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조선초의 문신이다. 고려 우왕 때인 1375년 간관으로 있으면서 권신 이인임을 탄핵하였다. 조선 때는 여러 도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본관은 경산(慶山)이고,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고려 말기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1375(우왕 1) 간관으로 있을 때 우헌납 이첨(李詹)과 함께 친원정책을 펴는 권신 이인임(李仁任)·지윤(池奫)을 죄목을 열거하여 목벨 것을 상소하다가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좌천되었다.
조선 건국 후인 1393년(태조 2) 간의대부에 제수되었으며, 이후로 간관으로서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하기 위한 방안을 여러 차례 상소하였다. 1396년(태조 5) 개국공신 정희계(鄭熙啓)의 시호문제에 연루되어 파직되었으나 곧 사면되었다. 1397년에는 병조전서(兵曹典書)로서 서북면선위사(西北面宣慰使)가 되어 여러 고을의 성 쌓을 만한 곳을 살피고 돌아와 보고하였다.
1398년 풍해도도관찰출척사(豊海道都觀察黜陟使)가 되어 부임하였고, 1400년(정종 2) 경상도도관찰출척사가 되어 왕에게 궁시(弓矢)와 검갑(劍甲)을 받았다. 1404년(태종 4) 승녕부 윤(承寧府尹)에 임명되고, 1405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거쳐 예조판서에 올랐다. 이듬해 경기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가 되어 선정을 베풀어 왕에게 칭찬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