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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은 20년 넘게 노동운동에 헌신해 온 한진중공업 해고자다. 올 1월에도 김진숙 지도위원은 한진중공업 대량 해고 방침에 항의해 공장 앞에서 24일간 단식 농성을 한 바 있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연설과 글은 많은 노동자와 학생들에게 영감과 감동을 주는 걸로 유명하다. 《소금꽃나무》는 지금도 필독서로 꼽힌다.
이 글은 ‘다함께’가 주최한 2007년 ‘맑시즘’ 강연에서 김 지도위원이 한 연설을 글로 옮긴 것이다. 대부분 1980년대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에 관한 내용으로, 오늘날 경제 위기 고통전가에 맞서는 노동자 투쟁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판단해 게재한다.///
저는 소개받은 대로 저 부산에 있는 한진중공업이라고 배 만드는 조선소의 용접공 출신입니다. 땜쟁이였어요. 그때 신문에도 나지 않았습니까? “대한민국 최초의 처녀 용접사 탄생”. [자신을 가리키며] 그게 이겁니다. 그 신문이 <조선일보>라는 게 지금도 쪽팔려 죽겠습니다. (청중 웃음) 난 그때 <조선일보>가 그딴 신문인 줄 몰랐거든. 그때는 아무도 <조선일보>가 그딴 신문이라고 얘기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맑시즘2007에서 연설 중인 김진숙 지도위원 ⓒ사진 레프트21
배 만드는 공장에들 안 댕겨 보셨지요? 배를 다 만들려면요, 보통 6개월에서 1년씩 걸립니다. 배 다 만들고 나면 진수식도 하고 명명식도 하고 행사를 거하게 해요. 그런 날은 선주도 오고, 선주 마누라도 오고, 국회의원도 오고, 교통부 장관도 오고, 경찰서장도 오고, 하여튼 할 일 없는 새끼들은 죄[다] 옵니다, 막. (청중 폭소). 회사 앞에 시커먼 자가용이 수백 대가 와요.
제가 입사하고 6개월 만에 처음으로 제가 만든 배가 바다로 나가는 날이었습니다. 제가 만든 배가 바다로 나가는데 얼마나 기분이 째지겄어요? 11시에 행사를 한다고 해서 나는 10시 반부터 꽃단장을 하고 기다렸다. 그 배 내가 만들었잖아! 난 나를 데리러 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임마들이요 10시 반쯤 되니까 데리러 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일하는 배에다 뻘건 줄을 쳐 놓고 아예 나오지 못하게 하더라고. 왜 나가지도 못하게 하느냐 그랬더니 직장이 “니 꼬라지를 한번 봐 봐라” 이라대? 내 꼬라지를 보니까 못 나가게 할 만하더라고요.
땜쟁이들 완전히 그지 새끼들 아닙니까. 오버헤드 천정 용접을 이렇게 하면은, 불똥이 떨어져서 들어갑니다. 용접하는 양반들은 체질이 특수해서 불똥 맞아도 안 뜨거운 줄들 아셔. 죄 뜨겁습니다. 떨어져서 들어가면 우선 멈추는 데가 허리띠잖아요. 막 털면은요, 그런 날은 목덜미부터 뒤꿈치까지 다 디는 거예요. 잘 때도 엎어져서 자야 되고 환장을 하겠더라고.
한 날은 내가 막 뛰는 걸 보더니 옆에 있던 아저씨가 “야, 뛰지 마라. 와 뛰노?” 이래요. 안 뛰고 가만히 있으니까, 신기하대. 고 자리만 폭 파이는 게 있잖아요. ‘야! 이것이 생활의 지혜구나.’
옷에 불똥이 떨어지면 불이 붙습니다. 지 몸땡아리에 불 붙은 거 모르는 놈도 있습니까? 근데도요, 땜쟁이들은 땜질하다가 용접봉 떼면 세상 끝나는 줄 압니다. 끝까지 가요. 나중에 용접봉 다 타면 그때서야 홀다[용접봉 끼우는 기구] 집어 던지고 끈다고 꺼도 구멍이 뚫려 있지. 거기다 테이프 하나 똑 붙이고 또 떨어지면 또 붙이고… 나중에 보면 멋있다. 갑옷 같애, 번쩍번쩍. (청중 웃음) 테이프 칠갑을 해 가 돌아다닙니다. 작업복이 1년에 한 번밖에 안 나왔거든요. 장관도 와 있는데 그런 그지들이 돌아다니면 회사 이미지 안 좋아질까 봐 그런지 아예 나오질 못하게 하는 거예요.
겨울엔 손 묶어 놓고 노나, 야들 잔치하는데? 야네들 1 도크에서 이렇게 행사하면요, 우리는 이렇게 2도크에서 내다 보면 야들 노는 거 다 뵌다. 배가 높잖아요. 저는 높이만 백 미터가 되는 배도 봤습니다. 그 높은 배에다 단을 이렇게 쌓아 가지고 거기에 누가 올라가냐면 꼭 선주 예편네가 올라간다. 그 예편네 그날 거기 올라가는 거 보면 눈꼴 셔서 못 봅니다. 그 배 지가 혼자 다 만든 거 같애요. (청중 웃음) 아저씨들이 용접봉 꼬다리 집어 던지고, 볼트 집어 던지고, 호루래기 불고, 자빠져라! 아! 얼마나 성질 납니까? 그 배 만드는 데 지가 용접을 한번 해 봤습니까? 구라인다[그라인더] 한번 갈아 봤어요?
