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31
2월11일[연중 제5주간 화요일/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세계 병자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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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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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lREjyiH3sc8
[의정부교구 이원희 사도요한(국내연학)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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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모두 백 퍼센트 예비 병자들이요 병자 후보자들입니다!>
오늘은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동시에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언젠가 파리 기차역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루르드로 간 적이 있습니다. 열차에 오르니 한량이 여러 칸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배정받은 칸으로 들어가니 2층 침대에 4명이 함께 누워 자게 되어 있었습니다.
좁디좁은 공간 안에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자야된다고 생각하니 정말이지 갑갑하고 조심스러웠습니다. 더구나 잠들면 탱크가 울고 갈 정도로 심하게 코를 고니, 민폐가 될까봐, 도저히 잠을 잘수가 없었습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새벽녘에 루르드로 들어갔습니다.
막 안개가 걷히고 청량한 아침 햇살이 눈부신 루르드 성지로 들어서는 순간, 몸은 피곤했지만, 정신이 어찌 그리 맑아지는지, 그리고 성지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성모님의 따뜻하고 친밀한 환대가 온몸으로 느껴져 뛸 듯이 기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미 루르드에는 저를 포함한 수많은 환자들이 도착해 있었는데, 병의 치유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까지 말끔히 치유되도록 도와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일으켜세워주신 성모님을 생각하니, 그저 감사와 찬미를 드릴 뿐입니다.
오늘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당신도 여기저기 몸이 성치 않은 분이시니, 병자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십니다. 메시지 한 마디 한 마디가 심금을 울립니다.
“병자들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의 최고 증인은 그분의 외아드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다양한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만나신 이야기를 수없이 들려주지 않습니까?”
“팬데믹 시대, 사랑하는 사람들, 소중한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집중 치료실에서 자기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세상과 단절된 채로 외롭게 맞이하고 있는 환자들을 우리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보건 의료 종사자 여러분, 여러분이 병자들 곁에서 사랑과 힘을 다하여 실천하는 봉사는 직업이라는 경계를 뛰어넘어 하나의 사명이 됩니다. 고통받는 그리스도의 몸을 어루만지는 여러분의 손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하신 손길의 표징이 됩니다.”
“가톨릭 보건 의료 기관은 지속적으로 보호받고 존속되어야 하는 값진 보화입니다. 이들의 존재는 우리 교회가 병자들과 가난한 이들 곁에 있음을, 병자들이 무시당하는 상황에서도 교회가 늘 그들과 함께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병자 방문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모든 제자에게 하시는 초대입니다. 얼마나 많은 병자와 연로한 이들이 집에서 머물며 누군가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치유자이신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모든 병자와 그 가정을 맡겨드립니다. 그들이 세상의 고통을 짊어지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의미와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기를 빕니다.”
나는 아직 젊고 쌩쌩하니 병과는 아무런 상관없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세월은 마치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갑니다. 어느새 우리 역시 이런저런 병고에 시달리며 고생할 날이 순식간에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 모두 병자 후보자가 100퍼센트 확실합니다.
주변의 병자들이 오늘 겪고 있는 사무친 고통과 외로움을 나 몰라라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병자들은 더 큰 관심과 사랑을 받아야 할 각별한 존재, 수난당하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들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수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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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dgkgmwUJH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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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얼마나 세속에 물들었는지 알아보는 법>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교회가 어떻게 하면 세속의 법과 인간적인 욕망에 물들지 않고, 본래의 사명인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로 남을 수 있을지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마르코 복음 7,1-13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하느님의 계명보다 인간의 전통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핑계로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드러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마르코 7,6-7)
예수님께서는 신앙이 외적인 형식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하느님의 계명은 오직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예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법을 코르반이라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전통으로 무시하는 지도자들을 나무라십니다.
영화 ‘대부’는 인간이 자신이 타락해가는 과정에서 자신이 망가지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는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영화 초반부에서 마이클은 코를레오네 가문이 하는 마피아 사업과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는 군에서 명예롭게 복무하고 돌아온 젊은이로, 아버지인 돈 비토 코를레오네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는 가족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폭력과 범죄를 통해 지켜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경쟁 조직의 공격을 받고 중태에 빠지자, 마이클의 태도는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아버지를 보호하고 가문의 명예를 지킨다는 이유로, 경쟁 조직의 두목과 부패한 경찰서를 살해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 사건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됩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복수였지만, 이 살인은 그를 범죄 조직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됩니다.
마이클은 이탈리아로 도피해 한동안 평화로운 삶을 꿈꾸지만, 자신이 저지른 폭력이 결국 자신을 따라다니게 됩니다. 그는 도피한 곳에서 사랑하는 여인 아폴로니아와 결혼하지만, 적들의 복수로 인해 그녀가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습니다. 이 사건은 그를 더욱 냉혹하게 만들었고, 이제 그는 더 이상 사랑과 가정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단순한 힘과 통제에 집착하는 인물로 변해갑니다.
