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남침땅굴 규명해낸 이창근동지! |
2006-10-15 21:45:36 |
김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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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구미리 제5땅굴진상규명시민연대 대표 박찬성, 총무 이창근
2006년 4. 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이 강제조정 결정문을 냈다 합니다.
"피고인 대한민국은 연천군 백학면 구미리의 땅굴을 절개하고 즉시 확인을 할 것이며 이에 따르는 모든 비용을 국가가 부담한다. 즉시 결정문을 보낼 것이며 '결정문을 받는 즉시 실행하라. 만일 이행치 않을 시 그동안 원고인들이 막대한 자금을 들여 작업을 한 것에 대하여 포상금과 보상금을 지급하라".
외롭게 투쟁해온 이창근 동지에 박수를 보냅니다. 연천 땅굴은 저도 가 보았고, 테이프도 100여개씩 복사하여 미국 국회의원 31명에도 나누어주었습니다. 이것이 북괴식 폭파공법에 의해 뚫어진 남침 땅굴이라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국방부 심원홈(소령예편, 20여년간 땅굴 탐사 직위), 김대중 등 수상한 사람들 밖에 없습니다.
2000년3월3,4,5일 3일간 SBS가 연천 땅굴은 남침 땅굴임을 보도했지만 김대중은 조사도 해보지 않고 "그것은 자연동굴이다"라 못을 박음으로써 조사를 방해했습니다. 그리고 베를린으로 날아가 김정일에게 6.15접선을 요청했습니다.
특히 국방부 땅굴 담당관 심원흥에 대해서는 민간 땅굴탐사자들 거의가 간첩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민간탐사를 탄압해 왔습니다.
저는 아래 글을 실었다가 심원홈이 고소한 사건에서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이를 이창근 동지가 뒤집어주었으니 얼마나 기쁩니까?
재판 당시는 간첩 임동원이 도청을 통해 저를 철저히 감사하라 하며 탄압했던 시기였습니다. 황장엽선생을 보호하기 위해 "국정원이 황비서의 밥에 독극물을 넣을 수 있다"는 글을 쓴 데 대해서도 민-형사 소송을 걸었습니다. 국정원 사람들이 판사들을 조정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1심에 이긴 사건들가지도 모두 패소했습니다.
앞으로 국방부가 강제조종 불응하겠다는 문서를 낼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싸움 참으로 볼만한 사건이며, 모두가 관심갖고 응원해야 할 사건입니다.
제가 벌금을 물었던 아래 글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을 쓰고서도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오른 쪽 땅굴 란에 심원홍을 검색하시면 자료들이 나옵니다.
연천 제5땅굴의 기막힌 사연
민간 땅굴 탐사자들은 서로 똘똘 뭉친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남굴사를 중심으로 이들이 뭉쳐있지만 소신에 따라 각기 일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창근씨는 지금도 가산을 축내면서 혼자 다닙니다. 박찬성 북핵저지시민연대 대표도 땅굴에 대한 열렬한 일꾼입니다. 그는 지금 사무실을 운영하는데 많은 애로를 겪고 있는데 그 이유는 2000년, 연천 땅굴 확인을 위한 2억원짜리 테이프를 제작하는 데에 기인한다고 합니다.
