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라바지오(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출생 – 사망 : 1571 ~ 1610.7.18.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지오(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는 16세기에서 17세기의 전환기에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에서 활약한 바로크 회화의 개척자이다. 활동 초기의 정물, 장르화와 이후 완숙기에 가톨릭 교회로부터 주문받아 제작한 종교화들에서, 그는 대담하고 개성적인 구성과 자연주의적인 인물 묘사, 연극적인 강렬한 명암대조를 주요 특징으로 하는 고유의 양식을 확립하였다. 17세기 초 전 유럽에서 수많은 추종자(Caravaggists)를 낳은 그의 양식(Caravaggism)은 르네상스의 고전주의와 구별되는 새로운 조형 언어였고, 그가 만든 바로크 미술의 어휘와 문법은 이후 등장하게 될 바로크 미술의 거장인 루벤스,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등의 회화 세계를 구축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보다 앞서 활동한 더 유명한 미켈란젤로와 구별하기 위해 붙여진 카라바지오라는 별명은 밀라노 동쪽에 있는 마을 이름으로, 그의 부모의 고향이다. 화가의 아버지 페르모 메리시(Fermo Merisi)는 밀라노와 카라바지오에 거처를 두고 있었던 카라바지오 후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자(Francesco Sforza)의 집사이자 건축가(혹은 석공)였다. 그의 가족은 화가가 5살 때까지 밀라노에 거주하다가 전염병을 피해 1576년 카라바지오로 이주했으나 이듬해에 아버지가 사망했다. 13살이 되던 1584년에 밀라노에 돌아와서 티치아노의 제자로 알려진 화가 시모네 페테르차노(Simone Peterzano)와 4년간의 도제 계약을 맺고 화가 수업을 시작했다. 그가 19살이 되던 1590년에 어머니도 사망하여 1592년에 여동생, 그리고 후에 사제가 되는 남동생과 유산에 대한 최종적인 분배를 하고 이를 처분하기 위해 카라바지오에 갔고, 이후 다시 고향을 찾을 기회는 없었다.
그 후 화가는 당시 유럽 예술의 중심지였던 로마로 갔는데 정확한 시기나 경로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주장들이 있다. 카라바지오의 생애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일차 자료는 17세기에 쓰여진 화가의 열전들인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판 만더(Karel van Mander, 1604), 만치니(Giulio Mancini, 1630), 발리오네(Giovanni Baglione, 1642), 벨로리(Giovanni Pietro Bellori, 1672)가 출판한 책들이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카라바지오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은 시각을 갖고 있었고, 사실과 다르거나 서로 모순되는 정보도 많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동의하는 사실은 그의 성품이 그가 예술가임을 감안하고도 ‘극도로 이상하다(stravagantissimo)’는 점이었다.
그는 불같은 성격, 종잡을 수 없는 행동, 신랄한 언설, 폭력적이고 자유분방한 생활로 수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서른아홉 해의 짧은 생애 동안 15번이나 수사 기록에 이름을 올렸고, 감옥에 갇힌 것도 7번이 넘으며, 탈옥도 여러 번 했다. 혐의는 폭행, 기물 파손, 명예 훼손, 불법 무기 소지, 살인 등으로 다양하다. 낭만주의 시대에나 볼 수 있는 ‘광기에 사로잡힌 천재 예술가’ 유형의 이런 삶은 20세기 들어 대중적으로도 많은 흥미를 끌어 그에 대한 영화가 만들어지고 서적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인생 편력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도 ‘불구하고’ 높은 예술적 성취를 낳고 좋은 평가를 받은 화가이다.