결국 마이클은 미국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새로운 대부가 됩니다. 그는 점점 더 권력에 집착하며, 가문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자신의 형제와 친구들마저 의심합니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는, 그가 자신의 형 프레도를 배신자로 의심하고 결국 제거하는 순간입니다. 이 장면은 마이클이 자신의 형제마저 용서할 수 없는 차가운 인간이 되어버렸음을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시작했던 일이었지만, 이제 그는 가족을 희생하면서까지 권력을 유지하려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이클은 혼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조직을 확장하고 가문의 안전을 지켰지만, 정작 자신에게 남은 것은 고독과 상실뿐입니다. 그의 아내 케이는 그를 떠났고, 그는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 준 사람들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한때 가족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모든 일을 한다고 믿었지만, 그 과정에서 점점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구약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58장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단식하면서도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모습을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우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라고 불평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너희가 단식하는 그날에 제 일을 찾아다니며 일꾼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는구나… 너희가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나눠 주고, 집 없는 가련한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며,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라면, 그때에 네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리라.”(이사야 58,3-9)
19세기 프랑스의 성 빈첸시오 드 폴은 당시 부유층과 결탁하며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던 교회를 바라보며 가난한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그들의 필요를 채우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은 우리의 주님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바쳐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신앙이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것이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지키고 교회가 세속의 법에 물들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이웃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황금으로 장식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서 빛나야 한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 주위에 늘어날수록 나는 세상 법에 오염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고립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줄어들수록 나 자신은 병들어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로 둘러싸인 교회는 절대 오염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교회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이들이 줄어든다면 그 교회는 분명 타락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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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 가는 항공편을 알아보았습니다. 가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부님들이 제게 ‘마일리지’가 있는 걸 보았습니다. 저는 마일리지를 활용할 방법을 잘 몰랐습니다. 신부님들은 마일리지를 적용해서 항공권을 발권해 주었습니다. 저의 마일리지로 한국 가는 왕복 항공권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마일리지를 이용해서 항공권을 마련하면서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물이지.’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유비는 제갈공명이라는 구슬을 잘 꿰어서 삼국시대를 열었습니다. 르네상스를 꽃피웠던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과학과 예술이라는 구슬을 잘 꿰어서 잠들었던 유럽의 영혼을 깨웠습니다. 르네상스는 산업혁명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기술과 디자인이라는 구슬을 잘 꿰어서 디지털 혁명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작년에 저는 창고 공사에 함께한 형제님들을 보았습니다. 그분들의 열정과 그분들의 헌신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분들과 함께 27기 사목회를 구성할 수 있었고, 그분들의 도움으로 본당의 많은 일들이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이 속담은 우리가 가진 잠재력이나 믿음이 아무리 커도 그것을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깊은 가르침을 전해줍니다. 이는 성경 말씀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구슬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행위라는 실로 꿰어지지 않으면 그 믿음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은 잠재된 가능성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천을 통해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세상 속에서 아무런 가치를 발휘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부른다고 모두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보물은 믿음을 실천하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었지만, 사제와 레위는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여관에 데려다주었습니다. 여관 주인에게 잘 돌보아 달라고 청하면서 비용이 더 들면 나중에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믿음을 어떻게 꿸 수 있을까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기도는 구슬을 꿸 실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소통하며 우리의 믿음을 더욱 단단히 할 수 있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기도하는 작은 실천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구슬을 꿸 때 방향을 잡아주는 기준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우리가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마태오 복음서 25장 40절의 말씀처럼, "너희가 여기 있는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는 말씀을 마음에 담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을 실천으로 꿰는 가장 구체적인 방법은 사랑과 봉사입니다. 작은 행동이라도 하느님 보시기에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나 가정, 직장에서 누군가를 돕는 일은 우리의 믿음을 실로 꿰는 작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들것으로 데리고 왔던 이웃을 칭찬하셨습니다. 그 이웃은 지붕을 뚫고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들의 따뜻한 마음을 어여삐 보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믿음과 실천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 사랑을 완전히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구슬을 하나도 빠짐없이 꿰어 보물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믿음의 구슬이 있습니다. 이제 이 구슬을 행위라는 실로 꿰어 세상 속에서 빛나는 보물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작은 것일지라도 하나씩 실천하며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는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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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딸들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복음서에서 예수님과 자주 대립하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 집단의 특징은 목적과 수단을 뒤바꾼다는 것입니다. 안식일과 사람의 관계가 그렇고,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전통과 계명, 입술과 마음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스스로 사회 지도층이라는 그들은 왜 그렇게 본래의 목적을 무시하고 수단에 집착할까요?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겉으로는 율법과 전통을 지키는 척하지만 ‘코르반’이라는 주술적 공식 하나로, 곧 하느님께 바친다는 명분으로 부모에게 줄 것을 빼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숨은 지향을 꿰뚫어 보시기에, 자기네 사리사욕을 위하여 사람의 전통을 내세워 하느님의 계명을 거스르는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전통은 ‘어떤 집단에서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사상이나 관습, 행동 등이 계통을 이루어 전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관습은 ‘굳어진 개별적인 행동 양식이나 습관’을 말합니다. 전통과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져 전해 내려오는 모든 것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세대마다 자기 시대에 바람직하고 유익한 것을 살려 가면서 창의적으로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가는 것이 발전일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많은 전통과 관습이 있습니다. 박물관과 고문서고에 갇힌 전통이 아니라 이 시대 신앙인의 삶에서 살아 움직이며 복음과 인간의 구원이라는 목적에 봉사하는 전통을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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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7,1-13: 조상들의 전통
