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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인공, 헨리 5세.
아쟁쿠르 전투 등에서 승리, 프랑스의 목에 칼을 들이댄 왕이다.
헨리 5세 (Henry V, 1387.9 ~ 1422.8.31)는 랭커스터 왕가 출신의 잉글랜드 왕이다.
프랑스와의 백년전쟁 중 아쟁쿠르 전투에서 승리, 잉글랜드를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의 하나로 만들었다.
헨리는 뒤에 헨리 4세가 되는 더비 백작 헨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398년에 아버지가 역모 혐의로 프랑스에 추방되자, 당시 잉글랜드의 왕이었던 리처드 2세는 어린 헨리를 맡아서 잘 보살펴주었고, 1399년에는 기사 작위를 주었다.
삼촌인 윈체스터 주교 헨리 보퍼트에게 교육을 받은 헨리는 자라면서 음악과 독서를 좋아했고, 영어로 쉽게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최초의 잉글랜드 왕이 됐다.
헨리가 기사 작위를 받은 것과 같은 해, 리처드 2세가 랭커스터 가의 영토를 몰수한다.
이에 헨리의 아버지는 급히 귀국해 병사를 일으켜 리처드 2세를 체포, 퇴위시킨 뒤 의회의 추대를 받아 헨리 4세로 즉위해 랭커스터 왕가를 열었다.
헨리 4세.
리처드 2세와는 사촌 관계로, 청년 시절에 리처드 2세에게 반대하는 귀족 무리에 속하기도 했었다.
후에는 스스로 왕위에 올라 랭커스터 왕가를 열지만
귀족 가운데 왕위를 노리는 사람이 많이 생겨, 음모와 반란이 계속 일어났다.
하지만 의회를 존중하며 어려움을 극복, 영국 의회 발달사상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헨리 4세가 즉위한 해, 헨리는 체스터 백작, 콘월 공작 겸 왕세자로 책봉됐고, 그 직후에 아키텐과 랭커스터 공작에 임명됐다.
1400년 10월부터 웨일스의 행정은 헨리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으며, 1403년에는 웨일스 반란을 진압하는 군대의 실질적인 지휘권을 행사했다.
헨리 4세의 만년에는 그를 대신해 정무를 보기도 했다.
헨리는 1413년 3월 21일, 아버지의 뒤를 이어 헨리 5세로 즉위했다.
하지만 통치 초기는 그리 안정적이지 않았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가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신봉하던 사람들인 롤라드파가 1414년에 일으킨 봉기에 이어, 이듬해에는 케임브리지 백작인 리처드와 스크로프 경 헨리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를 왕위에 앉히기 위해 꾸민 음모가 연달아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두 번의 반란은, 헨리의 가차없는 토벌로 인해 모두 실패로 끝난다.
이렇게 나라 안이 혼란스럽자, 헨리는 이런 혼란을 막기 위해 나라 밖으로 민심을 돌리려고 생각한다.
이런 그의 눈에 들어온 나라가, 프랑스였다.
헨리는 1360년의 칼레 조약에서 프랑스가 잉글랜드에 할양한 아키텐과 그밖의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요구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일찍이 앙주 왕가의 재산이었던 노르망디와 투렌 및 멘의 소유권을 요구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번도 잉글랜드가 가져보지 않은 프랑스 지역까지 요구했다.
헨리는 이런 요구가 단순히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구실이 아니라 정당한 요구였다고 생각했지만, 프랑스 측에서는 이런 요구를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시의 프랑스 왕, 샤를 6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삼촌들이 권력을 잡았지만,
그들에게 휘말리지 않고 궁정을 선왕의 신하들로 채워나가는 등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1392년에 정신병이 발병해 더 이상 국정을 이끌어나가기 힘들어졌으며,
왕족들이 다시 권력을 차지하며 두 파로 갈려, 내분이 일어나게 됐다.
결국 협상은 1415년 6월에 결렬된다.
하지만 헨리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헨리는 불만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평균 이하의 자질을 가진 군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헨리가 평균 이하의 자질을 가진 군주가 아니었다는 점이, 프랑스로서는 불운이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헨리는 당시 독립국이었던 부르고뉴의 지지 내지 중립을 확보하기 위해 노련한 외교 수완을 발휘했다.
또 프랑스에 해상 지원이 제공되는 것을 막으려는 헨리의 노력은, 그가 중세의 왕으로는 이례적으로 해군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국내적으로는 의회가 의결한 과세 등을 통해 프랑스와의 전쟁자금을 체계적으로 조달했다.
