뜻입니다(1코린 13,12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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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3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요한 16,20-23ㄱ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한자 중에 <신 辛>이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유명한 라면의 이름이기도 한 이 글자는 <맵다>는 뜻으로 잘 알려져 있지요. 그런데 이 글자에는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辛이라는 글자는 옛날에 글자나 문신을 새길 때 사용하던 도구를 형상화한 글자라고 합니다. 몸에 문신을 새기려면 날카로운 바늘로 피부를 계속해서 찔러야 하는데, 그 찔림이 괴로운 고통을 유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글자가 <괴롭다>는 의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 辛>자는 맵고 괴로운 삶의 고통을 뜻하는 말로 자주 쓰이게 된 것이겠지요.
이 辛자와 대비되는 의미를 지닌 글자가 있습니다. 바로 <행 幸>이라는 한자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이 한자는 '행복', '행운' 등 우리가 선호하는 좋고 긍정적인 뜻으로 많이 쓰이는 말입니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이 글자가 두손을 모으고 수갑을 찬 모습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즉 幸이라는 글자는 심신을 구속당한 죄수의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기에 원래는 부정적 의미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수들 중에는 <운 運>이 좋아서 그 구속을 피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런 상태를 두고 '행운'(幸運)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나의 심신을 구속하는 고통을 운이 찾아와서 해소해 주었기에 원래대로라면 '고통' 그 자체였을 사건이 나에게 '행복'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기한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辛자와 幸자가 서로 많이 닮아있다는 것입니다. 辛자 위에 一자 하나를 그으면 幸이 되지요. 바로 여기에 우리 삶의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과 행복을 서로 다른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지만, 생각 '하나'에 따라 고통과 행복이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만성 요통으로 고생하시는 어르신들께는 통증이 당장 없애고 싶은 '고통'이지만, 한센병 환자들에게는 통증이 자신이 그 무서운 병에서 치유되었음을 보여주는 '기쁨'의 표징이 됩니다. 악취가 진동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차라리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되면 좋겠다고 하시지만, 치매나 당뇨 같은 난치병에 걸리신 분들에게는 냄새를 제대로 맡는 것이 간절한 소원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슬픔이 기쁨으로 '바뀐다'고 하십니다. 슬픔이 따로 있고 기쁨이 따로 있다는게 아닙니다. 불행이 따로 있고 행복이 따로 있다는게 아닙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은 언제나 한결같이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슬픔이었던 사건이 어떤 때에는 기쁨이 됩니다. 어떤 때에는 불행처럼 느껴졌던 일들이 나중에 돌아보면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었는지를 깨닫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그렇기에 고통이라고 슬픔이라고 불행이라고 무조건 싫어하거나 배척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나에게 주어질 기쁨과 행복들까지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줄, 불행을 행복으로 바꿔줄 확실하고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라는 '믿음',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누리리라는 '희망'이 그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힘들고 괴로워서 다 포기하고 싶다면 내가 지닌 그 무기들이 제대로 '날'이 서있는지 되돌아보고 손질하는 시간, 즉 하루의 삶을 돌아보며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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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3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사도 바로오는 코린토에서 현시를 통해서 주님께서 해주신 말씀을 통해 용기를 갖고
일년 육 개월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나 갈리오가 아카이아 지방 총독으로 있을 때 유다인들이 들고 일어나서 바오로를
재판에 세웁니다.
갈리오 총독은 유다인들에게 율법과 관련된 시비에 대해서 스스로 알아서들 처리하라고
하면서 그들은 재판정에서 내몰아버립니다.
그러자 그들은 회장장 소스테네스를 붙잡아 재판정에서 매질을 하지만 갈리오 총독은
아무 관여를 하지 않습니다.
바오로는 그곳에서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을 하고 프리스킬라와 아쿨라와 함께 배를 타고
시리아로 떠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미래에 일어 날 죽음과 당신을 잃고 슬퍼한 제자들에 대해서 예견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제자들이 겪을 고통이 기쁨으로 이어진다는 말씀을 하며 해산하는 여인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21절)
그래서 제자들이 사랑하는 스승의 죽음을 겪고 진통을 겪는 여인처럼 제자들고
고통스러워하겠지만 여인이 아이를 낳으며 고통을 잊고 기쁜 것처럼 제자들도
그 고통 후에 기쁨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당신의 죽음 후에 부활을 맞이하실 것을 말씀하시며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22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고생 끝에 낙이 온다’라는 뜻을 담은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사자성어(四字成語)’를 떠오르게 합니다. 고통의 십자가는 기쁨의 부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고진감래’의 의미가 희망이요 버팀목의 역할을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운의 뜻을 담고 있는 네잎클로버를 찾으려 합니다.