영천 제5땅굴은 이창근씨의 주도로 굴착됐고, 이창근씨의 주도로 SBS에 접촉이 되어 2000년 3월2,3,5.에 각각 3차례 방영됐습니다, 이에 대해 김대중씨가 그건 자연동굴이라고 서둘러 막아주었고, 이어서 국방부 땅굴 담당자 심원홍 등이 SBS를 상대로 민사소송 3억원 어치를 제기했습니다. [안보] 문제에 관한 한, 검사와 법관들은 의례 국방부의 의견에 치중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양쪽이 팽팽히 맞서있는 순간 박찬성 대표가 결정적인 일을 했습니다. 그는 80여 개의 민간 기구가 참여하는 "제5땅굴진상규명시민연대"(02-730-1730-4)를 조직하여 비디오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직경 6인치(15cm)의 시추공을 직경 60cm로 확대했습니다. 깊이 42m에서 땅굴이 나왔습니다. 직경 6인치였을 때에는 사람이 들어갈 수 없었지만 직경 60cm로 넓히자 사람이 밧줄을 타고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의협심 있는 잠수부가 목숨을 걸고 66회의 잠수를 했고, 13회에 걸쳐 수중 촬영을 했습니다. 상상을 해보십시오. 저는 그 잠수부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너무 무서웠다고 회고합니다.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애국심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사진 촬영 결과를 분석한 사계의 전문가들이 땅굴임이 틀림없다는 진술과 함께 이유들이 비디오에 담겼습니다. 지질학 교수, 발파전문가, 굴착전문가, 화약전문가 등 8명이었습니다. 참고로 2003.6.26 국방부가 화성땅굴 현장으로 초대한 토목공학 교수(정형근 박사, 토목학계의 1인자) 역시 그 2억원 짜리 비디오를 보았다며 [연천 땅굴은 분명히 인공 땅굴로 본다]고 답했습니다.
바로 이 테이프가 SBS에 제공됐습니다. 이 테이프 하나로 SBS측은 땅굴이 틀림없다는 증거와 8명의 증인을 확보한 셈이 됐습니다. 그런데 국방부에서는 이에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땅굴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찌 되었겠습니까? 누구든 법관이 SBS의 손을 들어주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연천의 제5땅굴은 정말로 남침땅굴이다"라는 판결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5땅굴은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자연동굴이다"라고 못박은 곳입니다. 이렇게 되면 판사가 대통령의 발언을 뒤집는 것이 됩니다. 판사가 "판결" 대신 "결정"이라는 수습방법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으로 믿어집니다.
제가 서울지법남부지원에 가서 재판문서를 복사해 왔습니다. 그 분석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했습니다.
1. 재판과정에서 군이 유리했다면 군이 "강제조정"에 응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2. 강제조정 내용은 실로 군에 매우 굴욕적인 것들이 들어 있다.
첫째, 군은 소장에 요구한 청구 내용 4개항 모두를 포기한다.
둘째, 여기에 추가하여 군은 제5땅굴 문제로 SBS에 민사 및 형사 소송을 하지 않는다.
셋째, 소송비용은 각자 부담한다.
넷째, 군이 SBS에 요구한 "육군정보참모부장 앞 서신"은 일체 외부에 공 개하지 않는다(단 국정조사 등에는 예외).
SBS측 말을 들어보면 군은 마치 "살려달라"는 식으로 "육군 정보참모부장 앞 서신" 하나를 SBS에 구걸(?)했다 합니다. 그 서신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지난번 방송에는 군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아 유감으로 생각한다. 2. 앞으로는 관련부서의 입장을 반영하여 보도의 공정성을 높이겠다.
이 서신내용은 아무리 봐도 땅굴 담당자들이 윗선에 체면치례를 하기 위해 사용될 수는 있어도 외부적으로는 전혀 무의미해 보입니다. 이를 놓고 지금 저를 고소한 땅굴 담당자들은 "SBS가 사과문을 써주었기 때문에 소를 취하했다"며 오리발을 내밉니다. 사과문을 써주었느냐고 SBS담당자에게 문의했더니 펄쩍 뛰더군요. 생 거짓말이랍니다.
이 송사 말고도 SBS는 기무사와의 소송 등 군과 몇 가지 소송이 걸려 있답니다. SBS가 강제조정에 응하는 대가로 군은 다른 소송들을 취하했다 합니다.
