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Ⅲ-28]어느 고등학생의 격려광고 “민중은 정직하다”
엊그제 구례에서 ‘멋진 친구’를 만났다. 중학때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만 살다가 5년 전 고향 마산면 냉천리로 귀향, 양파농사 등을 짓는다고 한다. 나와 같은 월말부부 처지여서 친근감이 더했을까? 셋째형의 손아래동서이니 사돈인데, 사돈을 떠나 ‘자치동갑’이므로 '호형호제하자'고 제안했더니 대번에 좋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간문면에서 사신 것으로 보이는 4대조(崔西寬. 1925-1895년)의 흔적을 혹시나 찾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주소를 정확히 안다고 해도 19세기 사람이므로 찾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간문면에서 분리된 간전면과 문척면사무소에서 들었으니 헛걸음을 한 셈이다. 5대조(崔文)의 성함과 생몰연대는 족보에서 확인했으나 6대조 할아버지와 어떤 연유로 초계(草溪) 최문의 고리가 이어졌는지 궁금해서 나선 참이었다. 7대, 8대조 할아버지의 성함이 ‘득어’(得魚)와 ‘준’(俊)인 게 이채로웠다. 우리 집의 '영원한 수수께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증조부(崔定宣)의 제적등본으로 고조모(李小淑)와 증조모(申季住)의 성함을 확인한 게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당시 여성의 이름으로는 좀 세련됐다고 할 수 있겠다.
아무튼, 냉면 한 그릇을 같이 먹으며, 김형이 들려준 얘기에 귀가 번쩍했다. 유서깊은 오산고등학교(안창호 선생의 명연설에 감명받은 이승훈 선생이 세운 일제하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후신) 2학년 재학중(1974년, 나도 고2였다), 동아일보에 광고사태가 터졌다는 것이다. 정부에 비판적인 ‘큰 신문’에 압력을 가하는 수단으로 대기업들이 광고를 내지 못하게 한 전대미문의 사건이 동아일보 광고사태. 당시만 해도 동아일보는 정부의 꼼수에 굴복하지 않고, ‘민중의 힘’을 믿으며 백지광고를 내는 등 6개월도 더 버텼다. 그러자 1만여명의 이름없는 민중들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앞다퉈 의견(격려)광고(직사각형, 정사각형 형태라 우리는 ‘벽돌광고’라 했다)를 내기 시작했다. 마치 구한말 국채보상운동이나 IMF때 전국민이 금모으기에 솔선수범하여 나서던 것처럼. 1면 신문 제호 아래 <오산고등학교 1학년 5반 일동>의 격려광고를 본 그날밤, 김형은 후배들도 이러는데 선배가 돼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언론탄압 중지하라’는 식의 격문(檄文)를 A4용지에 길게 갈겨 썼다고. 지금은 내용이 '1도' 기억나지 않지만. 다음날 교실에서 그 격문을 낭송하며 ‘모자’를 돌리니 친구들이 호응, 걷힌 돈이 4600원으로 기억된다고 했다. 친구와 광화문 신문사 1층 광고국을 찾아 격문과 그 돈을 광고비로 줘 ‘광고’가 실렸다는 것. 그때 문구가 <민중은 정직하다>였던 것과 ‘2학년 6반 일동’ 명의를 신문사에서 멋대로 ‘오산고학생 일동’으로 잘못 기재했지만 항의할 수도 없이 그냥 지나갔다는 기억만은 확실하다는 것. 의식화 학생도 아니었지만, 나름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뜨거운 나이. 의당 해야할 일이 아니었을까.
대학에서는 틀림없이 운동권 학생이 되어 온갖 정치시위에 나섰으리라 생각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다만 김형이 낸 그 광고는 신문사 아카이브를 뒤지면 충분히 찾을 수 있고, 감회가 정말 새로울 것같다는 말과 함게 나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1987년은 6월 항쟁과 노동운동이 꽃을 피우는 등 전국을 달군 뜨거운 한 해였다. 그 결과가 다음해 5월 15일 한겨레신문의 창간으로 이어졌다고 하면 억설일까? 동아의 광고사태 격려광고처럼 창간호부터 제법 오랫동안 축하와 격려광고가 동아일보식으로 이어졌다. 솔직히 D일보 기자였으면서도 그 신문으로 옮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곳에 가면 뭔가 내가 정말 해보고 싶었던 기사를 쓸 수 있지 않을까? 보람이 훨씬 더 있을 것같다는 생각에 (쥐꼬리 월급 때문에)고민고민했지만, 결국 마음을 접고 축하격려광고를 내는 편으로 방향을 바꿨던 기억과 문구에 대해 고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때부터 함석헌 선생이 발간하던 <씨ᄋᆞᆯ의 소리>를 구독했기에 장준하 선생이 어떤 분인지, 그분의 어록을 잘 알고 있었다. 문구를 <통일은 좋은가/그렇다/모든 통일은 좋다>로 확정하고(장준하 선생의 대표적인 어록. <사상계>가 강제폐간 55년만에 재창간돼 열혈독자가 됐으니), 그 아래에 ‘최영록(아내와 1986년생 큰아들 이름 명기) 가족 일동’이라고 했다. 이 역시 한겨레 아카이브를 뒤지면 찾을 수 있을 터.
어렵다면 어려운 사돈을 모처럼 만나, 40-50여년 전의 동아일보와 한겨레에 관련된 ‘벽돌광고’ 일화를 나누는 것도 흔치 않을 터. 다음에 내 고향 오수를 꼭 방문하시라, 얘기를 하다 보니 겹치는 사람 인연이 많아 세상이 좁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우리 서로 많이 통하는 것같다(책이든 생각이든 싱크로나이즈부분이 많다), 확실히 동년배라 편하다, 종종 만나자며 작별을 했다. 그동안 쓴 졸문 몇 편을 보낸 뒤끝에 전화로 수다를 한참 떨었으니, 세상 인연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조상 뿌리를 찾다가 맺은 또 한 편의 소중한 인연은 또 어떻게 이어질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소개해준 강기현 작가의 <붉은 지게>(1-5권) 장편소설을 꼭 읽어봐야겠다. 김형의 가족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한다. 작가는 김형의 만석꾼 할아버지의 마름으로 일했던 분의 손자라 한다. 그 사실만 알고도 흥미로운 내용이 펼쳐질 듯하다.
덧붙임: 글머리에 '멋진 친구'라 한 까닭은 김형의 얘기를 듣고 서다.
"최형, 이제껏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이 뭔지 아시요?" 내가 어찌 알겠는가? "서울을 떠나 귀향하면서 아내의 작업실(화가)을 만들어주고 온 것이요" "와우-, 그건 정말 잘했소. 나는 뭐했대?" 아내는 천사표 형수의 친동생으로 그림을 그린다. 이름도 예쁘다. 물맑을 담(淡)에 구름 운(雲) 성은 복(卜)씨이다. 그 남편의 이름은 김강건.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