분장한 자화상, 모순되는 두 측면의 공존
[병든 바쿠스] 1593~1594년경
캔버스에 유채, 66×52cm, 보르게세 미술관, 로마
[병든 바쿠스 Bacchino Malato]는 그가 로마에 와서 처음 그린 작품 중 하나이다. 당시 그는 성직자들이 제공한 거처를 전전하다 화가 카발리에르 다르피노(Cavaliere d’Arpino)의 작업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병든 바쿠스라는 제목은 이 그림 속 인물의 안색이 황달에 걸린 듯 누렇고 푸르스름하기 때문에 붙여졌다. 모델은 화가 자신이었으며, 그가 이즈음 흑사병 (혹은 말에게 채인 부상) 때문에 극빈자 병원에 6개월 정도 입원했던 적이 있기 때문에, 병에서 회복되기 전의 자기 모습을 담았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입원 시기가 이 작품 제작에 앞서는지 아닌지가 자료마다 달라, 단지 본인이 아팠기 때문에 바쿠스를 병든 모습으로 그린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이후 카라바지오의 작품 세계에서 드러나는 두 가지 상반된 측면의 묘한 공존이다. 카라바지오가 로마에 도착했을 시기, 로마 미술계에서 인기가 있었던 매너리즘 회화의 복잡한 구성이나 난해한 상징과 비교해 볼 때, 그의 그림은 조형 요소가 단순하고 메시지가 직접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명쾌하게 해석되지 않는 부분이 항상 있기 때문에 해석이 쉽지는 않다.
이 작품에서는 풍요와 쾌락의 상징인 바쿠스가 가난하고 병든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노출된 어깨와 시선은 관람자를 유혹하는 듯하나, 팔은 몸을 가리고 방어하는 듯하다. 그의 근육은 남성의 것이나, 표정과 자세는 여성에 더 가깝다. 그가 머리에 쓴 것은 주신의 포도 덩굴이 아니라 시인의 담쟁이 덩굴이다.
카라바지오는 붓을 들고 이젤 앞에 서 있거나 옷을 차려입고 정면을 응시하는 자세를 취한 전형적인 화가의 자화상을 그린 적이 없다. 대신 그는 자신의 그림 속의 한 인물로 분장을 하고 자주 등장했다. 실제의 자신을 숨기면서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이런 작업은 20세기 말에 세계 미술계에서 유행한 작가들의 ‘분장 자화상’과 맥이 닿는 것으로, 그는 이런 흐름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분야에서 가장 탁월한 작가 중 한 명인 신디 셔먼(Cindy Sherman)이 1990년에 바로 이 작품 속 바쿠스, 즉 분장한 화가로 분장하여 그에게서 받은 영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손톱에 때가 낀 청년 바쿠스
[바쿠스], 1597~1598년경
캔버스에 유채, 95×85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1597~8년경에 제작된 [바쿠스 Bacchus]는 로마의 메디치 대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추기경 델 몬테(Francesco Maria del Monte)의 저택에 기거하며 젊은 청년들을 주제로 한 작품을 주로 제작했던 시기의 대표작이다. 인체의 처리, 화면 속 공간 배치, 정물 묘사 등에서 기량이 원숙해진 것을 알 수 있다. 화면에는 다시 한번 관람자를 초대하는 바쿠스가 등장한다. 탁자 위의 포도주병에 거품이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 막 잔을 채운 바쿠스가 관람자 쪽을 보며 술을 권한다. 바쿠스 자신은 이미 많이 마신 듯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바쿠스는 옷을 여민 끈을 풀 준비가 되어 있고, 과일은 너무 익어 기다릴 시간이 없다. 그는 ‘더 늦기 전에 마시고 사랑을 나누자’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지상에서 쾌락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을 서글퍼하는 것 같다.
이후에 그려진 그의 모든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자연주의적인(naturalistic) 세부 묘사도 두드러지는데 술잔을 든 바쿠스 손의 손톱에 낀 때나, 팔과 가슴에 비해 햇빛에 많이 그을린 얼굴과 손의 색깔이 그 예이다. 이렇게 그는 모델을 이상화하지는 않았지만, 이 경우의 모델은 그냥 자연스러운 모습은 아니다. 그가 그린 많은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이 바쿠스도 남성적인 육체의 특징과 여성을 연상시키는 자세 및 시선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카라바지오가 그린 청년, 소년들의 관능적인 모습에서는 동성애적인 취향이 명백히 발견된다. 화가의 실제 성적 취향에 대해서는 그가 동성애 특히 소아성애적 취향이 있다는 설과 이를 반박하는 주장이 모두 존재한다.