바리사이는 분리된 자라는 뜻으로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낫다고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질책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6절; 이사 29,13).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관습에 얽매여 있어서 하느님과는 멀다는 의미이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다는 것이 관습을 따르는 것이라고는 할 수 있으나 하느님을 섬기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니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인간의 전통이나 관습을 하느님의 계명인 양 가르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시면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계명을 들어 그것을 이행하지 않는 행위를 질책하고 계시다. 가난한 부모는 자녀에게서 부양받아야 하고, 자녀들은 연로한 부모에게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코르반”이라고 하면서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 하게 한다고 하신다. 코르반 서약문은 물건을 하느님께 바쳐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서약문이다. 그 의미는 “제가 제대에서 약속하고 성전에 봉헌하기로 서약한 선물이 당신 영혼에 힘을 불어넣어 줄 터이니 제가 당신을 공양할 필요는 없습니다”(11절 참조)라는 뜻이다. 이렇게 인간의 전통을 핑계 삼아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부모와의 사이가 좋지 않으면 코르반 서약문을 이용해서 부모의 봉양을 저버리기도 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형식적인 것을 지적하시면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이런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교회에도 우리가 지켜야 할 법이 있다. 이 법들은 우리의 신앙 성숙을 위한 것임을 생각하며 지켜야 한다. 외적인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 외적인 형식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담긴 본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서 율법주의적인 모습을 떨어내고 참된 하느님의 자녀인 신앙인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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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위선’은 곧 ‘어리석음’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마르 7,1-2)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마르 7,5-13)
1) 여기서 ‘조상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이 아니라, 구약시대 때의 유명한 율법학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 여기서 ‘전통’이라는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그 ‘전통’이 아니라, 구약시대 율법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할라카’ 라고 부르는 규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구약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할라카’는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4)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잘 실천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그 실천 방법을 정해 놓은 ‘행동 지침’이었습니다. 따라서 ‘할라카’를 만든 본래 의도는 좋은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유대인들은 그 규정의 본래 의도는 잊어버리고, 그 규정을 지키는 일에만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그것은 겉으로만 거룩한 척 하고 속은 거룩하지 않은 ‘위선’이었습니다.
<당시에 ‘할라카’는 바리사이들만 철저하게 지켰고, 바리사이들과 대립 관계에 있던 사두가이들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또 일반 서민들도 그런 규정은 무시하면서 살았고, 예수님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할라카’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불경한 자들’, 또는 ‘부정한 자들’로 취급했습니다.>
5절의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라는 말은, “어째서 당신들은 ‘할라카’에 규정되어 있는 정결예식을 행하지 않고 부정한 행동을 하는가?” 라고 시비를 거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당신들은 부정한 죄인들이다.”라고 비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2) 바리사이들의 정결예식은 우리나라의 ‘목욕재계’와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목욕재계’는 원래 ‘마음을 씻는’ 일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씻는 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몸을 씻는 ‘눈에 보이는 행위’를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깨끗함’을 이루려고 하는 일입니다.
바리사이들의 정결예식도 원래는 ‘거룩함’에 도달하기 위한 일이었는데, 그들은 ‘몸의 깨끗함’을 ‘거룩함’으로 착각했고, 결국 몸이 깨끗하면 거룩한 것이라고 우기는 위선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만(규정만) 지키는 ‘어리석은 위선’이었습니다(8절).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어리석음과 위선을 꾸짖으셨습니다.
3) 11절에 언급되어 있는 ‘코르반’ 관습도 원래는 하느님을 좀 더 잘 섬기기 위한 일이었습니다(민수 30,3). <하느님께 봉헌한 물품을 함부로 세속적인 일에 사용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원래 목적은 잊어버리고 부모 공양을 회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악용되었습니다. 그것은, “십계명 제1계명,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를 잘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십계명 제4계명, ‘부모에게 효도하여라.’를 안 지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역시 인간들이 만든 규정만 중시하고 하느님의 계명은 무시하는 짓이라고 꾸짖으십니다.(13절) 그런데 만일에 실제로 계명들이 서로 충돌하는 것 같은 상황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주일을 지키면 효도를 못하게 되고, 효도를 하면 주일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라면? 병석에 누워 있는 부모를 간병하다가 주일을 못 지키는 일이 생기거나, 반대로 주일을 지키려고 성당에 가면 병석에 누워 있는 부모를 방치하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실제로 그런 문제로 고민하는 이가 있을 수도 있는데, 우리 교회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주일을 지킬 수 없는 경우에 대한 해결책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사실, 두 계명이 서로 충돌하는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모든 계명은 ‘사랑’이라는 가장 큰 계명 하나로 통합됩니다. <기도하면서 부모를 간병한다면, 주일을 지킨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부모에 대한 사랑은 하나입니다.>
만일에 어떤 계명 때문에 다른 계명을 못 지킨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려고, 또는 하기 싫은 일은 안 하려고 핑계를 대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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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1225년 란돌프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삼촌은 베네딕토회 몬테카시노 수도원 원장이었고, 성인의 부모는 그가 귀족 집안의 아들로서 교회에 들어가 많은 사람이 선망하는 삼촌의 자리인 수도원 원장 자리를 이어 받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세속적인 영광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대신 청빈한 삶과 설교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는 탁발 수도회인 도미니코회에 입회하려 했습니다. 이는 세상의 모든 부와 명예를 완전히 버리는 삶이었습니다.
