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28
2월8일[연중 제4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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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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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oAIa6ObNqDA
[수원교구 박찬홍 가브리엘(은행동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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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진정한 쉼은 주님 현존 안에 머물 때 가능합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가도, 또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되는 부분이 제게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적절한 균형 감각입니다.
기도와 일 사이의 균형, 일과 쉼의 안배, 말과 침묵의 균형, 밀고 당길 줄 아는 능력...그러다보니 언제나 막판 몰아치기의 전문가, 언행 불일치의 대표주자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참으로 눈여겨볼 만 합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직감하셨습니다. 그래서 분주히 움직이셨습니다.
이 고을, 저 고을 옮겨 다니셨습니다. 몰려드는 군중의 필요성을 원없이 충족시켜주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뿐만 아니라 제자들까지 상습 피로에 시달렸고, 이러다 과로사하겠다는 위기감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이랬습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세상 살이에 지친 우리들, ‘나와 다른 그’로 인해 지친 우리에게도 휴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 한 가지는, 아무리 하루온종일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이 드러누워 뒹굴거리고 있어도, 더 피곤한건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참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는 쉼터 같은 존재, 선물 같은 존재와 시간을 보내야 될 것입니다.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따뜻해지는 존재, 더불어 보내는 시간이 힐링이 되는 그런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야말로 참 휴식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편안한 대상이라 할지라도 우리 모두 나약한 인간들인지라 언제나 한결같지는 않습니다. 환대 받던 존재에서 환멸의 대상으로 전락하기란 순식간입니다. 그래서 관계 안에서 더 많은 배려와 예의, 친절과 존중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결국 진정한 휴식, 참된 쉼, 깊은 마음의 평화를 주시는 분은 인간 존재가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궁극적, 최종적으로 나아가 머물 곳은 주님 면전 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주님, 그분 앞에 편안히 앉는 것이 참된 휴식입니다. 그분과 눈을 마주치고, 그분 앞에 머무는 것이 참된 쉼입니다. 그분께 내 모든 상처 보여드리고 맡겨드리는 것이, 참된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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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몰랐다.”는 핑계는 나를 계속 무식하게 만든다.>
1962년 2월 10일, 여수 남국민학교 졸업식에서 일어날 일이라고 합니다. 졸업식장에서 회색 스웨터에 까만 낡은 바지를 입은 중년부인이 노력상을 받았습니다.
그 부인이 단상에 올라가 상장을 받자 장내는 박수소리로 떠나갈 듯했고 졸업하는 그 부인의 딸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노력상을 받은 어머니와 딸은 세 채밖에 집이 없는 외딴 섬에 살았습니다. 주민이라고는 겨우 20명뿐인 이 섬에서는 제일 가까운 여수에 볼 일이 있어도 섬사람들이 직접 만든 배를 타고 갈 수밖에 없는 곳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딸이 여덟 살이 되자 남편에게 딸을 육지에서 공부시키자는 말을 어렵게 꺼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남편은 20리나 되는 뱃길을 어떻게 다닐 수가 있겠느냐며 반대했습니다. 당시 그 섬에는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그 섬이 무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믿음을 굽히지 않고 딸을 남편 몰래 육지의 초등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그로부터 6년, 어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꼭두새벽에 일어나 20리나 되는 험한 물결을 가로지르며 손수 노를 저어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섬으로 돌아와 밭일을 하다가 저녁이면 다시 배를 타고 딸을 데려와야 했습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딸도 울고 그 어머니도 울었습니다. 딸은 어머니가 자신을 육지에 홀로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 두려워 울었고 어머니는 딸을 데리러 가는 길이 늦어 딸이 애처로워 죽는 힘을 다해 노를 저으며 울었습니다.
시계도 없는 섬에서 매일 시간을 맞춰 딸을 학교에 보내고 데려오는 일에 한 번도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6년을 하루같이 오간 뱃길이 무려 3만 3천리나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졸업생과 부모, 그리고 선생님들의 감격스러운 울음으로 졸업식장은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어떤 잘못을 했을 때 “몰랐어요!”란 핑계를 많이 댑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이 꼭 핑계가 될 수없는 이유는 알려고만 하면 다 알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알면 지켜야 하니까 그게 싫어서 일부러 알려고 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에 “몰랐어요!”의 핑계가 더 적용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몰랐다는 핑계는 이렇게 계속 자신의 무지를 정당화하며 참 지식으로 나아가는 길을 막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고 피곤한 상태로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도 나오는데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끝까지 쫓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귀찮아하시지 않고 진리를 갈구하는 그들을 가엾은 마음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제자들은 피곤하니 당신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어제 서울 모 성당에서 저의 책을 일 년 동안 전 신자들이 영적독서를 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해서
책의 내용을 설명하는 특강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갑자기 날씨도 추워졌고 더구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신자들이 적게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녁 8시가 되자 강의를 듣기 위해 거의 교중미사 수준으로 신자들이 성당을 채웠습니다. 저도 그분들을 보며 짠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배우고 싶어 하는 열정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한 인간인 저도 그럴진대 하느님께서야 당신 진리를 알려고 노력하는 이가 얼마나 짠해 보이겠습니까?
