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도(昌原道)
-남해시초(南行詩抄)
백석
솔포기에 숨었다
토끼나 꿩을 놀래 주고 싶은 산(山) 허리의 길은
엎데서 싸스하니 손 녹이고 싶은 길이다
개 데리고 호이호이 휘파람 불며
시름 놓고 가고 싶은 길이다.
괴나리봇짐 벗고 땃불 놓고 앉아
담배 한 대 피우고 싶은 길이다
승냥이 줄레줄레 달고 가며
덕신덕신 이야기하고 싶은 길이다
떠꺼머리 총각은 정든 님 업고 오고 싶은 길이다
(『조선일보』, 1936.3.5.)
[어휘풀이]
-솔포기 : 가지가 다보록하게 퍼진 작은 소나무
-엎데서 : 엎드려서
-땃불 : 땅불, 화톳불
-떠거머리 : 장가나 시잡 갈 나이가 넘은 총각이나 처녀가 땋아 늘인 머리
[작품해설]
이 시는 4편의 『남해시초(南行詩抄)』 중 첫 번째 작품이다. 백석의 기행시(紀行詩)는 ‘남행시초’ 4편, ‘함주시초(咸州詩抄)’ 5편, ‘서행시초(西行詩抄)’ 4편 등 세 부류가 있다. 그 중 이 남행시초는 백석이 1936년 3월 조선일보사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쓴 시들로서 뒤에 발표된 ‘서행시초’와는 달리 밝고 명랑한 정서가 특징적이다.
이 시는 창원길을 가는 시적 화자의 여정(旅程)의 소회(所懷)가 백석시 초기의 특징인 공동체 의식과 결부되어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시상은 창원으로 가는 산길을 걷는 화자의 느낌을 따라 전개된다. ‘토끼나 꿩’이 놀랄 정도로 소나무 틈으로 나 있는 산길은 고즈넉하다. 엎드려서 따스하게 ‘손 녹이고 싶은’ 봄날, 화자는 ‘개 데리고 호이호이 휘파람 불며 / 시름 놓고 가고 싶’다. 그만큼 화자의 기분은 따스하고 넉넉하다. 계속하여 화자는 이 산길의 정취를 ‘담배 한 대 피우고 싶은 길’, 승냥이와도 ‘덕신덕신 이야기하고 싶은 길’, ‘떠꺼머리총각’이 ‘정든 님 업고 오고 싶은 길’로 느낀다. 이 시에 나오는 토끼 · 꿩 · 개 · 승냥이 등의 동물은 「모닥불」에서 모닥불 주위에 몰려있는 하찮은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화자를 중심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들이 있어서 화자는 시름을 잊고 싶고, 이들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공동체 의식의 매개가 되는 ‘산허리의 길’은 비록 좁고 사소한 공간이지만 이제는 모든 생명체들을 포용하고 그들에게 안식을 베풀 수 있는 화해의 공간으로 거듭난다. 그러한 이렇게 화자가 산길 여정을 통하여 따스함과 평화를 느끼게 되는 작품 내적인 계기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는 시의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작가소개]
백석(白石)
본명 : 백기행(白夔行)
1912년 평안북도 정주 출생
1929년 오산보고 졸업, 동경 아오야마(靑山)학원에서 영문학 공부
1934년 귀국 후 조선일보사 입사
1935년 시 「정주성(定州城)」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며 등단.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
1942년 만주의 안동에서 세관 업무에 종사
1945년 해방 후 북한에서 문학 활동
1995년 사망
시집 : 『사슴』(1936), 『백석시전집』(1987), 『가즈랑집 할머니』(1988), 『흰 바람벽이 있어』(1989), 『멧새소리』(1991), 『내가 생각하는 것은』(1995),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1997), 『집게네 네 형제』(1997), 『백석전집』(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