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9년 크롬웰은 왜 영국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했을까?
절대왕권 신봉 찰스 1세, 의회와 대립 끝 무력충돌
의회 동의 없이 선박세 과도하게 부과
스코틀랜드 교회에 국교회 기도서 강요
반발하자 군대로 무력 진압하려다 실패
왕당파와 의회파로 분열 내전 상태로
찰스 1세의 처형 장면(1649년)
차가운 바람이 뺨을 때리고 칙칙한 구름이 하늘을 잿빛으로 뒤덮고 있던 1649년 1월 30일, 수많은 군중이 국왕의 궁전인 화이트홀(Whitehall) 앞에 운집해 있었다. 하나같이 모두 음울하고 불안한 표정이었다. 다름 아니라 당일 그곳에서는 영국의 국왕 찰스 1세(Charles I·재위 1625~1649) 처형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얼마 전 그는 국가에 대한 반역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바 있었다. 이때 국왕에 대한 반대세력을 대표한 인물이 바로 군대의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1599~1658)이었다.
사후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렸으나 1899년 웨스트민스터 국회의사당 구내에 동상이 세워지면서 의회 수호자로서의 공적을 인정받은 바 있었다. 그렇다면 유럽에서 왕권신수설에 기초한 절대왕정이 무르익고 있을 즈음에 왜 영국에서는 정반대로 국왕이 반역죄로 처형당하는 일이 벌어졌을까? 이러한 과정에서 과연 크롬웰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그리고 국왕의 처형사건이 이후 영국사 및 유럽사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이 글은 바로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는 한 시도다.
사건의 역사적 배경
올리버 크롬웰
찰스 1세
찰스 1세가 처형당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당대에 영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시기에 영국에서는 내전과 혁명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격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찰스 1세를 중심으로 한 왕당파와 하원을 중심으로 한 의회파 간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무력 충돌이 있었다.
사건의 직접적 계기는 국왕 찰스 1세의 전제적 통치였으나 그 뿌리는 이미 그의 선대 제임스 1세 통치기부터 뻗어내리고 있었다. 원래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던 제임스에게 어느 날 잉글랜드의 왕위라는 ‘횡재’가 떨어졌다.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後嗣) 없이 죽음으로써 왕위가 스튜어트 왕가의 제임스에게로 넘어간 것이었다. 졸지에 그는 제임스 1세로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아우르는 영국의 단독 통치자로 등극했다.
그런데 복잡한 잉글랜드의 정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제임스 1세는 즉위 후 계속 통치상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다. 그는 두 왕국을 하나의 완벽한 브리튼 왕국으로 통합해 통치하고자 의도했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단지 대외관계에서만 머물지 않고 곧 법률과 의회, 교회 문제로까지 전방위적으로 확대됐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잉글랜드에서는 국왕 제임스의 궁정세력과 의회 간에 종교적·정치적 갈등이 점차 첨예화됐다.
이들 중 가장 핵심적인 당면 문제는 종교였다. 당시 영국에는 그리스도교의 여러 종파가 혼재해 있었다. 넓게 보아 스코틀랜드는 장로교, 잉글랜드는 국교회(성공회)였으나 현실적으로 잉글랜드의 종교 상황은 매우 복잡했다. 일단 국교회는 국왕을 수뇌로 하기에 거의 전적으로 국왕 편이라고 볼 수 있으나 다른 종파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가 매우 종교적인 시대여서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기에 정치·군사 측면도 종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우선, 국교회를 중심으로 맨 끝에 흔히 ‘청교도’라고 불리는 퓨리턴들(Puritans)이 있었다. 칼뱅의 교리를 추종하는 이들은 단순한 예배의식, 설교의 중요성, 가톨릭적인 의식의 폐지 등을 요구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가톨릭교도가 있었다. 아일랜드 및 유럽 대륙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이들은 새로운 국왕은 엘리자베스 여왕보다 자신들에게 좀 더 관용적일 것으로 기대했다. 비록 국교회가 가톨릭과 결별하면서 탄생했으나 수장만 다를 뿐 제반 측면에서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위 초기에는 가톨릭 억압정책을 펼쳤으나 가톨릭국가인 스페인과의 친선을 도모할 목적으로 억압정책에서 크게 후퇴했다.