부모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인을 성에 가두기도 하고, 매춘부를 고용해서 성인을 유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고, 결국 도미니코회에 들어가 세속을 벗어난 학자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행복해지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있지만, 결코 충족시켜 주지 않는 우상을 섬기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돈, 권력, 즐거움, 영광…. 성인은 이런 우상이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아셨고 또 그렇게 필요하지도 않음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우상보다 주님만을 따라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성인의 이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메시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와서 제자들이 더러운 손으로 음식 먹는 것을 따집니다. 왜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느냐는 것이었지요.
사실 조상들의 전통은 하느님의 뜻을 잘 따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조상들의 전통이 결코 하느님의 뜻보다 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본질적인 것을 잊어버리고, 세상의 기준을 내세우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이사 29,13)
하느님의 뜻을 잘 따르기 위해서는 조상들의 전통에 충실한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보다 마음이 중요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따르지도 않으면서, 아니 그 뜻을 전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조상들의 전통만 지키면 그만이라고 여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서 지키는 조상들의 전통은 하나의 우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성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역시 자기를 변화시킬 깊은 성찰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나의 우상은 무엇일까요? 주님보다 첫째 자리에 놓이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랑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모습들이 행복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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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
마르코 7,1-13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마르 7,11-12)
외로운 벗을
품습니다
벗을 빚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품음의 기도입니다
웅크린 벗을
돋웁니다
벗을 빚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돋움의 기도입니다
서러운 벗을
다독입니다
벗을 빚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다독임의 기도입니다
작은 벗들을
섬깁니다
벗을 빚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섬김의 기도입니다
쓰러진 벗을
일으킵니다
벗을 빚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일으킴의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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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헛되이 섬겨서는 안 된다>
오늘 복음은, 유다인의 전통 중에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관습이 있었는데, 왜 손을 씻게 되었는가에는 관심이 없고 손을 씻지 않았다는 것에만 마음을 둔 것을 지적해 줍니다. 사실 모든 음식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육체적인 생명의 양식으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합당한 마음으로 먹기 위해서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였습니다.
손을 씻는 것은 위생적인 의미도 있지만, 정화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미사 전례 때에 참회 예절이 있듯이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예의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 내용은 잊은 채 겉모양의 전통을 고집하면서 내용을 소홀히 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기 지켜야 할 전통과 관습이 있지만, 그것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재해석하고 쇄신할 수 있어야 미래에 희망이 있습니다. 더욱이 사람의 전통은 사람의 전통일 뿐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계명을 대행하거나 거기에 맞설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좋은 전통이라 해도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법이 훼손된다면 그 전통은 마땅히 쇄신되거나 부정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마르 7,6-7)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알맹이보다도 껍데기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여전히 같은 꾸중을 들을 것입니다. 내용보다도 형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조하며 거기에 얽매이다 보면 우리의 예배는 헛되고 헛된 행위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을 중요시하되 그 의미와 내용을 제대로 알고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형식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본질적 내용을 소홀히 하는 형식은 율법주의적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좋은 전통과 관습이라 하더라도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좋은 것이 아니니 마땅히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간혹 “부득이 주일미사 참례를 못하여 주님의 기도 33번을 하였는데 고해성사를 보아야 하느냐?” “몸이 불편한데 미사 전례 때 앉고, 일어서고, 꿇는 것을 따라 해야 하느냐?” “얼마 전에 고해성사를 봤는데 판공성사를 또 보아야 하느냐? 텔레비전 통해 미사에 함께했는데 고해성사를 봐야 하느냐?”라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일일이 답해 드려야 합니까? ‘코로나19’의 감염병 창궐로 말미암아, 전례와 관련 관면이 많이 주어졌던 탓이 있겠지만, 관면의 문제보다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 형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행하는 것의 의미와 내용을 알고 거기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입니다. 주님께서 명하신 바에 얼마나 사랑으로 응답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법은 함부로 무시하여서도 안 되고 내 입맛에 맞게 합리화시켜서도 안 되느니만큼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전통과 관습을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헛되이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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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조금은 따분하고 지루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창조된 순서대로 피조물을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순서대로 빛, 물과 하늘, 땅과 식물들, 빛물체, 바다 생물과 새, 땅의 생물들과 사람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 휴식하시며 복을 내리셨습니다.
