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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福澤諭吉
(1835년~1901년)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아래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일신독립(一身獨立)하여 일국독립(一國獨立)한다."
"조선은 아시아 주 중의 하나의 소야만국으로 그 문명의 정도는 우리 일본에 까마득히 미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설사 그쪽에서 내조하여 속국이 된다 할지라도 기뻐할 만한 것이 못된다."
근대 일본의 계몽운동가이자 철학자, 교육가. 아호는 산쥬잇코쿠진(三十一谷人). 게이오기주쿠(게이오기주쿠대학의 전신)와 지지신보(산케이신문의 전신)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메이지 유신기 일본인들, 특히 지식인들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막부 정치 대신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개혁할 것을 추구한 개혁주의자였다. 일본 근대 초기 인권 운동가 중 한 사람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정치적 라이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중년기 이후부터 급격한 사상 변화로 논란을 낳기도 했는데, 이 시기에 내놓은 일명 아시아 경멸론, 미개국 경멸론은 일본 내에서도 군국주의의 확산에 기여했다는 비판이 있을 정도다. 헌데 정작 후쿠자와 자신은 군국주의에 반대했다는 게 아이러니. 후술되어있듯 본인 스스로도 모순되는 말을 꽤나 했던 사람이라 이런 평이 나오는듯.
일본의 근대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임에는 분명하지만,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의 사상적 토대가 되기도 한 인물이므로, 한국에서 위인으로 떠받들기에는 꽤 무리가 있는 인물이다. 일본에서는 일본이 '가지 않은 길'을 가려고 한 자유주의자로 칭송받으며, 실제 김옥균, 유길준, 윤치호, 서재필 등 구한말 급진 개화파들이 이 사람의 이론에 큰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혈기가 넘쳤던 갑신정변을 긍정적으로 봐준다고 해도, 갑신정변에서 살아남은 급진 개화파 분류의 인물들은 상당수가 이후의 행적이 언급하기 껄끄러울 정도로 변질되어버려 안타깝긴 하다.
1만엔권 엔화의 얼굴 마담으로도 유명한데, 1984년 11월 1일부터 현재까지도 엔화 1만엔권에 초상이 실리고 있다. 1만엔 지폐를 돌려 말하는 식으로도 '유키치'라는 말이 쓰인다. 세뱃돈으로 유키치 세 장, 하는 식으로. 아이러니하게도 후쿠자와 유키치가 1만엔에 실리기 시작한 개시일(1984년 11월 1일)에 이토 히로부미가 1천엔권 초상에서 퇴출됐다. 후쿠자와로 대체한 이전의 인물은 쇼토쿠 태자, 이토 다음으로 대체하였던 인물은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다.
2. 생애
2.1. 계몽 운동가 후쿠자와
일본 오사카 출신으로 1835년 하급 무사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리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나카츠 번에서 하는 일은 회계 담당 겸 창고 담당이었다. 그는 유키치가 2살 되던 해 사망했고 저명한 성리학자인 형 역시 젊은 나이에 죽는다. 그는 아버지와 형의 죽음을 보고 실력이 있어도 성공할 수 없는 문벌 사회에 대한 강력한 증오감을 품게 된다.