그 여자가 거길 올라가지고 그 큰 배에다 오색 테이프를 창창 감아서, 도끼로 테이프를 탕 치면, 그게 진짜로 금도끼랴, 비둘기들 후루룩 날아간다. 난 비둘기들도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보는데요. (청중 웃음) 비둘기들이 조직이 안 돼 있으니까 그 따우들로 먹고 살더라고. 비둘기들이 날아가고 나면 그 큰 배가 바다를 쫘악 미끄러져 들어가는데, 그게 진수식이거든요. 그게 멋있습니다. 물줄기가 양 옆으로 수십 미터 솟구치고.
저는 넋을 빼고 그거를 쳐다보는데, 그 배가 세상에 태어나 첫 고동 소리를 뿌웅 내면서 바다로 가는 거예요. 뱃고동 소리가 들리니까 그 시끄럽던 아저씨들이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담배에 불을 붙여서는 철판 위에 올려놓습디다. 그리고 저한테 하시는 말씀이 “진숙아, 윤식이 나간다.” 이래요. 그 배 만들 때 죽은 노동자 이름이 윤식이었드랬습니다. 그때부터 고동 소리가 들리면 아! 저 배 만들 때 누가 죽었지, 누구 손가락이 잘렸지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데요.
세상 모든 걸 만들어 낸 건 노동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만들어 낸 걸 움직이는 것 또한 노동자들이에요. 우리는 그런 걸 별로 의식 못하고 삽니다만, 여러분이 입고 있는 옷도 노동자들이 만들었지요. 이 책걸상도 다 노동자들이 만들었고, 볼펜도 노동자들이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노동의 결과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노동자들 얘기를 하려고 저는 쌔가 빠지게 부산에서 왔는데요.
그런 노동자들이 어떤 취급들을 받고 살았냐면요. 5천 명이 일하는 공장에 식당이 없었다니까! 그래가 도시락을 줘요. 그것도 우리가 돈 내고 사 먹는다. 근데 이 눔의 도시락 공장이 다대포에 있는 거예요. [조선소가 있는] 영도까지 오려면 한 시간이 넘게 걸려. 새벽에 이 눔의 밥을 해 가지고는 트럭에 싣고 와서, 공장에다 자갈처럼 쏟아 놓고 가. 그러면 거기를 쥐들이 먼저 기다리고 있는 겨. 쥐약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지들이 먼저 먹어 본다니까. 그러고 뚜껑 죄 열어 놓고요. 심지어는 아저씨들 사이에서 뚜껑 열린 도시락은 먹어도 괜찮다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새까만 깡보리 밥이었드랬습니다. 저는 징역에 들어가 밥을 먹는데요. 밥이 진짜 백옥 같더라니까? 밥이 어찌 좋았는지, 징역에서 나가라고 하는데 안 나가고 개긴 건 제가 유일하다고 그랬습니다. 한 번은 도시락을 받았는데 까만 게 콩처럼 섞여 있더라고. 뭐였는지 아세요? 쥐똥이었다니까, 쥐똥! 손톱 깎은 게 열 개가 고스란히 나온 적도 있고요.
그때는 식수도 없었어요. 물을 어떻게 먹냐 하면, 물차가 와요. 바퀴 달린 차가 오거든. 여름에도 펄펄 끓는 물이 옵니다. 그런데 한번은. 물차 꼭지를 틀었는데, 물이 안 나오는 겨. 아저씨 하나가 올라 가서 물차 뚜껑을 열었는데, “야! 왕건이가 걸렸다” 이러더라고. 쥐 하나가 불어터져가지고 이따만 한 게 그 물차 구멍을 막고 있드랬습니다. 아저씨들 그거 건져 내고, 고기 우려낸 물이라고, 그러고 먹었드랬습니다.
여러분 탄압이 있으면 어디든 저항이 있습니다. 그러고 터져 나온 게 87년 7월, 우리가 7ㆍ8ㆍ9 대투쟁이라고 얘기하는데, 여기 87년생도 있다메요? (청중 웃음) 저는 아까 와서 여기 87년생이 있다는 얘길 듣고 되게 당황했습니다. 이 얘기를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청중 웃음)
87년 7월 투쟁이, 한진중공업에서는 7월 25일에 일어났어요. 그때는 파업 같은 개념도 없었어요. 저는 그때 해고된 상태였고. 한진중공업에 ― 그때는 대한조선공사였습니다 ― 가니까 길이 막혔더라고. 그때는요, 중공업 노동자들은 파업하면 길부터 막고 했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건 아니야. 근데 어쨌든 본능적으로 길부터 막고 했드랬습니다. 제가 도착하니까, 택시를 잡아 가지고, 그걸 무대로 만들어 놨어요.
