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세 명의 소녀는 걸그룹을 결성하여 '김시스터즈'라는 이름으로 '미8군'의 무대에 섰습니다. 김숙자, 김애자, 김민자로 구성된 이들은 겨우 10대 초반의 나이였지만,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의 가창력과 퍼포먼스로 관중을 휘어잡았고 미8군무대에서 유명해졌습니다.
한국은 1950년부터 3년간 치른 '6.25전쟁'으로 피폐했기 때문에 연예산업이 거의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연예인들은 미군이 운영하는 쇼무대에서 돈벌이를 해야 했는데, 일제강점기에 '저고리시스터즈'로 활약했던 이난영은 김시스터즈를 한류스타 원조걸그룹으로 키워냈습니다.
김시스터즈의 입소문은 미군 병사들에 의해 전해져서 미국의 한 에이전트와 연결되었습니다. 그리고 1959년, 8개월짜리 공연계약을 맺고 미국 '라스베가스'로 떠났습니다. 해방 이후 최초의 해외진출이며 원조 한류스타의 첫걸음인 것입니다. 어찌 보면 세계 최초의 원조걸그룹으로 평가받는 '슈프림즈'보다도 먼저 도전한 걸그룹인 셈입니다.
월 400달러의 조건으로 시작한 김시스터즈는 1년 후 한 주에 1만5천 달러를 받는 유명인으로 급성장하게 됩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천 달러도 안 되던 시대였지만, 이들은 라스베이거스에서 고액 세금납부 4위에 오를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활동을 시작할 때의 김시스터즈는 17세와 15세로 된 원조걸그룹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아노, 기타, 드럼, 베이스, 색소폰, 백파이프 등 20여 가지 이상의 악기를 다룰 줄 알았고, 가창력과 춤까지 갖추었기에 한두 시간 정도의 공연은 가볍게 할 수 있을 정도의 재능이 있었습니다.
미국 순회공연 등에서 유명세가 더해지자, 당시 유명 쇼프로그램이었던 '에드 설리번 쇼'에도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에드 설리번 쇼는 비틀즈가 세계무대로 진출할 때 처음 출연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김시스터즈는 비틀즈보다도 많은 22회를 출연한 한류스타였습니다
한류스타 원조걸그룹 김시스터즈는 '동양에서 온 마녀'라는 애칭을 얻으며 유명 잡지인 '라이프'지에도 등장했습니다. 특히 '찰리브라운'이라는 곡은 흥겨운 락앤롤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국내 뉴스 중에는 빌보드 7위에도 랭크되었다는 기사들이 있지만, 실제로 빌보드차트에서는 찾을 수가 없으니 좀 더 조사되어야 하겠습니다.
김시스터즈는 이후 14년 간 미국에서 연예활동을 하다가 멤버의 결혼과 함께 해체되었습니다. 저고리시스터즈의 이난영이 키워낸 최초의 한류스타인 이들 중, 김숙자씨는 미국에, 김민자씨는 헝가리에 70이 넘게 정정하며 김애자씨는 폐암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인기 절정의 걸그룹...가운데가 윤복희
미니스커트의 원조 가수 윤복희
가수 이미자
밀짚모자, 목장아가씨의 박재란
가수 현미
1971년 미스코리아의 월남 위문 공연
산장의 여인의 가수 권혜경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있어도 곱뿌없으면 ...."의 살살이 서영춘
배우 최은희
코미디언 배삼룡과 박시명
가수 남진
당시 최고 인기 가수였지만 월남전에 참전했다.
가수 이한필
위문공연시 빠질수 없는 고고춤 & 트위스트.
조국에서 온 공연단과 신나게 춤을 추고 있는 파월장병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