그러니 모든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를 깨닫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진리를 알고 싶은 우리의 열망입니다. 그 열망만 있다면 사람이 가르쳐주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분명 알 수 있었던 것들이기에 몰랐다고만 핑계를 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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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습니다. 원효대사가 당나라로 유학하러 가기 위해 길을 떠나던 중, 밤이 되어, 한 동굴에서 잠을 자게 됩니다. 한밤중에 갈증을 느낀 원효대사는 옆에 있던 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마십니다. 물은 상쾌하고 갈증을 해소해 주었기에 큰 만족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아침이 되어 주변을 보니, 자신이 물을 마신 것은 실제로 해골 속에 고여 있던 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는 극도의 혐오감과 구토를 느낍니다. 원효대사는 이 경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습니다. 자신이 밤에는 해골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물이 상쾌하고 만족스럽게 느껴졌지만, 낮에 해골임을 알자 혐오스럽게 느껴졌다는 점에서, 현상의 아름다움과 추함, 좋음과 나쁨은 외부 대상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즉,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들어낸다"라는 ‘일체유심조’의 깊은 진리를 체험적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유명한 명제를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말을 통해 생각하는 마음(정신)을 존재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그는 감각이나 외부 세계가 의심스러울지라도,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데카르트는 세계를 이해하려면 생각하는 주체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불교는 모든 세계가 마음의 투영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둘 다 마음(정신)을 경험과 존재의 본질로 삼습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라는 사유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존재를 확인했다면, 불교는 "일체유심조"를 통해 세계 자체가 마음의 작용임을 드러냅니다. 데카르트는 자아의 확실성을 통해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고, 불교는 자아를 초월하여 마음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했습니다.
일이 많았던 날이 있었습니다. 성당 컴퓨터를 새로 설치하는데 문을 열어 주면 좋겠다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제가 워낙 일찍 일어나니 그런 부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성당에 관리인이 없고, 이른 시간이라서 기꺼이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봉사하려는 마음이 고마웠습니다. 사제관 난방에 필요한 ‘필터’를 갈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기다렸습니다. 필터는 6개월에 한 번은 갈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고맙게도 형제님이 필터를 갈아주었습니다. 93세 어르신을 위한 병자성사가 있었습니다. 건강하셨던 어르신인데 이제는 거동이 불편해서 요양병원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성지순례 가서 토요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청년들과 만날 기회가 적었는데 토요일에 있는 청년 미사를 봉헌하니 청년들을 만나서 좋았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나니, 구역모임이 있었습니다. 지난 송년, 구역 장기 자랑에서 1등 한 구역이 뒤풀이한다고 모였습니다. 덕분에 저녁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정말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일이 많다고 짜증 내면, 아침부터 문 열어 달라는 부탁에 짜증을 내면 하루가 길고 힘들었을 겁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요, 하느님의 뜻으로 여겨집니다.
매일 강론을 준비하는 것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거라 생각하니 감사할 일입니다. 성당의 문을 여는 것도 제게 열쇠가 있기 때문이니 감사할 일입니다. 짚신 장수와 우산 장수의 어머니는 비가 오면 짚신 장수 아들을 걱정했습니다. 짚신이 팔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날이 맑으면 우산장수 아들을 걱정했습니다. 우산이 팔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비가와도 좋습니다. 우산장수 아들이 우산을 팔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날이 맑아도 좋습니다. 짚신장수 아들이 짚신을 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뀌는 겁니다. 동양의 현인 장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들보나 기둥 재목은 성벽을 무너뜨리는 데는 유용하지만 구멍을 막는 데에는 소용없다. 그것은 쓰임이 다르기 때문이다. 천리마는 하루를 달릴 수 있지만 쥐를 잡는 데에는 고양이만 못하다. 그것은 재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올빼미는 밤에는 벼룩을 잡고 터럭 끝도 볼 수 있지만 낮에 나와서는 눈을 뜨고도 큰 산조차 보지 못한다. 그것은 본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제게는 큰 울림을 주었던 말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쓰임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재주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본성이 있습니다. 그 쓰임과, 재주, 본성이 다를 뿐입니다. 남과 비교해서 교만할 필요도 없습니다. 남과 비교해서 아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많은 분이 세례를 받았지만, 신앙인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평화와 참된 행복을 만나면 좋겠습니다. 귀소본능의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는 루가복음 15장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났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우리는 그것을 회개라고 부릅니다. 아버지는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렸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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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딸들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사도들이 자기 사명을 수행하고 나서 예수님께 돌아와 “자신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마르 6,30)을 보고하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한적한 곳으로 가서 음식을 먹고 쉬도록 배려하시는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따스하고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열심히 일한 뒤 형제들끼리 보내는 오붓한 휴가는 어떤 것에도 방해를 받고 싶지 않은 소중한 순간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군중을 피하여 외딴곳으로 떠나지만 군중은 더 긴 육로를 통해서도 지름길인 뱃길보다 먼저 도착해서 그들을 기다립니다. 예수님 일행을 따라잡으려고 많은 군중이 호수 주변의 길을 빠르게 달리는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그만큼 그들의 갈망은 절박하였던 것이지요.