동요에도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
예쁜 꽃들 사이에 살짝 숨겨진
이슬 먹고 피어난
네잎 클로버 랄랄라
한잎 랄랄라 두잎 랄랄라
세잎 랄랄라 네잎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수줍은 얼굴의 미소
...
그리고
추억의 되어 버린
어른들의 노래,
이규황의 ‘네 잎 크로바’ 노래가
또한 떠오릅니다.
네~ 잎~ 크로바
찾~으~려~고
꽃 수풀 잔디에서
해가는 줄 몰랐네
당~신~에~게
드~리~고~픈
네 잎 크로바
사랑의 선~물
희망의 푸른 꿈
당신에 행운을
당신의 충성을
바치려고 하는 맘
네~ 잎~ 크로바
찾~으~려~고
헤매는 마음
네~ 잎 크로바
때로 고통스럽고 힘든 현실이지만
오늘이라는 날은 사실 흔하고 흔한 세 잎 클로버이지요.
이 세 잎 클로버는 ‘행복’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예수님께서 수난을 앞두시고도 음식을 나누시고
제자들의 고통에 대한 대비도 마련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지요.
걱정보다도 현실에 충실하신 것입니다.
다가올 행운의 네잎클로버를 찾기 위해서 행복의 세 잎 클로버를 지금 밟기 쉽지요.
오늘은 성모성월이고 본당의 성모의 밤이 있는
날입니다. 성모님 사랑과 오월의 싱그러움을 행복과 함께 누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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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3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는 힘
신앙인으로 고도로 발달한 이 현 시대에 순례여정을 살아가면서 슬프고 우울해질 때가 있다. 왜일까? 사람들은 내 힘으로 원하는 것을 얻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고, 내가 바라는 대로 되어질 때 기뻐한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고,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며, 나를 사랑해주던 사람이 자기 곁에서 떠나갈 때에 우리는 그 빈자리와 거리를 바라보며 슬퍼한다. 이 빈자리는 곧 연약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요 우리의 모습이다.나에게 뿌리를 두는 기쁨은 영원할 수 없다.
오늘의 사회는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권력이 오히려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끊임없이 가진 자들의 이익 옹호에 앞장서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기업가들은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는 데는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가난한 이들과의 재화의 재분배에는 인색하다.
언론은 정치권력에 길들여져 고유한 몫을 하지 못하고 가진 자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그 무엇에 비길 수 없이 존엄한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 이런 상황에서 항구한 기쁨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재 상황을 앞에 두고 유혹에 빠지고, 슬픔에 젖으며 고통과 혼란에 빠진다. 오늘도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말씀에서 동떨어진 우리 자신의 삶과 이 사회의 모습은 예수님 을 변두리로 내모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느님을 장식품처럼 여기는 주객전도의 태도, 믿음 없는 세상, 창조주 하느님께로부터 등을 돌림이 바로 그런 상황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조롱하는 듯 흘러가는 이 세상의 막강한 힘 앞에서, 때로는 무력감을 느끼고 체념하며, 때로는 패배감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한 채 기쁘게 살지 못한다.
우리가 그럴수록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16,20)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세상은 이제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여겨 기뻐할 것이고, 제자들은 그런 세상에 남아 있게 되어서 슬퍼할 것이다. 세상적인 기쁨은 그렇게 예수님과는 무관하게 행동하고 남이 못되고 실수할 때 느끼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16,20)라고 말씀하신다.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게 되는 계기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예수님을 다시 보는 데에 있다(20,20). 그렇다! 슬픔의 상황을 기쁨으로 바꾸려면 그분의 부활의 힘을 믿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한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16,22)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지 못하는’ 것으로서 항구한 기쁨이며 세상을 무력하게 하는 기쁨이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몸’으로 제자들에게 오시고, 또한 ‘평화’와 ‘기쁨’을 그들에게 주신다.
우리도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처럼 그분의 자유, 평화, 기쁨을 누림으로써 이해하기 어려운 고통이나 문제, 의심과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며, 그들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16,22). 우리도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됨으로써 세상의 그 어떤 힘도 억누를 수 없는 참되고 완전한 기쁨 안에 머무르게 된다. ‘예수님을 다시 본다’는 것은 지금 여기서 내 삶을 통하여 세상의 힘이 아무리 죽이려 해도 결코 죽여지지 않는 부활을 살며,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말한다.
