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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본 글 집 제목을 진시황 시대 탐구라고 붙였지만 4박 5일간 서안을 다녀온 기행을 전개 하면서 담은 글이기에' 4박 5일 시안을 다녀와서' 라고 부제를 붙여도 무방하다 싶다. 아니라면 시경을 읊조리던 주나라 시대 이후 춘추전국시대를 기점으로 춘추전국의 종결자로서 중국을 최초 제패 통일한 秦나라를 위시한 진시황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기술하였는 바 ' 3천년 중국이야기' 라는 부제를 붙여도 별 탈은 없지 싶다. 왜 이 글 집을 쓰기로 한 것일까. 한마디로 배우고 제대로 알고 싶어서였다. 워낙 춘추시대의 사상이나 문필이 강인해 한자권에서는 이를 도외시하기는 실로 어렵다. 정치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흔연한 것이 그 시대의 역사를 빗대어 매서운 눈초리로 현세를 꿰뚫는 시사전개가 아닌가. 반면교사로서는 그만한 학술적 가치는 없다. 분명 그들의 중원을 알면 중국이 보이고 더하여 동양적 의식의 일면을 손쉽게 접할 수 있다싶다.
물론 같은 유교권으로서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많이 미쳤기에 당연히 우리의 고전 속에서도 그 의식이 팽배한 것은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 그들과는 우리는 태생부터서 다르다. 진시황의 용마용갱을 보면서 나는 고구려를 더 깊이 생각하였다. 그보다 더 넓은 영역과 권력을 누린 당나라가 왜 그토록 그 멀고 먼 거리에 포진한 고구려를 멸하려 하였던 것인가. 강인하였기 때문이고 두려웠기 때문이다. 진나라가 저 정도라면 당에 버금간 고구려가 어느 정도 가늠이 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진나라를 들여다보며 개마무사의 나라 우리 고구려를 나는 떠올렸다. 아무리 고대국가사가 상상이 반이라지만 분명 저돌적인 용맹함을 말하는 고구려에는 뭔가 다른 비책이 있었다. 나는 이를 말하고 싶었다.
아무튼 이 글 집의 핵심은 춘추전국 시대 각축을 벌이던 국가의 흥망성쇠 그리고 변방에 지나지 않은 秦나라의 부국강병과 진시황에 대해서다. 그런 면에서 진秦나라와 진晉나라를 대비하면 자연스레 秦나라의 진면을 바로 알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진秦나라와 진晉나라는 무엇이 다른 걸까. 이 둘의 양상이 우리에게 전하는 바는 실로 크다.
천문이나 제사에 관한 일들을 기록해 놓은 『 사기 史記 』「 천관서 天官書 」 에서는 음양 오행의 이치에 따라 그 두나라는 전쟁을 좋아하는 나라라고 적고 있다. 나는 그 이유에 대해 그 글 속에 있듯이‘중국의 서북쪽은 호 胡 , 맥 貉 , 월지 月氏 등 모피 옷을 입고 활로 사냥하는 민족들로서 음에 속하는데’ 에 나오는 나라가 북에 버티고 있어 어쩔 수없이 전쟁을 해야 했고 또 강인했다고 본다. 아무튼 그 두나라는 용호상박으로 상호 막강했다. 우선 秦을 살펴보자. 진시황의 터전 진나라는 산시(陝西)성에 위치한다. 이 산시(陝西)성의 약칭은 ‘땅 이름 섬(陕, 번체는 陝)’자다. ‘陜’자는 ‘언덕과 언덕(阜/阝) 사이에 끼어(夾) 있는 골짜기가 좁다’는 뜻으로 ‘좁다/골짜기 협’으로 쓰기도 한다. 지도를 살펴보면 그 뜻대로 산시성이 골짜기 사이에 끼인 분지임을 알 수 있다. 허난성이 황토평원이라면 산시성은 황토고원이다. 산시의 동쪽으로는 진진대협곡(秦晉大峽谷), 남쪽으로는 북중국과 남중국을 가르는 진령산맥이 펼쳐진다. 그 사이에 놓인 관중평원(關中平原)은 3만9000㎢(한국의 약 39%)의 면적에 황하 최대의 지류인 위수(渭水)가 흘러 농사가 잘된다.