가장 마지막에 창조된 피조물이 무엇인가요? 바로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이 가장 마지막에 창조되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인간이 가장 소중하므로 마지막에 창조된 것입니다.
창조의 순서는 인간을 위한 모든 공간이 마련되고 채워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삼라만상의 설계 작업이 마무리된 뒤에, 인간이 그 자리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의 소중함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시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신 피조물은 사람이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중심의 창조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다른 피조물은 모두 “제 종류대로”(창세 1,11.12.21.24.25) 만드셨지만, 사람만은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복을 내리시고, 온갖 생물을 다스릴 권한도 부여하십니다.
하느님 창조 활동의 중심에 바로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애정, 그 사랑의 이야기가 창조 이야기에 담겨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렇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나의 모습에, 이웃의 모습에 하느님의 모습이 함께 있습니다. 그 모습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 그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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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정재성 요한 신부님]
1.
제가 일반대학에 다니던 시절, 군 면제 기준은 이랬습니다. 체중 100Kg 이상, 50Kg 이하, 시력 미달, 키가 너무 크거나 너무 적거나, 손가락 숫자가 많거나 적거나, 부선망 독자, 중졸 이하 등 여러 항목이 있었습니다. 둘째 매제는 군 면제를 받기 위해서 안 먹고 운동을 많이 해서 50Kg까지 살을 뺐지만, 그 이하가 되지 못해서 군대 갔습니다.
저는 고 3때 입시 공부에 치중하느라 운동을 못 해서, 체중이 한때 최고 96Kg까지 달했습니다. 지금보다 체중이 훨씬 더 많이 나갔는데, 그때 사진을 보면 꼭 인간 눈사람 같습니다. 여동생들은 “오빠야, 조금만 더 살쪄서 군대 면제 받아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100Kg 넘기가 어디 쉽습니까? 뭔가를 먹으면 소화도 잘 안 되고, 체중이 너무 많이 나가니까 숨이 차서 움직이기 힘들고, 옷도 마음에 드는 것을 사 입을 수도 없습니다.
어떻든 저는 신체검사 3급을 받고, 꼭 23년 전 오늘부터 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8개월 방위였는데, 훈련소에서 키 180Cm 이상 선발할 때 헌병대에 차출될 뻔도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2군 수송교육대로 배정되어 행정과에서 복무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제게 종종 이렇게 물었습니다. “신체도 건강하면서 어떻게 현역으로 안 뽑히고, 방위 판정을 받았습니까? 군대에 큰 빽이라도 있습니까?”라고 하면 저는 “인간성이 좋아서 그렇겠지요. 사회에 필요하니까 짧게 끝내게 했겠죠.”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사실 그 당시에는 88 올림픽을 준비한다고 1, 2급을 받아도 방위 복무를 배정받은 군인들도 많았습니다.
어떻든 짧게 마치는 것은 좋은데, 군대 있을 때 방위병이라고 현역병들한테 무시당할 때도 많았고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군 복무를 마치고 나서도 수모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1989년 7월 제대 후에, 중학생들에게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동물 3가지에 대해 물을 기회가 있었는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쥐, 바퀴벌레, 방위!” 그 설문지 대답을 보고 깜짝 놀랐고, 서글프기까지 했습니다.
신학교 입학 후에도 ‘방위 출신’이라고 괄시를 당했지요. 신학교 4학년 졸업여행으로 광주 Caritas 수녀원을 방문했었는데, 저녁 모임 때 한 동기가 “방위 출신들 다 나와서 춤 춰봐라!”고 하자, 다른 동기들이 만장일치해서 우리를 몰아세웠지요. 그래서 억지 춤을 뻣뻣하게 춰야 했습니다.
그 외에도 걸핏하면 방위들 운운하면서 동네북 취급을 했었습니다. 대개 방위 출신들은 현역 출신보다 모자라다, 열등하다는 의식이 팽배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방위 근무한 게 그렇게 큰 죄입니까! 그렇게 수모를 당할 줄 알았다면 차라리 현역으로, 해병대나 UDT에 지원했을 텐데 라는 생각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북한 공산당이 재침 못하는 이유 중 한 가지가 방위병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퀴벌레처럼 어디서 슬슬 기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긴장하기 때문입니다. ㅎㅎㅎ.
2.
이처럼 사람들은 여러 가지 잘못된 편견이나 고집을 갖고, 흑백논리를 내세웁니다. 쓸데없는 고집, 형식적인 관습, 전통주의가 사람 잡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무리 좋은 전통이라도 그것이 악용되거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입술로만이 아니라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서 주님을 잘 섬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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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이날은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발현 첫날을 기념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성하께서 ‘세계 병자의 날’로 제정하신 것입니다.
저는 몇 년 전 루르드 순례길에 올랐습니다. 그때 여러 곳을 순례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루르드입니다.
수많은 사람의 기도 행렬과 치유를 위한 기도가 이어지는 곳이었습니다. 치유의 은총으로 자신의 지팡이를 루르드에 봉헌하고 떠나간 사람들의 찬미는 아직도 그 루르드에 남아 있었습니다.
