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30
2월10일[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기념일/연중 제5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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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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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hryGuS7VG8E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주세환 프란치스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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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투자와 시간을 할애하신 부분은 아무래도 병자들에 대한 치유 활동일 것입니다. 그도 그런 것이 여기저기 몸이 아프면 삶의 질이 대폭 떨어집니다.가장 기본적인 것, 먹는 것도 움직이는 것, 화장실 가는 것도 힘들다 보니 만사 귀찮아집니다.
육체가 시들시들해지다 보니, 정신도, 마음도, 영혼도 덩달아 병들어갑니다. 점점 목숨은 붙어있지만, 삶의 많은 부분이 점점 소멸되어가니, 그것을 견디어내는 것이 얼마나 가혹하고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치유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나가면서 그분의 하루일과는 A급 연예인 못지않게 스케줄이 빡빡했습니다.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 뵙고 달려왔습니다.
특별히 환자들,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들, 인생의 막장까지 내몰린 사람들,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예수님 옷자락이라도 한번 만져보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계속되는 과로로 인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때로 이쪽 형편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집요하게 달려드는 사람들, 때로 무례하게 요구하는 사람들 앞에서 마음도 상하셨을 법한데, 조금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개별적인 요구에 일일이 응답하십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복음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 받는 사람들, 불치병 환자들,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아무런 부담 없이 찾아올 수 있는 곳이어야 하겠습니다.
그들의 꼬이고 꼬인 인생이 교회에서 제공하는 고객 감동 서비스를 통해서 활짝 펴지게 만드는 곳이 우리 교회여야 하겠습니다. 울적하다가, 우울하다가 우리 교회만 찾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분이 180도 전환되는 곳이 우리 교회여야 하겠습니다.
뜨거운 난로 앞에 눈덩이를 갖다 대면 순식간에 소리도 없이 녹아버립니다. 한낮의 강렬한 태양 아래 단단한 얼음덩어리를 놓아두면 금방 녹아 자취를 감춥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강렬한 사랑 앞에 우리 인간의 갖은 질병, 난관, 한계, 시련은 눈 녹듯이 녹아버립니다.
결국 우리가 한계상황 앞에 섰을 때, 우리가 깊은 슬픔에 잠겨 힘들어 할 때, 우리가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때 마다 최종적으로 찾아갈 곳은 예수님입니다. 그분의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는 순식간에 해결될 것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이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는 곳이 천국일 것입니다.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분을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그곳이 천국일 것입니다.
그곳은 모든 뒤틀린 인생길이 활짝 펴지는 곳, 굽은 등이 꼿꼿해지는 곳, 꺾인 가지에서도 새싹이 돋아나는 곳, 모든 만물이 제 색깔을 되찾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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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FVWQLjObT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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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웃에게 가장 주고 싶은 것은?>
화가 이중섭이 하루는 병을 앓고 있는 친구의 문병을 갔습니다. 친구가 아픈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문병이었기에 그는 늦게 찾아온 것을 미안해하며 친구에게 작은 도화지를 건넸습니다.
“자네 주려고 가지고 왔네. 이걸 가지고 오느라 늦었네. 자네가 좋아하는 복숭아라네.”
그는 친구가 좋아하는 복숭아를 사다 줄 돈이 없어 직접 그림을 그려 선물한 것입니다. 사랑하면 선물을 줍니다. 선물로 내가 가장 귀하다고 여기는 것을 줍니다. 그 선물이 받아들여지면 그 선물을 주는 사람도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일반대학교 다닐 때 어떤 자매가 저를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에 저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마음’이라고 대답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여자가 마음을 준다는 것은 다 준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면 누구나 같을 것입니다.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 찾을 것이고 그것을 선물하려 할 것입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주려 하는 바로 그것이 내가 가장 귀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성당에서 성탄 선물로 과자와 커다란 사과 하나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태어나서 그렇게 큰 사과는 처음 보았습니다. 그래서 혼자 먹기가 아까웠습니다. 갑자기 부모님이 생각났습니다.