유목민족인 북적(北狄)과 서융(西戎)으로부터는 중요 전략자원인 말을 얻을 수 있다. 동쪽의 함곡관만 막으면 산시는 철벽의 요새다. 약할 때는 굳게 방어하고 관중에서 착실히 힘을 키우다가, 강할 때는 불시에 밖으로 치고 나왔다. 그 시대 최대의 무기라 할 말의 집산지, 이는 팽창 하기에 충분한 秦의 자원이었음이다. 산시에서 팽팽하게 압축된 공기는 함곡관 밖으로 빠져나가자마자 태풍이 되어 중원을 삼키고 대륙을 휩쓸었다. 주·진·한·당은 산시에서 일어나 천하를 호령했다. 18로 제후군에게 몰린 동탁이 재기한 곳도, 8개국 연합군을 피해 서태후가 달아난 곳도 산시다. 일찌기 중원의 상나라는 강한 국력과 높은 문화 수준을 갖췄지만 시대의 한계 역시 컸다.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노예를 확보했고, 상제(上帝)를 기쁘게 하기 위해 숱한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 그 결과 주위를 온통 적으로 만들었다. 주나라는 주변 세력을 규합하고 목야대전 한 판의 싸움으로 강대한 상나라를 물리친다.
주는 ‘덕이 있는 자만이 하늘의 보살핌을 받는다’는 천명(天命) 사상을 내세우고 무력 지배보다는 덕치와 교화를 중요시했다. 상은 길흉을 점치는 갑골점(甲骨占)을 애용했고 사람을 죽여서까지 하늘을 기쁘게 하려 했지만, 주는 64가지 상황 속에서 최선의 길을 찾는 주역(周易)을 썼고, “조상을 믿지 말고 스스로의 덕을 닦으라”는 노래를 시경에 남겼다. 이 같은 합리성, 인본주의, 덕치교화의 사상은 공자의 유가에 의해 더욱 발전한다. 이처럼 상나라로부터 주나라의 전이는 단순한 왕조교체를 넘어선 인문학 적 혁명이다. 앞서 말햇지만 중화사상이나 유가사상은 이미 그 시대 토착화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왕·주공 등 사려 깊은 창립멤버가 세상을 뜨자, 못난 후손들은 소모적인 원정전쟁으로 국력을 낭비했고 그로 중원이 약해지자 변방이 나래를 폈다. 산시·간수 일대의 융(戎)은 이름 그대로 ‘갑옷(甲)과 창(戈)’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전사였다. 유왕 때 융족이 주의 수도 호경(오늘의 시안)을 함락해 주가 낙양으로 천도하자, 서주(西周) 시대가 끝나고 동주(東周) 시대가 시작됐다. 동주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지방정권이 난립한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했다.
융족이라고 다 같은 융족은 아니다. 주에 협력적이던 융족 일파는 목축 전문가로 인정받아 지역 정권인 진을 세웠다. 주가 망할 때 진의 지도자는 왕실을 호위한 공로로 진나라 최초의 제후인 진양공(秦襄公)으로 봉해져 융족으로부터 주의 서쪽을 지키는 울타리가 됐다. 일찍부터 찬란한 발전을 이룬 중원은 진을 오랑캐로 여겨 ‘진융(秦戎)’이라 불렀다. 그러나 진나라는 역설적으로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과감하게 혁신할 수 있었고, 중원에서 잉여 취급받던 인재들을 재상으로 삼았다. 25명의 진나라 재상 중 외국 출신이 17명, 평민 출신이 9명이었다. 상앙의 변법개혁, 장의의 연횡책, 범수의 원교근공(遠交近攻)에 진시황의 웅대한 비전과 추진력이 더해져 전국칠웅 중 가장 낙후국이던 秦은 6국을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秦의 천하통일은 중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다. 황하 중류에 국한된 중국은 진부터 비로소 광활한 대륙 전역에 세력이 미쳤다. 엄청난 변화를 가혹하게 밀어붙인 탓에 진 자체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이때 진이 창조한 질서는 중국 역대 왕조의 근간이 됐다. 사마천은 말한다. “배운 자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 것에만 얽매여 진의 통치기간이 짧은 것만 보고 진을 조롱할 줄만 알았지 진지하게 그 처음과 끝을 살피지도 않으니, 이야말로 귀로 음식을 먹으려는 격이다.”
