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로지절(白露之節)
구월에 들어서자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도 이제 그 길고 긴 꼬리를 내리는 즈음이다. 가을의 문턱이라지만 아직 늦더위의 여진은 남은 듯하다. 아침저녁은 서늘하나 한낮 기온은 30도 가까이 올라 야외 활동에선 땀을 흘릴 정도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 교무실에선 이틀 동안 에어컨이 고장 나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오히려 수업에 들어간 교실이 냉방이 잘 되어 시원해 지낼만했다.
24절기는 북반구 아시아 동북지방 한반도 일대에서 계절의 순환성을 명확히 드러낸다. 요즘엔 환경오염과 기상이변으로 해당 절기에 어긋나는 기후현상이 더러 나타나나 이전만 하더라도 해당 제 절기 날짜에 들어맞는 기후현상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계절의 순환은 이백 년 전 조선후기 다산의 둘째아들 정학유가 남긴 것으로 전하는 ‘농가월령가’에도 절기별로 뚜렷하게 전해 온다.
“팔월이라 중추가 되니 백로 추분 절기로다. 북두칠성 국자 모양 자루 돌아 서쪽을 가리키니 서늘한 아침저녁 가을 기운 완연하다. 귀뚜라미 맑은 소리 벽 사이 들려오네. 아침에 안개 끼고 밤이면 이슬 내려 온갖 곡식 여물어서 만물 결실 재촉하여 들 구경 나가보니 힘들여 일한 공이 나타난다. 여러 곡식 이삭 패고 곡식에 알이 들어 고개 숙여 서풍에 익는 빛은 노란 구름 이는구나.”
바로 앞 인용부호 단락은 정학유의 농가월령가 팔월 가락 일부다. 음력 팔월을 이어 구월에서는 “구월이라 계추 되니 한로 상강 절기로다. 제비는 돌아가고 떼 기러기 언제 왔노. 벽공에 우는 소리 찬이슬 재촉한다. 만산은 풍엽으로 연지를 물들이고 울밑에 황국화는 추광을 자랑한다. 구월구일 가절이라 화전으로 천신하세. 질서를 따라가며 추원보본 잊지 마소…”로 이어진 구절이다.
해마다 신춘은 우수(雨水)로 시작해 만춘은 곡우(穀雨)로 끝냈다. 올봄에도 몇 차례 엄습하던 미세먼지의 기세를 뚫고 여름이 찾아왔다. 그 여름을 넘기는 더 힘들었다. 연일 계속된 열대야와 폭염 경보로 유난히도 무더웠던 여름을 보냈다. 그 여름도 순환하는 계절 앞에선 더 이상 왕좌로 버틸 수 없어 가을에게 항복하고 있다. 입추 이후 처서를 지나면서 가을이 배턴을 넘겨받았다.
앞서 봄 절기엔 비 우(雨) 자가 든 우수와 곡우가 있다고 했다. 그 건너편 가을 절기엔 이슬 로(露) 자가 든 절기가 두 개다. 그게 바로 백로(白露)와 한로(寒露)다. 백로 즈음이면 밤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 풀잎에 이슬이 맺히는 시기다. 백로 한 달 뒤 한로는 공기가 더 서늘해짐에 따라 이슬이 찬 공기를 만나 서리로 변하기 직전의 시기다. 바야흐로 영롱한 이슬이 맺히는 때다.
이즈음 내가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를 변주하여 남긴다는 부제를 단 시를 꺼내보련다. “풀이라고 / 마구 뜯지 마세요. / 잡초라고 / 마구 밟지 마세요. // 그대는 / 언제 한 번 / 영롱한 이슬을 달아보셨나요. // 풀이라고 / 마구 베지 마세요. / 잡초라고 //마구 뽑지 마세요. / 그대는 / 언제 한 번 // 야무진 씨앗을 맺어보셨나요.” 나의 졸시 ‘그대는 언제 한 번’의 전문이다.
도심 생활에선 자연의 계절의 변화를 쉬 감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주변 생태 환경에 관심을 조금만 가지면 계절이 오가는 낌새 정도는 알 수 있다. 며칠 전 초저녁 학교 화단과 울타리에서 뚜렷이 들려온 귀뚜라미 소리에서 가을이 가까이 왔음을 실감했다. 그렇게 시끄럽게 울어대던 애매미소리는 뚝 그치지 않았는가. 바야흐로 이제 영롱한 이슬이 내리는 절기를 맞았다.
도심 여기저기 공원이 있기는 하나 잔디를 예초기로 깔끔히 정리해두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슬을 발견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물색해 놓았다. 충혼탑 사거리 극동방송국 앞 너른 공한지는 지난 늦은 봄날 꽃양귀비가 저물고는 잡초로 우거졌다. 강아지풀이 무성히 자라 이삭을 내밀었다. 바람 불지 않고 구름이 끼지 않은 밤을 샌 이른 아침 그곳으로 가보련다. 내일이나 모레 아침에. 16.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