오늘 복음은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그런 군중을 보신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르 6,34)라고 전합니다. ‘측은히 여기다’로도 옮기는 그리스 말의 이 낱말은 본래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곳으로 이해되던 창자가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애타다, 애달다’와 비슷한 이 표현은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요 예수 성심의 사랑을 잘 나타내는 낱말입니다.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은 계획대로 쉬게 하시고 당신 혼자 군중을 상대하신 듯합니다. 돌보아 줄 이 없는 군중을 보시고 창자가 움직일 만큼 연민이 끓어오르신 예수님께서는 식사와 휴식 그리고 제자들과 보내는 오붓한 시간 등 당신의 모든 계획과 필요를 잊으시고 군중의 필요에 몰두하십니다. 자기 사정을 잊고 상대의 사정에 부응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을 닮는 지름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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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30-34: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31절) 제자들은 예수님께 파견을 받고 나갔다가(6,6-13) 돌아와서 그들이 한 일을 보고하고 있다. 그때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곳으로 가서 조용하게 쉬면서 그 보고를 듣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조용히 쉴 시간이 없었다. 군중들이 많아서 그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 주님 안에서는 항상 휴식이란 없음을 보여준다. 하여간에 사도들은 다시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나지만(32절), 군중들은 그 배가 이미 어디로 갈 것을 알고는 육로로 예수님의 일행을 앞질러 그곳으로 갔다(33절).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시면서 그 군중들을 보시고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34절).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은”(34절)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신앙인의 삶이란 조용한 곳에서 하느님 앞에 머무르는 것과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서로 엇갈리는 삶을 조화롭게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많은 사람이 잘못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 조용히 쉬며 머무르는 시간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예수님과 함께 휴식하며 받을 힘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가끔 하느님 아버지와의 조용한 시간, 즉 기도의 시간을 자주 가지셨던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기도를 통하여 더욱 아버지와 하나임을 확인하시고 기도를 통하여 당신의 사명을 더 잘 완수하실 수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분과의 일치를 체험함으로써 더욱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한 가르침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살이 바쁜 속에 그럴만한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디서나 몸과 마음의 휴식을 주님 앞에 가질 수 있는 여유는 가져야 한다. 우리가 기도를 게을리한다면 활동의 의미를 잃을 수 있다. 이때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 있으며 주님은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힘을 주실 것이다. 이로써 영적인 갈망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의 지혜를 가르쳐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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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세속의 휴식’과 ‘예수님의 안식’을 구분해야 합니다.>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0-34)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예수님은 우리를 온갖 짐과 멍에에서 해방시켜 주려고 오신 분이고,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여기서 ‘안식’이라는 말은, 구원받은 상태를 뜻하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 기쁨, 행복 등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멍에와 짐’은 예수님의 복음과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뜻합니다. (반어법적인 표현입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는 말씀의 뜻은, “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너희의 멍에를 벗겨서 편안함을 줄 것이고, 너희의 짐을 없애서 가벼움을 줄 것이다.”입니다.
2)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는 말씀은, 외딴곳으로 가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이 ‘안식’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휴식’이 아니라, 영적인 힘의 재충전을 가리키는 ‘안식’입니다.>
3) 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예수님도 제자들도 원래의 계획과는 다르게 쉬지 못하게 된 것으로 보이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예수님도 제자들도 몰려든 사람들도 안식을 누리게 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 몰려든 사람들은, 참된 안식을 찾아서 예수님께 온 사람들이고,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영혼의 평화와 안식을 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2) 제자들은, 따로 떨어져서 쉰 것은 아니고,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영적인 힘’을 재충전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외딴곳에서 쉬는 일’을 ‘피정’이라고 표현하는데, ‘피정’은 아무것도 안 하고 쉬기만 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피정 지도자의 강의도 듣고, 고해성사도 보고, 미사와 기도를 드리면서 영적인 힘을 재충전하는 프로그램입니다.>
(3) 예수님은 쉬시지도 못하고 계속 일만 하신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예수님도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사람들을 가르치시면서 ‘새 힘’을 얻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시간은 예수님 자신의 방식대로 안식을 누리는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4)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인류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사람들도...> 그런데 사실 목자가 없었던 때는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목자이신 하느님께서는 늘 사람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당신께서 저의 원수들 앞에서 저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 제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저의 술잔도 가득합니다. 저의 한평생 모든 날에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다."(시편 23편) 목자이신 하느님께서 늘 함께 계시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잊어버리고 하느님을 떠나 있었고, 목자가 있는데도 목자 없는 양들처럼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방황하고 있는 인류를 가엾게 여기셔서 구원하려고 오신 ‘참 목자’이신 분입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말이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를 설명해 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참 목자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참된 안식을 얻으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5)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라는 말을 그 당시의 상황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이 말은 목자 직무를 수행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그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수많은 목자들이 내 포도밭을 파괴하고, 내 몫을 짓밟았다. 그들은 내 탐스러운 몫을 폐허의 광야로 만들었다. 그들이 내 몫을 폐허로 만들자, 폐허가 된 그곳이 나를 향해 통곡한다. 온 땅이 폐허가 되었는데도, 그 일을 마음에 두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예레 12,10-11) <나쁜 목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노여움과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목자가 직무를 잘못 수행하면 그 직무를 정지시켜야 합니다. 성전이(교회가) 제 구실을 못하고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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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히브리 서간의 저자는 유대인들이 십자가에서 죽인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시작해서 점점 이방인들, 특히 그리스 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숫자가 늘어납니다.
유대계 그리스도 인들은 구약성경과 그들이 몸담았던 관습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기에 이방인들에 비해 점점 축소해지는 분위기였습니다. 저자의 이름이 밝혀지지는 않은 히브리 서간의 저자는 히브리인들의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대사제이심을 증명해 보이려는 초점이 크게 보입니다.