그때 조합원이 3천 명이었어요. 3천 명이 화이바[헬멧]를 벗어 들고, 그 비를 줄줄 다 맞으면서 반동은 좌에서 우로, 군가는 ‘멸공의 횃불 아래’. (청중 웃음) 노동자들이 파업하는데, [노래가] ‘멸공의 횃불 아래’, ‘팔도 사나이’, ‘진짜 사나이’, 뭐, ‘소양강 처녀’. (청중 웃음) 그건 양반이여. ‘인천에 성냥 공장 아가씨’가 있습디다. 나는 남자들이요, 군대에서 여성에 대한 시각들이 대단히 왜곡된다고 생각을 하는 게…. 아니 노래가요, 인천에 성냥공장에 불이 나서요, 일하던 노동자가 어디도 타고, 어디도 타고, 홀라당 다 탔댄다. 아니 그러면 같은 노동자로서, 누이동생 같은 여성 노동자가 그런 사고를 당했으면 보상을 제대로 받았는지(청중 웃음), 치료는 제대로 됐는지 이런 걸 살펴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어디도 타고 어디도 타고 홀라당 다 탔다고 하면서 낄낄거린다. 아저씨들이요 그 노래 부를 때는 표정이 다르더라고. 화색이 도는 겨. (청중 웃음) 나는 그 노래를 몰르니까 노래를 배워야 될 거 아닙니까. 노래 가사를 받아서 적었드만 그딴 가사더라고.
그때는 노동가요 자체가 아예 없었을 때였어요. 유일하게 ‘늙은 노동자의 노래’라는 게 있었거든요. 그때 지오세[JOC, 가톨릭 노동단체]라고 카톨릭 단체에서 온 사람이 있었는데 그땐 민주노총 이딴 것도 없을 때에요. 지오세에서 온 사람이 그 ‘늙은 노동자의 노래’를 가르쳐 주는데 이 사람도 그 노래를 잘 몰랐나 봐. 한 줄을 빼먹고 가르쳐 준 겨. (청중 웃음) 그래 3천 명이 죄 한 줄을 빼먹고 배웠다. (청중 폭소) 지도자가 그래서 중요한 게여. (청중 폭소) 우리끼리 부를 때는 한 줄을 더 해도 되고 덜 해도 되고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지요? 근데 그때가 7ㆍ8ㆍ9 대투쟁이라 그래가지고 아저씨들 표현대로는 데모 못하는 거 빙신이라 그랬다고. 부산에서 하루에도 노조가 수십 개 만들어질 때였어요.
저는 그 시절만 생각하면 지금도 뼈저리게 후회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때 활동가라는 사람들이 골방에서 학습을 하는데 주로 어디 책들을 가지고 했냐면, 그때는 한국에는 노동조합에 대한 책도 없었어요. 일본 책들을 가지고 학습들을 했다니까. 일본이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노동조합의 형태가 어떻습니까? 기업별 체제에요. 우리는 노동조합은 기업별만 있는 줄 알았대니까? 현대자동차 따로, 한진중공업 따로, 대우조선 따로 이렇게 있는 줄 알았어요. 무식하게 진짜 노동조합을 다 따로따로 만든 겨. 위원장도 따로 만들고 간부도 따로 만들고. 그때 우리가 일본 책이 아니라 다른 나라 책들을 가지고 했으면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운명이 달라졌을 겁니다. 부산에 그냥 노동조합 하나 만들고 아니면 전국적으로 노동조합 하나 만들어서 가입만 시키면 되는 거 아니에요, 오는 족족 다! 근데 그 따우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니까? 그래가 7ㆍ8ㆍ9 대투쟁이 끝나고 나서 부산에서 그 투쟁에 함께한 노동조합이 수십 개, 아니 수백 개 아닙니까.
부산대학교에서, 그때는 노동자들이 모일 때도 없드랬어요, 유일하게 모일 수 있는 공간이 대학교였다고. 부산대학교 운동장에서 3만 명이 모인 거예요. 노동자라는 이름을 걸고 집회를 하는데 아, 진짜 많더마. 우리만 있는 줄 알았는데. 진짜 그때는요, 집회 한 번 하면 진짜 진심으로 했습니다. 팔이 막 다 뻐근하고 이랬는데, 구호를 외쳐도 막 이렇게 외쳤거든.[포즈를 취하면서 말함] (청중 웃음) [자본가] 목을 쳐야 된다고 막. (청중 폭소) 그래가 노래를 한 번 하고 나면, 집회 한 번이 끝나면 나면 목이 다 쉬고 그랬습니다, 진짜.
근데 그때는 노동가요 자체가 아예 없을 때였으니까. ‘늙은 노동자의 노래’ 아홉 번, 열 번을 해야 집회가 끝나는 거여. 근데 거기 집회에 한진중공업만 앉아 있는 게 아니고, 요 옆엔 대우정밀도 있고, 요 옆엔 신동금속도 있는데 그 노래 부를 때마다 우리는 다 불렀는데 그 새끼들은 아직도 부르고 앉아 있거든. (청중 웃음) 그 노래를 3절까지 꼬박꼬박 다 불렀으니까, 세 줄을 앉아 있어야 되니까 한참을 앉아 있어야 되거든. 아저씨들이 집회만 끝나면 “진숙아, 이 노래 돌림노래가?” 이랬습니다. (청중 웃음) 노래 하나를 몰라도 진짜 그때는 신나게 투쟁했는데….
그래 그게 7월 25일 토요일이었을 거예요, 제 기억에는. 26일 새벽 일요일에 공권력이 투입 됐는데 야네들이 길을 철판으로 막아 놓으니까 길로 못 들어오고 배 타고 들어왔다. 여러분들 공권력이 노 저어서 투입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청중 웃음) 그래 우리는 이제 대오에서 내다 보니까 야네들이 쌔가 만발이 빠지게 노 저어서 오더라고. 그래가 작전상 후퇴다 해서 다 철수를 했어요.
