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교회사연구소 심포지엄 '노기남 대주교와 한국 천주교회' 중계
조선 천주교인으로서 정체성 강조
- 한국인 첫 주교이며 서울대교구장인 노기남(바오로)대주교. 한국 가톨릭 자립화와 토착화의 기틀을 다진 그는 '한국 천주교회 대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진은 1942년 주교품을 받은 후 직무실에서 주교 정장차림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노기남 주교.
15일 서울 명동대성당 꼬스트홀에선 시종일관 팽팽한 긴장 속에 한 학술 심포지엄이 진행됐다. 연구자들은 혹 말 실수를 하지 않을까 여느 때보다 조심스레 논문을 발표했고, 청중들 역시 한 문장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숨죽이며 귀를 세웠다.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김성태 신부)가 '노기남 대주교와 한국 천주교회'란 주제로 연 심포지엄이었다. 노기남(바오로) 대주교는 한국인 첫 주교로 황국신민화 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일제말 서울교구장이었다. 이같은 이유로 노 대주교는 지난해 민족문제연구소와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로부터 '친일 행위자'로 규정되기도 했다.
이날 심포지엄은 역사 해석의 다양성을 전제조건으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식으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역사학계의 상황 논리를 극복하는 거시적 관점에서 진행됐다. 그래서 이날 심포지엄 연구 발표자들은 '민족'과 '교회'라는 비대칭 관점에서 노기남 대주교라는 시대적 인물에 대해 균형잡힌 성찰과 평가를 내리려 노력했다. 동시에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 상황에서 당시 노 대주교의 여러 활동 사실을 객관적으로 규명해 나가야 한다는 과제를 던져주었다.
종합토론에서도 토론자들은 '친일'은 정치적 관점이지 학문적 개념 규정이 아니라면서 "역사 해석에는 절제와 조심성이 있어야 하며 당시 실상을 균형잡힌 시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교회 내에서뿐 아니라 사회적 관심을 모았던 이번 심포지엄 발표 논문들과 토론을 정리했다.
노기남 신부의 경성대목구장 착좌에 대한 연구
노기남(바오로) 신부는 교황 비오 12세에게서 1942년 11월 10일자로 콜바사 명의 주교이자, 경성대목구(서울교구) 교황대리 주교로 임명됐다. 이후 그는 1942년 12월 20일 종현(명동)대성당에서 주교 성성식을 거행했다.
'노기남 신부의 경성대목구장 착좌에 대한 연구'를 주제로 발표한 양인성(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은 노 주교의 경성대목구장 착좌는 선임 경성대목구장 라리보 주교의 판단과 단호한 결정에 따라 갑작스레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양 연구원은 "노기남 신부의 주교 임명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나 교구 참사회의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고 당시 정세, 즉 일제 방침이 사회ㆍ종교 각 단체장을 일본인으로 교체하는 것이었던 만큼 경성대목구장을 일본인 신부로 대치하려는 계획이 기정사실임을 판단한 라리보 주교의 단독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윤식(부산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는 "노기남 신부의 주교 임명과 경성대목구장 착좌는 현지인 주교가 이끄는 가톨릭 선교지 설립을 통해 장차 지역 교회 설립의 초석을 놓고자 한 교황청의 선교 정책 속에서 이뤄진 것이라는 사실 또한 간과할 수 없다"고 반론했다.
아울러 "경성대목구장 임명은 전적으로 교황청 권한에 속한 사안이므로, 라리보 주교 개인 차원에서의 결정 때문만이 아니라 당시 교황청이 실현하고자 애쓴 선교 정책 속에서, 포교성성과 일본 동경 주재 교황 사절 사이의 공조 속에서 이뤄진 것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고 부연했다.
식민지시대 말기 조선 천주교회와 총독부의 종교 통제 - 노기남 주교의 대응을 중심으로
이장우(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박사는 '식민지 시대 말기 조선 천주교회와 총독부의 종교 통제'란 주제로 일제 식민지 전시통제체제 아래에서 조선 천주교회가 처해 있던 상황을 당시 천주교회 수장이었던 노기남 주교의 활동을 중심으로 정리 발표했다.