종교 문제에 이어서 제임스 1세는 세금 문제로 의회와 대립했다. 자신의 낭비벽과 총신들에 대한 연금 남발로 국가재정이 쪼그라들자 제임스는 의회의 동의도 없이 새로운 세금을 마구 부과했다. 국왕의 전횡에 중세 이래 나름대로 왕권 견제의 역사를 자랑해온 잉글랜드 의회가 가만있을 리 만무했다. 사실상 그동안 잉글랜드 국왕들은 중요한 국가정책을 시행할 때 나름대로 의회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모습을 보여왔다. 하지만 이러한 잉글랜드의 정치적 속성을 이해하지 못한 데다 유능한 신하도 얻지 못한 제임스는 계속 의회와 불화를 겪었다. 결국에는 의회 없이 제반 정책, 특히 재정정책을 밀어붙이는 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국왕 주변에 외모만 멀쩡할 뿐 경륜은 부족한 인물들이 몰려들어 국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곧 각종 추문과 부패가 만연하게 됐다.
제임스의 패착은 대외관계에서도 드러났다. 1618년 독일지역에서 이른바 30년 전쟁이 터지면서 즉위 후 평화정책을 지속해온 제임스는 기존의 외교 노선에 일대 변화를 모색했다. 영국민들의 국론이나 의회의 입장과 달리 그는 가톨릭 진영의 대표국가인 스페인과 외교관계를 맺고자 했다. 그 방편으로 왕세자 찰스와 스페인 마리아 왕녀의 결혼을 추진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체면을 구긴 제임스는 외교정책에 대한 의회의 관여를 허용하고 1624년에는 스페인에 선전포고까지 했으나 이미 국왕에 대한 여론은 악화된 상태였다.
1625년 3월 왕세자가 찰스 1세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부친과 달리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에 예술적 안목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통치자에게 필요한 식견과 유연한 태도는 매우 부족했다. 선왕 제임스가 시도해 의회의 거센 반발을 초래한 국왕의 절대권 확립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제임스가 강온 양면적 태도를 취한 데 비해 찰스는 강경 일변도로 나아갔다.
우선, 그는 재정 문제를 둘러싸고 의회와 끊임없이 대립했다. 왕실이 의회의 동의도 없이 계속해 새로운 세금을 부과한 것이 문제였다. 이 중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선박세(ship money)였다. 원래 선박세는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 방어용 선박을 마련할 목적으로 해안 도시들이 필요시 납부해 오던 세금이었다. 그런데 찰스는 이를 평시에 매년, 심지어 내륙 지역에까지 부과했다. 이는 의회는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의 강한 반발을 초래했다.
종교 문제에서도 국왕은 불협화음을 자극했다. 그는 윌리엄 로드 대주교를 앞세워 교회의 권위와 주교제를 강조하고 예배의식을 중시하는 등 국교회에 가톨릭적인 요소를 강화하는 조치들을 취했다. 이에 대해 특히 퓨리턴들이 반발하자 성실청 법정을 설치해 비판자들을 잔인한 형벌로 탄압했다.
만일 찰스가 이 정도 선에서 멈추었다면, 아마도 그는 처형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서 패착이 이어졌다. 결정적으로 잉글랜드에서 채택하고 있던 국교회의 새로운 기도서를 장로교도가 대부분인 스코틀랜드 교회에도 강요했던 것이다. 발끈한 스코틀랜드인들이 거국적으로 들고 일어났다. 그러자 이를 무력으로 누르고자 1639년 국왕은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진격했으나 참패했다. 오히려 이듬해 스코틀랜드 군대가 잉글랜드 남쪽 깊숙이 밀고 내려왔다.
이제 군대 동원에 필요한 전비 마련이 급선무가 되면서 찰스는 하는 수 없이 의회 소집 요구를 수용했다. 1640년 11월에 소집된 이 의회는 이후 무려 20년 동안이나 존속했기에 일명 ‘장기의회’라고 불린다. 개원 후 국정을 농단한 국왕의 최측근들에 대한 단죄에서 한목소리를 낸 의회가 종교개혁 수위를 놓고서는 강온파로 분열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밀리에 군사 모집을 지속해온 찰스가 런던을 벗어나 왕당파가 우세한 잉글랜드 북부로 이동했다. 급기야 잉글랜드는 1642년 여름 이후 왕당파와 의회파 간에 내전(Civil War) 상태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