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라
백석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모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 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하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디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 만한 알에서 가제 끼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적은 새끼 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어나 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히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여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어휘풀이]
-수라 : 아수라(阿修羅). 불교에서 싸우기 좋아하는 귀신
-어니젠가 : 어느샌가
-싹기도 : 식기도
-가제 : 마악, 방금
[작품해설]
이 시는 가족 공동체의 안락함을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방바닥에 떨어진 거미 일가(一家)를 의인화하여 표현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어느 추운 밤 방바닥에 떨어진 새끼 거미 한 마리를 무심결에 쓸어 담아서 방 밖에 내다 버린다. 그런데 어느 샌가 새끼 거미가 쓸려 나간 자리에 어미 거미가 와 있다. 화자는 그 거미를 다시 쓸어 내 버리고 추운 밖이지만 새끼가 있는 곳이니까 잘 살라고 위로한다. 그러나 어미 거미를 내 보내자 막 알에서 깨어난 듯한 무척 적은 새끼 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가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이 새끼 거미는 너무 작아서 손등에도 기어 오르지도 못할 정도여서 화자는 그것이 자신을 무서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서러워한다. 화자는 부드러운 종이로 새끼 거미를 받아 밖으로 버리며 ‘엄마와 누나나 형’을 만나 함께 살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시에서는 「여우난 곬족」·「모닥불」에서 보여 주었던 시인의 공동체 의식에 대한 지향이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다른 작품드에서는 객관적 입장에서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풍경의 묘사가 중심인데 비해 이 시는 시적 화자의 목소리를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화자는 자신 때문에 해체된 거미의 가족공동체의 비극을 서러워하며 회복을 모색하지만 현실적인 방법은 없다. 다만 그들이 다시 한가족으로 모두 만나기만을 기대하지만 자신의 잘못에 대한 자책감이 훨씬 크다. 화자는 그러한 자신이 거처하고 있는 방을 귀신들이 싸우는 ‘아수라’로 인식하고, 오히려 추운 밤의 방 밖의 세계를 공동체의 공간으로 간주하고자 한다. 그 만큼 현실의 절망감은 크다. 그러한 시적 화자의 안타까움은 각 행의 ‘차디찬 밤이다’ · ‘짜릿한다’ · ‘서러워한다’ · ‘서럽게 한다’ · ‘슬퍼한다’ 등의 감상적(感傷的) 어휘의 결말을 통해 훨씬 실감 있게 다가온다.
[작가소개]
백석(白石)
본명 : 백기행(白夔行)
1912년 평안북도 정주 출생
1929년 오산보고 졸업, 동경 아오야마(靑山)학원에서 영문학 공부
1934년 귀국 후 조선일보사 입사
1935년 시 「정주성(定州城)」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며 등단.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
1942년 만주의 안동에서 세관 업무에 종사
1945년 해방 후 북한에서 문학 활동
1995년 사망
시집 : 『사슴』(1936), 『백석시전집』(1987), 『가즈랑집 할머니』(1988), 『흰 바람벽이 있어』(1989), 『멧새소리』(1991), 『내가 생각하는 것은』(1995),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1997), 『집게네 네 형제』(1997), 『백석전집』(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