구약과는 다르게 인성을 취하신 성자께서는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죄인의 처지를 이해하고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하시는 점을 또한 유대인들에게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교우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계약의 피로, 양들의 위대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끌어올리신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시어 여러분이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히브리서 13,20-21)
지치고 병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은 위해서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을 치유하시기에는 주님께서도 또한 사도들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시는 복음선포와 마귀를 쫒아내고 병자들을 치유하도록 제자를 둘씩 짝 지어 파견하십니다.(마르코 6,7-13). 그리고 제자들은 그들의 소명을 다하고 스승께서 계신 곳에 다시 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주님께 보고합니다.(마르코 6장 30절)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고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은 주님과 제자들을 따라 가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따로 외딴 곳으로 떠납니다. 그러나 군중은 어떻게 알았는지 육로로 해서 주님과 그 일행이 도착하는 곳에 미리 와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보시며 쉬실 엄두도 내지 못하십니다.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에 가엾은 마음이 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들은 참으로 눈코 뜰 새 없이 희생적이었습니다. 그때에는 어머니들은 당연히 그러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들은 논밭에서 일하는 분들을 위해 시간을 맞추어 새참과 점심까지 준비해서 머리에 이고 부지런히 나릅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저녁 늦도록 함께 일을 합니다.
머리에 둘렀던 땀이 밴 수건은 해가 질 때에 비로소 풀립니다. 어머니들은 어둑어둑한 뜨락에서 저녁을 지어서 가족들이 옹기종기 음식을 먹도록 하지요.
음식을 드는 둥 마는 둥 어머니들은 식구들 옷가지를 챙겨 밤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빨래방망이 소리가 얼마큼 난 연 후에야 이 땅의 어머니들은 저문 강에서 발을 담그고 땀을 씻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철들은 사람들은 그 어머니들의 억척스런 정성과 사랑이 가족들을 지켜낸 힘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주름투성이의 어머니들은 쉴 줄도 지칠 줄도 몰랐습니다. 사랑은 지치지도 쉬지도 않나봅니다.
주님께서도 음식을 드실 겨를이 없으신 데도 당신 제자들은 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은 목자의 사랑으로 양들을 보살피며 복음을 전하고 병든 그들을 쉼 없이 치유해 주시지요.
히브리 서간의 저자가 예수님을 향해 ‘양들의 위대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이라는 칭호는 오늘은 더욱 살아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이사야 예언서 61,1)라고 외친 이사의 예언이 주님에게서 성취됩니다.
또한 마태오와 루카 복음도 예수님에게서 예언이 성취된 사실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오 11,5 ; 루카 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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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군중을 바라보시는 눈, 그 시선을 느껴 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언가 바라고 갈망하는 눈빛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눈과 군중의 눈이 만납니다. 그 만남 속에서 참된 목자, 착한 목자를 기다리는 그들의 마음이 예수님께 전해집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오늘 화답송에서도 강조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라고 다윗 임금은 노래합니다.
다윗은 이 노래에서, 주님께서 목자로 자신에게 행하시는 모든 것이 은총과 자애로 다가옴을 아름답게 읊어 냅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또 어떤 상황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이렇게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말씀을 마주하게 됩니다. 좋은 말씀, 위로의 말씀, 힘이 되는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체적 일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마주하였을 때, 항상 일치되는 신앙을 체험하고 있는지 조심스레 물어봅니다.
주님께서 나를 푸른 풀밭에 쉬게 하시는가? 잔잔하고 고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는가?
이 질문에 우리는 “예!”라고 확신하기보다, 말씀과 삶 사이의 거리를 마주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느끼는 거리는 우리 신앙의 자존감을 떨어뜨려, 스스로를 신앙심이 부족한 사람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마주하셨던 군중, “주님은 나의 목자”라고 고백한 다윗 임금. 주님을 향한 갈망을 지닌 공통점을 가진 이들은 우리의 눈과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가 중요함을 알려 줍니다.
우리의 일상은, 우리의 삶의 자리는 어둠의 깊은 골짜기를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과 마음이 주님을 향할 수 있다면 깊은 골짜기는 두려움의 자리가 아니라 구원의 자리로 변화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참된 의미입니다.
나의 눈과 마음이 향하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요? 당신께서 목자이심을 알려 주시는 그분께 우리의 방향을 정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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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고해소에 앉아 있다 보면 너무 열심히 살아서 번아웃‘Burnout’(어떠한 활동이 끝난 후 심신이 지친 상태. 과도한 훈련에 의하거나 경기가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아 쌓인 스트레스를 해결하지 못하여 심리적ㆍ생리적으로 지친 상태이다)에 힘겨워하는 교우분들을 만납니다.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열심히 봉사하는 것도 중요하고, 열심히 나눔을 실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무언가를 열심히만 하다 보면 꼭 만나는 벽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번아웃’입니다. 우리는 한계를 가진 사람입니다. 항상 주고만 싶지만 받아야 줄 수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만약 계속 내 안의 것을 꺼내기만 한다면 우리는 언젠가 모든 것이 바닥났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채워야 다시 나눌 수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이 바로 ‘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쉼을 권하십니다. 복음은 말합니다.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서 음식 먹을 시간조차 없었다.’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의 쉼은 또 다른 사랑의 시작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게 제자들을 쉼의 자리로 보내셨는데 정작 주님께서는 쉼을 갖지 못하십니다. 구름처럼 몰려온 사람들을 가엽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오늘도 주님께서는 쉼을 청하는 우리들을 대신해 많은 일을 하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덕분에 우리들이 조금 쉴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저는 전임 신부님이 시작한 이 묵상집을 이어 집필하면서 묵상집의 이름을 ‘숨 그리고 쉼’이라고 정했습니다.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게 숨과 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에게 ‘숨’이 되어주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묵상집이 쉼과 같은 여유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제 생각대로 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온통 이런 마음으로 묵상집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숨을 쉬세요. 그리고 쉼을 청하세요. 그래야 다시 채움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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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이어령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 평소 선생님을 존경해 왔던 분이 병문안을 갔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평생 존경을 받았지만, 사랑받지 못했어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 받지 않으셨습니까?”