성당과 사는 집의 거리는 아이 발걸음으로 한 시간 정도 되었습니다. 성탄 선물 꾸러미를 한 시간 넘게 집으로 가져오면서 추위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다만 부모님이 그 큰 사과를 보고 좋아하시는 것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착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은 “왜 먹지 않고 가져왔느냐?”고 하셨지만, 내심 감동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먹고 싶은 것을 참고 먹을 것을 부모님께 드린 이유는 어떤 중요한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였습니다. 바로 ‘소속되고 싶은 욕구’입니다. 부모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과자와 사과를 제물을 바친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소속되기 위해서는 그 누군가가 좋아하는 것을 제물로 바쳐야합니다. 사람에게 먹는 욕구가 매우 중요한 것 같지만 그보다 더 소속감을 느끼기를 원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누군가를 만날 때 내가 선물할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웃과 잘 지내며 그런 소속감을 통해 오는 행복을 느끼도록 우리에게 엄청난 선물을 준비하셨습니다.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것만큼 큰 선물은 없습니다. 모두에게 구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소속되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도 가장 귀한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바치지 않는다면 그건 예수님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가난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두 농부는 무 농사를 졌고 모두 좋은 무를 생산했습니다. 한 농부는 이 모든 것이 원님 덕분이라며 가장 큰 무 하나를 원님에게 바쳤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농부는 그 무가 원님에게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며 아무 것도 바치지 않았습니다. 큰 무를 선물로 받은 원님은 감동하여 그 농부에게만 답례로 황소 한 마리를 주었습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줄 것이 있다고 합니다. 찾으려하지 않을 뿐입니다. 신앙인으로서는 내 안에 모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러나 이웃이 돈이나 주면 좋아하지 예수님은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 여겨 선교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무 취급하는 것입니다. 일단 내가 귀하다 여기면 선물하고 보아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치를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선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디에 계신지 알았던 사람들은 빨리 그분에게 병자들을 데려오기 위해 그 분을 쫓아서 ‘뛰어다녔다’고 합니다.
걸어 다닌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또 어디로 가실지 모르기 때문에 뛰어다닌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걸을 여유가 없습니다.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는 생명의 샘물을 발견했는데, 어찌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뛰어다니며 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나에게 예수님이 이웃에게 전해줄 가장 귀한 선물이 안 될 때 나도 예수님의 가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농사를 잘 짓고도 바치지 않은 무로 만들어선 안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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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있습니다. 뽕나무밭이 변해서 푸른 바다가 된다는 뜻입니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가 온 사람은 한국의 변화를 보면서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가난하고, 지저분하고, 무질서하고, 부정과 부패가 만연했던 기억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0년 만에 한국에 오면 풍요롭고, 깨끗하고, 질서정연하고,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벗어난 한국은 가난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한과 북한은 3년간 전쟁을 겪었습니다. 모든 시설이 파괴된 폐허 위에서 우리의 부모님 세대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라는 신념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냈습니다. 저는 온몸으로 그런 시간을 체험했습니다. 어린 시절 기억은 ‘연탄가스, 만원 버스, 암표 장사, 승차 거부, 재래식 화장실, 달동네’였습니다. 지금 한국은 세계 최고의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지하철에서도 인터넷을 무료로 사용합니다. 한국에서 최고면 세계에서 최고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한국은 경제, 문화, 의료, 디지털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제 생활하면서 저도 ‘상전벽해’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2000년이니 25년 전입니다. 본당에 주일학교 학생이 10명도 안 되었습니다. 주일 미사에 50명 정도 참석했습니다. 가정 방문하면서 태권도 사범 하던 분을 만났습니다. 저는 본당에서 태권도를 가르치자는 제안을 했고, 자매님은 기꺼이 수락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태권도는 본당 사목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도복을 무료로 주었고, 태권도를 무료로 가르쳤습니다. 아이들은 도복을 입고 학교에도 가고, 장터에도 가고, 임진강에 가서 놀았습니다. 아이들이 움직이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태권도를 배우는 아이들이 늘어났고, 수녀님은 아이들에게 간식을 주고,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태권도 배우는 아이들이 세례받았고, 부모님도 세례받았습니다. 아이들은 국기원에 가서 승단 시험도 보았습니다. 본당의 날에는 아이들이 태권도 시범도 보여주었습니다. 10명이 시작한 태권도는 제가 떠날 무렵에는 100명이 넘었습니다.