새벽 시간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간에 우리는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아직 어두워 미사를 함께 봉헌하는 교우분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함께 하고 있다는 믿음에 든든하고 기뻤습니다. 미사 중 루르드에 발현하신 성모님께 성모송을 봉헌했습니다. 새벽에 노래할 수 있을지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성모송을 노래로 봉헌했습니다. 이 성모송이 누군가에게 치유와 희망의 은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아직도 그때의 감동이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오늘은 병자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지만 동시에 병자들과 함께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병자를 돌보는 이들이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정성과 사랑을 다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마음을 모아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아픔을 겪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그들을 돌보는 모든 이들에게 치유와 희망이 피어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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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마르코 6-8)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어떠한 규정도 사랑을 거슬러서는 안 됩니다. 법 만능주의가 우리를 지배하는 듯하여 씁쓸함을 느낍니다. 신앙인이 주님을 공경하는 것은 우리가 받은 주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받은 사랑을 우리가 이웃에게 실천하지 않고 주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주님을 ‘헛되이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진정으로 감사를 드린다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그 사랑을 기억하며 사는 것이 주님께 드리는 감사요 공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만큼 주님을 공경하게 됩니다. 주님을 향한 진정한 우리의 찬양은 삶으로 드러나고, 사랑을 하는 삶은 주님께 드리는 우리의 공경이요 찬양이 됩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우리의 진정한 공경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부모님께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을 우리가 하더라도 우리의 삶이 부모님의 뜻에 어긋나면 부모님은 슬퍼하십니다. 이처럼 사랑이나 정의를 거스르면 주님께 드리는 우리의 공경도 무색하게 됩니다.
입술로는 주님을 공경하지만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 멀리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말로만 하는 우리의 공경은 주님께서 필요하지 않으시기에, 그 공경은 실천적 사랑으로 드려야 합니다.
때로 우리의 삶이 사랑스럽지 못하고 의무로나 입술로만 주님을 공경하더라도, 주님께 대한 공경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메마른 우리의 공경도 주님께서는 끈기로 들으시며, 우리가 진정으로 이웃을 더 사랑할수 있을때까지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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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마르코 복음 7장 7절-9절)
예로부터 어디서나 ‘먹는 문제’가 항상 제일 예민합니다. 싸움 중에서도 ‘밥그릇’ 싸움이 가장 치열합니다. 공동체에서도 가장 말 많고 힘든 소임지가 바로 주방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두 번째(첫 번째는 3,22절에 나옴) 온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도 예수님께 먹는 것을 가지고 시비를 겁니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벼이삭을 따먹었다고 문제 삼는가 하면,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문제 삼고, 또 단식하지 않는다고 문제 삼기도 하고,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고 시비를 겁니다.
소위 ‘정결법’에 대한 논쟁입니다. 그런데 손 씻는 ‘정결법’은 율법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시비의 준거로 내세운 것은 “조상들의 전통”(구전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 신앙의 핵심과는 상관없는 일로 당시의 사회를 이끌어가던 전통방식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이를 마치 하느님의 뜻인 양 호도하여 종교적 권위를 덧붙였습니다. 그리하여 오히려 하느님의 계명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관습을 앞세우는 어긋난 행동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레위기> 11장의 ‘정결법’에 의거하여 음식물만 깨끗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는 사람이 깨끗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잘못 적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음식을 먹는 사람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은 몸의 깨끗함이 아니라, 마음의 깨끗함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를 잘못 적용하여 손을 씻는 예법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시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마르코 복음 7장 7절-9절)
오늘날 우리도 ‘사람의 규정’을 지키려다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사회적 관습이나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자기의 규정’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막상 ‘복음의 정신’을 놓칠 때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 몸에 배어 있는 잘못된 관습이나 전통들, 그리고 잘못 배운 교리나 가르침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자기 규범’이나 ‘자기 방식’이 옳다고 주장하기에 앞서, 먼저 ‘복음의 정신’과 ‘하느님의 뜻’에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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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마르코 복음 7장 8절)
주님!
몸에 밴 잘못된 관습과 전통에 매여 당신의 계명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틀에 맞춘 잘못된 지식과 신념을 지키려다 당신의 사랑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나의 옳음을 주장하기에 앞서 나 자신을 지키기에 앞서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묻게 하소서.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제가 원하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하늘나라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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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존엄한 품위의 인간>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 내 주시여, 온 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 하늘 위 높다랗게 엄위를 떨치셨나이다.”(시편 8.2)
자식자랑은 팔불출에 속한다는데 제자들 자랑은 괜찮겠지요. 지난 토요일에는 3명의 옛 초등학교 6학년때 여제자들이 저를 찾아와 함께 했습니다. 각자 삶의 제자리에서 얼마나 반듯하고 똑똑하게 치열하게 산 제자들인지 감탄했습니다. 1977년때 6학년때 제자들이니 48년전 13살 때 아이들이 지금은 61세 환갑을 넘긴 제자들입니다. 당시 저는 29세 청년교사였습니다.