“아니요. 스승의 날이 되어도 제 연구실에는 꽃을 들고 찾아오는 제자가 없었습니다. 제가 어려웠던 거지요. 그래서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존경은 받았지만 사랑받지는 못했구나.”
자신과 너무 멀다고 생각하면, 존경할 수는 있어도 사랑하기는 어려운 존재가 됩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이 시대의 석학이고 천재라고 불리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이 존경했지만, 사랑하기는 힘들었던 것이지요. 사랑을 주고받으려면 어딘가 빈구석이 있어야 하고, 실수도 하고 어리석은 면도 있어야 했습니다. 너무 완벽하면 사랑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선생님의 이 말씀에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부족한 모습을 보였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전지전능함만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기적만을 행하시고,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척척 들어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상태로는 사랑으로 넘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아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인간적인 나약함도 보여주셨고, 실제로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간이 겪는 죽음까지도 직접 겪으십니다. 존경의 차원을 넘어 사랑의 차원에 함께 머물기 위해서였습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고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쉼의 시간이 필요해서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갔지만, 많은 사람이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많은 군중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보이신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이 마음이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영적으로 목말라하는 군중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기에,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이 사랑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 곁에서 함께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나의 것으로 간직해야 함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사실 저 역시 완벽해지려고만 노력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제 곁에서 멀리 앉으려고 하나 봅니다. 식당에서도 멀리, 성당에서도 멀리…. 같이 어우러지는 편안한 사랑의 자리가 나의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존경받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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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외딴곳에서>
마르코 6,30-34 (‘오천 명을 먹이시다’ 전반부)
그때에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외딴곳에서>
외딴곳에서
좀 쉬다
참 좋다
외딴곳에서
벗을 만나다
더욱 좋다
외딴곳에서
벗과 하나되다
너무나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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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
사람은 때때로 쉬고 싶어 합니다. 지금 하는 일과 환경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맘먹고 쉬려고 하면 꼭 일이 생기고 맙니다. 그러니 때로는 지금 자리를 떠나는 것이 필요하고, 어느 특정한 날을 정하여 쉬는 것보다, 일상 안에서 쉬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 하는 일을 즐기는 법을 터득해야 오래도록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20세기 위대한 별이었던 슈바이처는 “현대인이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밤하늘을 쳐다보며 우주를 생각한다면 현대 문명이 이렇게 병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외딴곳을 찾아 떠났습니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습니다. 그리고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니(창세 2,2-3) 휴식은 재충전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는 곳에 이미 도착하여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고 이동하였는데 모든 고을 사람이 육로를 통해 이동하였다는 것은 어떤 어려움도 기꺼이 감당하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그들의 적극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을에서 나왔다는 것은 자기들의 삶의 현장을 떠났다는 것을 말해 주는 데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인기가 좋았습니다. 스스로 내 세워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분을 둘러쌌습니다. 바깥에 있으려 해도 사람들이 그분을 중심에 모셨습니다. 그분에게 매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가르쳐 주셨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기를 잡아 일시적으로 먹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통해서 영적인 갈증을 채우게 됩니다. 세례를 받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지내시는 분이 많은 데 사실은 이제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 또 부족한 것은 다시 배우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셔야 할 것도 많고,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많습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너무 고달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 자체 이시고 우리에 대한 사랑이 크시기에 모든 수고로움을 수고로움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측은한 백성과 함께할 수 있음이 오히려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외딴곳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셨습니다.(루카 6,21) 이른 새벽, 동트기 전 외딴곳에서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을 결코 소홀히 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셨던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없음을 생각합니다. 오히려 너무 바빠서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휴식은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내 일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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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마르코.6,34)
추운 겨울 날씨 속에서 어수선한 현실을 사는 많은 사람들은 마치 목자없는 양들처럼 방향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뿐만 아니라 새해가 지나도 국가의 방향도 정확히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지도자의 부재로 미래의 불확실성이 커져 국민들은 목자없는 양들처럼 분열되어 있습니다. 양들에게 연민을 가지고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려는 착한 목자와 같은 지도자보다, 양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만 지키기에 바쁜 미숙한 목자와 같은 지도자의 미숙한 모습을 보며 가슴이 쓰립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기본적 리더쉽 덕목은 양들에게 가지는 "연민의 마음"입니다. 양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이 없으면, 목자는 자신의 말과 행동이 어떻게 양들을 아프게 하는지 인식 조차도 못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양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목자는 양들을 죽음으로 인도하게 됩니다.
