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필♡
생일날의 희비
신 영 애
예로부터 사람이 세상에 태여난 날은 축하의 날이였다. 첫돐 생일부터 해마다 돌아오는 생일날에는 조용히 자축(自祝)을 하던지 친척, 친지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떠들썩하게 쇠던지 아무튼 평범하게 넘기지 않는 축하의 날로 되여 있다. 가끔 곤경에 빠지거나 다른 사정으로 생일을 개 보름 쇠듯이 지낼 수도 있지만 이런 경우에도 누구든 그날이 자기 생일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작년에 나는 50돐생일을 쇠였다. 내 생일은 음력으로 1월 28일 인데 그날은 공교롭게도 3.8국제부녀절과 겹쳐있었다. 이것도 복이라면 복이라고나 할가? 아무튼 나는 50돐생일을 아주 즐겁게 쇠였다.
친구들과 함께 호화로운 식당에 가 푸짐하게 차려놓고 너도나도 축하주(祝賀酒) 권하는 대로 받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해서 2차 노래방, 3차 발안마, 4차 양고기산적집에까지 다녀오고나니 어느덧 열두시가 넘었다. 결혼해서 지금까지 외박 한번 한적 없지만 그날만은 어쩌다 밖에서 밤을 샜다. 녀자명절이자 또 생일날였으니 남편도 아무 말없이 너그러이 보아 주었다.
참 세월이 많이 좋아졌다!
아낙네들도 지금은 남자들에게 뒤질세라 흐트러져도 슬쩍 눈감아주는게 요즘 세태이다. 하긴 요즘따라 생일이라면 웬지 동네가 분주해진다. 어른들 생일상은 태반이 음식점에서 손님을 모시고 치러지는가하면 밥술이나 뜬다는 집들에서는 애기들의 첫돌 생일잔치까지도 례식장에 가서 치른다. 생일선물또한 입이 쩍 벌어진다. 세상물정 모르는 코흘리개한데 목걸이며 반지, 손목걸이까지 척척 걸어주고 끼워준다. 돈을 펑펑 팔아가면서 프로가수들까지도 청하여 분위기를 돋군다. 결혼식 못지 않게 흥성거린다.
나의 지나간 생일날들을 되돌아보면 즐겁고 행복했던 추억들도 많지만 또 슬프고 쓸쓸했던 생일날도 있었다.
나는 어린시절에 생일을 쇠여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째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여난 까닭에 생일날은 아무런 기념일도 아닌, 나와 별로 상관없는 날들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풀떼기죽도 천신하기 어려운 형편에 부모들이게 코흘리개 막내딸의 생일을 챙겨줄 여유가 있었으랴.
그래도 결혼하고 나서 남편이나 시어머님이 나의 생일날을 꼭꼭 기억해서는 식당 혹은 집에서 맛있는 음식상을 차려주어 즐겁게 생일을 쇠군 하였다. 살림형편이 좋아지면서 남편은 내 생일날을 꼭 기억해두었다가는 귀중한 목걸이. 반지. 귀걸이. 화장품 등 예쁜 선물을 사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여 나는 늘 무지무지 행복하였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고 때론 자상하던 남편도 내 생일을 까맡게 잊어버릴 때가 있었다. 재작년의 일이다.
나는 내 생일날이 가까워오자 며칠 전부터 이번 생일에는 남편이 어떻게 생일을 쇠여주고 또 무슨 선물을 해줄가 하고 머리를 굴리면서 마치도 설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철부지계집애처럼 응근히 생일날만 기다렸다. 그런데 남편힌테서는 생일 전날에도 생일날아침에도 아무런 티도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점심에는 밖에서 손님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숫제 집에 돌아오지도 않았다. 행여 저녁에 어느 근사한 식당에 예약해 놓고 전화를 하려는걸가 하고 애타게 기다렸으나 감감 무소식이였다. 남편은 밤 9시가 넘어서야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술 냄새를 확확 풍기면서 돌아왔다. 나는 너무도 어처구니 없어 도끼눈을 하고 노려보았다.