이중 한 제자는 5-6학년 2년동안 가르쳤던 제자로 유난히 고마워하며 시종일관 제 시중을 들었습니다. 지금도 보관중인 그 제자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남긴글입니다. 쌍둥이 아들을 둔 제자로 다음주 결혼하는 친구처럼 지내는 큰 아들은 고등학교 영어교사입니다.
“일기장을 펴보니 나의 고민, 선생님의 격려 말씀뿐이었다. 이제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나는 선생님께 지금도 고마움을 느낀다. 선생님의 말씀 끝에 보람을 찾게 되다니. 이제 밑바닥 신세는 면하게 되었다. 기쁘다. 아버지같이 정답게 느껴지는 선생님께 어떻게 보답해 드려야 할까?”
이 제자가 이번 만남때 편지글도 줬습니다.
“까마득한 어린시절, 진정 우리 시대의 참 선생님이였던 이수철 선생님! 선생님의 사랑과 겸손, 온유함을 보면서 또 그 사랑을 받은 제자로서 어떻게 부족한 이에게 사랑을 주어야 할 지를 배웠습니다. 영원히 제 가슴 속에 제 인생의 참선생님으로서 기억됨을 감사합니다.”<2025.2.8. 제자 이정민 올림>
무엇보다 이 제자는 파워우먼으로 영원한 현역의 직장인이자 평생 한결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모범적 개신교 신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존엄한 품위의 사람’으로 잘 성장, 성숙한 참으로 자랑스런 제자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선명한 39년전 1986년 신학대학원 1학년때 문세화 외방선교회 출신 교수 신부님의 강의 내용입니다.
“‘사람답게’ 너무 추상적입니다. 구체적으로 분명히 하여 ‘자녀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한결같이 평생 날마다 어느 삶의 자리에서든 존엄한 품위의 인간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 사람으로 태어난 본분이자 행복이요 보람일 것입니다. 미사전례중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전 늘 감격하는 “하느님의 자녀 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 라는 사제의 권고 대목입니다. 하느님의 자녀, 바로 우리의 고귀하고 존엄한 신원을 말해 줍니다.
제가 수도생활하면서 많은 시를 썼는데 대표적 짧은 시는 작년 후반부 탄생했습니다.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싶은 짧은 고백시로 참 자주 나눴어도 늘 새로운 두 시를 다시 또 나눕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젊음은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열정에 있습니다. 평생 죽을 때까지 날마다 새롭게 폈다지는 영원한 현역, 영원한 청춘의 ‘파스카의 꽃’같은 봉헌의 삶,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입니다. 제 교대시절 학장의 호가 ‘다운’이었습니다. 이어지는 또 하나의 고백시입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집무실 문을 열 때 마다 한 눈 가득, 가슴 가득 안겨 오는 불암산을 볼 때마다 저절로 솟아나는 시입니다. 물론 당신이 지칭하는 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삶, 바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겠습니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오늘 독서와 복음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제1독서는 창세기 천지창조 마지막 부분으로 매 창조시 후렴처럼 반복되는 세 말마디가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천지창조의 절정은 사람 창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1,27)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삶’, ‘하느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하는 삶’, 베네딕도회의 또 하나의 모토, ‘참으로 모든 일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에 유일한 답은 사랑뿐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답이 없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이웃을, 자연을, 삶을, 모든 삶의 수행을 사랑할수록 주님을 닮아가면서 명실공히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겠습니다.
그러니 사랑은 분별의 잣대이자, 율법의 완성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무지했습니다. 하느님의 근본 법인 사랑이 아니라 조상들의 전통에 바탕한 일반 관행을 분별의 잣대로 삼습니다. 참마음, 참사랑을 도외시한 본질직시가 아닌 우선순위를 잊은 본말전도의 삶입니다. 주님은 이사야 예언을 근거로 자신 불편한 심정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대로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면서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관행이나 율법은 참고사항일뿐 절대적 법은 하느님의 사랑의 계명 하나뿐입니다. 오늘 말씀 주석을 읽으면서 공감한 부분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열왕기 상권에서 솔로몬은 ‘하느님은 실로 지상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묻는다. 창세기가 주는 답은 ‘그렇다!(YES!)’이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들이기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사신다(God dwells with us, within us). 솔로몬의 성전처럼 거룩한 장소들도, 바리사이들의 손씻는 것 같은 거룩한 수행들도 하느님의 법이 선포하고 보호하는 인간의 거룩한 존엄에 비하면 모두 빛을 잃는다."(all pale in)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엄한 품위의 사람들, 바로 우리의 자랑스런 신원입니다. 답은 사랑뿐입니다. 한결같은, 끊임없는 사랑의 실천이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합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 천사들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시편 8,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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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자기 좋을 대로'{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오늘 복음은 창세기 1장의 후반부입니다. 그런데 우리 전례가 1장을 어제와 오늘에 이어 둘로 나누어 읽은 것은 단지 길이가 길기 때문이 아니라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창세기는 무생물의 창조 얘기입니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생물이 아니고 번식하고 번성하도록 복을 내릴 대상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동물이 아닌 무생물은 번식하고 번성하도록 하느님께서 복을 내려주시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이런 구분에 대해 저는 유감이 없지 않습니다. 돌덩이에게 복을 주시지 않는 것에 유감이 있습니다.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생물만 번식하고 번성해야 할 존재로 여기고 복을 주셨다는 얘기인데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 생각하는 겁니다.