제가 맨 마지막에 나가면서 다 집에 보내고 갔는데 58명이 연행이 됐다는 거예요. “야, 이거 연행될 리가 없다. 내가 맨 마지막에 갔는데.”그래가 경찰에서 일부러 우리를 교란시킬라구 인제 불안하게 만들라구 일부러 공갈치는 거다 이랬다. 근데 마누라들이 58명이 왔더라구. 지네 아저씨가 집에를 안 온댜. 그땐 휴대폰이라는 것도 없을 때니까, 기자들한테 확인하는데 58명이 연행된 게 진짜 맞더라고요. 이 사람들이 어디 있었냐 하면, 그때 한진중공업이 10층 짜리 신관 건물을 막 새로 지었습니다. 거 우리가 만들었다. 근데 치사 빤스 같은 새끼들이 우리를 거길 못 들어가게 했다니까. 그 외국의 선주들도 막 오고 이러는데 아까 얘기한대로 그지들이 돌아다니면 회사 이미지에 타격 갈까봐 거길 못 들어가게 했어요, 진짜루. 이런 얘기 지금 하면 안 믿습니다. 87년 생들은 아마 실감을 못할 거예요. (청중 웃음)
거길 못 들어가게 하는데 파업 때가 되니까 완전히 해방구 아닙니까, 다 우리 꺼거든. 거기를 들어가 있었는데 이 58명이 어디 한 군데라도 모여 있으면은 좋잖아. 전부 술들이 떡이 돼 가지고. 그 10층짜리 신관 건물에는 사장실, 부사장실, 이사실 이런 데가 있습니다. 거기를 하나씩 들어가서 안에서 문들을 또 죄 잠가 가지고요. 유치장에 연행이 돼서 보니까 저거들이[자기들이] 봐도 웃기드랴. 그 정신에 어떻게 완장들을 주웠는지 하나는 사장 완장 차고 있고, (청중 폭소) 하나는 부사장 완장 차고 있고. 유치장에서 뭐 했냐니까 1박 2일 동안 완장 따먹기 하고 놀았다 그러더라고.
연행이 됐으니까 그 사람들부터 끄내 와야 될 거 아닙니까. 그래 이제 월요일 날이 딱 밝았는데, 저는 일요일 날 새벽에 공권력이 투입된 이후부터 아저씨들 집집마다 찾아 다니는 거예요. 휴대폰도 없고 삐삐도 없을 때니까 아저씨를 만날래면 집으로 가는 것밖엔 방법이 없드랬습니다. 아저씨들 그때 영도에 많이 모여 살았을 때였어요. 집집마다 아저씨들을 찾아 다닐때 영도 골목마다 제 사진하고 현상금 50만 원이 붙어 있었습니다. 제가 월급이 13만 원이던 시절에. (청중 웃음)
아저씨들 찾아다니면서 이제 술 먹고 파업하면 클 난다. 조직적으로 하지 않으면 다 깨진다. 아저씨는 1조에 들어가서 물자 보급 책임지고, 아저씨는 2조에 들어가서 정문 경비 책임지고, 아저씨는 3조에 들어가서 서문 경비 책임지고 … [그렇게 말했어요]. 문만 해도 5개였거든요. 그거를 하고 다니는데 온종일을 해도 2백 명을 채 못 만났습니다.
그래 월요일 날이 딱 밝았는데 공장에 들어가야 재파업이 될 거 아닙니까? 근데 공장에 들어갈 수가 없는 거여. 세상에 전국에 있는 백골단들은 글루 다 온 거 같더라고, 하여튼. 그 넓은 공장을 서너 겹 둘러싸 가지고요 개미 새끼 한 마리 들어갈 수 없는 거야. 산복도로 위에서 막 우왕좌왕 하고 있으니까 아저씨 하나가 “야, 진숙아, 일루 와 보래이” 이래. 가니까 저 봉학국민학교 밑으로 가면 하수구 구멍이 있는데 글루 들어가면 2도크가 나온댄다. “아저씨 그거 어떻게 아세요?” 그랬더니, 독수리 훈련할 때 글루 들어간댜.
독수리 훈련 안 해 보셨지요? 그거 애들 다방구 게임하고 똑같다. 저도 같이 일하던 아저씨가 자기 철야 하고 와서 피곤하다고 예비군 훈련을 나보고 가라구 그래서 예비군 훈련을 간 적이 있어요. (청중 폭소) 남자 사업장에서 일해 보면 참 신비롭고도 유치한 경험들을 많이 하게 됩니다. (청중 웃음) 그래가 예비군 훈련을 그때 해 보니까 중대별로 팀을 나눠요. 그래가 이쪽 중대가 지키고 있는데, 이쪽 중대가 쟤네들이 지키고 있는 배에 가 가지고 ‘폭파’라고 쓴 스티커를 딱 붙이고 오면 그 배는 폭파된 겁니다. 그러고 논다. (청중 웃음) 야네들이 지키고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 들어가야 되는 비밀 루트가 있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게 봉화국민학교 밑으로 들어가는 하수구 구멍이었습니다.
