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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일주일 전쯤으로 기억된다. 화방에서 나온 하연의 양손엔 두 개의 종이백이 들려져 있었다. 서울 시내로 나오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하연은 그동안 필요한 물건이나 재료가 있어도 사지않고 버티고 있었던 까닭에 구매해야 할 물건들이 꽤나 많았다. 혜진과 함께 오랜만에 서울 시내로 나온 하연은 필요한 걸 다 사가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이며 계속 짐을 늘려만 갔다. 나올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어깨를 부딪히며 표정없이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그 속으로 휩쓸려들어가 자신 역시 표정을 잃어버릴것만 같아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보자.......안료는 주문했고, 유약주문도 했고....... 붓이 좀 ........세필(細筆)이 필요한데.......한군데 더 들러볼까? 혜진인 야생화 집 찾았을려나? "
틈틈이 필요한 물품들을 적어놓은 다이어리를 손에 들고는 하나하나 살 물건들을 체크해 나가고 있던 하연은 화방 한군데를 더 들를 시간이 되나 시계를 보았다. 웬만한 건 전화로 주문을 할수도 있었지만, 물감들이라는게 나오는 회사마다 색깔이 천차만별이라 같은 회사 물건이라도 꼭 눈으로 확인을 해야한다. 미세한 차이가 색감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까닭에 굳이 눈으로 보고 사는 번거로움을 택해야만 한다. 서울 시내로 들어오자마자 거래처에 들러 필요한 물건들을 주문해 놓은 하연과 혜진은 각자 흩어져 필요한 것들을 구매하고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대부분 둘이 함께 다니곤 했지만 오늘은 시간이 빠듯한 관계로 각자 움직이기로 했던 것인데,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다. 혜진은 지난달 주문해 놓은 한국 야생화 모음전 책과 필요한 몇가지 책들을 구입하기위해 서점으로 향했고, 하연은 그동안 미뤄뒀던 은행 일을 보기로 하고는 헤어졌던 것이다. 거래처에서 입금된 대금을 확인한 하연은 필요한 붓과 조각도를 사기위해 화방에 들렀다. 한국 야생화 작업을 하려면 아무래도 지금 가지고 있는 붓들이 너무 굵고 숱이 많은 관계로 가늘고 작은 붓들이 더 필요했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적어놓은 물품들 중 아직 구입하지 못한것들을 체크하며 걷던 하연은 모퉁이를 돌며 달려오는 낯선 남자와 세차게 부딪혔다.
"엄마얏!!!!"
"앗!!! 이런....."
외마디 비명과 함께 하연의 손에 들려있던 종이백 속의 화구들이 와르르 길바닥에 쏟아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중심을 잃은 상대편 남자의 손에 들려있던 서류더미들 역시 화구와 섞여 나딩굴었다. 미안하다는 말과 재빠르게 쏟아진 서류들을 챙기기 시작하는 상대편 남자의 손길이 분주하다. 긴 롱코트를 입고 가죽 장갑을 끼고 있던 남자는 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쑤셔넣고는 땅에 떨어진 종이들을 빠르게 주워 정리했다. 털실로 짠 장갑을 끼고 있던 하연 역시 서둘러 장갑을 벗어던지곤 바닥에 쏟아진 화구들을 주워 담았다. 무게가 상당한 유약들은 모두 택배로 부탁을 했지만, 우선 급한 안료들은 직접 들고 가고 있었기에 하연은 안료병들이 깨진게 아닌가 일일이 확인을 해야했다. 그러던 하연은 쏟아진 자신의 서류들을 챙겨 들고선 미안하단 말을 남긴채 서둘러 자리를 뜨는 상대편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아직 땅바닥에는 하연의 물건들이 뒹굴고 있는데, 화구들을 다 챙기지도 못했는데 사과만 하곤 서둘러 자리를 떠나버리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하연은 어이가 없다. 서로가 부주의해서 부딪혔으니 상대편의 잘못이라 탓하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 상대편 물건을 챙겨주는 매너정도는 보여야 하는게 아닐까 싶다.
