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0일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이영근 신부
복음; 마르12,38-44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38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40 그들 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 자들이 큰돈을 넣었다.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 이다.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산 제물'>
가을의 끝자락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이 가을엔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이 가을에는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
내 욕심으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소리 없이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맑고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빈 가슴을 소유하게 하소서.
집착과 구속이라는 돌덩이로 우리들 여린 가슴을 짓눌러 별처럼 많은 시간들을 힘들어 하며 고통과 번민속에 지내지 않도록 빈 가슴을 소유하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풋풋한 그리움 하나 품게 하소서.
우리들 매 순간 살아감이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 누군가의 어깨가 절실히 필요할 때
보이지 않는 따스함으로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아 줄수 있는 풋풋한 그리움하나 품게하소서.
이 가을에는 말 없는 사랑을 하게 하소서.
'사랑'이라는 말이 범람하지 않아도 서로의 눈빛 만으로도 간절한 사랑을 알아주고 보듬어주며 부족함조차도 메꾸어 줄 수 있는 겸손하고도 말없는 사랑을 하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정녕 넉넉하게 비워지고 따뜻해지는 작은 가슴 하나 가득 환한 미소로 이름없는 사랑이 되어서라도 그대를 사랑하게 하소서.
평신도 주일인 오늘 말씀전례는 ‘참된 봉헌’의 의미를 일깨워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엘리야는 이방인 시돈 여인 이세벨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우상숭배를 전념시켰던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예고한 3년간의 가뭄이 진행될 때, 시돈 지방의 사렙다의 한 과부 집에 들어가 물 한모금과 먹을 것을 청합니다.
과부는 자신과 아들이 마지막으로 먹을 수 있는 한 끼니 분량의 밀가루와 기름 밖에 없었는데도, 음식을 청한 엘리야의 요청을 따랐으며, 엘리야의 말대로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복음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렙톤 두 닢을 봉헌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높이 칭송하십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그러니 '렙톤 두 닢'은 비록 액수로는 작지만, ‘자신의 전부를 담은 사랑의 크기’인 ‘내면적 헌신의 외적인 표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제1독서의 사렙다의 과부가 마지막 음식마저 내어주었던 것처럼, 자신이 가진 ‘생활비 모두’를 내어놓았습니다.
단지 다른 점은, 제1독서의 사렙다의 과부는 엘리야의 요청에 따르는 믿음을 보여주었고, 복음의 가난한 과부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전부를 내놓았습니다. 어쩌면, 제1독서의 사렙다 과부는 타인을 위하여 내놓았다면, 복음의 과부는 자신을 위한 감사헌금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사렙다 과부’에게는 나눔의 의미가, ‘가난한 과부’는 속죄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이 둘 다 모두, 마치 나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통째로 내어놓으셨듯이, 자신의 전부를 봉헌했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많이 하여야 한다’는 돈 모금을 위해 제시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참된 봉헌’이란 무엇일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봉헌의 참뜻’을 일깨워 주십니다. 곧 '참된 봉헌'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사랑’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봉헌예물의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향의 순수함’에 걸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곧 이 가난한 과부들의 마음은 헌금의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과 ‘그 진실성(순수성)’에 있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내어놓는 마음의 진실성’ 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몸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칠 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사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우리의 몸도, 재물도, 마음도,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 전부를 봉헌 제물로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오늘 하루도 '산 제물로 드리는 진정한 예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2독서는 더 나아가서, '산 제물'의 신학적 깊은 의미를 일깨워줍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당신 자신을 제물로 내어놓으신 예수님의 대사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대사제의 직무로서 당신 자신을 다른 이들을 위한 사랑의 속죄 제물, 곧 다른 이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제물로 봉헌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단 한 번’으로 온전하고 완성된 속죄 예식이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바로 이러한 '산 제물'로 바치는 진정한 예배, ‘살아있는 진정한 사랑의 예배’가 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주님! 제 마음의 지향을 깨끗하게 하소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하게 하소서. 전부를 내어놓은 가난한 과부처럼, 목숨을 내어놓은 당신처럼, 산 제물이 되게 하소서. 오직 당신이 저의 전부이오니, 전부를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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