그래가 3천 명이 몇 시간 걸려 가지고 하수구 구멍으로 들어가니까 진짜 2도크가 나오는 거예요. 3천 명이, 아! 그땐 한 줄 빼먹은 걸 몰랐으니까, 그 ‘늙은 노동자의 노래’를 어찌 비장하게 불렀는지요. 아저씨들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그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까 바깥에서는 난리가 난 거예요. 저 새끼들이 어디로 들어갔냐 이거예요. 몇 중대가 뚫렸냐는 거지. 저들끼리 조인트 까고, 걔들은 지금도 모릅니다, 몇 중대가 뚫렸는지. (청중 폭소) 그렇게 3천 명이 모여서 재파업에 들어간 거에요. 그 광장 이름이 지금도 ‘단결의 광장’입니다. 노동자 투쟁이 유구한 사업장들을 다녀 보면 그런 역사적 이름이 붙은 현장들이 한 군데씩은 다 있어요.
그래가 3천 명이 재파업에 들어가는데 제일 먼저 뭐부터 해야 되겠습니까? 58명부터 끄내 와야 되잖아. 지금이야 노동자들이요 누가 구속됐다 그래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세상에 도달해 있습니다. 그때만 하더래두요, 울산에서 누가 연행됐다 그래도, 창원에서 누가 연행됐다 그래도, 울산에서, 그때는 쟁의행위 찬반투표가 어딨습니까. 바로 기계 내리고 가면 되는 거예요. 그때 실제로 마창노련 의장이 구속돼 있을 때는 창원 시가지가 막 만들어질 때에요. 콜타르 있잖아. 그 드럼통을 굴리면 왕대자 화염병이 된다. (청중 웃음) 특대 화염병입니다, 진짜. 그거를 굴리면서 창원경찰서를 습격해 가지고 마창노련 의장을 끄내 오고 이랬대니까요. (청중 박수) 신화 같은 일들이 참 많았드랬는데요. 그러던 시절이었는데 지금은 누가 구속됐다 그래도요, 저는 징역 두 번 갔다 왔는데, 이제 징역 안 갈라고요. 징역 갔다 올 때마다, 아! 진짜 열 받는 놈들이여! “어 내일 면회 갈라구 그랬는데 벌써 나왔시요?” 이런 새끼들이 꼭 하나씩은 있습니다. (청중 웃음)
그때는 하여튼 58명이, 그 사람들부터 끄내 와야 하니까 3천 명이 다시 모여 가지고 재파업에 이렇게 들어가는데, 저는 군대는 안 갔다 왔습니다. (청중 웃음) 근데 한 사람이 마이크를 딱 잡더니, 저는 그 현상금 붙은 골목을 뚫고 다니면서 아저씨들을 조직을 하는데 채 2백 몇십 명도 조직을 못했드랬어요. 근데 한 사람이 마이크를 딱 잡더니 “예비군 중대별로 모이십시오” 이러는 거예요. (청중 폭소) 그러니까 1중대는 뭐 하고, 2중대는 뭐 하고 이러니까 나는 스물네 시간을 한 게 5분 만에 조직이 끝나더라고. 한진중공업은 지금도 파업하면 예비군 중대별로 합니다. (청중 웃음)
어용 노조 집행부는 다 도망가 버리고 지도부가 “이제 58명 구출하러 영도경찰서 진격 투쟁 갈 거니까 완전 무장하고 집결하십시오” 이렇게 한 거예요. 근데 땜쟁이들은 일하던 채로 나가면 완전 무장 아닙니까. 화이바 쓰고 시커먼 안경 쓰고 마스크 시커먼 거 쓰고, 안전화 안에다가 작업복 딱 말아 넣고. 야! 3천 명이 빠이프[파이프]를 끌고 나오는데요, 전 태어나서 지금까지도 그렇게 이쁜 빠이프를 첨 봤습니다. (청중 웃음) 빠이프를 구라인다[그라인더]로 빡빡 갈아 가지고 뺑끼칠[페인트칠]을 색동으로 해 가지고 (청중 폭소) 빠이프에다가 용접으로 지 이름 다 써 가지고요(청중 폭소)
그래 3천 명이 모인 겁니다. 그래가 “문 열어!” 이래가 정문이 쫘악 열린 거예요. 백골단들하고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딱 대치한 겁니다. 얼마나 긴장되는 순간입니까. 숨소리 하나 안 들리지, 차는 안 다니고…. 그런 상황이 되면요 제가 겪어 본 남자들의 세계는 웃통 벗는 사람이 꼭 하나 나온다. (청중 웃음) 그 웃통 벗는 사람을 보면 십중팔구 해병대 출신입니다. (청중 웃음) 해병대 출신 하나가 웃통을 딱 벗고 백골단들을 향해 쫘악 서더니요, “야, 이 새끼들아! 니들은 행님도 못 알아보나! 군번이 몇 번이야” 이러더니 자기 군번을 막 얘기를 하더라고. (청중 웃음) 근데 우리는 뒤에서 웃음이 나 돌아가시는 게 땜쟁이들 난닝구 아시요? 그 빵꾸 다 나 가지고요, 쇳물 들어 가지고 누우렇게 찌든 난닝구 다 늘어진 걸 이렇게 입고, 이 아저씨는 일생일대 제일 비장한 거지. (청중 웃음) 그래 가지고 백골단들을 향해서 일성을, 진짜 포효를 하고 있는 거여.