이후 쿠로후네 사건이 벌어지고 서양의 대포 이야기가 전국에 퍼지자 그는 포술을 공부하기 위해 네덜란드어를 배웠으며 당대 최고의 난학자(蘭學. 일본어 : 란가쿠, 네덜란드 학문을 뜻함)가 되어 1858년 도쿄(당시의 에도)에 네덜란드 어학교(語學校)인 난학숙(蘭學塾, 일본어 : 란가쿠주쿠)을 세우고 계몽 운동에 기여를 한다. 그러나 이듬해 쿠로후네 사건의 진원지이자 서양인의 거류지가 된 요코하마를 방문한 유키치는 이곳에 머물면서 네덜란드어가 통하지 않는 사실에 충격을 먹고, 네덜란드는 이류 국가에 불과했으며 영국이 세계 최강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후쿠자와는 과감히 난학을 때려치우고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막상 영어를 공부해보니 네덜란드어와 비슷한 점이 많아 쉽게 터득했다고했다. 그래놓고 영국의 공문서를 오역해서 사쓰에이 전쟁의 원인을 유발하기도 했다. 존문가
1860년, 그가 25살이 되던 해에 에도 막부 소속 카츠 카이슈의 미국 특사의 일원으로 꼽사리 끼어서 미국에 반년 간 방문했다. 이때 존 만지로라는 인물과 함께 서점에서 영어 사전을 구입해와서 최초의 일영 사전을 만들었다. 1862년에는 유럽을 1년간 여행했으며 이때 막부의 통역 담당 외교관으로 근무하고 1867년에는 다시 반년간 미국을 방문했다.
1868년 난학숙을 게이오기주쿠로 이름을 변경시키고 메이지유신 때 신 정부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모두 거절하였으며 대신 언론 활동과 교육에 전념하며 일본의 개혁과 근대화를 주장하는 한편 서양의 문물을 소개하면서 대중적인 토론과 회의 등을 통해 전국적인 논의가 되도록 만들고자 하였다. 이후 1867년부터 1870년까지 유명한 『서양사정(西洋事情)』을, 1872년부터 1876년까지는 아직도 널리 읽히는 『학문의 권장(學問のすすめ)』을 펴내 단숨에 당대의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면서 저술가이자 계몽 운동가로서의 이름을 떨치게 된다. 당시 일본에서는 만국공법과 함께 서양 사적이 당대 최고의 관심을 받는 서적이었다. 그가 학문의 권장에서 남긴 일신독립(一身獨立)하여 일국독립(一國獨立)한다는 구절은 최근에 방영된 일본 근대 사극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에서도 주인공의 입을 빌려 강조될 정도로 일본의 계몽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토 히로부미 등의 군국주의 정책에 반대하여 자유와 민권 운동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초기 일본의 헌법과 교육법 제정에 민간인 교육자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지만 이토 등과의 논쟁 이후 교육령 개정, 헌법 개정에서 모두 손을 뗀다.
『학문의 권장』의 첫 문장인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아래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에서 드러나듯 후쿠자와는 만인이 각기 불가침의 권리를 갖는 평등하고 독립적인 인간임을 강변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일신 독립하여 일국 독립한다는 사람은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학문과 실업에 힘써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 일신의 독립이 국가의 독립과 직결되는 이유는 무지하고 게으른 인민은 정부의 압제를 초래하고 국력을 약화시켜 외국의 침략을 불러일으키게 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국가의 근대화에는 개인의 근대화, 곧 시민적 자유를 향유하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의 형성이 선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후쿠자와는 정부와 인민 관계가 상하 관계가 아니라 인민이 주인이고 정부는 대리자인 서로가 대등하며 국법에 의해 서로의 권리 존중하고 의무를 이행해야하는 계약 관계임을 설파했다. 학자건 상인이건 관(官)의 일만 선호하고 정부를 견제할 사립의 중요함을 모른다는 일본의 국가주의적 풍토에 대한 비판 역시 이 같은 관점에서 나왔다. 후쿠자와가 막부와 메이지 정부의 영입 제안을 거절하고 끝까지 민간에서 활동한 것도 이러한 사상 때문으로 보인다.