이 박사는 "노기남 대주교는 한국사 전체 맥락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태어나 천주교회 사제로서, 지도자로서 활동했다"며 "노 주교는 자신이 얼마나 힘든 상황에서 교구장이 됐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조선 총독부 의도와 완전히 달랐음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노 대주교를 평가할 때 조선 총독부의 철저한 검열을 거쳐 작성되고 게재된, 즉 조선 총독부가 요구한 '공식 언어'를 사용해 작성된 글들만으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은 '비공식 자료'들과 대비시켜 이용해야 그 기록들의 이면에 감춰져 있는 당시 실상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이 박사는 말했다.
이 박사는 "노 주교는 조선 총독부 치하에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에 따라 조선 천주교회의 운명이 좌우될 수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기에 표면상으로 일본 정부와 조선 총독부 정책에 적극적으로 따를 것을 천명했으나 신자들에게 천주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항상 먼저 내세웠다"고 설명했다.
일례로 일제 간섭을 배제하고 신학교 특성에 맞게 자유로이 교육하기 위해 미인가 상태로 운영했던 용산신학교를 조선 총독부가 천주교를 통제하기 위해 폐교 조치를 내렸을 때 노 주교는 신학생들을 덕원 신학교로 보내고 대신학교 건물을 성모병원 분원으로 개원해 일본 군대에 징발되는 것을 막았다.
이처럼 노 주교는 조선 총독부 정책에 마냥 순응했던 것이 아니라 강압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천주교회 존속을 위해 최선을 다해 묘책을 짜내고, 차선책이라도 찾아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조선 천주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해 나가고자 했다.
이 박사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노용필(한국사학연구소) 교수는 "역사 사료 연구에서 행간을 읽는 지혜가 필요하다"며 "다만 글로 돼 있는 자료들을 눈으로 보더라도 현장에서 발언이 어떻게 느껴졌을지를 염두에 두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공감했다.
해방 이후 노기남 주교와 반공주의(1945~1953)
김수자(이화여대) 교수는 1945년부터 1953년까지 노기남 주교의 반공 활동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의 반공주의 성격과 한국 현대사에서 갖는 의미를 검토했다.
김 교수는 "노 주교의 해방 이후 반공 활동은 대체로 가톨릭 신자를 중심으로 순교 정신과 사상 강화 활동, 천주교회 내 반공단체 결성, 해방정국에서 반공활동을 전개시킨 단체에의 참여 등의 형태로 진행됐다"면서 "노 주교의 반공활동은 공산주의와 북한에 대해 타협 여지를 갖지 않고 무조건 박멸해야 한다는 일관된 태도를 보여 한반도 이념대립을 공고화하고 고착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반공주의에 입각한 노 주교의 현실참여와 종교 활동은 당시 분단을 극복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 해결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으며 한국사에서 천주교가 이념 전파자의 첨병역할을 담당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이에 대해 이현진(국민대) 교수는 당시 공산주의에 대한 보편교회의 가르침과 노기남 주교의 반공주의의 연관성과 차이점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면서 1940년대 후반 시기는 교회가 유물론과 반그리스도교 사상을 공언하는 신자들을 파문하던 시대였다고 부연했다.
이 교수는 "당시 세계적 흐름에서 교회 지도자들의 반공투쟁은 그리스도교의 사명처럼 인식됐다"면서 "노기남 주교의 반공주의 성격과 특징은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천주교회의 보편주의적 입장에서 평가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한국 현대사 속의 노기남 대주교
박태균(서울대) 교수는 "한국현대사에서 노기남 대주교에 대한 이해는 그 개인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위치와 역할을 보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 대주교에 대한 기록은 미비하다.
또 노 대주교와 연관된 사건들 대부분이 '소문'에 근거한 것이어서 부정확한 점이 없지 않다. 그래서 박 교수는 "다양한 통로를 통해 자료들을 축적하는 작업들이 계속 진행돼야 할 것이다"며 "최근 활발하게 진행되는 구술사 작업이 한국 천주교회에서도 지속되기 바란다"고 기대했다. [평화신문, 2010년 10월 24일, 리길재 기자]
‘노기남 대주교와 한국 천주교회’ 심포지엄
한국 근현대 역경의 시기에 교회 이끈 지도자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김성태 신부)는 15일 오후 1시 30분 서울 명동 꼬스트홀에서 2010년 심포지엄 ‘노기남 대주교와 한국 천주교회’를 열었다.