근데 안 비키잖아. 근데 남자들이 진짜 웃기는 게요, 아니 그때까지도 개목걸이를 왜 걸고 댕기냐? (청중 웃음) 그 목걸이를요 무슨 마패도 아니고 야네들한테 짝 보여 주더라고. (청중 웃음) 비키라고. 그런다고 얘네들이 비킬 군번입니까? 안 비키면 고 다음 프로그램으로 길에 눕습니다. 그럼 이제 옆에 있는 사람들이 “아, 행님 참으소” 이러면 “두고 보자, 이 새끼들아” 이러면서, 다음 프로그램으로 진행이 되는 거에요. (청중 웃음) 그 사람이 나중에 노조 위원장 됐습니다. 멋있다고. (청중 웃음)
그렇게 우리도 준비가 하나두 안 된 투쟁이랬드랬어요, 그게. 그러는 찰나에 뭔가가 백골단들 방패에 가서 팍! 맞는데, 이게 떨어지는 게 아니라 꽂히는 거에요. 저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전경들 방패가 쇠로 돼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근데 이게 반이 쫙 나가기도 하드라고요. 그때 영도경찰서장이 그걸 맞아가지고, 여기, 여기, 하필 여기가 날라가 가지고 피투성이가 돼서 실려 갔거든요. 이게 화염병이나 돌멩이 같으면 맞고 떨어지는데 가서 박히는 거예요. 저쪽 대오 끝에서 그게 날라 가더라고. 그쪽 찾아가서 보니까 세상에! 조선소에는 굴러다니는 게 철판 쪼가리 아닙니까. 그거를요, 별표로 다 오렸다. 그래 가지고 끄트머리를요 구라인다[그라인더]로 다 가는 거에요. 이거를 세 리어카를 끌고 나왔더라고. 이게 얼마나 쫍니까? 그런 상황이 되면 지도부는 쫍니다. 그래 나는 쫄아 가지고 이거 완전히 살인죄를 덮어쓰게 생긴 거 아니에요. 더군다나 서장이 맞아서 실려 갔는데. 그래 나는 걱정이 돼서 아저씨들 이거 어디서 났냐고 그랬더니 아저씨들은 모자라서 걱정하는 줄 알고 “걱정 마라!”(청중 폭소) “열 트럭 숨가 났다[숨겨 놨다]” 이러더라고. (청중 웃음) 3천 명이 웬종일 빠이프 만들고 그걸 만들어서 끌고 나온 거예요.
그걸 집어던지고 싸움을 하니 게임이 됩니까? 저절로 길이 뚫린 거예요. 그래가 영도경찰서까지 가는데 한진중공업에서 영도경찰서까지 그래도 꽤 갑니다. 꽤 가는데 앞 대가리는 경찰서에 도착했는데 아직 뒷 대가리는 공장에서 출발도 못했습니다. 사람이 어찌나 많았는지 하여튼. 우리 조합원들뿐 아니라 막 아새끼들, 마누라들, 개새끼들 하여튼 다 나온 거예요. (청중 웃음) 그래가 회사의 경비들이[의] 오키토키 그거 뺏어가지고 그래 영도경찰서에 도착을 하니까, 58명 전원 구속 방침이었는데 다 나왔더라고. 근데 그때까지도 술 냄새가 나서 옆에 갈 수가 없어요. 그 아저씨들은 그때까지도 이해를 못하더라고. 저거들이 분명히 사장실에서 잠들었는데 왜 영도경찰서 유치장에서 아침을 맞이해야 되는지를. 그 사람들이 대부분 다 노조 간부가 됐습니다.
그래가 이 사람들 완전히 이긴 거 아닙니까. 공권력하고 싸워서 이겼는데. 그니까 이 아저씨들이 들어와 가지고 파업에 들어갔는데, 그때 이미 게임은 끝난 거지요. 그니까 회사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파업을 탄압할라구. 얘네들이요, 얼마나 치사한 새끼들이냐면요, 얘네들이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건 뭐 정해져 있습니다. 전기 끊고 물 끊고 밥 끊고. 얘네도[맑시즘 장소 불허한 고려대학교 당국] 똑같죠. 여기도 뭐 화장실 못 가게 한다매? 하여튼 자본가들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청중 웃음) 그래가 전기 끊고 물 끊고 이랬는데, 이게 노동자들한텐 안 통하는 게, 전기를 끊으니까 “야! 배전반 나와!” 이러니까 5분도 안 돼서 전기가 다 연결이 되는 거예요. (청중 웃음) 수도를 끊으니까 “야! 배수반 나와!” 이러니까 또…. (청중 웃음) 밥을 안 주니까요 군대 취사병만 모아도 수백 명이더라고. 그래 감자 한 가마니를 사다 주면 아주 퓨전 요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청중 웃음) 파업 하는 동안 더 살찌고요.