총 결산하면 군은 SBS에 굴복한 것입니다. 혹을 떼려다 혹을 더 붙인 꼴이 됐습니다. 첫째, 소장에 기록된 4가지 청구내용을 포기했고, 둘째, SBS를 상대로 민.형사 소송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셋째, 군이 SBS를 상대로 걸었던 이전의 소송들을 취하했습니다. 반면 SBS는 잃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재판장은 "판결"을 피하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상과 같이 강제조정 결정문 내용을 분석해 보면 연천 5땅굴은 법정에서 "사실상의 인공땅굴"로 가려진 셈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남습니다. SBS가 법정에서 유리해진 이유는 그 2억원짜리 비디오테이프 때문이었습니다. 그 비디오 테이프는 어떻게 만들어 졌습니까? 이창근씨 및 박찬성씨의 금전적 공헌과 피나는 노력이 있었고, 그리고 목숨을 건 잠수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SBS가 이기기를 바랐지 그걸로 협상을 하라고 그 값진 테이프를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후 박찬성 회장과 이창근씨가 당시 SBS 보도국장을 이남기씨를 찾아가 항의를 하였습니다. 그들간의 대화록이 보존돼 있습니다. 그리고 이창근씨는 SBS가 절대로 타협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해 SBS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2003. 10. 27 -------------------------------------------
국방부 땅굴 탐지 요원들의 고소 건에 대한 진술서
피고인: 지만원 주소: 생략
국방부 당굴 관계자 김병조, 심원흠, 윤상훈이 피고인을 고소한 고소 대상은 상기 피고인이 운영하는 홈페이지 www.systemclub.co.kr의 국방분야 124호 "군의 땅굴 은닉집단은 간첩인가? 확실히 밝히자"는 제하의 글입니다.
1. 핵심쟁점으로 들어가기 전에 졸지에 피고인이 된 제가 왜 국방부 땅굴 관계자들로부터 소송을 받아야 할 대상인지에 대한 자격부터 규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문제의 글은 피고인 혼자 쓴 것이 아니라 남굴사(남침 땅굴을 찾는 사람들의 모임)의 간부 7명이 공동으로 작성하였으며 글의 말미에 7명의 성명과 신원이 명확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상기 피고인은 7명의 간부 중 한 사람일뿐이며 모임의 대표도 아닙니다. 7명의 공동 작성자 중에서 유독 제가 소송을 받아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단지 당시에는 남굴사에 홈페이지가 없어 피고인의 홈페이지를 임시로 할애했을 뿐입니다.
2. 설사 남굴사 7명 중 누가 소송을 받는다 하더라도 문제의 글이 왜 소송을 대상이 돼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문제의 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여러 개의 땅굴 의혹 지점에 대해 민은 사비를 들이고 밤을 지새면 찾아내려 했고, 군은 언제나 땅굴이 아니라고 일축했다. 민과 군이 각기 다른 대상을 향해 일방적인 비난전만 펼 것이 아니라 대질하여 공개토론을 벌이자. 대질 토론은 회피하면서 군은 증거를 인멸하고, 현장의 민간증언자들의 입을 막고, 뒷구멍으로 다니며 그럴듯한 논리로 거짓말을 해왔다.
2) 민간 탐사자들이 신고한 것 중 한 곳을 선택하여 속시원히 당을 절개하여 규명하자. 5천만 원이면 되는 것을 군은 예산 낭비라며 회피해 왔다. 16조에 달하는 막대한 국방비를 쓰고 북한에도 막대한 돈을 주면서 땅굴 규명을 위해 5천만원을 예산낭비라는 것은 소가 웃을 일이다. 5천만원이 아가워 절개하지 않는다면 군당국은 당굴 은닉세력으로 의심받아야 한다.
3) 지난 7월23일 민간 탐사자들은 땅굴을 주제로 하는 토론회에 군당국을 초대했지만 참석하기는커녕 방해공작을 했다.
제1항의 대질토론을 벌이자, 제2항의 절개를 하자는 글은 제안하는 글이므로 문제될 게 없다. 제3항은 사실이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다. 군이 문제 삼고 있는 내용은 아마도 제1항의 "대질 토론은 회피하면서 군은 증거를 인멸하고, 현장의 민간증언자들의 입을 막고, 뒷구멍으로 다니며 그럴듯한 논리로 거짓말을 해왔다"는 내용일 것이다.