거리에서 찾은 모델, 통속적인 예술
카라바지오는 젊은 병사의 손금을 봐주는 집시를 그린 [점쟁이 Fortune-teller]를 두 번 그렸는데 그 중 1593년경에 그린 첫 번째 작품을 델 몬테 추기경이 구입하면서 오랜 후원자로서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1598~9년경에 그린 두 번째 작품은 동일한 주제를 좀 더 원숙한 필치로 담아내고 있다. 병사는 젊은 집시 여인의 말과 용모에 정신이 팔려 자기 손가락에서 반지가 빠져나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 이 작품은 당대부터 큰 인기를 끌어 수없이 복제되기도 했고, 현대에는 이탈리아 10만 리라 지폐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이미지가 되었다.
[점쟁이] 1598~1599년경
캔버스에 유채, 99×131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당대의 기록에 의하면, 거장의 작품을 모델로 작업해볼 것을 권유하는 사람에게 화가는 ‘자연이 이미 훌륭한 모델을 넉넉히 주었다’고 말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가리켰고, 그 중에서 집시 여인 한 명을 골라 작업실에 데리고 가 이 그림의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당대 인물의 개성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용모와 표정, 옷차림과 함께 이 그림에서 눈에 띄는 것은 아름답고 조화로운 색채이다. 그가 즐겨 사용한 색채는, 전성기 르네상스 미술을 특징짓던 강한 기본색이나 매너리즘 미술의 명도 높은 파스텔톤과 대조되는 그의 고향 롬바르디아 특유의 깊은 붉은색과 황토색, 흰색과 검정색이다. 이러한 색조와 인물에게 초점이 맞춰진 구성으로 그의 그림 속 세계는 관람자의 손에 만져질 듯이 사실적인 대상이 되었다.
그는 당대의 길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인물을 화폭에 그대로 담았을 뿐 아니라 당시의 연극(commedia dell’arte)의 영향을 받은 일상적이고 통속적인 장면을 만들어냈다. 인물의 얼굴에는 눈동자와 표정이 살아 있고, 분위기에는 유머가 넘친다. 그러면서도 북유럽 장르화처럼 소란스럽고 번잡하다거나 노골적으로 도덕적 메시지를 부각시키는 대신 차분하고 고요한 격조를 유지하고 있다.
어둠을 깨우는 신성한 빛, 일상을 밝히는 예술의 빛
1599년에 카라바지오는 로마의 프랑스인 공동체를 위해 지어진 교회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San Luigi dei Francesi)로부터 마테오 콘타렐리(Matteo Contarelli) 추기경의 무덤이 안치된 콘타렐리 채플의 좌우 벽을 장식할 두 그림을 주문받는다. 이것은 그가 받은 최초의 공식적인 주문이었다. 이때 그린 두 점의 대형 종교화 [성 마태의 소명]과 [성 마태의 순교]는 종교화가로서 카라바지오의 명성을 확립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때부터 그가 로마를 떠나는 1606년까지가 그의 최고 걸작들이 탄생한 전성기이다.
[성 마태의 소명] 1600년
캔버스에 유채, 322×340cm, 콘타렐리 채플,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로마
稅吏 마태가 예수의 제자로 부름을 받는 순간을 묘사한 [성 마태의 소명 Calling of Saint Matthew]에는 이후 그의 종교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카라바지오 양식의 두 요소 곧 ‘사실적인 인물 묘사’와 ‘대담한 명암법’이 잘 드러나 있다.1세기 이스라엘에서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는 16세기 로마인의 복장으로 한 무리의 한량들과 함께 연극무대 같은 선술집의 도박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런 그를 부르러 고전적 복장의 예수와 베드로가 화면 오른쪽에서 등장한다.