의회가 과세를 인정해 준 것은 헨리가 전쟁에 대한 국민적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헨리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유력 인사들의 진심어린 지지와 통일 국가의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군사적 전략도, 평균 이하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헨리의 주요 목적은 프랑스 북부의 대도시와 요새들을 조직적으로 정복하는 것으로, 전투에서 이기는 것과는 별로 관계가 없었다.
이런 대도시와 요새들을 정복하고 잉글랜드 상설 수비대의 본부로 유지하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점차 주변의 시골 지방을 정복한다.
그 이후 행정관과 세금 징수관이 병사들을 뒤따라 점령지에 들어가, 전쟁 비용을 자체 조달하는 것으로 계획은 마무리된다.
이 계획은 헨리의 깊은 통찰력과 식견을 알 수 있는 부분이지만, 계획을 실행하는 데는 예상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백년전쟁 지도.
위 지도에 나와있지만, 녹색 부분이 백년전쟁 전 잉글랜드 영토였던 부분이다.
붉은 선으로 둘러싸인 부분이 오늘의 주인공 헨리 5세가 정복한 영토이고,
푸른 부분인 종전 당시의 잉글랜드 영토는 잔 다르크의 위력(?)을 잘 보여준다.
헨리는 1415년 9월에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프랑스에 상륙, 한달 쯤 뒤에 아쟁쿠르에서 대승을 거뒀다.
그때가 1415년 10월 25일로, 595년 전의 오늘이다.
아쟁쿠르 전투는 노르망디에 상륙, 칼레를 향해 진군해 온 잉글랜드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프랑스군과의 전투로, 병력은 잉글랜드군 약 6,000명, 프랑스군 약 2만 명이었다.
1415년 8월 센 강 어귀를 통해 프랑스에 침입한 헨리는 9월에 아르플뢰르를 점령하고 노르망디 동부와 폰티외, 피카르디 서부지방을 거쳐 칼레로 진격할 것을 결정했다.
그가 내륙 지역으로 들어오자, 프랑스 군대는 북쪽에서 잉글랜드군의 퇴로를 봉쇄하려 했다.
이들은 마침내 도버 해협으로 통하는 작은 마을인 아쟁쿠르에서 잉글랜드군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 지역은 울창한 삼림으로 뒤덮여 있고 너비 900m 정도의 개활지만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수적 우위에서 오는 이점을 제대로 살릴 수가 없었다.
잉글랜드의 장궁병 부대가 프랑스 기병대를 격파하자마자 이어진 공격을 프랑스는 당해낼 수 없었고, 결국 프랑스는 참패한 채로 물러나야 했다.
프랑스군의 전사자와 포로가 약 7,000명인 반면, 잉글랜드군은 1,600여 명에 불과했다.
이 전투로 잉글랜드군은 칼레를 점령할 수 있었고, 후에 북부 프랑스를 지배하에 두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아쟁쿠르 전투에서의 헨리 5세.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의 주력부대는 기병이었는데,
헨리 5세는 프랑스의 기병을 장궁병으로 완벽하게 압도한다.
참고로 백년전쟁 때 잉글랜드가 석궁을 썼다는 것은 잘못이며,
장궁병의 일제사격 전술이 승리에 크게 공헌했다고 한다.
아쟁쿠르 전투가, 좋은 예다.
이 승리로, 헨리는 유럽의 외교적 중재자로 떠올랐다.
1416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지기스문트 황제가 잉글랜드를 방문, 캔터베리에서 동맹조약을 맺었으며 지기스문트의 영향력을 이용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해군을 제공하던 제노바를 동맹에서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1417년에 헨리와 지기스문트는 서로 협력해 마르티누스 5세를 교황으로 선출, 교회의 대분열을 종식시켰다.
교회의 분열 종식은,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던 헨리의 목표 가운데 하나였다.
그 후에도, 헨리는 프랑스 북부지방을 조금씩 정복했다.
프랑스 북부의 주요 도시인 루앙은 1419년 1월에 헨리에게 항복했고, 1419년 9월에 부르고뉴는 헨리와 동맹을 맺기에 이른다.
부르고뉴.
지금은 프랑스에 속해 있지만, 예전에는 프랑스의 동맹국가였다.
위쪽 지도에 나와있듯,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부르고뉴와 거의 맞닿아 있다.
부르고뉴와 잉글랜드의 동맹은, 프랑스로서는 청천벽력이었을 것이다.
헨리가 파리 근처까지 진군해 오자, 프랑스는 1420년 5월에 트루아 조약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조약으로 헨리는 프랑스 왕위 계승자 겸 프랑스 섭정으로 인정받았고, 샤를의 딸 카트린과 결혼했다.