군은 대질토론을 지금도 피하고 있다. 동두천 경찰관을 포함하여 땅굴 의혹을 제기한 사람들은 모두 입을 봉하고 자리를 피한다. 이는 정지용씨와 국방장관 고학보좌관이었던 윤여길 박사를 포함해 남굴사 요원 모두가 경험했고, 일부 얼넌 기자들도 경험한 일이다. 군이 땅굴에 대한 결정적 징후를 은페하고 증거를 인멸하며 방해한 사실이 밝혀지면 '입을 막는다"는 위 주장은 자동적으로 해명된다 할 것입니다.
군이 땅굴 증거를 인멸한 사례 #1: 김포 땅굴 (증거사진)
1. 민간 탐사팀이 88년초부터 김포군, 하성면 후평리에서 시추작업을 하던 중 1992년 김천환씨 텃밭에서 땅굴 징후를 발견했다. 민간 탐사대는 시추공에서 1) 인공시멘트를 수거하고 2)기계소리를 녹음했으며 3) 북한 억양의 대화내용을 녹음했다. 대화내용이다. "이것 만지면 일만일천 감전되지". "예 예"
2. 탐사팀은 이 증거물을 군당국에 신고했으나 "민간 탐사팀이 조작해낸 것"으로 처리했다.
3. 월간 조선이 이 증거물들을 가지고 미국의 음향연구소와 일본의 세계적인 음향분석 전문가 스즈끼 마시미 박사에게 의뢰하여 확신을 얻고, 프레스 센터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폭로했다.
4. 1992년 12월17일 민간 탐사자 김천환씨가 시추공 특수 카메라를 통해 땅굴과 같은 지하공간을 발견하여 육본 탐지과에 신고했다.
5. 신고된지 몇 시간만에 군 시추기 한 대가 나타나 시추공을 빼려 하다가 빠지지 않자 시추공 파이프를 돌과 흙으로 메워 찰영이 불가능하도록 했다.
6. 12월17일 오후 3시. 군의 비행을 연락 받은 정지용이 현장에 나타나 증거 인멸 작업 현장을 찰영하려 하자 작업을 지휘하던 소령이 급히 병사들을 싣고 도주했다. 5억원 대의 시추기는 주인 없이 벌판에 방치됐다.
7. 민간 탐사대는 "군이 밤중에 증거인멸작업을 완료할 것"이라는 생각에 잠복근무를 했다.
8. 예측대로 12월18일 새벽 6시에 군이 나타나 모든 시추공을 빼냈고, 빠지지 않는 것은 산소 용접기로 잘라내 흙으로 덮어 땅굴 징후를 노골적으로 은폐했다. 민간팀은 이 은폐과정을 촬영하여 9 매의 생생한 컬러 사진으로 보관 하고 있다.
9. 92년12월19일 김천환을 군의 은폐행위를 진정서로 만들어 국방장관 앞으로 보냈지만 소용없었다.
10. 정지용씨는 2001년 1.22일 서울고등검찰청에 임동원을 직무유기 죄로 재고발(항고장) 했으며, 2001년1월15일 국방부 간부 2명 및 육군본부 간부 2명을 "직무유기 및 특수 이적죄"로 국방부 검찰부장에게 고소했다.
피고소인: 1. 국방정보본부 대침투정보과 대령 김명진 2. 상동 5급 조병영 3. 육본 정보참모부 탐지과 대령 김병조 4. 상동 3급 심원흠
군이 땅굴 증거를 인멸한 사례 #2: 연천군 아미리(증거 사진)
2000년3월, SBS가 연천군 구미리에 제5땅굴 증거를 2차례에 걸쳐 방영했다. 바로 그 근방인 아미리에서도 땅굴로 확실시되는 징후가 발견되었다. 1992년이었다. 지하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는 주민의 신고를 받고 민간 탐사자들이 한동안 시추작업을 했다. 사추공을 박아놓고 시추공 밑바닥에 폭약을 넣은 후 발파를 했다.