그렇다면 晉은 어떠한가. 춘추시대 서쪽 변방인 진(秦)나라보다 더 북쪽에 치우쳐 자리를 잡은 또 다른 진(晉)나라. 이들 또한 기마민족으로 용맹하였다. 姬는 중국 고대의 성으로, 주나라의 국성인데 당시는 성과 씨의 개념이 달랐다, 성은 본가를 대표하는 호칭, 씨는 분가를 대표하는 호칭이다. 주나라 외에도 동성 제후국인 오나라, 노나라, 연나라, 위(衞)나라, 진(晉)나라 등의 군주들은 희성과 함께 자기 지역명을 씨로 했다. 한마디로 晉나라는 제후국이지만 뿌리가 주나라와 같고 강했다. 당연 秦나라하고는 성분이 달랐다고 볼 수있다. 그러니까 진(晉)나라는 주(周)성왕 치세에 분봉(分封)된 제후국으로서, 그 첫 봉군(封君)은 당숙우(唐叔虞)로 그는 주(周) 무왕의 아들이자 성왕의 아우이니 막강하다 할 수 있었다. 봉읍은 오늘날의 산서성 북조촌(北趙村) 부근에 있는데, 이곳은 하(夏)의 고도(古都)가 있는 곳이기도 하니 위치도 하나라 고도답게 알차고 무엇보다도 뼈대가 든든했다. 그들은 봉지(封地)가 지역적으로 북방의 융적과 가까웠고, 봉읍내에 하(夏)왕조의 유민이 있어 그들 문화와의 교류, 융합에 유리 했고 선전화했다고 볼 수도 있다.
기원전 645년 진(晉)나라는 최초로 옛 병역제를 야인(野人)으로 군대를 편성하여 군사력을 신속하게 증강 시켰으며, 군대의 구성원이 귀족 위주 에서 야인 혹은 평민으로 골간으로 하는 군사를 징병하여, 변화의 선두주자가 되기도 하고 기원전 636년:진(晉)문공(文公)중이(重耳)가 망명 생활을 끝내고,귀국하여 즉위하면서 진(晉)나라의 패업을 창업하고 이후 진(晉) 문공을 후백에 봉(封)함에 따라 진문공이 패권을 잡았다. 전국시대의 개막은 바로 그 무렵 진(晉)나라로부터 시작되었다. 진문공(晉文公;서기전 697-628년) 희중이(姬重耳)가 주(周)왕실을 보호하고 오랑캐를 무찌른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의 깃발을 들고 초성왕(楚成王)의 군대를 성복(城복)에서 무찔러 후백(侯伯;패자)의 자리에 추대된 해는 서기전 633년의 일이다. 이때에 진(晉)나라에는 진문공을 도와 공을 세운 고(孤), 난(欒), 원(原), 지(知)씨등 십여명의 경대부들이 점차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시대의 변화와 가문의 영고성쇠에 따라서 어느 가문은 흥하고 어느 가문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춘추말기에 접어들면서 다른 세력은 소멸하고 지(智), 범(范), 중행(中行), 한(韓), 위(魏), 조(趙)씨만이 남게 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여섯 가문을 육경(六卿)이라고 불렀다. 진(晉)나라는 이 여섯의 장군 가문이 실질적인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여, 진정공(晉定公;서기전 511-475년), 진출공(晉出公;서기전 474-452년)은 모두 꼭두각시 왕에 불과하였다. 서기전 455년, 진출공이 재위하고 있던 때에 지씨의 세력은 한, 위, 조의 세력과 연합하여 사시로이 범씨와 중행가를 멸하고 그들의 재산과 토지를 각각 나누어 가졌다. 네 가문의 세력이 정변을 통하여 진(晉)나라의 권력을 실질적으로 장악하자, 진출공은 네 가문의 꼭두각시를 거부하고 은밀하게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네 가문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들의 수장인 지백(智伯), 조양자(趙襄子), 한강자(韓康子), 위환자(魏桓子)는 연합하여 진출공을 공격하였다. 세가 불리해진 진출공은 제나라로 피신하다가 도중에 죽고 말았다. 이에 네 가문에서는 백성들과 이웃 제후국의 눈치를 고려하여 경공(敬公;서기전 451-434년)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봉책에 불과하였고 서로들 진(晉)나라의 권력을 장악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이중에서 특히 야심이 대단한 지백이 가장 노골적으로 진공(晉公;이때 제후는 공이라 불리움)의 자리를 탐내었다.이후 그들은 땅따먹기 싸움을 죽어라고 벌인다. 