진짜 그땐 해방구라는 것을 실감을 했드랬어요. 노동자들이 그렇게 투쟁을 하면서 야, 이게 뭔가 하니까 된다는, 그리고 우리가 일을 안 하니까 그야말로 공장이 멈춘다는 걸 실감을 했습니다. 그때 서른세 가지 요구 조건 중에 서른두 가지가 관철이 됐어요. 임금도 25프로 [인상]를 요구했는데 이 새끼들이 29.98프로를 올려 줬다. (청중 웃음) 그때는 가이드라인이 30프로였어요. 그니까 요구 조건 이상을 올려 준 거예요. 그러고 하나가 빠진 게 해고자 복직이었습니다. 그러고 싸움을 하니까 그때 제일 큰 성과는, 그때 26년 된 어용 노조가 있었거든요. 진짜 쌩짜배기 어용이었습니다. 조합원들이 회사에 대한 불만보다 노조에 대한 불만이 더 컸었어요. 그때는 노동자들이 투쟁을 하면 투쟁 구호 중에 제일 컸던 게 “인간답게 살아 보자”였고, 그 다음이 “어용 노조 물러가라” 이런 거였습니다. 인제 그 노조 간부들이 다 도망갔지. 한 놈은 영주의 처갓집에 숨어 있고요, 한 놈은 해동병원 중환자실에 숨어 있고요. 그 새끼들 다 잡아다가 무릎 꿇려 가지고 사퇴서 받고, <부산일보> 보도에 의하면 전국에서 최초로 노조 위원장을 직선제로 만들었습니다. 그게 조합원들의 제일 큰 성과였드랬어요. (청중 박수)
여러분 우리가 민주노조, 민주노조 네 글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지만 민주노조는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를 해요, 왜 노조 하나에 저렇게 무모하게 목숨을 거는가? 그런 경험들이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 보지 않았고 그 뜨거운 경험들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게 다만 책에만 나오는 얘기일 수 있겠는데요, 노동자들이 민주노조를 포기할 수 없는 건 그게 아니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가 투쟁들을 하는데, 노동조합이 어느 정도 민주화됐습니다. 그 이후에 한진중공업은 거의 해마다 파업을 했드랬어요. 이긴 싸움도 있지만 물론 패배한 싸움이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투쟁을 포기할 수 없었던 건 그건 존재의 확인이었어요. 그렇게 하면서 나도 노동자라는, 나도 인간이라는 선언을 비로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노동자들이 신나는 봄날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자본가들이 인제 노동자들하고 저 같은 사람하고 분리하는 방법이요, 여러분이 ‘자[쟤]는 아마 태어날 때부터 투쟁하고 나왔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실는지 모르지만 저는 노동조합의 ‘ㄴ’도 몰랐습니다, 진짜. 제가 옛날에 시내버스 안내양을 할 때에요. 그때 부산의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있었다. 그때 신문에 맨날 시커멓게 어떻게 나왔냐면 ‘불순분자의 소행인 듯’, ‘북한 괴뢰도당의 사주를 받은 듯’ …. 아! 대학생이 미문화원에 불을 싸질렀댜. 미국 물러가라고. 상상도 못하던 구호였습니다. 그거는 만인의 공분을 자아내는 사건이었드랬습니다. 그래가지고 매일 그 범인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의 몽타주가 신문에 실렸드랬어요. 저는 그 몽타주를 오려 들고 그 놈아들을 찾으러 다녔다니까. (청중 웃음) 저는 그 놈아들을 발본색원하는 길만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앞당기는 (청중 폭소)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을 했드랬습니다. 그게 이 나라를 살아가는 청년으로서 유일한 임무라고 생각을 했드랬어요.
제가 노무현 씨하고 인연이 어떻게 되냐면요, 사람들은 노무현이가 ‘왼쪽 깜빡이 키고 오른쪽으로 갔다’ 그러지만 뒤로 갔어요. (청중 폭소) 그 시절에는 유인물을 만들 데가 없드랬습니다. 지금처럼 뭐 컴퓨터가 어딨고, 여러분 가리방 뜨는 거 아셔? 철필로 긁어서 이렇게 밉니다. 예, 그거를 하던 시절이드랬어요. 근데 유인물을 만들기도 힘들었지만, 뿌리지도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노동자라는 말이 들어가면 어디서도 이걸 인쇄를 안 해줬어요. 그래가 어떻게 했드랬냐면요, 등사로 밀어 가지고 새벽에 아저씨들 사는 영도 집집마다 꽂아 놓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는데 부산민주시민협의회라는, 부민협이라는 단체가, 유일한 재야 단체가 있드랬어요. 거기 상임이사가 노무현이었거든. 근데 부민협에 가면 전동 타자기가 있댜. 전동 타자기로 치면 이걸 안 긁어도 되니까 공정이 반이 줄어들거든요. 그때는 하루에도 두세 번씩 유인물을 뿌리던 시절이니까. 그렇게 뿌리기가 힘들었는데도. 그래서 부민협이라는 데를 갔다. 근데 내가 몽타주에 오려 들고 다니던 이호철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지금 민정비서관으로 가 있습니다. 부민협에 가 가지고 이만이만해서 왔다고 그랬더니, 아 잘 오셨다고 인사를 하는데 “이호철입니다” 이러는 거예요. ‘어 어디서 많이 본 놈인데?’(청중 웃음) 나중에 보니까 이렇게 들고 댕기던 놈이더라고. 아, 어찌 쪽팔리던지. (청중 웃음)
이 부민협에서 그렇게 인쇄를 하고 등사를 해 가지고 현장에 뿌리고 이랬드랬는데요. 그때는 노동자들이 무슨 단결이라는 말을 알았습니까, 투쟁이라는 말을 알았드랬습니까. 저도 전혀 노동조합에 대해서 모를 땐데 제가 노동조합 대의원에 출마하면서 해고됐습니다. 그게 어떻게 됐드랬냐면, 그때만 하더라도 위원장 간선제라고 말씀드렸지요. 86년이 위원장 선거가 있던 해에요. 그니까 대의원 88명이 모여 가지고 위원장 선출을 합니다. 위원장 선거가 있는 해니까 이 해의 대의원 선거는 치열하겠지요. 그때는요, 위원장 출마를 하면 뭐 정책이나 공약이나 이런 걸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기순이파는 부곡온천 가고 상주파는 도곡온천 가고 종래파는 제주도 갔다 왔댜” 그러면 “이번에 종래가 먹었네?” 이러던 시절이거든요. 아저씨들이 아무도 노조 얘기하는 사람 없었어요.
