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50313. 파도 (2013 우리시 여름학교 백일장에서 장원 한 시)
민구식
바닷가에
흉터 없는 바위 볼 수 있는가?
세상사 모두 그래
파도에 시달린 흉터를
勳章(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거야
백사장에
모난 돌 없지?
모두 그래
부딪쳐 닳으면서
서로 닮아가는 거야
2014년 시집 <가랑잎 통신> 에서
♥ 친구들과 바다 낚시를 갔습니다.
모두들 낚시에 빠져 있는데 저는 낚시가 별로 재미가 없어 방파제에서 나와 모래사장을 어슬렁거리며 멀리서 몰려오는 파도가 바위섬에 부딪쳐 물보라를 일으키는 것을 바라보다가 지은 시입니다
모든 사물이나 사건, 상황에 내가 개입되는 게 아니라 내가 그것이 되는 것, 그 묘미가 시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에서는 1인칭 화자 시점이거나 3인칭 전지전능의 시점으로 사건을 전개하면서 객관적 서술을 하지만 어느 것이나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에서는 내가 그 물체로 전이되지 않고는 시를 만들거나 쓸 수가 없는 차이가 있습니다. 내가 그것이 된다는 것, 그래서 시가 소설보다 더욱 풍부한 상상과 진솔함을 가지는 것 아닌가 합니다. 전이되는 것, 그러다 보니 모든 현상을 인생사의 어떤 모습으로 형상화하고, 더 나아가 성찰이나 희망, 에너지를 주는 모습으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잠언적인 시가 많은 것이 특징이기도 합니다.
제 시의 바탕에는 서정적인 것을 배제할 수가 없습니다. 노동자의 세월을 보내면서 노동시를 쓰지 않느냐는 질문을 듣기도 합니다. 물론 격변의 시대를 살았던 7~80년대의 참여시, 저항시, 리얼리티를 추구하고 싶은 생각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시는 하소연이라기 보다는 추억으로부터 희망을 걸러내고 서정적인 풍경 안에서 편안함과 회귀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이 본질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마도 저의 시는 그런 면에서 제 삶의 치열했던 부분을 비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시적 능력의 한계도 있겠지요. 고영민, 여국현, 맹문제 시인이 포스코 출신입니다. 시인들이 지금은 대학에서 문학 교수를 하고 있지만 평론가들은 그를 노동시인이라고 합니다 노동에 관한 시를 썼지요. 저 역시 노동문제의 격변 시기를 겪으며 노동조합 위원에 출마하기도 하는 등 나름대로의 고민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진정 제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고 그런 참여의 방법이 세상을 변화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글은 말보다 힘이 셉니다. 글도 이성을 움직이는 글보다 가슴을 움직이는 힘이 더 힘이 셉니다. 그래서 제가 쓰는 시가 제 발자국과는 다르게 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