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하루가 100년인 듯, 100년이 하루인 듯
이영주
고난의 길을 헤치며 살아온 우리의 윗세대 어머니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내가 살아온 걸 책으로 내면 몇 권이 될지도 모른다.’라고. 시어머님의 인생 여정 역시 백 년이나 되는 인생길을 굽이굽이 돌아왔으니 대하소설인들 다 담아낼 수 있을까.
《하루가 100년인 듯, 100년이 하루인 듯》은 백수를 맞아 발간한 시어머님의 문집 제목이다. 어머님의 백 세를 기념해 잔치는 물론, 어떤 선물보다 100년의 삶을 정리한 기념문집이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부모님은 결혼해서 육십 년 넘게 해로하시고, 일곱 남매에, 손주가 스물일곱 명, 증손주 스무 명이다. 두 분이 시작해서 63명의 대가족으로 번창했으며, 건강하게 백수를 맞이하셨으니 이보다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까. 무엇보다 감사한 건 모두 큰 탈 없이, 각자의 몫을 하며 반듯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어머님은 태어났을 때 이미 일제강점기였고, 한국전쟁, 현대사의 주인공으로 격랑의 시대를 살았다기보다 살아내셨다. 어머님은 굴곡진 삶의 애환을 틈틈이 노트에 빼곡히 적어 놓으셨다.
가장 젊은 막내 시동생(62세)이 문집발간 책임을 맡겠다고 나섰다. 문명의 이기 스마트폰. 그의 힘은 대단했다. 시공을 초월해서 온 가족이 실시간으로 동시에 상의하며 아이디어를 냈다. 집집에서 간직하고 있던 사진이나 편지 등 자료를 일사불란하게 단체 카톡에 올려주며 혹은 등기우편으로 보내왔다. 큰 시누이가 어머님께 올리는 편지를 싣겠다고 했다. 철부지 시절엔 어머니를 오해하며 섭섭한 마음도 많았었다고. 하지만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삶은 물론, 한 여성으로서 걸어온 인생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고맙다는 고백의 편지였다. 역시 동생들의 마음을 대변한 맏이다웠다.
문집에는 어머님이 쓰신 글이 대부분이지만 자식들과 주고받은 편지와 사진, 손자 손녀들의 편지를 실었으며, 4대에 걸친 가족의 탄생부터 중요한 행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글 내용에 맞추어 사진을 배치하고 사진 밑에는 간단한 설명을 곁들였다.
어머님 친필 편지들과 글, 돌아가신 아버님의 육필도 몇 편 넣어 자손들이 부모님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그야말로 가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역사책이다.
어머님은 자손들에게 당부 말씀이나 입학, 졸업, 취업, 결혼 등 특별한 경우엔 꼭 축하금과 함께 편지로 마음을 전하셨다. 며느리들에게도 상의할 일이나 부탁, 서운한 마음도 편지를 이용하셨다. 말보다는 글의 힘이 훨씬 강했다. 어머님의 진심은 글을 통해 전달되었고 자연스럽게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문집의 얼굴인 표지를 장식할 제목은 전 가족이 참여하도록 공모했다. 며칠 공론 끝에 예선을 통과한 3가지 제목을 놓고 투표를 했다. 그 결과 내가 지은 제목이 채택되었다. 표지 그림은 미술 교사인 조카가 맡았다. 화가인 막내 시누이의 그림도 넣었다. 그림 속 어머님은 연분홍 한복차림의 중년에 접어드는 모습이다. 정원 꽃밭에 앉아서 화사하게 웃고 계신다. ‘백 년이 하루인 듯’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순간이지 싶다.
이번에 문집을 내면서 형제들의 새로운 면을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 다들 조용한 성격에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의외였다. 카톡이 불이 날 만큼 의견을 내고, 귀찮을 정도로 수정을 요구했다. 누락 된 사진을 속달등기로 보내오며 하루만 기다려달라는 등 열정적이었다.
7남매가 공동 목표를 갖고 열중하는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결혼해서 45년을 살아오는 동안, 가족의 성격을 거의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정작 내면은 보지 못하고 있었다니. 사람들은 흔히 보이는 게 다인 줄 알며,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는 실수를 저지르며 살아간다. 내가 ‘과묵한 가족’이라고 별명을 지어 불러왔는데 하나같이 수다쟁이였다. 가족사를 정리하려니, 의견 충돌이 일어날 법도 했다. 그러나 서로 양보하고 배려,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일 처리를 해나가는 모습에서 가족에 대한 자부심이 생긴 것도 큰 성과다.