제가 지금 삐딱하게 얘기하는 것인데 인간을 창조하시고 난 뒤 참 좋았다고 하신 것에 관해서도 왜 참 좋다고 하시는 건지 생각됩니다.
그리고 번식하고 번성하도록 복을 주시는데도 그 복을 거부하며 번식하고 번성하려고 하지 않는 오늘날 신인류가 뭐가 보기 좋다고 하시는 겁니까?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셨는데 오늘날 인류가 어떤 면에서 하느님 모습을 닮았으며 온갖 피조물을 잘 다스리고 있다고 어떻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 오늘날 우리는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인간과는 다릅니다. 우리 인간은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와 같이 갈수록 교만해지고 하느님 사랑은 닮지 않고 자기 좋을 대로 피조물을 다스립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좋도록 다스려야 하는데 자기 좋을 대로 부려 먹는 것입니다.
‘자기 좋을 대로’, 이것이 하느님 사랑과 정반대되는 자기중심의 죄이고, ‘하느님 보시기 좋을 대로’에 불순종하게 하는 교만의 죄입니다.
주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이점을 꼬집으십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거스르는데 인간의 전통을 근거로 그리고 하느님을 핑계 대며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코르반’이란 어떤 물건을 하느님께 봉헌함으로써 아무나 사용치 못하게 한 것인데 ‘코르반’을 핑계로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 당대 전통과 사람들을 꼬집으신 것입니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라고 꾸짖으시는데 오늘 이 말씀이 제겐 ‘레오나르도, 너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라는 말로 정확히 들립니다.
하느님 사랑과 정반대되는 이 ‘자기 좋을 대로’ 곧 자기중심을 오늘 우리는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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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버린다."(마르 7,9)
<고통의 의미!>
오늘 복음(마르 7,1-13)은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입니다. 조상들의 전통은 유다 지도자들이 만들어 놓은 율법 조항들(613개)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사랑의 계명이 이 조항들보다 위에 있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오늘은 '1858년 2월 11일, 성모님께서 루르드의 시골 소녀(14살)인 베르나데트(벨라뎃다)에게 첫 번째 발현하신 날'이며,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병자들과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는 많은 이들을 기억하시면서 '제33차 세계 병자의 날 담화'를 발표하셨습니다. '담화의 제목'은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5)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느님께서 고통받는 이들 곁에 계시는 특별한 세 가지 방식', 곧 '만남과 선물과 나눔'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병을 주님을 만나 뵙는 기회'로 삼고, 그리고 '질병이 더 큰 만남의 계기, 변화의 계기가 된다.'고 하십니다.
이 만남 때문에 지금의 고통이 '선물'이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렇습니다. 고통이 지나고보면 그것이 선물이라는 것을 훗날 깨닫곤 합니다.
"고통의 자리들은 서로를 풍요롭게 하는 나눔의 자리 이기도 하다."고 하십니다. 환자와 의사와 간호사와 봉사사와 가족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이들의 따뜻한 나눔, 곧 미소와 관심(사랑)을 통해, 우리가 '희망의 천사이자 하느님의 심부름꾼'이 된다고 하십니다.
참으로 아픈 이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크고 작은 아픔은 모두에게 찾아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하느님의 사랑(기도와 나눔)이 되어 주는 희망의 천사들이 됩시다!
"천주의 성모님, 당신의 보호에 저희를 맡기오니 어려울 때에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마시고 항상 모든 위험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영화롭고 복되신 동정녀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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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를 헛되이 섬긴다."(마르 7, 7)
우리 자신은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스스로 묻고
살펴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이 물음이
가장 중요한
신앙의
반성입니다.
신앙의 빛은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는
정신으로부터
옵니다.
저마다
복음의 자리에서
자기를 바로
보는 것이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는
계명의 진정한
첫걸음입니다.
그것이
겉모습에만
집착하는
우리의
위선에서
벗어나는
참된
길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계명은
마음 깊숙히
존재하는
사랑을
만나게 합니다.
계명의 무게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진정한
사랑의
무게입니다.
가벼운 전통은
쉬이 왜곡되어
너무 빨리
다른 길로
빠져나가
버립니다.
좋은 전통도
좋지만
정신을
곧추세우는
주체는
언제나
계명의 정신입니다.
계명의 정신은
공동체를 살립니다.
계명은 지식이
아닌
생명입니다.
생명의 발동이
하느님을 섬기는
진정한
계명입니다.
우리의 생명이란
하느님의
계명과 함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한 시대를
유행했던
전통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폐기될 수 없고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계명입니다.
영원한 사랑으로
영원하신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는 사랑의
새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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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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