헨리와 카트린의 결혼.
그저 가정이지만, 헨리가 오래 살았다면 잉글랜드 왕과 프랑스 왕을 겸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됐다면, 잔이라는 소녀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헨리의 승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프랑스의 많은 귀족들이 트루아 조약을 인정하지 않고 헨리에게 반기를 들어 전쟁이 계속됐고, 헨리는 1422년 남프랑스의 뱅센 성에서 발진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36세였다.
헨리의 성품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매정하고 오만하며 반대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고, 정책을 추진할 때는 무자비하고 잔인한 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대인들은 정의에 대한 헨리의 애착을 칭송했고, 당시의 프랑스 작가들조차 그를 용감하고 신실하며 꼿꼿한 인간, 훌륭한 투사, 비열함과 천박함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당당한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했다.
비록 인간적인 따뜻함은 부족했지만 헨리는 남의 헌신을 끌어내는 재능이 있었으며, 지도자의 자질도 풍부하게 가지고 있었다.
교회의 대분열을 끝낸 것이라든가 임종할 때 밝힌 마지막 소원이 ‘조금만 더 오래 살아서 다음 십자군 원정에 참가해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세울 수 있으면 좋겠다’ 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헨리는 그레이트브리튼 섬의 절반만을 차지하고 있던 작고 약한 나라를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만들어낸, 뛰어난 실력의 군주였다.
헨리가 평균 이하의 군주가 아니었다는 것이 프랑스의 불운이었다면, 헨리가 36세의 나이로 요절한 것은 잉글랜드의 불운이었다.
헨리 5세의 뒤를 이어 생후 9개월의 갓난아이 때 즉위한 헨리 6세는, 아버지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칼레 이외의 영토를 모두 잃고 프랑스에서 추방된 상태로 백년전쟁을 마쳐야 했으며, 친정 이후에는 프랑스와의 평화정책을 추진, 그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의 반란으로 장미전쟁 중에 살해됐다.
헨리 6세.
물론 갓난아이 때 즉위한 탓도 있겠지만,
아버지인 헨리 5세에 비하면 재능이 너무 떨어지는 왕이라고밖에 평가해줄 수 없다.
이 글에서는 객관성을 기하기 위해 잔이라고만 표기했지만,
나는 잔 다르크를 싫어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하기는커녕 대단한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정말 신의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환청이었는지는 일단 덮어두고,
프랑스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왕자 앞에 선 용기는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잔이라는 '스타' 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건 옳지 않다.
백년전쟁을 승리로 이끈 잔 다르크만 쳐다보고, 잉글랜드는 한때 프랑스를 위기에까지 몰아넣었던 그녀의 적이었다는 정도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잉글랜드에도 헨리 5세 같은 영웅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영웅이 있었기에, 잉글랜드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까지 얻어낸 것이다.
잔 다르크는 역시 높이 평가되어야 할 인물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20대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넌 헨리 5세 역시
기억하기에는 충분한 인물이 아닐까...?
헨리 5세.
잔 다르크가 어린 나이에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일어섰다면,
헨리는 젊은 나이에 잉글랜드의 승리를 위해 바다를 건넜다.
<헨리 5세의 연표>
1세 - 탄생하다.
12세 - 아버지 헨리가 역모 혐의로 프랑스로 추방되다.
13세 - 리처드 2세가 랭커스터 가의 영토를 몰수하다. 아버지 헨리가 리처드 2세를 체포하고 왕위에 올라, 랭커스터 왕가를 열다.
27세 - 헨리 5세로 즉위하다.
28세 - 롤라드파의 봉기가 일어나고, 이듬해에는 케임브리지 백작 리처드와 스크로프 경 헨리의 반란이 일어나다.
29세 -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다.
31세 -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 황제와 협력해 마르티누스 5세를 교황으로 선출, 교회의 대분열을 종식시키다.
33세 - 잉글랜드와 부르고뉴가 동맹을 맺다.
34세 - 트루아 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 왕위 계승자 겸 섭정으로 인정받다.
36세 - 사망하다.
첫댓글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유로파3 그랜드 캠페인으로 신나게 프랑스 조지고 부셔서 퍼스널 유니온 만들었는데 만들자마자 왕이 죽어서 퍼스널유니온이 깨지고 역관광 당해서 패망...
이 헨리 5세도 유명한 잉글랜드의 왕이었지만 그 전의 에드워드 3세와 그의 아들 흑태자도 역시 유명했음....
호옹이 ㄷㄷ
헨리 5세가 쩔긴했음. 흑태자도 유명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