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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의 사람시리즈-바울(59)
바울의 비전
참고말씀: 민11:23; 왕상4:29; 롬1:15; 6:6,8; 12:2; 15:22-24,28; 고전15:10,31; 고후12:18; 갈2:20; 6:14; 빌1:6
읽을말씀: 빌2:13
주제말씀: 빌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첫째,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행하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빌2:13 상)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무엇을 차분하게 되돌아보았습니까? 자신의 지난 발자취입니다. 또한 그곳에서 무엇을 곰곰이 돌이켜보았습니까? 다메섹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사역들입니다. 그랬더니 어떤 결론에 다다랐으며 또 무엇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까? 자신이 행한 것이 아니란 점입니다. 즉 자신이 단독으로 행한 것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고전15:10 중)
바울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행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즉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서 지금까지 행하여 오셨음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빌2:13 상)
로마 감옥에 있을 때 처음 그리 말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전부터도 줄곧 그리 말해왔습니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하) /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1:6)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 같은 신비한 동행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입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그가 예수님 앞에 거꾸러졌을 때입니다. 즉 그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온전히 알고 자신의 구주로 고백했을 때 비로소 이 같은 동행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9:3-5)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그의 옛 사람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 때 이미 그는 죽었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갈2:20 상) /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하) /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롬6:6 상)
날마다 죽어갔으며,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이 땅에서의 생을 마감할 때 최종적으로 죽게 될 것입니다. 죽음과 동시에 그의 성화(聖化)가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죽기만 합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6:8) 어째서입니까? 그리스도께서 그의 안에서 대신 살아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중) 혼자서 가기 힘든 길들도 그리스도께서 대신 가주시는 것이고요.
바울의 경우만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다른 모든 비전의 사람의 경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빌2:13 상) 그러니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이 같은 점을 바로 알고 모든 일에 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행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참고로,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행하신다는 점을 왜 중요합니까? 진정한 비전의 삶은 이 같은 사실을 아는 데서부터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 안에서 행하고 계시는데, 정작 우리가 이 사실을 모른 채 우리 의지대로 행하려한다면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둘째,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하)
사도 바울은 또 무엇을 고백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역사하여 오셨다는 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행하시되 그를 통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역사해오셨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행하셨습니까? 소원을 두고 이를 행하게 하심으로써 입니다.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하)
이 소원은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입니까? 하나님입니다. 본문에 이르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해 우리에게 두셨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빌2:13 상)
이 소원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먼저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빌2:13 중) /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하) 하지만 순전히 하나님만을 위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와 동시에 비전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어째서입니까? 하나님의 소원이 그들의 소원이 되고, 예수님의 꿈이 그들의 꿈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꿈의 이양(移讓)’이나 ‘꿈의 공유(共有)’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소원은 어떻게 이룰 수 있습니까? 소원의 출처가 하나님이시고, 소원의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응당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1:6) 즉 하나님의 보폭(步幅)에 우리의 보폭을 맞추고, 하나님의 보조(步調)에 우리의 보조를 맞추며, 하나님이 가시려는 방향(方向)에 우리의 방향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고후12:18 하)
비전의 사람 바울의 경우는 구체적으로 어떤 소원으로 나타났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복음의 서진(西進)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처음에는 그가 회심한 다메섹을 중심으로 한 길리기아, 수리아 등지에 대한 복음전파가 그의 소원이었다면, 점차 로마 제국의 서쪽으로 옮겨가면서 마게도냐와 아가야, 소(小)아시아를 거쳐서,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복음 증거 하는 것이 그의 소원이 되었으며,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1:15)
결국에는 로마제국의 서쪽 끝 서바나에까지 가서 복음 전하는 것까지 그의 소원이 확장되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롬15:22,23-24) /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롬15:28)
비단 바울의 경우만 그리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비전의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비전의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시되 하나님의 소원을 그들의 소원이 되게 하심으로써 그리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하)
이 같은 소원은 처음부터 그 크기나 내용 등이 정형화(定型化)되어 있거나 고정(固定)되어 있습니까? 아닙니다. 언제나 유동적(流動的)이며 점차 확장되거나 확대되어 갑니다. 바울에게 두신 소원이 로마 제국을 서진西進)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두신 소원을 어떤 정형화된 틀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자칫 하나님의 생각이나 능력 등을 제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민11:23) 허면 어찌 해야 합니까? 언제나 유동적임을 전제하면서 열린 마음과 넓은 마음으로 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왕상4:29 하)
또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까? 이른바 ‘꿈의 이양’이나 ‘꿈의 공유’가 우리에게 이루어지도록, 즉 하나님의 소원이 그들의 소원이 되고, 예수님의 꿈이 그들의 꿈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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