땅굴이 없었다면 그 폭발력에 의해 시추공은 공중으로 솟아오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폭발력이 동굴로 흡입되어 땅이 내려앉았다. 그 광경을 본 모든 사람들은 지하에 동굴이 있다는 걸 의심치 않았다.
당시 한미야전사령부 김무웅 장군(육사20기)이 땅굴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를 통해 6군단장에게 이 사실이 보고됐다. 6군단장이 직접 나서서 공병여단을 투입하여 절개 작업을 시작했다.
군장비와 민간장비가 총동원돼서 터를 넓게 잡고 땅을 파내려갔다. 땅이 패여지는 것만큼 포크레인도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 15-17m 정도 파내려 가자 움푹 패인 웅덩이가 나타났다. 모두가 영락없는 동굴이라고 생각했다. 웅덩이 밑에는 물이 고여있었다. 군이 가지고 있던 양수기로서는 물을 뽑아낼 수 없어 민간 탐사자 한 사람이 의정부에 나가 양수기 두 대를 사왔다.
신들린 듯 돌아왔지만 사태는 이상하게 진전되고 있었다. 갑자기 작업중지 명령이 내려왔다. 군단장도 어찌 할 수 없이 작업을 중단하고 기껐 파낸 흙을 도로 메웠다. 군단장이 저항 한번 못해보고 다 파놓은 땅굴을 서둘러 메웠다면 그 윗선은 누구일까?
군이 땅굴 증거를 인멸한 사례 #3: 연천군 구미리(증거 비디오)
2000. 3. 2일 SBS가 연천 제5땅굴의 실체를 뉴스로 보도했다. 3월4일 국방부가 조사도 해보지 않고 서둘러 자연동굴인 것으로 발표했다. 3월5일 SBS가 다시 뉴스추적 에서 잠수부가 찰영한 땅굴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도했다. 이번엔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자연동굴이라고 못박았다. 그 누가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겠는가?
3월8일 80 여 개의 보수 시민단체가 연합하여 "보수국민연합땅굴진상규명추진위"를 만들어 8인치 시추공 5개를 뚫어 66회의 잠수와 13회의 찰영을 통해 상식인이 봐도 완연한 땅굴임을 의심치 않게 하는 비디오를 작성했다. 그 비디오에는 한국의 지질학계 전문가 대표들과 화약기술, 발파기술, 굴착 전문 분야 대표들의 전문적인 판단내용도 담겨져 있다.
지질학 박사 우경식 강원대 교수, 지질학회 이사 권기옥 부사장(삼안지질), 이정배 이사(주 신우엔지니어링사), 발파공법의 대가인 강전산(화약기술총연합회 회장), 굴착 전문가인 이상근 사장(다신쏘일테크), 제3땅굴 시추자 유태근 사장(동아수중펌프) 등 한다하는 전문가들이 조목조목 자연동굴이 아니라는 것과 북괴식 발파공법에 의한 땅굴임을 밝혀주고 있다. 남굴사는 많은 돈과 노력을 들여 땅굴임을 증명하는 테이프와 교수들을 포함한 전문가의 증언을 확보했다. 군 역시 이것이 땅굴이 아니라는 증거와 증인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군이 땅굴 증거를 인멸한 사례 #4: 의정부시(증거 소송 자료: 정지용)
1. 의정부 식당주인 식구들이 겪은 공포의 땅굴 일기장은 그의 집 밑에서 땅굴을 파는 과정을 생생하고 묘사하고 있다(첨부)
95'. 1. 27 오후 7:20, 방바닥에 청진기를 대고 있던 민간탐사자들의 귀에 소리가 들렸다. 궤도차 소리가 점점 가까이 나더니 무엇을 싣는 소리가 들렸다. "밥먹으러 가자우" "날래 날래 타라우" 궤도차 소리가 멀어져 갔다.