『학문의 권장』에서 드러난 문제 의식을 구체적으로 써내려간 후쿠자와의 또다른 고전『문명론의 개략(文明論之槪略)』역시 1875년의 저술로, 이 시기의 유키치는 그야말로 일본 근대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쌓았다. 보통 여기까지를 후쿠자와의 생애 전반으로 보며, 일본에서는 후쿠자와의 옹호자이건 비판자이건 이 시기의 업적은 모두 인정하고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후쿠자와는 생애 전반에는 조선에 별다른 저술을 남기지 않았으나, 임오군란 사후 처리 사절로 방일한 김옥균과 만나게 되면서 조선의 근대화에 큰 관심을 보이게 된다. 조선의 급진 개화파에 후쿠자와가 끼친 사상적, 실질적 영향은 막대한 것이었다. 김옥균은 후쿠자와를 신선 같은 인물이라고 평하고 스승으로 모셨고, 후쿠자와도 김옥균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아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깊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후쿠자와는 김옥균을 위시한 급진 개화파가 정치적 실각 위기에 처하자 갑신정변에 직접 개입해 반란의 성공을 위해 도검과 폭약 등의 무기를 조달하기도 했다.
실제 후쿠자와를 통해 무기를 조달한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김옥균, 박영효 등 일파의 거사는 당초부터 선생이 관여하고 듣고 계신 바이다. 선생은 단지 그 대본의 작자임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나서서 배우를 선택하고 배우를 가르치고 또한 필요한 도구를 갖추는 등 만반의 수단을 강구한 사실이 있다"는 증언을 남겼다. 물론 후쿠자와는 자서전인 후쿠옹자전에서 그런 일 없다고 딱 잡아뗐다.
이러한 후쿠자와의 조선 근대화에 대한 개입은 단순히 '조선의 근대화에 열의를 보인 후쿠자와'라는 평가에서 '메이지 유신의 모델을 조선에 강요한 후쿠자와', 심지어 '제국주의 침략의 선봉 후쿠자와'에 이르기까지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다만 갑신정변 시기까지는 후쿠자와가 어느 정도 아시아 각국의 연대를 강조한 것은 사실이며, (의외이지만) 조선인에게는 한글이 가장 알맞으니, 국한 혼용체를 사용하여야 한다며 당시로선 파격적인 주장도 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같은 아시아 국가인 청나라의 개입으로 실패하자, 이후 이 사람은 탈아론으로 일종의 흑화를 해버린다.
2.2. 갑신정변과 노선 변환
갑신정변의 실패와 함께 갑신정변 관련자들에 대한 조선 정부의 혹형은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후쿠자와는 '조선 독립당의 처형'이라는 글을 게이오기주쿠에서 발행하던 신문 '시사신보'에 싣는다. 이 글은 갑신정변의 주모자를 처형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조선 정부가 죄 없는 부모, 조부모와 처 자식, 나이 어린 손자까지 처형하는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야만이라고 맹렬하게 비판한 글이었다.
갑신정변은 조선 조정의 입장에서는 반역죄였기 때문에 조선 시대에서 반역죄에 적용하던 처벌대로 내린 것이고, 갑신정변은 현대 관점에서도 외환죄에 해당한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여기 적용된 연좌제가 무지막지한 전근대적 형벌로 보이는 것은 사실. 철저한 근대주의자였던 후쿠자와가 노발대발 안 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 더구나 세계 각국과 통상을 맺으며 근대화를 추진하던 시점에 이런 전근대적 악습을 자행했으니 외국인의 입장에서 결코 좋게 볼 수 없는 행태라 조선의 국격만 떨어뜨려 국제 관계에 있어서 불리한 요소를 자초한 셈이다.
이에 관해서 내정 간섭이라며 비판하는 의견도 있지만 현재의 시각에서 보자면 이런 입장은 오늘날의 북한이 자국의 참혹한 인권 실태를 비판하는 서방 언론에 내정 간섭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과 겹쳐 보이기도 한다.