《당신 왜 그래? 갑자기?》
남편이 어정쩡해서 묻자 나는 더구나 발끈하였다.
《당신 눈엔 내가 거지발싸개만도 못하지? 말 좀 해봐요!》
남편은 새파랗게 독을 쓰는 내 기세에 한참 뒷수더기를 긁적이더니 그제야 무릎을 탁 쳤다.
《아차! 오늘이 당신 생일이구나, 그치?》
나는 대답대신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앵돌아져서 누워버렸다.
《금년도 9.3절 민속축제 계획서를 한시 바삐 작성해 올리라는 독촉이 불같아서 깜빡했어, 미안해! 미안하다구!》
남편이 아무리 구슬려도 나는 온밤 심통을 부렸다. 나는 아예 베개를 들고 다른 방으로 건너가 별거를 선포했다. 하지만 이럴 경우 남편은 더 빌지도 말리지도 않는다. 그때뿐인 나의 성격을 손금 보듯 잘 알고있기때문이다.
그 이튿날 남편은 토라진 내 마음을 풀어주려고 최고급 호텔에다 푸짐한 생일상을 차리고 커다란 꽃바구니를 안겨주는 재미나는 촌극(寸劇)을 벌린 적도 있었다.
외국에 가 있는 외동아들녀석도 엄마 생일날을 잊지 않고 꼭꼭 전화로 축하 인사를 보내오군 한다.
어느덧 지천명의 나이가 되였지만 해마다 돌아오는 생일날이 즐겁고 행복해서 나는 늘 마음속으로 살아가는게 고맙기만 하다.
오십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이런 저런 연고로 생일날을 쇠지 못한 나날들이 많았지만 14살 되던 그해의 생일날은 지금도 아픈 기억으로 남아 도무지 잊혀지지를 않는다.
1969년, 그해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던 것 같다. 혹한의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생일날 아침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연길 동쪽에 자리 잡은 동비행장에(그 때는 동비행장이라고 불렀음)가서 옥수수들을 말리는 일을 하게 되였다. 그때 우리는 소학교를 금방 졸업한 조무래기들이였다. 그때 수십만 연길시 시민들의 주식은 옥수수였다. 지난 가을에 수분이 많은 옥수수를 창고에 쌓아두었기에, 봄이 되여 날씨가 따뜻해지기만 하면 쉽게 변질할수 있었다.
그 시기 우리 집 살림이 가장 어렵던 시기였다. 아침을 먹고 나면 점심을 이어대기 어려웠다. 어머니는 이 막내딸의 생일날에도 도시락을 사줄 일이 막막하여 한숨을 짓었다. 그렇다고 일하러가는 걸 막을 수도 없어 돌아앉아 눈꿉만 찍었다. 15리 길이나 되는 동비행장에서 점심시간에 집까지 온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였다. 생각하던 끝에 어머니는 집에 있던 통 옥수수알 한 사발을 삶아가지고 나의 도시락에 넣어주면서 굶기보다는 낫을 것이니 그거라도 꼭 먹으라고 당부하였다. 철이 없었던 나는 싫다고 떼를 쓰다가 억지로 넣어 주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가지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동학들은 인부들의 림시휴식처로 쳐놓은 허술한 천막안에 오구작작 모여들어가 가지고 간 도시락들을 진설하고 먹느라고 야단이지만 나는 도무지 그 삶은 통 옥수수알이 담긴 도시락을 내놓을 수 없었다.
나는 추워서 와들와들 떨면서도 텐트안에 들어가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동학들이 점심을 다 먹을 때까지 밖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한참 떠들어 대면서 점심을 먹던 동학들은 그제야 내가 자리에 없다는 걸 이식한 모양이다. 여기 저기에서 동학들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왔지만 나는 들은 척 않고 꽁꽁 숨어있었다.