"뭐야? 자기거만 챙겨가구, 진짜 매너없네."
하연은 자신의 서류만 챙기곤 서둘러 자리를 떠나는 남자의 뒷 모습을 원망스러운듯 쳐다보며 툴툴거렸다. 적어도 서로의 물건 정도는 챙겨주는게 매너 아닌가? 훌쩍 사라진 낯선 남자를 원망하며 떨어진 물건들을 챙기던 하연의 눈에 찢어진 쇼핑백이 들어왔다.
"아~이, 진짜 이게 뭐야!!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아무리 잘 챙겨넣는다 해도 찟어진 쇼핑백에 지금의 물건을 다 집어넣을 수는 없을 것 같다. 화방 한군데를 더 들릴려는 계획은 무산되어 버리고 하연은 최대한 물건들을 정리해 찟어진 쇼핑백에 주섬주섬 챙겨 넣기 시작했다. 물론 쇼핑한 물건들을 다 집어넣을 수는 없었지만 최대한 정리를 해보려 애를 쓴 하연은 찢어진 쇼핑백을 두 팔로 껴안고는 나머지 물건들을 그 위에 쌓아올렸다. 그렇게 두 팔 가득 쇼핑백을 껴안다시피 주차장으로 온 하연은 먼저 와 기다리던 혜진이 눈에 들어오자 종종 걸음으로 뛰다시피 걸어갔다. 혜진은 피난민 살림살이마냥 두 팔 가득 두서없이 화구들을 안고 오는 하연을 보며 무척이나 놀란듯한 얼굴이다.
"뭐야!! 어디 가게라도 털었냐? 몰골이 왜 이래?"
"좀 받아줘. 오다가 쏟아졌어."
서둘러 차문을 연 혜진이 하연의 손에 두서없이 들린 짐들을 받아 뒷좌석에 던지다시피 내려놓았다. 하여튼 한꺼번에 너무 많이 산다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런 사단이 난다. 그냥 한번씩 바람쐬러 나오자니깐 기어이 욕심을 부린다며 타박을 하는 혜진을 보며 하연도 입맛이 쓰다. 너무 욕심을 부린게 맞기는 하지만 서울엔 별로 나오고 싶지않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아까처럼 낯선 사람과 어깨를 부딪혀야 할만큼 복잡한 서울이 싫다.
"오다가 어떤 남자랑 부딪혔어."
"부딪혀? 다치진 않았어?"
"다치진 않았는데 보시다시피 쇼핑백이 찢어져서 이 몰골이 됐어."
"어쩐지, 난 또 돈 모자라서 주인 몰래 가게라도 털어나온 줄 알았지."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아직 그 정도는 아냐."
"아무튼 안 다쳤으면 됐지. 살건 다 산거야? 뭐 빠뜨린거 없어?"
"가는 붓 좀 더 사려고 했는데 못 샀어. 넌 야생화집 찾았어?"
혜진이 자랑스런 표정을 지어보이며 두툼한 책 한권을 두 손으로 들어 올리곤 씩 웃어 보인다. 고생한 보람이 있는가 보다. 근 한달을 기다려 손에 넣은 야생화 집을 보며 새로운 디자인들을 고안해 낼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좀 전의 낭패감이 눈 녹듯 사라져 버린다. 더불어 헤헤거리는 혜진의 손에 들려있는 호떡 봉지를 보며 툴툴거리던 투정마저도 잠잠해져버렸다. 좀 식긴 했지만 여전히 따뜻한 기운이 남아있는 호떡을 하나 들고는 크게 한입 베어 문 하연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운전석에 앉아 안전밸트를 매고 차에 시동을 건 하연은 남아있던 호떡을 모조리 입안으로 쑤셔넣고는 힘차게 엑셀을 밟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조수석에 앉아 하연은 사 온 물건을 정리하고 있던 혜진이 갑자기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운전을 하고 있던 하연을 쳐다보았다.
"어라?"
"왜?"
"하연아......."
