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금융위기때도 안쓴 ‘예금 전액 보증’… FRC에도 자금 수혈
[SVB 파산 후폭풍]
美은행 일주일새 세번째 폐쇄
실리콘밸리은행 폐쇄 이틀 만인 12일(현지 시간) 가상화폐 기업들의 주거래 은행으로 자산 규모 1100억 달러(약143조 원)인 미국 시그니처은행도 폐쇄됐다. 사진은 문 닫힌 시그니처은행 뉴욕지점. 뉴욕=AP 뉴시스
뉴욕에 기반을 둔 시그니처은행은 팬데믹 기간 ‘큰손’으로 부상한 가상화폐 기업을 대상으로 거래를 늘리며 성장했다. 자산 규모는 약 1103억 달러(약 146조 원)로 미 은행 순위 29위의 중소형 은행으로서 틈새시장을 찾은 것이다.
지급 불능 사태에 빠진 실리콘밸리은행(SVB) 폐쇄 이틀 만인 12일(현지 시간) 뉴욕주는 시그니처은행을 폐쇄 조치했다. 다음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자 증시가 개장하는 13일 월요일 시장 혼란을 차단하기 위해 선제적 조치에 나선 것이다. 미 연방정부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쓰지 않은 ‘예금 전액 보증’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러나 38년 역사의 샌프란시스코 중소 은행 퍼스트리퍼블릭(FRC)도 생사 기로에 내몰리며 긴급 자금 지원을 받는 등 위기 확산 우려는 가시지 않고 있다.
● 미 연방정부 유동성 지원 왜
미 연방정부 금융시장과 관련된 수장들은 주말 내내 대책회의를 했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12일 금융안정감독위원회(FSOC)를 소집했고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과 게리 겐슬러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 마틴 그루엔버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의장, 로스틴 버냄 상품선물거래위원회 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미 상업은행 1위인 JP모건 체이스 뱅크의 자산 규모가 3조2000억 달러임을 감안하면 SVB(2090억 달러)나 시그니처은행(1103억 달러)은 중소형 은행에 속한다. 이들 은행이 월가 ‘대마불사’ 수준의 핵심 플레이어는 아니지만 중소형 은행으로 위험을 전이시키기엔 충분한 규모라고 본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SVB의 고객이 미 테크 스타트업에 집중돼 있어 줄도산 우려가 깊어지자 조 바이든 대통령과 옐런 장관, 파월 의장 등이 나서 예금보증 및 추가 유동성 지원을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 등 실리콘밸리 스타트업계 주요 인사들은 정부가 개입해 예금을 보전해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FDIC는 당초 12일 오후 2시까지 SVB 매각을 시도했지만 매수 희망자들이 발을 빼 사실상 불발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특정 은행의 파산이 광범위한 금융권 리스크를 초래할 경우’ 보증 한도(25만 달러)를 초과한 예금도 보호할 수 있다는 연방예금보험법 조항을 이용해 SVB와 시그니처은행을 보증해주기로 한 것이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이날 성명에서 “미국인과 미국 기업은 필요할 때 예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를 가질 수 있다”고 밝혔다.
● 연준발 고금리 리스크 커지나
이번 SVB 폐쇄 사태가 팬데믹 거품과 연준의 고강도 긴축에 따른 보유자산 가치 하락이 원인이 된 만큼 연준은 은행에 긴급 유동성을 제공해주는 기금인 ‘BTFP(Bank Term Funding Program)’를 도입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은행들은 보유 국채나 주택저당증권(MBS)을 액면가 담보로 제공해 연준으로부터 1년 동안 무제한 돈을 빌릴 수 있게 됐다. 40년 만의 고금리 국면에 따른 ‘금융시스템 위기’를 조기에 차단하겠다는 취지다.
다만 미 금융 당국은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수익률이 높은 부실채권에 투자해 시스템 위기를 초래한 금융기업을 구제해 ‘대마불사’ 비판이 쏟아진 점을 감안해 이번 지원이 세금으로 금융기관을 살리는 구제금융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연준과 미 재무부는 성명에서 “투자자와 채권자는 지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미 금융당국의 긴급 개입에도 40년 만의 연준발 고강도 긴축에 따른 위험은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른다는 우려는 여전하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빌 애크먼 퍼싱스퀘어 창업자는 “연준의 SVB 개입에도 더 많은 금융기관이 붕괴에 직면할 수 있다”고 밝혔다. 특히 팬데믹 시기 급성장했다 연준의 고강도 긴축에 직격탄을 맞은 테크, 가상화폐, 부동산 관련 금융 기관에서 위험이 확산될 우려도 제기된다.
뉴욕=김현수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