사실 갑신정변이 일본과 연관이 있어서 사람들의 감정이 좋지 않을 뿐이지, 영락제가 십족을 멸했다거나 유교권 국가에서 반역자의 삼족을 깡그리 고문하거나, 죽여버리는 것에 동의하는 현대인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연좌제라는 게 갓난아기 등 가족들 뿐 아니라 관련이 있다는 소문만 있어도 일단 국문으로 조지고 보는 인권 따위 개나 줘버린 방식이었다. 일본 사회에서 인권을 설파했던 사람이니만큼 환멸 이상의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드러나듯 후쿠자와는 갑신정변의 좌절과 그 사후 처리 과정에서 적용된 연좌제에 극도로 분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후쿠자와는 세 달 뒤인 1885년 3월에 그 유명한 탈아론을 발표한다.
"조선 인민 일반의 이해(利害)가 어떤지를 논할 때는 (조선의) 멸망이야말로 오히려 그들의 행복을 크게 하는 방편"이라는 말 역시 이 사건의 연장선상에 있다. 즉, 전제적이고 봉건적인 조선 정부가 멸망하고 (일본의 메이지 정부와 같은) 근대적 정부가 성립해야만 조선 인민이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 말이 후쿠자와가 제국주의 침공의 선동자였음을 보여주는 근거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은 위에서 보이듯 그냥 조선 정부에 빡쳐서 날린 공개 디스에 가깝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인민의 생명도 지키지 않고, 재산도 지켜주지 못하고, 독립 국가의 자존심도 지켜주지 않는 그런 나라는 오히려 망해 버리는 것이 오히려 인민을 구제하는 길이다." 라고 하였다.
후쿠자와는 두 번의 미국 여행과 한 번 유럽 여행만으로 당대의 흐름이었던 제국주의의 핵심을 꿰뚫어 보았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당대를 사는 사람은 그 당대의 시간적, 공간적 인습과 편견에서 쉽게 벗어나기 어려우며, 그런 인습과 편견 없이 사물을 파악하는게 소수의 지식인을 제외하고는 어렵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의 시공간을 초월한 안목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제국주의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 본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러한 국제 정세의 부조리를 비판하기는커녕 도리어 적극적으로 그 비법을 배워서 일본 제국주의를 추진하여 일본이 제국주의의 막차를 올라타도록 주도했다.
2.3. 민중 경멸론자 / 제국주의자 후쿠자와
사상가로서의 명망과는 달리 원칙없는(...) 언행을 꽤 일삼았다. 예를 들어, 그는 초기에 쓴 『학문의 권장』에서 인간 평등 사상을 내보이지만, 나중에는 스스로 이것을 부정한다. 물론 사상가가 사상이 원고부동하라는 법은 없지만 그는 변화한 후가 너무 막장이라는 게 문제. 특히 교육 문제에 대하여 그의 입장이 변화하는 과정을 보자면,
학문의 권유 / 인민이 지식을 쌓아야
→ 강박 교육론(강제 의무 교육론)/계몽부터 해야
→ 강박 교육 반대론 / 아 그런데 개인의 존엄성을 침범하면 안되지..
→ 최하등 교육론(3년제 간이 소학교 용인) / 일단 사람부터 되야하니 어느 정도 의무 교육은 있어야 할 거 같기도
→ 신 학문의 권유 / 에라 모르겠다, 과정에 대한 논의는 됐으니까 지식 좀 쌓으라고
→ 공장 노동 아동에 대한 교육 거부 / "아 시X 다 때려칠거야 노예 같이 살거면 교육이 뭐가 필요해 우민들아!"
변천한 내용을 보면 단순히 원칙이 없는 것을 떠나서, 과연 교육가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악질적인 주장도 서슴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 그는 막부 정치를 그리워하는 당시의 일본 시골 사람들을 보며 우매한 대중이라고 경멸했다. 물론 개혁 사상가 입장에선 이런 사람들이 답답한 우민들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후쿠자와는 이들을 계몽할 생각보단 걍 우민이라고 멸시하기 바빴다는게 문제. 우매한 것들을 보니 또 성질 뻗치네 아오.