양들은 착한 목자에게 목숨을 맡깁니다. 그래서 착한 목자는 양들의 아픔을 알고 양들이 원하는 생명이 있는 푸른 목장으로 안내합니다. 하지만, 목자가 양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리떼가 나타나 양들을 위협할 때, 양들의 아픔도 모르는 어리석은 목자는 양들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착한 목자가 되기 위하여 주님은 인간이 되시어 누구보다 큰 상처를 받으시고 양들인 우리를 위해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아픔이나 두려움을 헤아리기보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기가 죽어 아픈 우리에게 ‘가엾은 마음’으로 먼저 공감을 하십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은 양들인 우리의 아픔에 공감하고 가엾은 마음으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선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통과 상처는 양들인 우리의 아픔을 공감하며 구원하는 ‘복된 아픔’이 되었습니다.
양들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목자는 양들을 가혹하게 대하고 자신의 이익만 챙깁니다.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고통받는 국민인 양들을 보며 "가엾은 마음"으로 공감을 하는 착한 목자의 리더쉽을 가진 지도자가 더욱 그리운 요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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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0-34)
엊그제 목요일 복음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복음 선포의 소명을 받고 파견되었던 제자들이 무사히 자기 할 일을 마치고 잇달아 예수님께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부족한 자신이 잘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많았지만, 예상치 못한 큰 성과에 한껏 고무되어 있었지요. 그들은 예수님 곁에 둘러앉아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나누었을 겁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어렵고 괴로웠던 순간들,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통해 이루신 성과와 자기들이 느낀 보람들, 당시엔 힘들었지만 지나고보니 웃으며 추억할 수 있게 된 고생담까지… 그런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으시는 예수님의 얼굴엔 흐뭇한 미소가 번졌을 것이고, 그분의 마음 속에선 그 모든 과정을 함께 하시고 섭리하신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감사가 우러나왔겠지요.
하지만 모든 일에서, 특히 ‘하느님의 일’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무리’입니다. 외딴 곳을 찾아가 하느님과 나 사이의 일대일 관계 안에 머무르며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한 겁니다. 그 시간을 통해 어떤 점들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겠고 어떤 점들을 아쉬워하셨겠는지, 다음 번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그런 점들을 보완하고 개선할 수 있겠는지 그 길을 찾아야 하지요. 그래야 같은 잘못을 반복하며 후회할 일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방향으로 제대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루 종일 당신을 찾아오는 군중들을 잠시 물리시고, 제자들과 함께 외딴 곳을 찾으시기 위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입니다. 오늘은 더 이상 예수님을 못보겠구나 하는 생각에 아쉬움을 삼키며 돌아설 줄 알았는데, 예수님 일행이 배를 타고 가는 방향을 향해 무작정 달리기 시작한 겁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배에서 채 내리시기도 전에 먼저 목적지에 도착하여 그분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분 말씀을 조금이라도 더 듣기 위해, 그분 곁에 조금이라도 더 머무르기 위해 말 그대로 ‘사력’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얼마나 간절했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울컥해진 예수님은 그들을 안쓰럽게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해, 구원의 진리와 하느님 나라에 대해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십니다.
고생하는 자식들을 위해 이것저것 필요한 걸 챙겨주고 싶은 게 어머니 마음이라면, 그 자식들이 나중에라도 고생하지 않고 잘 먹고 잘 살도록 길을 마련해주고 싶은 건 예수님 마음입니다. 오늘 복음이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이라는 점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분명한 의도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곧 빵과 물고기라는 세상의 음식으로 그들을 배불리 먹이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빵 하나 물고기 하나에 만족하는 사람이 되는 건 바라지 않으십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주님이 주시는 걸 받으려고만 하는 수동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물고기 대신 고기잡을 방법을 알려주는 것처럼, 당신이 곁에 없어도 그들이 방황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 뜻에 맞는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그래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참된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그 방법을 알려주시는 것이지요. 세례만 받으면 구원받는데 필요한 모든 준비가 끝난 것으로 착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세례성사는 겨우 시작일 뿐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진심을 담아 행하며, 부족하거나 잘못된 부분을 성찰하고 그 성찰을 통해 더 심오한 배움으로 나아가는 여정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 속 군중들처럼 간절히 주님을 찾고 끝까지 그분을 따라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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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세 가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친 제자들을 향한 ‘배려의 마음’이요, <둘째>는 몰려든 군중들을 향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요, <셋째>는 양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았던 사도들이 돌아오자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군중이 몰려왔건만, 예수님께서는 지친 제자들에게 ‘가서 좀 쉬어라’고 배려하십니다. “쉬어라”는 이 말씀에서,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창세기 2,3)는 <창세기>의 울림을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쉼”은 하느님께서 창조된 모든 것에게 ‘복을 내려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음’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쉬게 하고, 그들이 한 모든 일에 복을 내리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쉼’ 안에서 당신이 바로 ‘주님’임을 알게 하시는 일입니다. <시편> 작가는 말합니다.
“너희는 멈추고(곧 쉬고)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또한,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외딴 곳으로 가서”라는 말씀에서 <호세아서>의 울림을 듣습니다.
“이제 나는 그 여자를 외딴 곳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너는 나를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내가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 2,16-22 참조)
그러니 “외딴 곳”에서 벌어질 일은 바로 이 일,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되고 ‘주님’을 알게 되는 일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피곤함에 지친 제자들은 쉬게 하시면서도,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았기 때문입니다.”(마르 6,34) 이는 <민수기>(27,15-17)의 표현을 연상시켜줍니다. 거기서 모세는 하느님 백성이 “목자 없는 양처럼”(민수 27,17; 1열왕 22,17) 되지 않도록 한 사람을 세워달라고 간청합니다. 목자의 주요업무 중 하나는 양떼를 위한 음식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불러들이고(탈출 16장), 엘리사가 백 명을 먹이기 위해 빵의 양을 늘렸듯이(2열왕 4,42-44), 예수님께서도 이제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먹을 음식을 마련하기에 앞서, 먼저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 6,34) 그들이 진정으로 굶주리고 목말랐던 것은 바로 ‘진리’인 ‘생명의 말씀’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양들을 “진리”에로 인도하는 이가 바로 “참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참된 양식’을 받아먹는 ‘양’이어야 합니다. 오늘 진정, 우리가 그분의 ‘양’이라면,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그분에게서 ‘진리인 말씀의 양식’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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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주님!