첫 한국인 교구장 노기남 대주교에 대한 네 가지 주제로 이뤄진 이번 심포지엄은 역동적인 한국교회사의 흐름 속에서 여러 가지 고민을 안고 살았을 노 대주교를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됐다.
경성대목구장 착좌에 대한 연구 - 양윤성(한국교회사연구소)
1942년, 노기남 신부는 경성대목구장 라리보 주교로부터 급히 상경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평양을 떠나 서울에 도착한 노 신부는 뜻밖의 전보를 전달받았다. 그것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온 것으로, 교황 비오 12세가 노 신부를 경성대목구장 서리에 임명한다는 내용이었다.
노 신부는 그해 1월 종현대성당에서 경성대목구장에 착좌했다. 12월 20일에는 주교 성성식을 가졌다.
이로써 노기남 주교는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된 이래, 한국인 최초의 경성대목구장이자 주교가 됐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제가 전시체제 하에서 종교통제를 강화해 나가자, 라리보 주교는 대응 방안에 대해 고심했다. 그는 후임 대목구장으로 노기남 신부를 추천하기로 하고, 이를 주일 교황 사절에게 알렸다.
그렇다면 그가 후임으로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 신부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첫째, 일본인 신부가 대목구장으로 부임하는 것은 파리외방전교회의 제1목적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 목적은 본방인 성직자를 양성하고 그들의 힘으로 교회 유지가 가능해지면, 교회의 운영을 맡긴다는 것이다.
둘째, 라리보 주교는 자신의 사임 이후 파리외방전교회가 처하게 될 상황도 고려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일제가 전시 체제 아래 종교통제를 강화하고 서양인 선교사들에 대한 압박을 가하는 것을 이미 목격했다.
셋째, 라리보 주교는 한국인 신부들과 신자들의 반발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일본인 신부가 대목구장으로 부임하였을 때 직면하게 될 한국인 신부들과 신자들의 반발을 고려해야 했다.
한편 라리보 주교의 사임과 노기남 신부의 대목구장 임명이 발표되자, 일제는 반발하며 즉각 조치를 취했다. 착좌식 직후,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정식 인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예수성심신학교의 폐교를 통보했다.
또 일제는 서양인 교구장이 재임하고 있는 대구대목구를 주목하고, 대목구장 교체와 관련하여 촉각을 곤두세웠다.
조선 교회와 총독부의 종교 통제 - 이장우(한국교회사연구소)
노기남 대주교는 한국사의 맥락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태어나 천주교회의 사제로서, 지도자로서 활동했다. 이 때문에 이 시기의 그에 대한 평가가 마냥 긍정적일 수는 없었다.
노 주교는 조선총독부의 황국신민화정책에 협조하는 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었지만, 교회를 유지 · 발전시키기 위해 ‘충량한 황국신민으로서 열심한 가톨릭 신자’가 아닌 ‘열심한 가톨릭 신자로서 충량한 황국신민’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첫 번째로 당한 어려움은 신학교 문제였다. 교황청에서 임명한 조선인 교구장을 일본인으로 바꾼다는 것은 총독부가 내세운 내선일체의 명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대신 그들은 미인가 상태로 있던 용산신학교를 폐쇄시키고자 했다.
이에 노 주교는 교구 평의회를 소집해 대책을 논의, 대신학교와 소신학교를 혜화동의 소신학교로 통합하기로 하고 학무국에 보고했다.
그는 다시 대신학교 학생들을 덕원신학교로 전학시키고, 대신학교 건물에는 성모병원의 분원을 개원하기로 결정했다.
노 주교가 두 번째로 당한 난관은 신사참배 문제였다. 교황청은 종교 의식이 아닌 국민의례이므로 신사참배를 해도 무방하다고 일본 주재 교황사절에게 지시한 바 있다.
