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火, 佛〕 속에 핀 연꽃
글·최혜숙/성남시 수정구
지금 생각해보아도 그건 기이한 인연입니다.
왜냐하면 셋째 아들 생일에 당신이 돌아가실 것을 예감하셨고, 셋째 며느리 생일 오후 1시에 눈을 감으셨습니다. 그리고 운명하신 지 100일 되는 날은 생전의 당신 생신이었습니다.
3년 전의 일입니다.
제가 생각한 결혼생활과 현실생활과는 너무 동떨어진 느낌이었고, 갈등에 빠져 허우적거면서 세 아이의 어미가 되었지요.
시댁 사람들은 종교에 대한 개념이 없었습니다.
절에 가는 것조차 용납이 되지 않던 터에 불광사 12주년 법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환희 그 자체였지만 빠짐없이 법회에 참석하고자 해도 시간이 허락치 않았습니다. 아무 때나 슬며시 도량에 발을 들여 놓으면 걷잡을 수 없는 환희심에 목이 메입니다. 광덕 큰스님의 “기도하면 활로가 생긴다.”는 말씀은 제게 크나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시어머니나 남편이 제가 절에 가는 것을 말리지 않도록 도와 주십사’ 늘 기도하고, 또 ‘시어머니가 절 미워하지 않게 해 주십사’하고 기도하면서 시어머니께 꼭 부처님 대하듯 오랜 세월을 한결같이 했던 겁니다.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전 벌써 이승 사람이 아닙니다. 상대가 내게 거칠게 다가오면 그만큼 내 업장은 소멸될 거라는 그 이치가 저를 성숙시킨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저렇게 25년이 지나갔고, 3년 전부터 시어머니는 시골에 혼자 계셨습니다.
저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시어머니를 찾아뵈었고, 이웃 아주머니를 비서로 두게 했고, 늘 냉장고에 먹거리를 두어 마을사람들이 꼬이도록 했습니다.
이웃과 더불어 사시면서 맑은 공기 물 좋고 산 좋은 환경에 늘 건강하게 미소 띈 어머니 모습을 보게 되어 기뻤습니다.
새벽이면 늘 하던 금강경, 반야경 독경 대신에 어머니도 들을 수 있도록 보현행자의 서원을 크게 낭송합니다.
어느새 동네분들한테 셋째 며느리 얘기도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남편 생일날 음식을 장만해서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어머니께서 “어젯밤에 머리가 너무 아파 청심환 두 알을 먹었는데 지금은 괜찮다”고 하셔서 혈압을 재었더니 너무 높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잘 드시고 비서노인과 화투놀이를 하다가 “머리가 아파.”하고 누우셨고 그 뒤로 의식이 없었습니다. 자손들이 다 왔습니다. 미국의 딸도 왔습니다.
어머니는 11일간 병원에 계시다 12일째 되는 날 오후 1시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날은 제 생일이었습니다. 제가 끼고 있던 은으로 만든 ‘마하반야바라밀’ 반지를 끼워 드렸습니다.
장례 치르고 초하루 삭망, 보름 삭망 지내고 일요일이 마침 지장재일이었습니다. 몇 년 전 해 보았던 3,000배를 시작했습니다.
네 명의 김씨(남편, 두 딸, 아들)는 제 모습을 보고 아무 말도 못 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모습에서 근접할 수 없던 어떤 힘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잠에 빠졌습니다.
보통 때와 같이 시골 현관에 들어 섰습니다.
남자들 5~6명 정도와 여자는 어머니 한 분뿐인데 제 행동을 주시합니다.
늘 하던 대로 화장실부터 청소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 갔더니 대변을 한 데다 아무렇게 보아 놓아서 마당의 재래식 화장실 안에 휙 던지고 뒤돌아서려는데 기이한 일이 생겼습니다.
맷방석만한 분홍색 연꽃 봉우리가 변소 안에서 솟아 오르더니 활짝 핀 연꽃으로 올라왔습니다.
“이렇게 묘할 수가 있을까.” 뒷걸음치다가 깨었습니다.
꿈이었습니다. 왜 꿈에서 깨었는데 광덕 큰스님이 보입니까? 제 불명을 묘오련(妙晤蓮)이라고 광덕 큰스님께서 지어 주신 것이 생각났습니다.
어느 노보살이 남자들 5~6명은 어머니를 따라 극락에 가려고 오신 것이라고 합니다. 천도되지 않은 영가가 어머니를 따라 극락왕생하셨답니다. 큰시숙, 둘째 시숙 모두 시큰둥했지만 저는 49재를 해 드리면 좋다는 이치를 알고 있기에 남편과 같이 거들어서 봉국사에서 49천도재를 지냈습니다.
일가친지, 도반들로 법당 안이 비좁을 정도로 꽉 찼습니다.
스님께서는 영가법문과 우리들에게까지 법문을 들려주셨습니다. 그 날은 스승의 날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인생의 큰스승이었습니다.
법당의 음식을 나르다가 우연히 바람에 부딪히는 연등의 카드 때문에 위를 올려다 보니까 또 묘한 일이었습니다.
영정 모신 위에 바로 “청신녀 김이분” 어머니 이름 석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우리집 가족들 이름이 적힌 카드와 연등이었습니다. 4월 초파일 연등을 신청하고도 등이 어느 곳에 있었는지 확인도 안 했었는데 참 묘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지 100일째 되는 날은 또 어머니 생신이었습니다.
읍내 음식점으로 동네 분들을 모시고 융숭한 대접을 하였습니다.
제가 시집 오던 해 육순잔치 때부터 계속 해마다 환갑잔치하듯 생일잔치를 했었습니다.
마지막 생신은 돌아가신 지 100일째 되는 날로 어머니 얘기들로 시끌벅쩍했는데 이것도 참 묘한 생각이 듭니다.
어머니가 당신 돌아가실 날짜를 택일했던 것 같습니다.
셋째 아들 생일날 저녁 늦게까지 많은 얘기를 해 주셨는데 그것이 마지막 유언이 되었습니다.
제게도 긴한 말씀들을 해 주셨는데 평소에 섭섭했던 일들이 일시에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또 신기한 것은 큰시숙이 정년퇴임하기 며칠 전이 100일 탈상입니다. 조문객이 엄청 많았던 것도 어머니가 택일해 돌아가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달포 전 미국의 시누이에게서 고맙다는 전화가 왔었습니다.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고 며느리라는 의무감에서 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죄송스럽다”고 시누이에게 고백하면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고백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새벽에 일어나면 “남이 짓는 공덕을 기뻐하겠습니다. 설법하여 주시기를 청하겠습니다. 모든 부처님께 이 세상에 오래 계시기를 청하겠습니다. 항상 부처님을 따라 배우겠습니다. 항상 중생을 수순하겠습니다. 지은 바 모든 공덕을 널리 중생에게 회향하겠습니다.”
보현보살 10종 행원의 원제만 독송하여도 구절구절 그 좋은 문구가 머릿 속에서 필름처럼 빠르게 지나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금강경에 버금가는 보현행자의 서원을 가슴뭉클하게 좋아하면서 늘 독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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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모 땃서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붇닷서! 존귀하신분, 공뱡받아 마땅하신분, 바르게 깨달으신 그분께 귀의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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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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