2010년이니 15년 전입니다. 태풍 ‘곤파스’가 한반도를 지나갔습니다. 제가 있던 본당에도 곤파스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성당에 있던 야산의 흙이 흘러 근처 아파트의 축대 벽이 무너졌습니다. 뉴스에도 나왔고, 서울시장도 다녀갔습니다. 저는 시장님에게 야산을 낮추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또 태풍이 불어도 안전할 거라고 했습니다. 시장님은 저의 의견을 받아들였습니다. 구청장님을 만나서 야산을 낮추는 문제를 상의했습니다. 구청장님도 기꺼이 저의 의견을 들어주었습니다. 트럭 1,000대 분량의 흙을 옮겼습니다. 흙은 주민들의 텃밭을 가꾸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게 야산은 10미터 정도 낮아졌고, 성당에는 1,000평이 넘는 마당이 생겼습니다. 저는 교우들과 양재동 꽃시장에 가서 철쭉도 사고, 벚나무도 사고, 장미도 샀습니다. 아카시아와 잡목으로 지저분했던 야산은 아름다운 꽃동산으로 변했습니다. 성당 마당에서 성모의 밤도 했고, 성당 마당에서 윷놀이도 했고, 성당 마당에서 아이들은 물놀이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에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상상과 생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빛을 만들고, 땅을 만들고, 하늘을 만들고, 물을 만들고, 해와 달, 별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정도는 되셔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정도는 되셔야지 만물의 주인이시고,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 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의 옷깃만 스쳐도 병이 낫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정말 장난이 아니십니다. 어디가 아픈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언제부터 아픈지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예수님 곁에서 옷만 만져도 모든 병이 저절로 치유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 그 정도는 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넘치는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들의 업적과 자랑도 아닙니다. 너희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하얗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뉘우치고, 하느님께, 예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지난 모든 것은 덮어주고 당신의 나라에 다시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 안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가슴이 따뜻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계산하고 따지기보다는 순수한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너그럽게 대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상전벽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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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딸들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기후 위기로 말미암아 회칙 「찬미받으소서」가 말하는 우리 공동의 집 지구가 생태 위기에 놓인 시대에 읽는 창조 이야기가 가슴 아리게 다가옵니다. 오늘 읽는 창조 이야기에서는 사제계 전승의 특징대로 하느님의 창조 활동 전반부가 규칙적인 반복에 따라 질서 있는 작업으로 드러납니다.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는]”(창세 1,2) 심연 위를 감도는 하느님의 영이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혼란(카오스)을 질서(코스모스)로 변화시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창조 질서가 인간의 죄로 훼손된 뒤에도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드신 것들을 버려두시지 않고 계속 돌보십니다. 창조의 하느님께서는 또한 섭리의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피조물을 정성껏 돌보시는 하느님을 잘 보여 주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마다’ 병자들을 데려오고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됩니다. 이는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보편성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느님에게서 돌봄의 임무를 위임받은 인류는 그 책임을 소홀히 한 대가를 지금 톡톡히 치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제 종류대로”(1,11) 조화롭게 땅에 돋게 하신 “푸른 싹”(1,12)을 뒤섞어 유전자 변형이나 종자 조작 등으로 창조 질서를 혼란에 빠트렸고, 기후 위기는 종자 위기로, 식량 위기로, 인류 생존의 위기로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빨리 충실한 청지기로서 창조 질서를 회복하고 구원의 보편 성사로 교회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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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53-56: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예수께서 겐네사렛 땅으로 가셨을 때 수많은 사람이 예수께로 몰려왔다. 예수께 한결같이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찾아왔다. 수많은 군중이 자기 필요성에 의해 예수님을 찾는 것을 결코 비웃을 수는 없다. 우리 자신이 그런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그분을 섬기고 따른다고 하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만들어 놓은 우상일 수 있다. 그 우상은 나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할 때, 아무렇지도 않게 버릴 수 있듯이 우리 안에 잘못 가지고 있는 하느님 상이 무너지게 되면 많은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신앙을 버리게 된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나의 편의를 위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나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그 기계적인 하느님은 버림을 받게 된다. 그러한 하느님은 진정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아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신앙을 받아들이고 성당에 다니는 것이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참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지는 않는지 반성하면서, 우리 자신은 이제 예수님이 필요하고 찾는다면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성소인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될 것이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기복적인 신앙이 아닌, 신앙으로 인해 자신이 변화하고 또 세상이 변화될 수 있는 조그마한 실천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거기에서 참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나 자신이 완성되어 가는 삶이어야 한다. 이러한 삶이 우리 가운데 조금씩 실천되도록 끊임없이 나 자신과 싸움을 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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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도 고치실 수 없는 병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3-56)
1) 예수님께서는 ‘말씀’만으로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치유의 은총’으로도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 일이 아니라, 즉 복음 선포를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일 자체가 복음 선포였습니다.
사람들은 ‘치유의 은총’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체험하게 되었을 것이고,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묵시 21,4) 하느님 나라를 믿고 희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치유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예수님을 ‘그 나라로 인도해 주시는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병의 치유로만 만족하고서 그냥 가버린 사람들도 많았고......
2) 질병의 고통은 인간이 겪는 고통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의 모든 처지를 가엾게 여기셨지만,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특별히 더 가엾게 여기셨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고칠 수 있는 병이라면, 그냥 고치면 되는데, ‘사람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이라면 하느님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병자들을 당신이 가지고 계시는 ‘하느님의 권능’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믿음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병을 잘 고치는 의사’로만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병을 잘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병을 지배하시는 주님’이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 주실 때 당신의 말씀만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루카 4,38-39)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는 “열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시니, 그 명령에 복종하고 열이 떠나갔다.”입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이 말은 어떤 백인대장이 한 말인데, 그는 “예수님은 ‘병’을 지배하시는 주님”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은 사실상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믿음입니다.>
3) 예수님은 ‘병을 지배하시는 주님’이신 분이지만, 예수님도 고치시지 못하는 병자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병이 들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 자기가 병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자기는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치료받을 생각 자체를 하지 않기 때문에 병을 고쳐 달라는 청을 하지도 않을 것이고, 예수님도 그런 사람들은 고쳐 주시지 못합니다.