이것은 그의 또다른 특징인 우민 멸시 사상과도 맞닿아 있다. 실제 초창기의 개혁적 성향과 달리 흑화된 이후 후쿠자와는 우민을 경멸하고 멸시하는 사상으로 변화해갔다. 이러한 가운데 그는 덴노제의 본질이 어리석은 백성을 농락하는 사술임을 알고, 그것을 지적하긴커녕 적극적으로 선택하였다. 또한 그는 초기에는 천부인권의 인간 평등을 주창하다가 나중에는 대중을 바보와 병신 같은 구제 불능의 우민 집단으로 간주하였으며, 이들을 통치하기 위해 종교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종교를 이용해 백성을 통제하고자 한 논리는 이후 국가신토라는 큰 쓰레기(...)로 나타나게 된다.
후쿠자와는 종교는 허황된 미신,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사람들을 현혹한다고 종교를 비판했다. 그런데 그는 우매한 사람들을 통제하는데는 종교가 최고라는 역설을 하였다.
"세상에 병신들이 있는 한 종교 또한 매우 유용하다. 바보와 병신에게 종교는 꼭 맞는 구색이 아니랴."
당시 일본 국민들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와 경멸, 여기에 조선, 청나라 사람들에 대한 경멸과 무시, 갑신정변 이후 조선인 독립당의 처참한 최후까지 더하여 그는 죽을 때까지 민중을 경멸했고, 스스로 무신론자 혹은 불가지론자였음에도 바보와 병신을 위한 종교 진흥론을 1백편 이상 집필하였다. 그 밖에도 '타인의 고통을 은근히 즐기거나, 고소해하는 속이 배배 꼬인 인간'들은 의외로 사회에 많다, 그런 속이 배배 꼬인 사람들의 심리를 풍자하여 "압제도 내가 당하면 싫지만 남을 압제하는 것은 몹시 유쾌하다."라는 비상식적인 말도 남겼다.
그는 당시 일본인들이 신사에 가서 길흉화복을 점치는 것을 어리석고 미개한 짓이라며 조롱했다. 그럴 시간에 노동을 더 해서 돈을 더 벌거나, 기술을 연마하는게 더 본인에게 도움되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수천년간 신사에 참배하는 일본인들의 습관, 힘들고 어려울 때 점술이나 종교에 의탁하는 버릇을 쉽게 고칠 수는 없었다. 동시대의 일본인 중에는 그를 비애국자라고 비판하거나 그가 일본을 강도의 나라로 만들려고 한다고 비판하는 의견들도 있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를 포함한 일본의 '계몽주의자' 지식인들은 대중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고, 소수의 지식인이 다수의 대중을 이끌고 지도해야 된다고 확신하였다. 그것을 위해서 스스로 자기 관리를 하고 절제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후쿠자와 유키치는 자유 민권 운동 당시 이 운동을 "잡스러운 것"이라고 비난하던 메이지 정부를 옹호했다는 점을 보면 곡학아세라고 볼 수도 있다.
그의 이러한 우민 멸시 사상은 정치적으로는 우민화 정치를 펴는 아시아 멸시 사상으로도 발휘되었다. 여기서 이러한 멸시관이 후일 일본군의 잔학 행위의 사상적 배경으로 연결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단의 서술처럼 후쿠자와 유키치는 긍정적인 부분도 있었고 후쿠자와 개인에게 당시의 여러 요인을 무시하고 책임을 돌리는 건 어리석은 얘기겠지만 일본 사상계의 태두라 할 수 있는 그의 부정적인 영향 역시 막대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하여튼 이 때 부터 후쿠자와는 막말의 강도가 점점 세지며 흑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조선 침략의 목적은 일본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며 남을 위한 게 아니라 일본을 위한 것이다." "조선국은 사지가 마비되어 스스로 움직이는 능력이 없는 병자와 같다." "대만인은 오합지졸 좀 도둑떼" "청국 병사는 돼지 꼬랑지 새끼" "조선과 중국 이 두 나라는 진보의 길을 모르고 구습에 연연하며 도덕마저 땅에 떨어진데다가 잔혹, 몰염치는 극에 달하고 거기에 오만방자하다."
