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자료[1686]황정견(黃庭堅)-跋子瞻和陶詩(발자첨화도시)
跋子瞻和陶詩(발자첨화도시)
*소동파의 시에 부쳐
五言古詩 ㅡ 黃庭堅(황정견)
子瞻謫嶺南 자첨적영남
자첨 선생이 미개한 땅
영남에 귀양 가셨을 때에
* 소식 蘇軾 동파는 호 東坡
자첨 子瞻은 자이다.
時宰欲殺之 시재욕살지
당시 재상은 선생을
죽이려고 생각하였지요.
飽喫惠州飯 포끽혜주반
역경 속에서도 혜주에서
배부르게 식사를 하셨고
細和淵明詩 세화연명시
자상하시게도 도연명의
전원시에 화답하셨습니다.
彭澤千載人 팽택천재인
팽택 현령 도연명은 천 년 후에도
이름이 남으시겠고
東坡百世師 동파백세사
동파 선생도 백대 후까지
스승이 되실 분이십니다.
出處雖不同 출처수부동
각기 다른 환경에서
취한 태도는 다른 점이 있겠으나
氣味乃相似 기미내상사
도연명의 시와 동파 선생의
품격은 같다 하겠습니다.
* 子瞻(자첨) : 소식(蘇軾)의 자(字)
* 謫(적) : 귀양을 가다.
* 喫(끽) : 먹다.
* 飽喫(포끽) : 포식(飽食)
* 彭澤(팽택) : 진(晉)의 도잠(陶潛, 일명 淵明, 자 원량元亮)이
팽택의 현령(縣令, 팽택령彭澤令)을 지냈으므로 도잠의 별칭으로도 씀.
* 出處(출처) : ‘出’은 조정에 나아가는 것이고 ‘處’는 재야에 머무름을 말함.
즉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말함.
* 氣味(기미) : 마음과 취미.
* 乃(내) : 이와 같다.
동파가 대륙의 최남단 광둥성 혜주로 쫓겨난 것은 재상 장돈(章惇) 등 개혁파와의 갈등 때문이었다.
그곳은 고온다습한 데다 풍토병이 창궐했기에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험지였다.
하나 동파는 태연자약 식사도 잘하고 평소 흠모했던 도연명의 시에 화답하는 작업에 몰두한다.
이런 스승의 시와 인품을 공경했기에 시인은 동파 역시 도연명처럼 천고에
길이 빛날 것이라 확신한다. 은거냐 출사(出仕)냐로 둘의 행적은 갈렸지만,
명리에 얽매이지 않는 고결한 기품은 빼닮았으니 말이다.
시제는 ‘도연명 시에 화답한 소동파의 시에 부치는 글’이라는 뜻이다.
도연명 시에 화답했다 하여 ‘화도시(和陶詩)’라 부르는데 동파는 무려 109수나 남겼다.
그 문하에 있던 황정견은 동파 사후 스승에 대한 추모의 정을 담아 ‘화도시’ 말미에
이 시를 덧붙였다. 시라기보다는 도연명에 견줘 스승의 높은 품격을 기린 추모사쯤 되겠다.
그래서인지 시는 서정적 윤기를 배제한 대신 담담한 서술로 일관한다.
동파는 혜주를 거쳐 바다 건너 하이난섬 담주(담州)까지 밀려났지만 시종 초연함을 잃지 않았다.
6년여의 오지 생활을 마무리하고 오는 뱃길, ‘죽을 고비 넘긴 남방 오지의 삶을 원망하지 않으리니,
이 여행이 내 평생 가장 기막힌 경험이었지’란 시구를 남길 정도였다.
✵ 황정견(黃庭堅·송(宋)1045~1105)의 자는 노직(魯直), 호는 부옹(涪翁)으로
강서(江西) 분녕(分寧)사람이다. 23세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산서(山西) 태화(太和)의 지현(知縣: 군수), 교서랑(校書郎),저작좌랑(著作佐郎),
기거사인(起居舍人) 등의 벼슬을 하였고 악주(鄂州), 부주(涪州), 융주(戎州),
의주(宜州) 등의 지주(知州: 주지사)를 지냈다.
장뢰(張耒), 조보지(晁補之), 진관(秦觀)과 함께 소식(蘇軾)에게 인정받아
“소문사학사(蘇門四學士)”라고 일컬어 지는데 시를 잘 지어 소식과 그 이름을 나란히 한다.
황정견의 서법의 기원은 다양한데 주로 안진경(顏真卿, 709-785)과 소식 그리고
남조(南朝) 석각(刻石) <예학명(瘞鶴銘)>의 영향을 받았다.
소성(紹聖) 원년(1094) 좌천되어 검(黔: 오늘 날의 귀주(貴州))에 있을 때
당나라 회소(懷素)의 초서 <자서첩(自敘帖)>을 보고 이에 많은 영감을 받아 용필에
더욱 힘이 넘치고 초서적인 서체로 변화하였다.
이하=동아일보입력 2022-05-13 03:00
스승을 기리며[이준식의 한시 한 수]〈160〉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남쪽 땅으로 좌천된 동파,
당시 재상은 그를 죽이려고도 했지만,
그곳 혜주에서 식사도 잘하고
꼼꼼히 도연명 시에 화답도 했지.
도연명이 천년에 하나 나올 인물이라면
동파는 백년토록 이름 날릴 선비.
벼슬길 들고 난 건 서로 달랐어도
풍기는 정취는 둘이 꼭 빼닮았지.
(子瞻謫嶺南, 時宰欲殺之.
飽喫惠州飯, 細和淵明詩.
彭澤千載人, 東坡百世士.
出處雖不同, 風味乃相似.)
―‘소동파의 화도시에 부쳐(발자첨화도시·跋子瞻和陶詩)’
황정견(黃庭堅·1045∼1105)
동파가 대륙의 최남단 광둥성 혜주로 쫓겨난 것은 재상 장돈(章惇) 등
개혁파와의 갈등 때문이었다. 그곳은 고온다습한 데다
풍토병이 창궐했기에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험지였다.
하나 동파는 태연자약 식사도 잘하고 평소 흠모했던
도연명의 시에 화답하는 작업에 몰두한다.
이런 스승의 시와 인품을 공경했기에 시인은 동파 역시
도연명처럼 천고에 길이 빛날 것이라 확신한다.
은거냐 출사(出仕)냐로 둘의 행적은 갈렸지만,
명리에 얽매이지 않는 고결한 기품은 빼닮았으니 말이다.
시제는 ‘도연명 시에 화답한 소동파의 시에 부치는 글’이라는 뜻이다.
도연명 시에 화답했다 하여 ‘화도시(和陶詩)’라 부르는데
동파는 무려 109수나 남겼다. 그 문하에 있던 황정견은 동파 사후 스승에 대한
추모의 정을 담아 ‘화도시’ 말미에 이 시를 덧붙였다.
시라기보다는 도연명에 견줘 스승의 높은 품격을 기린 추모사쯤 되겠다.
그래서인지 시는 서정적 윤기를 배제한 대신 담담한 서술로 일관한다.
동파는 혜주를 거쳐 바다 건너 하이난섬 담주(담州)까지 밀려났지만
시종 초연함을 잃지 않았다. 6년여의 오지 생활을 마무리하고 오는 뱃길,
‘죽을 고비 넘긴 남방 오지의 삶을 원망하지 않으리니,
이 여행이 내 평생 가장 기막힌 경험이었지’란 시구를 남길 정도였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