우리도 이런 전폭적인 받아들임을 통해 종말론적인 기쁨을 살아야겠다. 이 기쁨 안에서 모든 부당함, 혼란, 유혹, 고통은 잠시 지나가는 과거의 일이 될 것이다. 이제 나를 보아주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께서 주시는 영원한 기쁨의 힘으로 어떤 어려움과 고통 중에서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를 외치며 주님을 증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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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3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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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3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주님 안에 서는 신앙의 삶
<2025.5.30> 아침을 여는 묵상 (빌 4:1~9절)
❝주님 안에 서는 신앙의 삶❞
❚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환난 중에서도 예수님 안에서 굳게 설 때에 평강으로 함께하시며, 지켜 주십니다.
✔ 주님 안에서 어떤 신앙이어야 합니까?
➲ 한마음을 품고서 서로 돕는 신앙이어야 합니다(1~3절).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어려운 상황들을 염두에 두면서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서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직 ‘주 안에서’만이 가능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1절).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전도를 받은 자주 장사 루디아라는 여인에 의해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여성들의 활약이 컸던 교회였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다툼과 분쟁은 아무래도 빌립보 교회에 적잖은 악영향을 끼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 사람 각각에게 ‘권하고...권하노니’라고 말하면서 훈계를 하고 있습니다. ‘같은 마음’은 주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 된 마음을 가리킵니다(2절). 바울은 동시에 빌립보 성도들에게도 그들의 화해를 도울 것을 부탁했습니다. 바울은 이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역했던 자들이며,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임을 확인해 주었습니다(3절).
믿음의 열심히 자칫 교회 내에 갈등을 유발시키는 불씨가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 혼자 열심히 한다고 해서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주의 일에 열심을 낼 수 있도록 나를 비워야 하고, 나의 열심(??)을 내려놓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지나친 경쟁의식 또한 교회내의 심한 갈등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열심히 해야겠지만, 함께 하는 열심히 더 필요합니다. 교회 공동체의 영적 부흥과 목회 사역에 함께할 믿음의 조력자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결코 만만치가 없습니다. 우리 힘과 능력으로는 사탄의 세력을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어느새 넘어짐의 자리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영적 전투에서 이기는 에너지는 주님으로부터 공급을 받아야 하며, ‘같은 마음’(2절)으로 즉, 주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 된 마음으로 이기는 삶이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한마음을 품고서 서로 도와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가기를 힘쓰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믿음으로 환난을 뛰어 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4~7절).
‘항상...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는 곧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기뻐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있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자신이 먼저 기뻐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빌립보 성도들에 바울의 이 말은 더욱 더 큰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내가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6절)라고 권면합니다. 즉,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아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7절)이라고 약속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내거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기도와 감사로 하나님께 아뢸 때, 그 기도의 결과로 오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평화는 일시적이고, 표면적이지만, 하나님의 평화와 평강은 영원하며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평강은 믿는 우리의 마음을 파수꾼처럼 모든 근심과 걱정들로부터 지켜 주시고, 보호해 줄 것입니다. 어떠한 형편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는 삶이 되기 위해 믿음으로 모든 환난을 뛰어 넘는 신앙이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자녀는 앎과 삶이 일치하여야 합니다(8~9절).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할 여섯 가지 덕목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 덕목은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할 만하며, 칭찬(덕과 기림)받을 만한 것입니다(8절).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9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교회 영적 리더로써 경건의 삶을 살아가며, 무엇보다 하나님께로부터 옳다 인정함을 받는 삶, 순결과 사랑의 실천과 도덕적으로 바른 삶의 실천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도 인정받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것을 배우고, 듣고, 본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것들이 삶을 통해 실천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또한 배우고 듣고 본 것을 실천하는 삶이 평강의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의 지름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헛되고, 바르지 못하고, 경건하지 못하면, 또한 그렇지 못한 곳에 우리 마음을 빼앗겨 버리고, 그곳에 서 있게 되면 결코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정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결단하면서 알고, 깨달았던 것을 삶으로 실천되며, 앎과 삶이 일치하는 신앙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주님 안에서 믿음을 굳게 지키며, 세상의 모든 소용돌이를 뚫고 마침내 천국 소망의 항구에 이르기를 소망하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세상 가치관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을 굳게 지켜 날마다 기쁨으로 주께서 맡기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빌 4:1~9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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