추운 바깥에서 오전 내내 일하고 온 몸이 언데다가 아침밥마저 먹지 못한 채 쪼그리고 앉아있을라니 눈앞이 아찔해나면서 한참동안 앞이 보이질 .않았다. 배안에서는 쉴 새 없이 꼬르륵 꼬르륵 소리가 났다. 나는 너무도 서러워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어데라없이 도망치고 싶었지만 집과 너무 멀리 떨어져있는 곳이라 또 오후에 계속 일 해야 하였기에 어서 점심시간이 끝나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날 점심시간은 왜 그렇게 지지리 길었던지····· 나는 지금도 안데르센의 동화《성냥 파는 녀자애》에서 나오는, 그 굶고 얼고 지쳐서 크리스마스이브에 죽어간 녀자애의 모습이 머리 속에 떠1969년 음력 1월 28일 내 생일날의 자기와 겹쳐지군 한다.
오후 일을 겨우 끝내고 어깨를 뚝 떨어뜨린 채 맥없는 다리를 질질 끌면서 집에 들어서니 어머니가 해쓱하게 질린 나의 얼굴을 보고 엎어질 듯 달려왔다.
《에구! 이것아 내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 하루 종일 굶었구나! 생일날인데 엄마가 너무너무 미안하구나!》
어머니는 나를 부등켜안고 하염없이 락루하였다! 나도 너무 서러워서 엉엉 울었다. 모녀간이 붙들고 울기 시작하자 온 집안은 마치 초상난 집처럼 부산하였다.
그날 저녁 나는 끝내 드러눕고 말았다. 된 감기에다 영양실조가 겹쳐 며칠 내내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그랬다. 생일날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던 그 시절에는 좋은 음식이 아니더라도 그냥 배만 채울 수 있는 음식만 있으면 다행이였다. 그 때는 닭알 하나에 입밥을 실컷 먹어보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소원이였다. 국가에서 주는 식량에 입쌀을 한달에 사람 당 한근 정도 밖에 배급하지 않은 세월에 언제 그 소원을 이를수 있었겠가. 그 당시 우리 집처럼 어렵게 지냈던 사람들이 많고도 많다.
나는 내 동년시절에 그 서글펐던 생일날이 잊혀지지 않기에 자식에게는 그런 아픔을 맛보이고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들애 생일날이면 그 어느애들보다 못하지 않게 잘 쇠여주었다. 그 애가 좋아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돈을 아끼지 않고 다 사주었다. 첫돌 생일부터 8살까지는 생일날이면 사진관에 가서 기념사진을 한장씩 꼭 꼭 찍어주었다. 나는 연길에서 이름 있는 사진사 딸로 태여 났어도 동년 시절에 남긴 사진이라고 단 한 장도 없다.
슬픔이 무엇인지, 괴로움이 무엇인지, 배고픔이 무엇인지, 추위가 무엇인지 모르고 행복하게 자란 우리 아들 녀석과 지난날 어렵게 살았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할라치면 어느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케케묵은 소리를 한다고 코웃음을 치군 한다.
하지만 나는 소녀시절의 이 아픈 기억이 영원히 잊을수 없다 . 아마도 내 눈에 흙이 들어가는 날 까지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런 아픔이 나를 지금까지 열심이 살아가도록 떠 밀어준 원동력으로 되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아픔이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오도록 나를 떠 밀어준 에너지였다. 또한 오늘의 행복을 더욱 소중히 여길 수 있게 해준 스승이였다.
생일날,오늘에와서 그것은 어려웠던 옛날을 추억하면서 오늘의 행복을 음미하는 자리이다.
그리고 더 나은 행복을 가꿔가자고 약속하는 즐거운 파티이다.
그래서 나는 지꿏게도 생일날을 기다린다. 남편, 자식 그리고 나의 생일까지.
2005년 10월 초고
2006년 3월 수정.
2007년 청년생활 제 7기에 실림
첫댓글 그런 케케묵은 소리를 열심히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답니다.같은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죠.지지리 어렵기만 하던 년대를 되돌아보는 좋은글이였습니다. 잘읽었습니다.
생일날 챙겨 주시는분은 따로 있나봅니다. 전 생일을 잘못챙겨서.... 즐감하고갑니다^^
신선생 또 이쁜글 등장해 주셨네. ... 잘 보고 느끼고 감니다.
추억의 좋은글 즐감했습니다.
저의 글 읽어주시고 조언을 주신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