"조선은 본래 논할 가치가 없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당면의 적은 지나(중국)이기 때문에 우선 병사를 파견해 경성에 주둔 중인 지나 병사를 몰살하고 바다와 육지로 대거 지나에 진입해 곧바로 북경성을 함락시켜라." "눈에 띄는 것은 노획물밖에 없다. 온 북경을 뒤져 금은보화를 긁어모으고 관민 가릴 것 없이 아무 것도 남기지 말고 빠뜨리지 말고 '창창 되놈'들의 옷가지라도 벗겨 가져와라."
물론 그의 이런 조선 비판에 대해서는 조선의 중국에 대한 사대 모화 사상과 연좌제가 20세기 이후에도 존재했다는 점도 어느 정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저서인 '학문의 권장'에서 아시아 민족의 전근대성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영국과 프랑스 등의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을 문명의 선도자로 좋게 평가하면서도 그 폭력적 성격을 예리하게 꿰뚫어 보았다. 또한 일본과 일본인은 거짓말을 일삼고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 비굴하다며 디스를 했고, 그렇게 몇 백년간 몸에 밴 근성을 뿌리 뽑을려면 국민 개개인이 학문의 중요성을 깨닫고 실업에 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 평등 사상을 내세우면서, 일본인도 할 수 있는데 왜 서양인만 만나면 굽신거리기 바쁘고 말도 제대로 못하냐며 한탄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후쿠자와는 당대 전 세계적인 제국주의적, 사회 진화론적 가식과 그 뒤에 있는 시커먼 탐욕의 본질을 파악할 만큼 명민했던 주제에 이걸 도덕적 차원에서 배격하고 대체할만한 인본주의적 주장을 펼친게 아니라, 오히려 저 탐욕을 긍정하고 내재했다. 사기꾼들이 공갈 사기 치는걸 다 꿰뚫어 보았음에도 이들을 사기치지 말라고 나무란게 아니라, "오 님 좀 천재인듯?" 하며 같이 사기꾼의 대열에 자발적으로 합류했던 것이다. 나도 꿀 좀 빨아보자. 그리고 이런 근대화의 억압적, 차별적인 면모에 대한 긍정은 갈수록 인간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더욱 더 심해졌다.
후쿠자와와 그가 설립한 게이오의숙에서 많은 신진 민권론자들이 배출되었고 1800년대 중반부쯤 되어서는 자유 민권 운동이 활발해졌는데 이때부터 일제는 교과서 검열 제도를 실시했고 『학문의 권장』도 그 대상이었다.
천황과 황군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복종을 강요하는데 "사람 위에 사람 없고~"라는 말 자체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후쿠자와의 제국주의 논리만큼은 수용했다. 국가의 교육 방침 자체가 국가주의, 군국주의 일변도를 가면서 자유주의 사상 역시 탄압 대상이 되었는데 만주 침략, 태평양 전쟁 시기에 게이오의숙은 반정부주의의 소굴로 취급되었고 극심한 감시를 받았다.
이러한 연유로 후쿠자와는 그저 미국과 영국 문화를 소개한 사람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그가 다시 인기를 회복한 것은 패전 후였다. 패전으로 천황의 정치 일선 후퇴, 군부의 퇴출, 그리고 민주주의가 들어오면서 "사람 위에 사람 없다"는 캐치 프레이즈가 다시 각광을 받게 되었던 것. 이는 전후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한 자유주의적 독해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 바로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로 일본 군국주의를 예리하게 비판하며 명성을 얻은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라는 점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사람의 어록을 보면, 후기의 제국주의자의 면모를 알 수 있을 것이다.