2. 땅굴 징후가 명확해지면서 주민들 중에 민간탐사자들을 감시하는 어두운 눈동자들이 보였다.
3. 식당 주인 이국진씨는 음식점을 세내주고 청주로 이사가 버렸다.
4. YS 특별지시
95'. 1. 4, 충현교회 장로가 땅굴 진정서를 들고 YS를 찾았다. 며칠 후 안기부가 국방부를 배제시키고 자체 땅굴 탐사반을 구성해, 민간 탐사반과 함께 의정부/동두천 에서 땅굴 검증 작업을 벌였다.
문제가 발생한 의정부와 동두천 미군기지부근에서 안기부와 민간탐사반 합동으로 시추작업을 벌린 결과, 양쪽에서 지하공간및 역대책 현상이 발견됐다. 동두천은 민간탐사반이 92년도에 이미 지하 24m에서 공간을 발견했고, 사람 목소리, 굴착 소리를 녹음했었다. 당시 SBS 및 월간조선이 이를 보도했다.
민간탐사반과 함께 땅굴증거를 확인해 놓고도 안기부 직원들은 돌연 태도를 돌변하여 같이 일하던 민간 탐사자들을 비하하고, 감금 고문하고, 각서를 쓰게한후 대통령특명작업을 강제로 작업을 종료시킨다음, YS에는 땅굴이 없다고 허위 보고를 했다(권영해 부장시절).
5. 안기부의 마각
1) 이후 민간탐사반은 10일간 안기부 서기관 이남구, 민병은과 함께 동두천 미군기지 옆에서 시추작업을 벌였다. 이들의 행동이 수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2) 시추공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있으니, 들어보라고 했더니, 고의적으로 피했다. "내가 들어서 무슨 소린 줄 알겠는가"
3) 동두천 미군기지 옆에 3개 지역을 시추했다. 3곳 모두에서 땅굴 징후가 나왔다. 이제 땅굴을 찾는 것은 시간문제라며 모두가 들떠 있었다.
4) 95'. 2. 14 오후 8시: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데 중년 신사 3명이 들어와 신분증을 보이며 정지용씨를 강제 연행했다. 앰배새더 1205호. 10여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노려봤다. 국장급으로 보이는 사람이 호통을 쳤다.
"당신 말야, 땅굴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무조건 간첩으로 몰아버리고, 기관간에 알력을 조장하는 이유가 뭐야? 응?"
5) 5명의 조사관이 번갈아 밤을 새워가며 취조와 협박을 했다. 요정에 데려가 "외국으로 나간다면 조용히 살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해 주겠다"는 회유도 했다. 부르는 대로 각서를 쓰라고 했다.
* 앞으로 절대로 땅굴 작업을 하지 않는다 * 앞으로 땅굴에 관한 진정서를 내지 않는다 * 앞으로 땅굴에 관한 책을 쓰지 않는다
6) 정지용씨는 2. 17일, 2박 3일간의 감금 조사를 마치고 동두천 작업장으로 갔다. 정명환 장군을 비롯하여 민간탐사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앞으로는 땅굴 징후를 절대로 기관에 알리지 말자. 대통령의 특명으로 시작된 작업이니 계속 강행하자"는 의지를 주고받으면서 5일간 정지됐던 작업을 재개했다. 안기부 이남구씨가 협박했다. "정비용씨는 서울에서 조사받을 때 지시를 못받았느냐, 앞으로 현장에 나오지 말고 여관에서 대기하라.어기면 그냥 두지 않을 꺼다".
7) 안기부 이남구씨는 흰색 횟가루로 선을 그어주면서포크레인업자 이만덕씨에게 "절개 작업은 이 횟가루선 밖을 벗어나서는 안된다. 정지용의 말을 들어선 않된다. 우리의 지시대로만 작업하라"고 지시했다.