어머님의 이야기는 윗대부터 시작되어, 외조부께서 학교를 세울 정도의 부농에서 탄생과 성장기를 거친다. 엄마를 잃고 언니만 의지하던, 어린 두 여동생이 울며 매달리던 신행길이 오죽했을까. 채 마르지 않은 눈물로 들어선 시댁이 무밥과 시래기밥으로 끼니를 이어가는 궁핍한 가정일 줄이야.
그런 환경에 실망하고 좌절하면서, 형제간의 갈등과 우애를 반복하며 세월이 흐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7남매를 낳아 기르며 교육, 결혼의 고충과 보람은 물론, 무수히 많은 선택과 판단의 갈림길에서 막막하고 불안해서 노심초사했던 시간이 흘러간다. 자녀들의 학비를 마련하려니 가슴이 타들어 가던 나날들, 하숙생을 두고, 밤이면 삯바느질로 밤을 새우기 일쑤였던 젊은 시절의 고달픈 생활도 생생하게 담겨있다.
시대의 격동 속에서 위기를 극복하며, 인생의 고비마다 얼마나 지독한 순간들을 많이 겪어내셨는지. 원통하고 억장이 무너지는 절망과 막막한 상황들을 오직 ‘울었다’라는 단어 하나로만 표현하셨다. 처절한 마음을 어떤 말로 어떻게도 나타낼 수 없으셨나 보다.
어머님은 글쓰기도 좋아하지만, 책 읽는 것도 무척 좋아하신다. 내 수필집을 다 외울 정도로 많이 읽으셨다. 그러자니 책이 닳고 부풀어 올라 해어진 건 물론이고, 책장마다 아래쪽 귀퉁이가 누렇고 둥그렇게 들 떠 있다.
그러니 당신 문집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지나온 인생길을 몇 번이고 되짚어 보실 게다. 어느 순간은 사무치게 되돌아가고 싶은 시절도 있으시리라. 반면 아무리 젊음이 다시 온다 해도 두 번 다시 가기 싫은 길이 눈에 선하여 만감이 교차하시겠지.
문집이 탄생하자 봉투에 담아 어린 손녀, 손자에게 두 손으로 건네주었다. 잘 읽어보고 간직해서 너희들이 자식을 낳으면 보여주고 대대로 물려주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그 책 속에는 우리 딸아이가 74세 할머니 생신을 맞아 쓴 편지도 있다.
‘할머니 생신 축하드립니다. 할머니 오래오래 사세요. 지금은 작은 선물밖에 못 드리지만 100세 생신에는 큰 선물을 해드릴게요.’라는 약속이었다.
딸아이는 할머니 백세 큰 선물은 바로 자기가 낳은 딸과 아들이라 했다. 백수연에 두 아이를 예쁘게 단장시켜서 선물용 빨간 리본을 달아 할머니 품으로 데리고 갈 거라 했다. 100세 기념 선물들이 증조할머니를 꼭 안아드리고, 한 달 내내 연습한 재롱을 피웠더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백수연 모든 준비를 다 마쳤었는데 코로나19가 모든 걸 변화시켰다. 되돌아갈 수 없는 시간은 안타까움으로 남았다.
기념문집을 읽어보노라니 어머님의 백수를 축하하기 위한 자식들의 선물이 아니라, 어머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커다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프리카 속담에 ‘한 사람의 노인이 죽는 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 있다. 오랜 인생의 경험을 통해 노인들이 갖게 되는 경륜과 지혜가 얼마나 소중한 보물인지 깨닫게 해주는 말이다.
어머님이야말로 살아서 움직이는 도서관이 아닐까. 어머님은 아직도 도서관에 채워야 할 못다 한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있다. 어찌 문집 한 권에, 백 년 동안 그때마다 의미가 있던 일들을 모두 담을 수 있을까. 그 도서관에는 어머님께서 온몸으로 겪었던 끝없는 삶의 편린들과 100세 노인이 된 후 살아가는 새로운 생활이 책장을 장식해 가고 있다.
온 가족이 한마음으로 문집을 만들었던 일도 어머님이라는 도서관에 앞자리를 차지하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