하연은 찟어진 쇼핑백에 아무렇게나 들어있던 물건들을 차 안에 있던 빈 박스에 차곡차곡 정리해가던 혜진이 자신의 다이어리를 집어드는것을 보았다. 운전을 하며 흘깃 별 생각없이 혜진이 들어보이는 자신의 다이어리를 본 하연은 무심히 고개를 돌리다 흠짓 놀라 급하게 성급하게 차를 길가로 세웠다. 혜진의 손에서 낚아채듯 다이어리를 건네받은 하연은 어이없다는 듯 벌린 입을 다물줄 모른다. 분명 같은 색깔의 다이어리였지만 세무가죽으로 표지가 되어있던 하연의 다이어리가 아니다. 꽤 비싸보이는 가죽으로 싸여져 있기는 하지만 분명 하연의 다이어리와는 다른 것이다. 그때 하연의 머리속으로 서둘러 흐트러진 서류뭉치들을 챙겨 자리를 떠나던 남자의 옆구리에 끼워졌던 자신의 다이어리가 떠올랐다.
"어떡해, 아까 부딪혔을때 바꿔졌나봐. "
"그럼 그 남자가 니 다이어리를 가져갔다는 거야?"
"이 상황에 그거밖에 없잖아. 화방에 나올때까지 분명 가지고 있었거든."
울상을 짖는 하연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군다. 정말 이놈의 서울이 너무 싫다. 미안하단 말 한마디 겨우 던지고는 매너없이 홀라당 가버린 그 남자도 싫고, 주책없이 길바닥에 물건을 쏟아버리곤 그걸 주워담고 있던 자신의 모습도 싫다. 이리저리 연신 싫다는 소리만 연발하는 하연을 보며 혜진은 하연의 손에서 다이어리를 낚아채선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겉표지가 비슷한게 얼핏봐선 헷갈리만도 하지만 하연의 다이어리는 천연 세무가죽으로 되어있어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몇년째 속지만 바꿔가며 쓰던거라 손때가 묻긴 했지만, 그래서 더욱 값어치가 있어보이는 물건이라 혜진도 무척이나 욕심내던 물건이다. 혜진은 이리저리 다이어리를 뒤적이며 주인의 인적사항을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강 찬혁, 이름 석자 외에 정보가 될만한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 빽빽히 적힌 스케줄 표만이 다이어리의 주인이 무척이나 바쁜 사람이라는걸 알려주고 있을뿐이었다.
"바빠보이긴 하더라. 허우대는 멀쩡한 인간이 매너없게 자기껏만 홀라당 챙겨선 가버리더라구. 연락할만한 번호도 없는거야?"
"없어."
하연이 운전을 하는 동안 내내 다이어리를 살펴보며 혹시나 연락할 방법이 없나 찾고 있던 혜진은 머리가 아픈듯 고개를 흔들어댔다. 사람 이름 같기도 하고 가게 이름같기도 한 온통 알수없는 암호같은 말만 잔뜩 적힌 스케줄표에 절로 머리가 아파왔다. 이 다이어리의 주인은 분실 같은건 절대 염두에 두지않는 사람인것같다. 그 흔한 친구 핸드폰 번호도 적어두질 않았다. 아님 친구가 없는건가? 결론은 별로 인간성이 좋은 사람은 아닌거 같다는 것뿐이었다.
"이 사람, 별로 인간성이 안좋은 사람인가?"
"왜?"
"그렇잖아. 어째 친구 전화번호 하나가 없냐구?"
"요즘 전부 핸드폰에 저장시키지 누가 그런걸 일일이 적고 다녀? 그나저나 내 다이어리는 어떡하니? 거기에 안료 비율이랑 유약 비율까지 다 적혔는데. 게다가 우리 거래처 전화번호도 거기 있구 주문받은 목록표랑 수량도 다 거기 적혀있는데."
"작년에 쓰던거 있잖아. 대충은 거기 다 있을거 아냐."
"그렇긴 한데........"
"게다가 이 다이어리 좀 중요해 보이는데 아마 그쪽에서 먼저 연락이 올거야 틀림없이."
"그럴까?"
"그렇다니깐 거긴 우리집 전화번호도 있고하니깐 그쪽에서 먼저 연락이 올거야. 찾을수 있을거니깐 너무 걱정마."