사실적인 인물들의 일상 장면 같은 그림에 종교화로서의 신비감과 성스러움을 부여하는 것은 화면 오른쪽 위에서 들어오는 ‘빛’이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배경에 중간 단계 없이 강한 빛을 병치시키는 이러한 조명법은, 13세기 이래 이탈리아 회화가 화면에 입체감을 주기 위해 개발해온 명암법인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에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이어서 이에는 ‘어두운 방식’이라는 뜻의 ‘테네브리즘(tenebrism)’이라는 이름이 따로 붙었다. 연극의 인공조명처럼 다소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키아로스쿠로라고 할 수 있는 테네브리즘은, 당대부터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켜 로마에 와 있던 화가들을 통해 전 유럽에 퍼졌고 특히 네덜란드, 프랑스, 스페인에서 수많은 모방자를 낳았다.
이 빛은 실제 창문이 있는 위치에서 들어와 ‘나를 부르는 것이냐’는 손짓을 하고 있는 마태의 얼굴을 비추는 ‘자연의 빛’인 동시에, 깨닫지 못하는 죄인들의 어두운 세계를 비춰 각성을 가져올 ‘신적인 빛’이기도 하다. 또한 이 빛은 추하고 더러운 몸에 누더기를 걸치고 이어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남루한 일상에서 연극의 한 장면처럼 주목받을 만한 순간을 찾아내 의미를 부여하는 ‘예술의 빛’이기도 하다. 스스로 ‘세상의 빛’을 자처한 예수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채플 천장화의아담의 손동작을 반복함으로써 ‘제2의 아담’으로서의 위상을 보여준다. 예수와 마태 사이에 선 베드로는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 역할을 하는 사제를 상징하여, 이 작품에 반종교개혁 가톨릭적인 메시지를 싣고 있다.
관람자가 참여하는 종교적 체험의 공간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Santa Maria del Popolo)에 있는 교황청 재무장관 티베리오 체라시(Tiberio Cerasi)의 장례 예배실 체라시 채플의 좌우 벽에 들어간 카라바지오의 [십자가에 못 박힌 성 베드로]와 [성 바울의 회심]은 이전의 종교화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양식을 보여주는 그의 최고 걸작들이다.
[성 바울의 회심] 1601년
캔버스에 유채, 230×175cm, 체라시 채플,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로마
그 중 [성 바울의 회심 Conversion of Saint Paul]은 기독교인을 박해하던 바리새인 사울이 기독교인 바울로 개종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을 주제로 삼았다. 기독교인들을 잡으러 다메섹(다마스커스)으로 가던 사울은 갑자기 하늘에서 비치는 환한 빛에 땅에 엎어져, ‘나를 왜 박해하느냐’는 예수의 음성을 듣고 사흘 동안 눈이 멀었다가 시력을 회복한 후기독교의 전파자가 된다. 같은 주제를 다루었던 이전의 작품들과 달리 이 작품에는 번잡한 조연이나, 구름 타고 내려오는 천사와 같은 초자연적인 요소가 없다. 간결하게 핵심만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는 다른 어떤 작품과도 다른 집중된 힘이 느껴진다.
그림의 배경은 실내인지 야외인지 구별이 잘 안 될 정도로 단순하다. 보이는 것은 화면 밖으로 밀려 나올 듯 전경에 바짝 배치된 주인공 즉 땅에 누워 눈을 감고 허공에 손을 내뻗은 사울과 앞발을 들고 아직도 입에 거품을 물고 있는 놀란 말, 그 말을 진정시키려 하는 맨발의 늙은 마부뿐이다. 이들에게 왼쪽 위에서 빛이 내려와 비춘다. 이 빛 역시 제단 위 창문이 있는 쪽에서 비치는 것처럼 보이는 자연의 빛이면서, 사울에게 예수의 말을 전달하는 신성한 빛이다.