결국 물리고 물리는 암투 속에 조나라의 조양자는 지백의 목을 베고 천지신명께 승리를 고한 다음에, 한, 위 양가의 군사와 함께 지가의 봉지로 쳐들어가 그들의 세력을 뿌리채 뽑고 지가의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어 가졌다. 이로써 한, 위, 조가의 세력이 진(晉)의 권력을 삼등분하였다. 명분상으로는 비록 경대부였지이 그들을 상대한 만 이미 유명무실한 진(晉)나라의 공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미 제후나 다름이 없었다. 이때가 서기전 453년, 주정왕 16년으로 역사에서는 한, 위, 조의 세 가문이 진(晉)을 삼분했다는 삼가분진(三家分晉)이라고 불렀고 후대의 사람들은 기술한 년대가 비슷한 공자의 「춘추」에 빗대어 주평양의 낙양 천도로부터 한, 위, 조 3가가 진을 삼분한 때까지의 시기를 춘추시대라고 하였으며, 그 이후부터 진나라가 주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킨 서기전 256년까지의 시대를 「전국책(戰國策)」의 이름을 빌어 전국시대라고 부른 것이다.
秦이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했다고 한다면 晉은 거창했으나 사분오열로 자멸의 길을 걷고 만 셈이다. 한쪽은 부국강병으로 또 다른 쪽은 사분오열로 쪼개져 진나라에 하나씩 하나씩 먹히고 만다. 만약 그들이 분열이 없었다면 형세는 예측하기가 어려웠고 진시황도 등장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각자도생으로 秦이 그들을 상대한 전적을 참조해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군주가 어떠해야 하는지에대해서 대표적으로 손 꼽는 인물이 당 태종이다. 정관의 치’란 당 태종의 현명한 치세(627~649)에 바치는 역사의 찬사이다. 태종은 우리 민족에게는 고구려 정벌을 시도한 악역으로 다가온다. 그는 또한 형제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패륜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과오를 교훈 삼아 치세에 공을 들여 중국뿐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손꼽히는 위대한 지도자로 기록된다. 백성을 섬긴 위민정신, 간언(諫言)을 새겨들은 경청의 자세, 살생부를 뿌리치고 정적을 등용한 통합의 정치 등등 그의 리더십은 후세의 거울로 삼을 대목이 많다.
당 태종의 어진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다. 어느날 감옥을 시찰한 그는 사형수들을 가엾게 여겨 집으로 돌려보내 준 뒤, 내년 가을에 돌아와 사형 집행에 응하라고 명했다. 당시 전국의 사형수는 모두 390명인데, 이듬해 가을이 되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돌아왔다고 한다. 훗날 백거이는 ‘칠덕무(七德舞)’라는 글에서 이 일을 높이 찬양한다.훌륭한 군주 뒤에는 훌륭한 신하가 있는 법이다. 태종을 도운 여러 명신들 중에서 간의대부(諫義大夫) 위징(魏徵)은 첫손가락에 꼽힌다. 황제가 노해도 그는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잘못을 지적했다. 위징이 죽자 태종은 “옛 일을 거울로 삼으면 흥망을 알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과오를 알 수 있다. 위징이 갔으니 거울 하나를 잃었다”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다.” 드라마 <이산>의 대사로 소개돼 인기를 끌었던 말이다. 물은 배를 띄우지만 엎어버리기도 한다. 민심을 두려워하라는 경구다. 원래 순자의 말인데 당 태종의 정치를 정리한 <정관정요(貞觀政要)>의 첫머리에도 나온다. 정관은 태종의 연호로, 백성의 소리에 늘 귀를 기울였던 그는 성당(盛唐)시대를 연 명군으로 꼽힌다. 이는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틀림 없는 진리가 아닐까. 분명 군주는 배고 백성은 물이다. 진시황을 보자면 더더욱 그 말이 뚜렷이 각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