부디 그랬으면 하는 마음이다. 애써 실망감을 감추고 있기는 하지만 손때 묻은 다이어리는 대학 입학 선물로 엄마가 그녀에게 남겼던 것이다. 몇개 안되는 엄마의 선물들 중 하나인데, 더구나 다이어리 표지 속에 끼워진 엄마의 사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이....이런......."
같은 시각 다이어리가 바뀐 걸 눈치 챈 찬혁 역시 난감한 표정이다. 아침 일찍부터 사무실을 나와 거래처를 돌고있던 그는 자신이 미리 짜놓은 시간보다 일정이 늦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더구나 아직 둘러보지 못한 매장이 여섯 곳이다. 팔라는 상품은 팔지않고 홍보 책자를 팔고 있는 건지, 가는 곳마다 카다로그며 홍보 물량이 충분치 못하다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아무래도 새로 선정한 모델의 인기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것 같다. 매장마다 좀더 많은 홍보물을 요구하는 통에 실갱이를 벌이다보니 예상한 시간보다 많이 지체되었다. 시간에 쫓겨 거의 뛰다시피 매장을 나오던 찬혁은 모퉁이를 돌아오는 여자를 보지못하고 부딪혀 버렸다. 길바닥에 쏟아진 물건들을 보며 생각 같아선 모두 정리를 해주고 싶지만, 일분 일초가 급했던 찬혁으로썬 실례를 무릅쓰고 자리를 떠나와야만 했다. 여전히 바닥에 쏟아진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던 상대편에겐 미안했지만 어쩔수가 없다 생각했었는데 결국 그 벌을 받는 모양이다. 지금 거길 돌아간다고 해도 그 여자가 그곳에 있을 확률은 전혀 없다. 찬혁은 아까 부딪힌 여자에 대해 최대한으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분명 일반 회사원의 복장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빚바랜 찢어진 청바지와 터틀넥스웨터에 롱 코트를 입은 여자는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일반 회사원은 아닌듯 하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여자가 바닥에 쏟아버린 물건들이 붓이며 물감이며 죄다 미술 도구들이었던거 같다. 찬혁은 다이어리를 펼쳐보았다. 정 하연이라는 이름과 함께 조금 전 부딪히며 지나간 여자의 얼굴이 좀 더 선명히 나타났다. 친구인듯 보이는 여자와 다정히 팔짱을 낀 채 웃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 들어있다. 뒷장으로 중년 여자의 사진도 끼워져 있다. 젊었을 때 무척이나 미인이란 소리를 많이 들었을 것 같다. 사진을 다시 표지에 끼워넣은 찬혁은 자신의 손안에 있는 다이어리를 팔랑팔랑 넘기며 도대체 이것들은 다 뭔가 싶다. 안료는 뭐고 철은 뭔지, 그에게는 생소하게 들리는 용어들이 잔뜩 적혀있는 다이어리를 보며 아무튼 자신과는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다.
혜진이랑 하연이네 공방? 공방이면 그릇집인 모양인데 바꾼지 얼마되지 않아보이는 다이어리에는 연락할만한 핸드폰 번호 하나 없이 달랑 집 전화번호 하나와 주소가 전부다.
찬혁은 망설임없이 핸드폰을 꺼내 다이어리에 적힌 전화번호를 눌렸다. 가족 누구라도 전화를 받아준다면 연락처를 찾을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찬혁의 바램과는 달리 몇번이고 울리는 신호음에도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을수 없었다. 필요한 스케줄 몇개가 신경쓰기기는 하지만 실상 주요 사항들은 모두 사무실 컴퓨터에 저장이 되어 있으니 그리 큰 지장은 없을 것이다. 찬혁은 일단 다이어리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인데 우선은 눈 앞의 서류가 더 급하다. 다이어리를 옆으로 던져놓은 찬혁은 지금 자신의 발등에 떨어진 사안들을 해결하기 위해 사무실로 차를 돌렸다.
첫댓글 하연과 찬혁의 만남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가는것 같네요 기대해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