저를 외딴 곳, 당신의 거처로 데려 가소서.
당신 안에 쉬게 하소서. 그 쉼 안에서 사랑에 젖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알게 하소서. 그 사랑 안에서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하소서.
당신만이 진정한 쉼이오니, 당신 사랑의 속삭임 안에 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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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착한 목자 영성>
-“삶의 균형, 분별의 지혜와 사랑”-
“주님은 나의 목자,아쉬울 것 없어라.”(시편23,1)
오늘 화답송 후렴은 김수환 추기경의 묘비명이기도 합니다. 오늘 옛 현자들의 말씀도 착한 목자 영성 공부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공부해야합니다. 무지에서 벗어나 겸손하고 지혜롭기 위한 공부는 전방위적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공자는 호학(好學)이라 하여 배움을 좋아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재물을 탐내기보다 공부에 집중하는 것이 재물보다 만족을 준다.”<다산>
“군자는 도를 추구하지 음식을 추구하지 않는다.
농사를 지어도 굶주림이 그 안에 있을 수 있지만, 배우면 녹봉이 그 안에 있다.”<논어>
궁극엔 도(道)를, 삶의 진리를 추구하는 공부이겠습니다. 교황님의 공개된 2025년 ‘세계 선교의 날 메시지’ 한 대목도 신선했습니다.
“기도는 우리 희망의 불꽃이 계속 살아 있게 한다”
(Prayer keeps our ‘spark of hope’ alive)
교황님이 요즘 유난히 강조하는 덕목이 ‘희망’입니다.
희망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늘 불타오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순서로 하면 “기도하라!”에 이어 “공부하라!”이겠습니다.
착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님은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입니다. 우리가 평생 배워야 할 바 이런 착한 목자 예수님의 영성입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은 선교차 파견되었던 제자들의 귀환과 더불어 시작됩니다. 성공적 선교여행에 사도들이 흥분된 분위기입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사도’로 파견되었다가 다시 ‘삶의 중심’인 예수님께 ‘제자’로 돌아온 이들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바로 이 순간 착한목자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와 사랑이, 삶의 균형 감각이 빛을 발합니다. 제자들의 흥분과 피곤해 있음을 직시한 예수님은 ‘휴식과 성찰, 기도’를 위해 쉴것을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오고 가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 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이래서 필히 마련해야 할 바 외딴곳의 쉼터에서 주님 안에 머무는 피정입니다. 여러분의 외딴곳 쉼터는 어디입니까? 시간과 장소는 있습니까? 정말 경계할바 ‘바쁨과 인기’요, ‘바쁘다, 인기있다’는 것 바람직하지 않으며 달콤한 유혹이 될 수 있습니다.
이미 ‘활동주의는 현대판 이단이며 현대인들에게 고독은 사치가 아니라 필수품’이라 설파한 20세기 최고의 영성가 토마스 머튼입니다. 일과 휴식의 균형이, 분별의 지혜와 사랑이 참 중요합니다. 이래야 온갖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분별의 지혜로 ‘죄책감 없이 아니오(No without feelins guilty)’라고 말할 필요가 있음을 배워야 합니다. 바로 자기의 한계를 아는 분별과 절제가 겸손이자 지혜입니다.
참으로 집요한 군중들입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목마르고 굶주린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찾는 분은 모두의 길이자 생명이요 진리이자 ‘삶의 중심’인 착한목자 예수님입니다. 예나 이제나 주님을 찾는 인간의 본질은 똑같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는 동안 군중들은 호숫가를 걸어 더 일찍 외딴곳에 도착한 것이니 이들의 주님을 찾는 필사적 갈망과 열정의 농도를 능히 짐작할 만합니다.
예수님은 배에서 내리시어 목자 없는 양들 같은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에 외딴곳에서의 쉼을 포기하고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와 사랑이 빛나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가엾이, 측은히,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사랑은 그대로 착한목자 하느님의 사랑을 반영합니다. 착한목자 하느님을 그대로 닮은 예수님입니다.
우선 해소되어야 할 영적 목마름입니다. 육신의 음식에 앞선 영혼의 양식이 진리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이어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이니, 말씀전례에 이은 성찬전례인 미사구조가 은연중 드러납니다. 이런 우선순위에 따른 영적구조는 수도원의 일과표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미사후 아침식사에 낮기도후 점심식사, 저녁기도후 저녁식사입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은 오늘 시공을 초월하여 제1독서 히브리서를 통해 어제에 이어 오늘의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첫째, 예수님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 제물을 바치십시오. 그것은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이래서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찬양과 감사의 시편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둘째,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기도와 예배(prayer and worship)’에 이어 ‘사랑과 섬김(love and service)’이 참 좋은 신자 삶의 요약이자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입니다.