자기가 병이 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자기가 병자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예수님께 치유의 은총을 청하지 않는 사람들도 고쳐 주실 수가 없습니다. 원래 은총은, 받기를 원하고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받게 됩니다. 원하지도 않고 받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 받아서 못 받게 됩니다.
4) 자신의 병을 고통스러워하고, 치유되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또 치유를 위해서 노력하긴 하는데, 몸의 건강만 생각하고 영혼의 건강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의 ‘벳자타 못 가의 병자’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치유되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께 치유의 은총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엾게 여기셔서, 그의 믿음과는 상관없이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요한 5,8-9)
그런데 그는 안식일 규정에 관한 문제로 시비가 붙자, 유대인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신고했습니다.(요한 5,15) 그것은 명백하게 ‘배은망덕’이고, 자기가 받은 은총을 스스로 ‘헛일’로 만들어버린 일입니다. 몸의 병은 고쳤지만, 영혼의 병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인데, 그것은 전적으로 그 자신의 탓입니다.
5) 몸의 병을 고치는 것은, 또 몸의 건강을 되찾고 유지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이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몸만 건강하고 영혼은 병든 상태라면, 그 ‘몸의 건강’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벳자타 못 가의 병자’에게,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 5,14)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의 ‘몸’이 완전히 치유되었음을 확인해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몸의 치유’로만 만족하지 말고 ‘영혼의 구원’을 향해 나아가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더 나쁜 일’은 ‘구원받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신고한 것은,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한 것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거부한 것이기 때문에, ‘더 나쁜 일’은 그가 예수님을 신고할 때 이미 일어난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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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 말씀이 담긴 성경>
그 성경의 첫 시작을 우리는 오늘 만납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나온 세상과 인류의 기원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비교하자면 조금은 황당하고 비이성적으로 다가오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창조 이야기는 창세기의 저자가 세상이 창조되는 그 순간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기록하거나, 과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증명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신앙의 언어로 기록한 신앙 고백문입니다.
그리고 신앙 고백의 정점에는 ‘창조’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창조’는 무에서 유를 이끌어 내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힘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구약 성경 전체에서 하느님께서만이 ‘창조하다.’라는 동사의 주어가 되십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창조하시는 힘은 ‘말씀’으로 실현됩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는 것이지요. 창조의 재료는 오로지 ‘말씀’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말씀이 지닌 힘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첫 장면부터 하느님 창조의 힘과 그분 말씀의 힘이 드러납니다. 그렇게 창조하신 이 세상에 대하여 하느님 당신께서 보시니 좋으셨다고 평가하십니다.
창조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말씀이 창조한 ‘세상’과 세상을 창조한 ‘말씀’을 마주합니다. 말씀이 창조한 세상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었습니다. 세상을 창조한 말씀은 우리를 좋은 세상으로 초대합니다. 오늘 화답송과 같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이루신 일을 기뻐하셨습니다. 보시니 좋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마주하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세상이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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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분도회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땅에 도착하시자 사람들이 그 지방의 모든 병자를 그분께 데려다 놓았고,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지 병자들을 고쳐 주시라고 청하였으며,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 주신 기적은,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었음을 보여 주는 표지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오실 분, 곧 그리스도이시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 말씀을 인용하시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루카 7,22).
따라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해 주신 것은, 하느님 아드님으로서 하신 구원 행위이면서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었음을 보여 주는 계시였습니다.
병자들을 포함해서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은, 그분께서 치유 능력을 지니셨음을 알고 있었기에 병자들을 고쳐 주시라고 청하였고, 병자들도 그분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렇게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댄 병자들은 병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공생활을 요약하는 오늘의 이야기 어디에도 그들의 믿음이나 신앙 고백에 관한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필요한 것이 있을 때나 어려움이 닥쳤을 때에 바로 주님을 찾고 도움을 청하면서도, 그 순간이 지나면 주님이 누구신지,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해 주셨는지 금방 잊어버리는 우리의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일상에서 우리에게 풍부한 은총을 내리시는 주님을 알아 뵙고, 감사드리며, 주님께서 바라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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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전연동 세바스찬 신부님]
<어디다 우리들의 아픔을 맡겨야 하겠습니까?>
사제들 주위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립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사람들 하나같이 각자의 아픔을 가슴에 품고 살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다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각자 나름대로 ‘아픔’을 하나씩은 지니고 살아갑니다. 사제인 저도, 아마도 우리 수녀님들도, 또 부자는 부자대로 아픔을 지니고, 가난한 사람은 또 가난한 사람대로 아픔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픔을 지닌 사람들의 극복하는 방법이 각각 나름대로 입니다. 어떤 사람은 꼭꼭 숨기기만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애써 외면합니다. 그리고 또 어떻게든 헤쳐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극복의 방법으로 돈에 의지하는 사람들, 명예나 권력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 주위에도 아픔을 지닌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아픔을 예수님께 맡기려 합니다. 자신의 아픔을 솔직하게 예수님께 드러낸 것입니다. 이 시대는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모든 아픔을 죄의 결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아픔을 드러내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세상에 공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아픔을 드러낸 결과는 치유와 용서였고, 그들에게는 새 삶이 주어졌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들의 아픔을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숨기겠습니까? 외면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부질없는 물질적인 것에 의지해 보겠습니까? 저는 그저 부족하고 나약한.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제 아픔들을 겸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맡겨 드리렵니다.