카라바지오는 성서의 이야기를 문자대로 화폭에 옮겨 그리지 않고 성서에 소개된 초월적인 경험을, 그것을 체험한 개인의 감정을 단순하고 적나라한 연극의 절정 장면처럼 제시하여 관람자가 이를 생생하게 목격하고 강렬하게 느낄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은 신도들의 눈과 감정에 호소하는 대중적인 예술로 신도들을 교육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에 맞서 가톨릭 신앙을 지키려 했던 가톨릭 반종교개혁의 새로운 에너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제단으로 내려오는 예수의 몸
[그리스도의 매장 Entombment]은 발리첼라의 산타 마리아(Santa Maria in Vallicella, 현재의 치에사 누오바 Chiesa Nuova) 교회의 비트리체 채플(Vittrice Chapel)의 중앙 제단화로 그려졌다. (지금은 원작이 미술관으로 옮겨져 있고 그 자리에는 복제화가 걸려 있다.) 카라바지오 작품 중에서 가장 전통적인 구성을 따른 이 작품은 당대에 성직자들로부터 그의 최고 걸작이라는 칭송을 받았고 그에게 적대적이었던 비평가나 화가들로부터도 찬사를 받았다. 루벤스도 이를 보고 유명한 모사화를 남겼다.
화면에는 예수의 시신을 관 속에 눕히고 있는 요한과 니고데모, 그 뒤에 선 성모 마리아와 다른 두 마리아가 대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니고데모의 거친 용모에서 잘 나타나듯 서민적인 모델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나 빛과 어둠을 강렬하게 대조시킨 것은 카라바지오 양식의 특징이다. 그의 장기 중 하나인 관람자를 화면 안의 사건에 끌어들이는 구성도 이 작품에서 특별한 빛을 발하고 있다.
예수의 몸이 눕히게 될 화면 앞쪽 공간에는 사제가 성례전을 집행하는 제단이 있다. 이 채플의 예배, 특히 성찬에 참석한 신도는 예배 중에 예수의 몸이 물리적으로 임재하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로써 이 그림은 프로테스탄트가 거부한 가톨릭의 핵심 교리 중 하나로 성찬이 예수의 살과 피로 변모된다는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을 신도들에게 추상적인 설교 없이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는 도구가 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매장] 1602~1604년경
캔버스에 유채, 300×203cm, 바티칸 미술관, 로마
너무나도 인간적인 성모의 죽음
카라바지오의 종교화는 주제와 양식의 조화(decorum)를 문제 삼는 주문자에게 거부당해서 다시 그려진 일이 몇 번 있다. 이 때문에 그는 ‘기존 질서와 불화하고, 당대인들에게 이해받지 못한,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 이미지를 갖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 사실 그의 그림이 가진 장점은 당대의 주문자나 대중 모두에게 잘 파악되어 인기를 끌었고, 그의 작품이 가진 특징은 그 시대의 정서 특히 가톨릭의 주된 관심에 부합하는 측면도 있었다. 그의 미술 양식은 종교를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가톨릭이 요구했던 반종교개혁의 시대 정신을 담아낸 것이다. 거부된 몇몇 작품의 경우도 곧바로 다른 소장가에게 높은 가격으로 팔려나갔다. 그래도 가장 큰 물의를 일으킨 작품을 찾자면 [성모의 죽음 Death of the Virgin]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성모의 죽음] 1601~1603년경
캔버스에 유채, 369×245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화면에는 붉은 휘장이 쳐진 실내에 눕혀진 성모의 시신, 그를 둘러 서 슬퍼하는 예수의 제자들, 그 앞에 앉아서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가 보인다. 복음서 외경에 따르면 성모는 죄가 없기 때문에 고통 없이 숨을 거두었고 그후 3일 동안 잠을 자듯 평화롭게 누워있다가 승천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성모의 죽음 주제 그림은 ‘잠’이라는 뜻의 ‘도르미션(Dormiton)’이라고 불린다.