그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를 틈타, 민간탐사자들이 땅굴 징후가 있는 곳으로 파내려가자 이남구 등은 어떻게 이 사실을 알았는지 호출기와 핸드폰으로 불러내 작업을 중지시키고 장비를 철수시켰다. 95.3.15일이었다. 대통령의 특명작업은 이렇게 중단됐다.
8) 95.3.23, 안기부 모국장이 민간탐사자 7명을 장충동 산유화 한정식집으로 초대했다. 향응을 베풀고 여비쪼로 1,400만원을 주었다.
9) 그들은 정지용씨를 따로 불렀다. "땅굴 작업으로 가산까지 모두 투입한 애국자임을 잘 알고 있다. 앞으로는 사업을 하라. 우리가 도와주겠다. 이는 내 말이 아니라 위의 방침이다. 외부에는 발설하지 말라. 만약 누설되면 정지용씨도 기관에 근무했으니 어떻게 되는 지 잘 알 것이다".
10) 95.9.4, 정지용씨는 권영해 안기부장에게 내용증명을 보냈다. "안기부에서 땅굴 징후를 확인하고도 대통령께 허위보고한 후, 앞으로 민간인들에게는 땅굴 작업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정당한 사유가 있다면 순응할테니 해명해달라". 물론 응답이 없었다.
11) 95.9.21, 안기부에는 그래도 숨은 애국자가 있는 모양이었다. 놀랍게도 안기부의 모간부가 당시 창간된 자유일보 천금성 주필에게 정지용씨를 소개했다. "정지용씨를 만나보면 땅굴에 대한 좋은 취재 자료가 있을 겁니다".
12) 천금성 주필은 3차례에 걸쳐 땅굴을 은폐한 안기부"라는 제목으로 은폐를 주도했던 안기부 직원들의 이름까지 실명으로 보도했다. 갖은 회유와 협박을 가했지만, 천금성 주필이 끄떡도 하지 않자 안기부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13) 96.2.2, 장지용씨는 안기부장 권영해를 이적행위로 대검찰청에 고발했다. "안기부가 은폐한 장소에서 재작업을 해서 땅굴이 나오지 않으면 어떠한 엄벌도 달게 받겠다"는 요지였다. 93.3월 초, 서울지검 공안부 강익중 검사가 정지용을 조사한 후에 한 말이다. "이런 엄청난 문제를 거짓 고소하겠는가. 등골이 오싹해진다"
14) 검찰에 고발한 후에 정지용씨는 이 사실을 청와대 및 각 기관에 탄원했고, 유력 인사들이 이 문제를 거론하자 안기부는 유력 인사를 찾아다니며 그럴듯한 말로 허위해명 하곤했다.
15) 대검에 고발한지 22개월만에 갑자기 육군본부 탐지과장이 정지용씨를 협박했다. "고소를 취하하지 않으면 안기부장께서 구속시키겠다고 한다".
16) 97.11.14, 정지용씨는 서울지검에 안기부장을을 공갈협박 및 직권남용 혐의로 추가 고발했다.
17) 97.3월,천금성씨가 재차 보도를 하려하자, 안기부 언론반 직원들이 취재 중단을 요구했지만 관철되지 않자, 권영해는 남정판 언론특보를 보냈다.천금성 주필을 찾아온 남특보는 "부장께서 직접 보내셨다. 나도 이곳을 떠난다. 내가 떠난 후에 보도하던지 하라". 얼마 후 남정판 특보는 공보처 차관으로 전보됐다.
18) 97.7.24, 예비역 장군 등 유력인사들과 함께 남침저지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하여 97.8.30일자 중앙일보 2면에 "수도권 땅굴 발굴 작업에 전국민이 동참, 남침을 막읍시다"라는 제목으로 5단 광고를 게재하자, 안기부는 가판에 배포된 신문을 회수하고 2판부터는 타 광고로 대체시켰다.