예수님께 몰려 가야합니다. 그분은 우리들을 치유해 주시고, 보듬어 주시고 새 삶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어디다 우리들의 아픔을 맡겨야 하겠습니까? 각자의 선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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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손길이 닿은 곳은 그 티가 납니다. 정성의 손길이 닿은 곳은 그 정성이 느껴집니다. 노력이 닿아있는 곳은 그 노력을 볼 수 있고, 사랑이 닿아있는 곳에는 그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구슬땀을 흘린 곳에는 그 땀의 결실이 맺히기 마련입니다. 단순한 청소도 마찬가지입니다. 걸레가 닿았던 곳은 티가 나기 마련입니다.
오늘 독서는 천지가 시작되는 모습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곳마다 그대로 되었다고 성경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그분의 뜻대로 창조되었으며 그분의 숨결과 말씀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것 안에 하느님의 손길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모습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치유가 일어나고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구원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과 고난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걱정과 근심에서 멀어지는 것이고. 어둠과 죄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을 오늘 창세기와 같이 묵상한다면 우리 구원은 새롭게 태어나는 우리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의 손이 우리에게 닿을 때마다 우리는 새롭게 탄생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걸맞은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구원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손길을 늘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웃을 통해서 전해지기도 하고 기도 안에서 전해지기도 하고 사제들을 통해서 전해지기도 합니다.
주님의 손길이 늘 우리를 새롭게 하기를 기도합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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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마르 6,53-5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겐네사렛’이라는 곳으로 들어가십니다. 그곳은 토질이 비옥하고 기름진 평야가 넓게 펼쳐진 곳으로 작물을 심으면 많은 소출을 얻을 수 있었지요. 그 풍족함 덕분일까요? 그 지역 주민들은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던 넉넉한 마음 씀씀이를 보여줍니다. 본인 혹은 자신과 가까운 이들을 치유해주시기를 바랐던 다른 이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자기들 고을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자 그 지방 곳곳을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예수님 가까이 갈 수가 없어 치유의 은총을 받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이들을 안쓰럽게 여기며 그들을 위해 자선을 베푸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도 큰 감동을 받으셨을 듯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아끼는 그들의 소중한 마음과 정성이 헛되지 않도록 당신 앞에 나온 병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치유해주셨을 겁니다.
한편, 이웃을 소중히 여기는 그들의 마음가짐은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입장이나 상황은 생각하지 않고 그분 앞으로 나아가 원하는 걸 청하기 위해 그분을 밀쳐댔던 이전 고을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개 해달라고 그분께 ‘먼저 청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 믿고 기대하는 건 그들의 자유입니다. 또한 그분의 앞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는 것도 그들이 할 수 있는 노력이지요. 그러나 그들에게 치유의 은총을 베푸시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뜻과 의지에 달린 일이라 생각했기에 먼저 그분께 허락을 구한 겁니다.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라고 외쳤던 나병환자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굳게 믿으며 그분 뜻에 철저히 순명하려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런 겐네사렛 고을 사람들의 성숙한 믿음 덕분에,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사람들 모두가 ‘구원’을 받습니다. 주님께 대한 참된 믿음이 없었다면 ‘잘해봐야’ 질병이 낫는 수준에 그쳤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의 ‘주님’이심을 철저한 순명과 전적인 의탁으로 드러냈기에, 주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그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겁니다. 주님은 우리가 믿는대로 이루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겐네사렛 고을 사람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진정으로 바라야 할 것은 당장 몸의 아픈 부위가 낫는 육체적 치유가 아닙니다.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알아보고 기도로 그분의 뜻을 헤아리며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그분과 깊은 일치를 이루어야 하지요. 그것이 우리가 희망하는 ‘구원’이자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그분을 만나고, 그분의 능력이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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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30년 전의 일이 생각납니다. 친한 친구가 첫째 딸을 얻었을 때, 다른 친구들에게 얼마나 딸 자랑을 했는지 모릅니다. 너무 예쁘지 않냐고, 너무 똘망똘망하지 않냐면서 웃으며 친구들의 동의를 구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했었지요.
“정말, 딸 바보다.”
30년이 지나서 정말 오랜만에 이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30년에 우리에게 보여줬던 딸 바보의 모습이 생각나서 물었습니다.