이 작품은 본래 가르멜 수도회의 교회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Santa Maria della Scala)의 체루비니 채플(Cherubini Chapel) 제단화로 그려져 설치까지 되었지만 곧 철거되었다. 철거된 이유에 대해 기록자마다 다른 설명을 하고 있는데, 그 중 성모가 맨다리를 드러낸 단정치 않은 모습이라는 설, 모델이 화가의 애인이었던 매춘부 혹은 물에 빠져 죽은 창녀였다는 설 등이 있다. 요는 ‘여인 중에 가장 복된’ 마리아의 죽음을 치장하는 것이 전혀 없었다는 것, 성자의 죽음이 평범한 사람의 죽음과 너무도 닮았다는 사실이었다. 마리아를 신앙의 모델로 삼고 있던 가르멜 수도회로서는 모델이 창녀라는 말까지 나오는 작품을 제단에 두고 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거부당한 다른 작품들처럼 이 그림도 곧 다른 주인을 찾았다. 당시 로마에 체류 중이던 루벤스가 자신의 후원자인 만토바 공작에게 구입을 권유했지만 결국 작품은 찰스 1세의 손에 들어가 영국으로 갔고 후에 루이 14세에게 매각되어 현재 루브르에 있다.
이 작품 제작을 전후한 시기에 카라바지오는 특히 많은 범죄 사건들을 일으켰다. 그의 작업 속도는 빠른 편이었지만 꾸준히 작업하지 않아 작품 수는 많지 않다. 보통 보름쯤 작업을 하면 한두 달은 칼을 차고 하인과 함께 테니스 경기장 등을 다니며 싸움이나 논쟁에 끼어들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그러다가 1606년 5월에는 내기 테니스 경기를 하다가 싸움이 나 상대방을 칼로 찔러 죽이고 본인도 큰 부상을 입게 된다. 그는 나폴리로 도주했다가 1607년에 말타(Malta)섬으로 갔다.
기사의 십자가를 달아 준 초상화
범죄를 저지른 도망자 처지였지만 카라바지오는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았고 그에게서 그림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 줄을 이어, 그는 머문 곳마다 그림과 추종자들을 남겼다. 나폴리를 떠난 그가 도착한 말타는 로마로 압송되던 사도 바울의 배가 난파했다가 구조된 곳으로 성서에 등장하는 유서 깊은 섬이다. 이 섬은 십자군 시대 이래 남성적, 군사적 문화가 지배한 기사들의 섬으로도 유명하다. 1565년에는 120명의 기사가 오스만 투르크에게 죽음을 당해 순교 영웅의 섬이 되었다. 카라바지오는 이곳에서 기사가 되어 ‘말타의 십자가’를 받기를 원했다. 본래 귀족만이 기사가 될 수 있었지만 특별한 공헌이 있을 경우 귀족이 아니어도 작위를 받을 수 있었다. 기사 작위가 살인죄에 대한 교황의 사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시동과 함께 있는 알로프 드 위냐쿠르] 1607~1608년경
캔버스에 유채, 194×134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시동과 함께 있는 알로프 드 위냐쿠르 Alof de Wignacourt, with a Page]는 카라바지오를 말타의 기사가 되게 한 작품이다. 모델인 위냐쿠르는 프랑스 출신의 용병 대장으로 말타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그림 속에서 갑옷을 입은 그는 친절하면서도 남자다운 표정으로 지휘관의 곤봉을 들고 직무에 어울리게 먼 곳을 주시하는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옆에는 헬멧과 외투를 들고 기사단의 십자가를 단 시동이 서 있다. 기사를 시동과 함께 등장시키는 초상화는 베네치아나 롬바르디아 회화에 선례가 있으나, 이 작품의 경우 시동의 인상이 주인공보다 강렬하여 독특한 분위기를 만드는 동시에 다시 한번 그의 성적 취향에 대한 다양한 추측을 낳았다.