6. 드디어 권영해가 1선에 나서서 방해하다
1) 국방부 장관 과학보좌관으로 근무하던 윤여길 박사(육사 20기 1등 졸업)가 땅굴 문제를 직접 조사한 후 국방 장관 최세창에게 "민간 당굴 민원은 신빙성이 있다. 거짓말을 하는 쪽은 육군본부다"라고 보고했다. 그 결과 반대 세력들의 작전으로 윤여길 박사가 강제 퇴직 당했다. 퇴직당한 후 윤여길 박사는 대우 중공업 부사장으로 일했다.
2) 윤박사는 대우중공업에 근무하면서도 문제의 의정부 땅굴 현장을 은밀히 방문하여 안기부의 음모를 확인하였다. 그는 권영해 측근으로부터 "권부장께서는 땅굴 징후가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바 있다"는 내용을 전언 받았다. 그는 이 엄청난 사실을 주위에 발설하였다. 그 후 윤박사는 업무와는 전혀 무관한 러시아로 발령 받았다. 주위에서조차 윤박사의 갑작스런 발령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3) 6개월 후, 윤박사는 김우중 회장으로부터 발령의 배경을 알게 되었다. 권영해가 김우중을 찾아와 "윤박사를 해외로 보내라. 그 대신 한전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용하는 우라늄 수입권을 대우에 주겠다"고 제안하여 윤박사를 러시아로 보냈다고 말했다.
군이 땅굴 증거를 인멸한 사례 #5: 철원(증거자료: 암석)
2001.6.1 강원일보는 "철원, 땅굴인가 동굴인가"라는 제하의 기사를 실었다. 같은 날 강원도민일보는 "철원 당굴 초정 동공층 발견"이란 제하의 기사를 썼다. 철원군 갈말읍 신동막리에서 가믐 대책으로 암반관정을 시추하던 중 지하 20여m에서 3m의 동공층이 발견됐다. 동공층이 발견된 지점은 제2땅굴 위치로보터 불과 10km 지점이다.
시추경력 20년의 이씨는 "이 지역은 화강암층이라 자연 동공현상이 있을 수 없는 곳"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군부대 관계자는 "이 지역은 화산분출로 형성된 한탄강과 인접하고 있어 동공형상이 일어날 수 있다(현무암). 자세한 것은 지질탐사기를 동원해 정밀조사를 해야만 밝혀질 수 있다"고말했다.
이러한 보도에 따라 남굴사는 지난 12.18-29(12일)간 같은 지점을 시추하여 화강암을 추출해 냈다. 시추경력 20년 소유자인 시추업자 이씨의 말이 맞고 군 땅굴 담당자들의 말이 틀린 것으로 확인됐니다. 남굴사는 이 화강암 기둥을 샘플로 많이 확보했다. 작업비는 1천만원이었지만 이는 어느 가난한 독지가가 모두 부담해 주었다.
하지만 군 땅굴 담당자는 지난 5.30, "지질탐사기를 동원해 정밀조사를 해야만 밝혀질 수 있다"고 말한 이후 일체 조사를 하지 않았음은 물론 옛날의 시추공 속에 콘크리트를 붓고 잘라내고 흙으로 묻어 증거를 인멸했다.
3. 땅굴 투쟁 14년을 기록하는 정지용씨는 그간 7회에 걸쳐 국정원과 국방부 및 군 땅굴 당국자들을 고소했습니다. 김진영 당시 육군 참모총장외 4명에 대해 1회, 권영해에 대해 3회, 임동원에 대해 1회, 군 당굴 담당자들에 대해 2회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검찰은 무혐의 처리했습니다. 무혐의로 처리했지만 피고소인들로부터 항의나 이의 제기나 무고죄 고소가 일체 없었습니다(정비용 참고인).
4. 군 땅굴 탐사자가 무엇이 떳떳하다고 감히 고소까지 했는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2002. 1. 12 지 만 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