노 주교가 지방순시를 떠날 때는 적어도 한 달 전 치안국에 일정을 보고해야 했고, 치안국은 해당 지방 경찰서에 연락했다. 때문에 그가 가는 곳에는 형사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또 신사를 참배하고, 경찰서장·군수 등을 예방한 다음 성당을 가야 했다. 신자들이 황국신민의 서사나 기미가요를 부르지 못하면 경찰관은 노 주교나 그곳 주임 신부를 문책했다.
조선 천주교회가 총독부의 정책을 어쩔 수 없이 동의하고 이행했던 것은 천주교회의 ‘발전을 위한 도움’을 기대해서가 아닌 천주교회의 ‘존속’과 ‘유지’를 위해 협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방 이후 노기남 주교와 반공주의 - 김수자(이화여자대학교)
해방 직후 미군정이나 이승만 정부와의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성장한 한국 천주교회는 6·25 전쟁기에 신자 수가 급속도로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교세 확장에 심혈을 기울인 대표적 인물 또한 노기남 주교였다.
현재까지 해방 이후부터 전쟁기까지의 노 주교의 활동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한국 천주교의 대부로서 한국 천주교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견해다.
두 번째는 해방 이후 적극적 ‘정치참여’로 인해 교회가 정치와 분리되지 못하고 종속적 관계를 만들었다고 보는 견해다.
1945년 한국은 해방을 맞이했다. 초기 정국 관망 자세는 미군의 진주와 함께 적극적 참여의 자세로 바뀌게 된다. 이것은 사회질서 회복을 위해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노 주교는 이승만과 김구와도 우호적 관계를 맺었다. 그는 1945년 이승만을 예방하고 환담을 나눴고, 이 자리에서 이승만 또한 윤을수 신부와는 독립협회에서 같이 활약했었다며 천주교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보였다. 이와 같이 해방정국 초기 노 주교는 미군정과 우익 정치 지도자들과 우호적 관계를 형성해 나갔다.
1948년 노 주교와 천주교회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적극 참여했다. 이것은 이승만과의 친밀한 관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50년에는 ‘신자여! 멸공에 총궐기하라’며 신자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던져 사상 강화를 강조했다.
노 주교의 반공 활동은 한반도의 이념대립의 공고화와 고착화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종교 지도자로서 무신론을 주장하며 종교를 탄압하는 공산정권에 대해 우호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와 북한에 대해 타협의 여지를 갖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박멸해야 할 존재로 설정하고 배타적 태도를 보인 것은 분단을 극복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 해결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한국 현대사 속의 노기남 대주교 - 박태균(서울대학교)
노기남 대주교는 한국 근현대 천주교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의 일생은 한국 현대사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1956년 부통령, 1960년 민주당 정부의 총리를 역임한 장면과의 관계는 널리 알려져 있다. 1969년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발간한 ‘나의 회상록’에 따르면 그는 1948년 첫 총선거에서 장면을 정치에 입문하도록 권유하기도 했다.
장면 총리가 일제강점기 동성학교 교장을 할 때부터 노 대주교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노 대주교 자신의 글뿐만 아니라 장면의 회고록, 당시 민주당 관계자들의 글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장면과의 가까운 관계는 자연스럽게 이승만 대통령과의 불편한 관계를 형성하도록 했다. 결국 이러한 불편한 관계는 1959년 사상 초유의 ‘경향신문’ 폐간 사건으로 이어졌다.
1967년 노 대주교는 현직에서 은퇴했다. ‘경향신문’ 매각 과정과 부도 수표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잘 드러나지만, 박정희 정부는 노기남 대주교에 대해 결코 호의적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노 대주교에게 수모를 안겨 주었다. 노 대주교로서는 호의적이지 않은 박정희 정부하에서 더 이상 교구장직을 수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상처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현대사에서 노 대주교의 활동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장면을 비롯한 민주당 관계자들과의 관계, 그리고 5?16 쿠데타 이후에 있었던 다양한 ‘난관’들. 사실 이러한 모습들은 노 대주교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현대사가 안고 있던, 한국 천주교회가 안고 있던 실제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노 대주교에 대한 이해는 개인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위치와 역할을 보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가톨릭신문, 2010년 10월 24일, 오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