이 작품 이후로 화가는 바탕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인물도 빠르고 간략한 붓질로 처리하는 기법을 사용한다. 이 작품은 1670년에 루이 14세에게 팔렸는데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18세기부터 보수 처리를 많이 했다. 20세기에는 카라바치오 진작인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루브르에 걸린 이 작품은 반아카데미적 성향을 가진 많은 화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들라크르와가 루브르에서 이 작품을 보고 시동을 베껴 그린 드로잉을 남겼고, 마네도 이 소년에게서 영감을 받아 [칼을 가진 소년]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카라바지오의 바로크는 이후에 등장하는 반고전주의, 반아카데미적 성향의 모든 미술 즉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등의 기본 바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 초상화에 만족한 위냐쿠르의 도움으로 1608년에 카라바지오는 말타의 기사가 되었으나 6개월도 안 되어 다른 기사와 싸움을 벌여 기사단에서 제명되고 투옥되었다. 그는 탈옥하여 시칠리아 섬으로 도망갔다. 이어 1609년에는 나폴리로 갔는데 거기서 보복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공격을 받아 심하게 다쳤다. 이후 배를 타고 로마로 향하다 배가 정박한 곳에서 다른 사람으로 오인되어 이틀간 투옥되었고, 감옥에서 나와 걸어서 로마로가다가 포르토 에르콜레(Porto Ercole)에서 열병에 걸려 사망했다. 시신은 공동묘지에 묘비도 없이 묻혀 지금은 행방을 알 수가 없다. 이때가 1610년, 그의 나이 39살이었다.
분장한 자화상, 잔혹한 시대의 유혈낭자한 종교화
카라바지오는 잔혹한 장면 특히 참수 장면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페르세우스가 목을 자른 메두사,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살로메의 청에 의해 목이 잘린 세례 요한, 골리앗의 머리를 벤 다윗 등 목이 잘리는 것을 묘사할 수 있는 주제는 모두 한 번 이상 다루었고 매 작품에서 특유의 사실적 묘사로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잔인한 광경을 연출했다. 이단자로 몰린 사람이 화형 당하고, 흉악범의 목이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잘리고, 잔인하게 죽은 순교자의 이미지가 즐겨 그려지던 병적인 잔혹 취미가 만연한 시대의 대표 화가다운 모습이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1610년경
캔버스에 유채, 125×101cm, 보르게세 미술관, 로마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은 나폴리에서 제작된,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추정되는 그림이다. 말년에 도망 다니면서 제작한 많은 작품들처럼 이 작품의 화면도 어둡고 붓질은 속도감 있고 거칠다. 이전에 그렸던 같은 주제의 그림과 다른 점은 이런 양식만이 아니다. 승리자 다윗의 슬픈 듯 어두운 표정은 선례도 없고 성서 텍스트로도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다. 성서에 의하면 다윗은 선한 승리자이고 골리앗은 악한 패배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분위기는 다윗의 처형에 골리앗이 희생된 듯한 모습이다. 다윗은 골리앗의 잘린 머리를 보며 모두에게 닥칠 죽음(memento mori)을 명상하고 있는 것일까.
17세기부터 이 작품은 화가의 자전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해석되었다. 목이 잘린 골리앗의 얼굴이 화가의 자화상이라는 것이다. (그가 자신을 참수의 희생자로 묘사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참수되고 있는 세례 요한, 방패 위에 그려진 [메두사 Medusa]의 모델로도 자신의 얼굴을 사용한 적이 있다. 그의 메두사는 목이 끊어졌으나 아직은 살아있고, 남을 두렵게 하는 동시에 자신도 공포에 질린 모습이다.) 골리앗의 목을 든 다윗의 모델은 그의 조수이자 동성애 상대라는 설과 화가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일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는 자기 자신에 의해 혹은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것으로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
[메두사] 1598년경
나무 방패에 유채, 지름 55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화가는 평생 자기 가정이나 집을 가져보지 못하고 떠돌면서, 각종 폭력 사건으로 인한 불안감과 피해의식 때문에 잘 때도 신발을 신고 자는 극도로 긴장된 생활을 했다. 자신이 가한 폭력과 받은 폭력에 대한 기억, 살인으로 인한 죄책감과 도망자로서의 불안감에 늘 시달렸던 그는 스스로에게 죽음이라는 벌을 내려서라도 안정과 휴식을 얻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
발행일 : 2010. 08. 12.
글 김진희 미술평론가
연세대학교 신학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1999년부터 전시기획과 문화예술행정 분야에서 일하면서, 관람자의 눈에 근거한 미술 비평을 시도해 왔다. 미술, 역사, 제3섹터에서의 활동에 관심이 있고 이들의 접점을 찾는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