셋째, 지도자들의 말을 따르고 그들에게 순종하십시오. 영혼을 돌보고 하느님께 셈바칠 지도자들이 기쁘게 섬김의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자발적 사랑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독재적인 지도자들에게는 분명히 해당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권위, 질서, 규율에 대한 존중은 신약전체의 가르침입니다. 이 순종은 기꺼이, 즐겁게 해야하며 ‘한숨쉬며’ 해서는 안됩니다. 순종의 목적은 모두가 공통의 목표에 헌신하여 함께 일하게 하는 것입니다.
넷째,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교황님도 매 강론 끝에는 자기를 위해 기도해달라 청하십니다. 히브리서 저자 역시 똑같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주십시오. 우리는 모든면에서 늘 올바로 처신하려 하기에 바른 양심을 지니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흡사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히브리서 마지막 기도와 축복이 참 아름답습니다. 신약에서 가장 아름다운 축복기도중 하나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그대로 이뤄지는 참 좋은 선물인 축복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영원한 계약의 피로, 양들의 위대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끌어올리신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시어,
여러분이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우리에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히브 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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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는 찬미,, 이웃에게는 선행>
“예수님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 제물을 바칩시다. 그것은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들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입니다.”
오늘로 히브리서 독서가 끝나는데 당부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 제물을 바치라는 것과 이웃에게 선행을 하고 나눔을 실천하라는 것인데 둘을 합치면 하느님과 이웃에게 할 도리를 하라는 말입니다.
먼저 위로 하느님께 해야 할 도리로 언제나 찬양 제물을 바치라고 하는데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어떻게 언제나 찬양 제물을 바칠 수 있을까 생각됩니다.
‘언제나’는 참 어려운 것이고 성인에게나 가능하거나 성인도 쉽지 않은 것입니다. ‘언제나’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이고,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언제나’라는 말이잖습니까?
그런데 더 생각해보면 하느님께 찬양 제물을 바치면 괴로울 때도 이미 괴롭지 않게 되고 슬플 때도 이미 그 슬픔이 전혀 슬픔이 아닐 것입니다.
사실 그러기 쉽지 않아서 문제지 그럴 수만 있다면 괴로울 때 찬양 제물을 바치는 것은 괴로움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고, 괴로움에 매이거나 머물지 않고 눈을 들어 하느님을 보는 것이며 그래서 괴로움을 넘어 이미 하느님께 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 제물을 바치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도리가 아니라 나의 유익이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중 공통 감사송 4>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께는 저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나 저희가 감사를 드림은 아버지의 은사이옵니다. 저희 찬미가 아버지께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나 저희에게는 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도움이 되나이다.”
두 번째 도리인 이웃 사랑도 이 면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선행과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이웃에게 도움 되는 측면이 없지 않겠지만 사실은 그에게 도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에게 도움이 됩니다.
선행과 나눔을 실천하려고 하는 순간 사랑이 들어와 내 안에 머물고, 선행과 나눔을 실천하고 나면 더더욱 사랑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선행을 실천하느라 힘이 빠져나가고, 나눔을 실천하느라 돈이 빠져나갈지라도 사랑이 들어오고 보람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느님 사랑 까닭에 한다면 하느님 사랑이 내 안에 들어오기에 더더욱 충만하고 보람될 것입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해 주시기를” 빌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우리에게 해 주시기를” 비는데 하느님 뜻과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이 바로 이것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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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르 6,34ㄱ)
<하느님의 마음인 가엾은 마음!>
오늘 복음(마르6,30-34)은 '파견된 열두 사도들이 돌아와 예수님께 보고하는 말씀과 예수님께서 군중을 향해 가엾은 마음을 드러내시는 말씀'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그리고 당신을 따르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가엾은 마음'은 '목자'이신 하느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대할 때 드러내신 마음인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인 가엾은 마음'은 '너를 향한 마음'이고, '지금 너에게 필요한 것을 내어주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두의 구원을 위해 가엾은 마음을 드러내시어,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따라가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이며, '우리가 닮고자 하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독서(히브 13,15-17.20-21)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들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입니다."(13,15)
"지도자의 말을 따르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이 탄식하는 일 없이 기쁘게 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들의 탄식은 여러분에게 손해가 됩니다."(13,17)
우리도 하느님의 마음인 가엾은 마음이 됩시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인 선행과 나눔을 통해 살아있는 제물을 하느님 아버지께 바쳐드리도록 합시다!
그리고 목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성직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영혼의 구원을 위해 힘쓰는 그들의 말에 순종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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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르 6, 34)
열정과 연민을
잃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연민과
열정으로
일상을
바로 잡으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
해답이
있습니다.
기쁘게
맞아들여야 할
우리의 일상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조화와 균형으로
당신의 일상을
조화롭게
다스립니다.
외딴곳으로의
초대는
자신을 보살피는
시간입니다.
외딴곳의
시간도
우리의
일상입니다.
걸으면서
나누면서
쉬면서
작은 피정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일상이 모여
예수님의
일생이 됩니다.
우리의 연민도
외딴곳의 쉼이
필요합니다.
감정도
균형이
필요합니다.
절제와
균형 속에서
일상의 중심이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믿음도 실천도
균형을 통해
건강한 신앙이
됩니다.
외딴곳에서
다시
찾아야 할
조화와
균형입니다.
신앙도
균형을 잃으면
연민도 열정도
사그라듭니다.
일상안에서
외딴곳은
우리가
우리자신을
보살피는
복음의
알찬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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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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