“그 예쁘고, 똘망똘망한 따님은 잘 계신가?”
그러자 이렇게 말합니다.
“그 웬수 때문에 내가 환장하겠다.”
관점이 바뀌면 인간을 보는 눈도 바뀐다고 합니다. 처음 연애할 때는 다 아름답고 멋져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투고 나면 어떨까요? 그렇게 아름답지도 또 멋지지도 않습니다. 나의 원수로만 보입니다. 관점이 바뀐 것입니다.
관점의 변화로 사랑이라는 감각을 키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고 멋지게 보입니다. 그리고 행복해집니다. 행복은 관점의 변화를 통해 이룰 수 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데려왔고,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고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옷자락 술은 예부터 유다인들이 몸에 착용한 ‘성구갑’과 건물 문설주에 붙이는 ‘메주자’와 더불어 일상에 녹아 있는 신앙의 도구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위한 증표였던 것입니다.
이제 옷자락 술에 손을 대는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옷자락 술에 손을 댈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높은 곳에 올라가셔서, “자~ 이제 내 옷자락 술에 손을 대어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려면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여야 합니다. 자기를 낮춘 사람만이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면서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렇게 자기를 낮춰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의 변화를 통해서 구원의 선물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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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들>
마르코 6,53-56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사람들>
살릴 수 있는
사람과
살 수 없는
사람
그 사이에
두 사람
곱게 잇고
살며시 물러나는
올곧은 믿음 지닌
사람이 있네
살리고픈
사람과
살고픈
사람
그 사이에
두 사람
곱게 잇고
살며시 물러나는
풋풋한 희망 지닌
사람이 있네
살리는
사람과
살아나는
사람
그 사이에
두 사람
곱게 잇고
살며시 물러나는
따뜻한 사랑 지닌
사람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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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손이 되어야 합니다>
신부는 고향 본당으로 부임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셨듯이(마르 6,4) 고향에서 환영받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이 고향 성당으로 인사 발령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고향 분들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러다가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할머니께서는 그 신부님의 옛날얘기를 꺼내셨습니다. 오줌을 싸서 체를 뒤집어쓰고 동네를 돌던 얘기며 똥을 싸고…… 고집통이고, 어머니 젖이 모자라 당신 젖을 먹고 컸다는 둥…정말이지 개천에서 용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할머니께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자꾸 자랑삼아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고민 끝에 하루는 할머니께 옛날에 내가 먹던 젖인지 확인 좀 해야겠다고 진피를 떨었답니다. 그 이후 할머니 입에서 다시는 신부의 옛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답니다.
고향에서 예수님께서도 환영받지 못했는데 하물며 감히 누가 환영받겠습니까? 내가 알고 있는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합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인다면 더 큰 혜택을 입을 것인데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옛날이 아무렴 어떻습니까? 지금이 중요하고 또 앞으로 다가올 날이 더 소중한 것이지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긴 과거에 묶여 미래를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땅에 도착하셨을 때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심지어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다 놓는 이들도 있었습니다.(마르 6,54) 그리고 주변 마을까지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마르 6,56) 너도나도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 동네는 셈이 빠른 도시가 아니라 시골이었고, 시골의 순박한 마음이 큰 은총을 입게 하였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그리스도는 이제 몸이 없습니다. 우리의 몸밖에는. 그분에게는 손이 없습니다. 우리의 손밖에는. 그분에게는 발이 없습니다. 우리의 발밖에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눈을 통하여 연민 가득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발로 뛰어다니시며 선을 행하십니다. 그분은 지금 우리의 손으로 사람들을 축복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 받을 것입니다.”(야고 5,15)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앞에 모셔다 놓아진 이들은 단순히 병을 치료받은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소중한 마음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도 확인받은 것입니다. 굽어진 마음, 오그라든 마음, 상처 ¹1입은 마음은 일반 병원에 가서 치료받을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 안에서만이 온전하게 치유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줄 능력이 있는 분이시지만 육신의 치유자로만 보면 부분을 전체로 보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여 있는 중병이 있다면 예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듯이(마르 6,56) 오늘 우리가 구원을 위한 행동을 취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귀찮게 여기지 않으시고 모두 고쳐주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받고 열이 가신 부인은 곧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시중을 들었습니다.(마르 1,31)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님의 자녀가 되고 죄를 용서받아 구원을 얻은 우리도 주님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시중을 든다는 것은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고 기뻐하시는지를 알고 그에 맞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동네에도 가야 한다’하시며 복음을 선포하신 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 마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마땅히 시중을 들어야 한다’하고 고백할 만큼 내가‘구원 받았음’을 확신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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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애정이 있어도 표현하지 못했음을 아쉬워 하며>
+찬미예수님
요즘은 마스크를 써서 어떻게 느껴지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평소 무뚝뚝한 표정의 소유자입니다. 그리하여 보통 저의 첫인상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차가운 성격인 줄 알았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반면 어린 아이들과 있을 때는 조금 다른가 봅니다. 그러다 보니 한 번은, 아이들과 함께 있는 저의 모습을 보고 한 신자분께서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미소를 우리들에게도 보여 달라는 말씀을 하신 적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많이 듣다보니 저의 표정이 차갑고 무뚝뚝해 보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살가운 성격이 아니라서 마음을 표현하기 어렵고 상대가 먼저 다가오지 않으면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본당을 떠날 날이 다가오는 지금 다소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사랑이란 것이 그렇습니다. 마음속에 애정을 품고 있어도 그를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고 결코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제가 성격과 달리 아이들을 바라보면 활기를 띄는 이유는 아이들이 먼저 저에게 마음을 표현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순수한 눈망울로 다가와 저를 안아줄 때, 저의 손을 잡아줄 때 저는 어떻게든 보답을 하고자 스스럼없이 마음을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는 이렇게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향해 마음을 표현하는 군중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겐네사렛 땅에 이렀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합니다.