3. 평가
일본인들은 대체로 계몽가, 일본 근대사의 위인 등으로 좋게 평가하며 일본내에서 존경받을 위인 같은 주제로 조사 통계를 내면 항상 상위권 내에 든다. 일본 엔 중 만엔권에 있다. 실제 일본인들이 아니더라도 일부 행적은 좋게 평가해줄만 하다. 허나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 국가인 한국이나 중국 등에서는 아무래도 제국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더 드러나기 마련이라 부정적인 평이 많은 편. 또 상술되어있듯 본인 스스로 모순되는 언행을 많이 해서 평이 깎이기도 한다. 조선 시대에도 공맹 사상을 중시해왔던 조선의 유림이나 위정척사파들에게는 적대적인 인물로 알려졌었다. 다만 김옥균 등 개화파들은 개화에 기여하는 인물로 부분적인 평가를 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과거 일본의 정치와 사회의 여러가지 면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지금까지 일본에는 "정부의 역사"는 있어도 "국민의 역사"는 없었다고 까내린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근대에 들어 유럽과 미국에서 많은 정권이 민중에 의해 바뀌거나 민중의 요구에 의해 정책이 결정되는걸 보면서 한 말이다. 스스로 참여해서 만들어진 법과 제도를 준수하는 구미인들과 정부의 필요에 의해서만 만들어지고 정부가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일본을 비롯한 많은 아시아인들을 깐 것이다. 자유주의자적 모습을 여기서 볼 수 있을듯. 허나 이런 자유주의자적인 모습을 버리고 말년엔 제국주의자로 흑화되어버려 안타까운 점은 있다.
물론 그를 비롯한 많은 일본 (뿐만 아니라 서구) 사상가들이 당대 조류였던 제국주의를 충실히 따른 것일 뿐이라는 변명도 할 순 있으나, 아닌 사상가도 많았기에 온당한 쉴드가 될 순 없다. 또 이는 제국주의가 쇠퇴하고 그에 따른 부작용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현대 질서에 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마냥 이렇게 변명만 하다보면 잘못될 경우 일본 우익들이 걸핏하면 내세우는 일본의 방어적 제국주의, 식민주의론과 연계되어 현실에서 재현될 수도 있다. 즉, 자유주의자부터 제국주의자까지 왔다갔다한 그의 인생사에 대한 적절한 공과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필요한 셈.
야스히코 요시카즈 화백의 걸작인 "왕도의 개"는 일본인 작가의 작품이지만, 후쿠자와를 정말 강하게 디스한다. 흑화 후쿠자와 특유의 형용할 수 없는 느글거림(...) 역시 제대로 묘사된다. 또한 조선이 러시아에 빌붙으려는 모습을 보인다면서 이런 나라는 희망이 없다고 실망했다고 무시한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아래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는 스스로의 말과 어긋나지 않느냐는 주인공의 지적에 "그러니까 학문을 배우라는 말이다. 그런 것도 모르는가?"라는 소리만 늘어놓는다. 단순한 만화적 픽션으로 취급하기 힘든게, 실제로 흑화 후쿠자와의 사상과 언행이 이러했다.
전 나고야 대학 교수인 야스카와 주노스케 역시 기존의 후쿠자와 연구에서 벗어나 비판적인 관점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다. 한국에도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 사상을 묻는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그의 아시아 멸시 발언 어록도 부록으로 낱낱히 들어가 있으니 관심이 있으면 한번 읽어보자.
그 외 2015년 7월자로 야스카와 쥬노스케의 『마루야마 마사오가 만들어낸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신화』도 번역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흑화' 혹은 '전향'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제국주의적인 인물이었다는 사실, 또 그 사실이 감춰지는데 있어 상술된 마루야마 마사오가 깊숙하게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다만 야스카와는 9.11 테러를 미국의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책을 썼던 적이 있는만큼 이 책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면서 접할 필요는 있다는 주장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