누군가를 향하여 시간을 내어 찾아간다는 것,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게 해달라는 요청. 이 모두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매우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모습입니다.
군중들이 아무리 예수님을 존경한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표현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직접 찾아가지 않았다면 그들의 마음은 그저 그런 평범한 감정으로 남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오늘의 복음은 서술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적극적으로 드러내 보일 때 주님은 그것을 알아봐 주시고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을 돌아봅시다. 간절히 기도를 하지만 그와 함께 얼마나 사랑을 주님께 드러내 보이고자 애쓰고 있는지요. 바라는 것만 말씀드리고 그것이 이뤄지기를 청하면서 정작 아무것도 안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용서를 할 의지는 없으면서 누군가와 화해하기를 청한다면 그 기도는 결코 이뤄지지 않습니다. 의지가 있고 적극적인 행동이 있을 때 주님이 그 마음을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 어떻게 더욱 주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지, 예수님의 옷에 어떠한 방법으로 손이 닫게 할지 고민하시기 바랍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찾아감은 나의 시간을 희생함을 의미합니다.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게 해달라는 요청은 자신을 굽히는 겸손을 전제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주님께 다가가길 희망하며 오늘도 내일도 사랑을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사람들은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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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마르코 6,56)
손을 대는 촉각은 인간의 감각 중에 가장 강렬합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그리고 신체적 접촉을 하는 촉각은 어느 감각보다 통제도 어렵고 직선적입니다. 품에 안겨 엄마와 친밀한 신체적 접촉을 하는 아기는 가장 행복한 순간을 발견합니다.
정신치료사 버지니아 사티어(Virginia Satir)는 정서적으로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하루에 네 번의 포옹이, 평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덟 번, 그리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열두 번의 포옹이 필요하다’고 하며 촉각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프란시스코 성인은, 겉으로 보이는 미(美)는 선(善)을 담고, 선(善)은 진리(眞理)를 담고 있는 그릇으로 보았습니다. 모든 아름다움을 포옹하는 미(美)와 친밀한 접촉을 통하여 우리 마음이 품고 있는 구원의 진리(眞理)를 체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무분별하고 지나친 오용과 남용 그리고 폭력적인 현대의 접촉 문화는, 심지어 머리를 쓰다듬거나 따뜻하게 서로의 손을 잡는 것조차 두려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폭력적인 촉각의 오남용으로 인해 친밀한 접촉의 소중함은 훼손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품에 안고 쓰다듬어 주시며 친밀한 촉각을 통해서 우리와 따뜻한 영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십니다. 주님의 가슴에 자주 기대었던 요한과 이룬 친밀한 관계처럼 우리와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고자 하는’ 우리의 갈망은 현대문화에서 폭행을 당한 우리의 감각을 위한 영적 치유책입니다. 주님이신 진리(眞理)와 선(善)을 담고 있는 그릇인 미(美)에 손을 대려는 촉각의 갈망은 우리가 참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문이요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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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독서>는 태초의 ‘창조’이야기이고, <복음>은 예수님의 일행이 호수를 건너 온 곳, 곧 겐네사렛 땅에서의 ‘새로운 창조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도 ‘새롭게 창조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설교집).
“그분을 밀쳐대는 이는 많지만, 믿음으로 만지는 이는 적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이 ‘새롭게 창조된 사람’입니다. 그들은 ‘열 두 해 동안 하혈증을 앓고 있던 여인’(마르 5,5-25)처럼, 믿음으로 예수님께 접근해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이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권능으로 새로 태어난 이들입니다. 곧 ‘믿음으로 새롭게 창조된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너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요한 20,27)
사실, 손을 댄 이는 우리지만, 만지신 분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이 우리를 매만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더듬은 것입니다. 당신 손으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쪼물딱거리시고,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낫게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손을 대었을 뿐, 우리를 붙잡으시는 분은 그분이십니다. 우리를 당신 심장으로 끌어당기신 분은 그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알아본 이들’이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이 계신 곳으로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 그들은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분의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청을 들어 주셨고, 과연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는 이들의 표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중재하는 이가 되어야 하고, 또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그들을 위해 간청하고, 또한 직접 예수님을 만지며 그분 사랑의 손길을 반겨 맞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옷을 만지듯, 말씀 속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져야 할 일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지고,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그렇습니다. ‘말씀’이 구원이 흘러나오는 예수님의 옷자락입니다. 사실, 오늘도 우리는 옷자락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몸을 받아먹습니다. 그러니 사랑의 전류가 만땅 충전된 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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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주님!
당신은 옷자락뿐만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십니다.
손을 내미는 이는 제가 아니라 당신이며
저를 붙드신 분도 당신이십니다.
손을 대기만 하면 먼저 어루만지시고
찾기만 하면 먼저 찾아오시는 분도 당신이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이 항상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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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창조도 하시고, 구원도 하시는>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지난 몇 주 그러니까 연중 1주부터 우리는 히브리서를 내내 들었고, 오늘부터 또 몇 주 그러니까 연중 7주까지 우리는 창세기를 듣는데 오늘은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얘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얘기를 우주의 기원 얘기로만 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를 창조하시고 나의 형제들을 창조하신 얘기로 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얘기를 나의 창조와 시작 얘기로만 들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구원도 하실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겐 어떤지 모르지만 창조 얘기가 오늘 제게는 하느님께서 별로 성의 없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나도 너무 쉽게 무성의하게 창조하신 것이 아닐까요?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오늘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너무 쉽게 그러니까 생기라 하면 바로 생기는 그런 구조로 창조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창세기 2장처럼 손도 안 쓰고, 머리도 안 쓰고,
애도 안 쓰고 그저 말 한마디로 창조하신 것 같지 않습니까? 도자기공이 도자기를 만드는 것보다도 더 쉽게 만드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분이나 약하게 태어난 분들은 사랑도 없이 애쓰지도 않고 불량품으로 나를 만들어 내가 이렇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신앙인인 우리는 그러셨을 리 없다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내지르신 분이 아니라고 믿어야 하고, 그것이 진정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고 우리의 올바른 믿음입니다.
지혜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창세기의 표현은 사랑이 없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크신 능력으로 창조하셨음을 얘기하려고 함이고, 앞에서 인용한 지혜서는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다.”라고 얘기하기까지 합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은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받았다.”
이들은 치유만 청했을 뿐인데 하느님은 구원을 주신 겁니다.
그래서 연중 감사송은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인류를 창조하셨듯이 또한 인자로이 인류를 구원하셨나이다.”
하느님은 사랑 없이 창조하지 않으시고, 창조만 하고 사랑을 거두지도 않으시며, 사랑으로 창조하신 당신 자녀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기에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인자로이 구원하십니다.
우리도 오늘 복음의 병자들처럼 이런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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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연결 구원!>
오늘 복음(마르6,53-56)은 '예수님께서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래아 호수 건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데려옵니다.
마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합니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떠오른 말이 '연결 구원'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연결 구원이라는 말이 좀 생소하게 들려오지만, 우리의 구원은 연결되어있고, 모두의 구원으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들려옵니다.
사람들이 많은 병자들을 데려와 예수님과 연결시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연결된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기적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열두 사도들과 수많은 성인들과 연결되어 있고,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독서(창세1,1-19)는 '천지 창조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하늘의 피조물들을 만드시고 "보시니 좋았다." 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선한 피조물들과 연결되어 있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또한 이 선한 피조물들을 잘 보존시켜, 후대와 연결시켜주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오빠인 성 베네딕토와 연결되어 있는 분'이십니다. 베네딕토 성인과 영적 담화를 나누며 수도 생활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성인성녀가 또 계시는데, 바로 아씨시의 영적 동반자였던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입니다.
예수님과 그리고 너와 잘 연결되어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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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 56)
사람의 출발지는
분명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이웃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사람 속에
구원이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가고
사람은
사랑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아파본 사람은
압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도우심과
치유가
간절히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아픈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다 놓는
사람들의
도움이
우리들의
따뜻하고
간절한
고백이 되고
기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서로를
치유하길
바라십니다.
치유는 치유로
이어집니다.
아픔을 모르는
치유가 없고
고통을 모르는
구원이 없습니다.
한 사람을
구원하는
구원에는
인격의 여정이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아픔을
예수님께
데려다 놓는
믿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현실을
하느님께
진실로
맡기는 것입니다.
전부를 맡기는
소중한 날
되십시오.
사람의
오늘이란
하느님께
내맡기는
오늘이 있을
뿐입니다.
내맡김이
진정한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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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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