저는 진짜 황당했던 게 땡끄라는 데가 있거든요. 조선소는 땡끄로 만들어졌는데 배를 이렇게 반으로 쫙 짜개면요, 단면이 이렇게 생겼습니다. [칠판에 그림 그리며 설명] 배가 철판이 다 두 겹이에요, 외벽이. 그래가 이 철판들을 또 이렇게 대서 연결을 합니다. 요 사방 1미터도 안 되는 공간을 땡끄라고 불러요. 혹시 조선소 근처를 지나다니는 분들 [아는지] 모르겠지만 탑재해 논 블록에 보면 전부 구멍 뚫어져 있습니다. 이게 땡끄에요. 이렇게 배를 만들어야 외벽 하나가 빵꾸가 나더라도 타이타닉이 되는 게 아니라 요 칸에만 물이 들어오지요. 큰 배는 절대 침몰하지 않게 돼 있습니다. 다만 수출하는 배만. 국내선은 침몰합니다. (청중 폭소)
제가 스물한 살 때 조선소에 입사해서 진짜 끔찍한 죽음들을 마이 봤는데요. 그 철판 밑에 끼우는 게 있습니다. 딱 도끼날이에요. 이게 날라와서 반으로 딱 쪼갠 것도 봤어요. 한번은 크레인 신호사 아저씨가 철판을 뺐는데 이 날라가던 철판이 걸려 가지고 아저씨를 치고 지나간 거에요. 옆에 있던 사람들이 쫓아 가서 바지를 벗겼는데 아랫도리가 하나도 없었어요. 그때까지도 그 아저씨가 눈을 뜨고서 저를 쳐다봤는데 그 눈빛이 어땠을 거 같습니까? 그 눈빛을 기억하는 자의 이후 삶이 어떨 거 같아요? 제일 끔찍한 죽음이 감전사고로 죽는 시신이었습니다. 혈관이 다 터져 죽어요. 눈알까지 빠진 것도 봤습니다. 제일 어이없이 죽은 사람이 땡끄 안에 들어갔다가 나올 길을 못 찾아서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데가 땡끕니다. 처음에 입사해 가지고, 땡끄가 아마 수십 미터에요, 진짜로. 근데 조선소는 사다리가 이렇게 된 게 하나도 없거든요. 전부 직각입니다. 이거를 타고 아저씨들이 담배 시간이 되니까 전부 갑판 위로 올라가는 거예요. 땡끄 안에 들어가면 자기 손끝이 잘 안 보입니다. 그러니까 눈 앞에 뻔히 맨홀, 우리는 하치카바 구멍이라고 부르는데 하치카바 구멍이 뚫려 있는 걸 알면서도 거길 빠져요. 한번은 그 땡끄 안에 들어갔는데 옆에서 구라인더 하는 아저씨가 없어진 거예요. 근데 땡끄 안에 들어가면 잘 나오지도 못하거든요. 용접을 한참 하고 나니까 사람이 없어졌어요.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화이바가 뒤집힌 채 그 구멍 우[위]로 동동 떠올라 왔드랬습니다. 그 화이바 안에 [적힌] 그 아저씨 사번하고 이름이 지금도 저는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요. 노동자들이 그러고 살았드랬습니다.
이 땡끄 안에 들어갔다가 담배 시간 10분이라도 그거이 좋은 공기 마실라고 전부 아저씨들이 그 사다리 하나에 매달려서 갑판으로 다 기어올라 가는데 저도 뭣 모르고 막 따라갔어요. 거기 있으면 막 터질 것 같더라고. 막 따라갔는데 갑판 구멍이 요만하거든요, 사람 하나 겨우 겨우 드나 들만 해요. 갑판에다가 머리를 쏙 내밀었는데, 빼도 박도 못 한다는 얘기가 뭔지 실감이 나는 게, 내려갈라 그러니까 그 사다리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 내가 내려가면 다 내려가야 될 거 아니에요. 그 밑에서는 빨리 올라가라고 난리가 났는데 올라갈 수가 없는 거예요.
아저씨들이 담배 시간에 바다를 향해서 쫙 서 가지고 뭐 하냐면 누구 오줌발이 멀리 나가는지 시합하고 있다. (청중 웃음) 담배 한 까치 내기여. 그거 지 오줌발을 붙잡고 목숨을 걸고 싸우고요, 멀리 나갔다고. 그때는 목숨을 걸 일이 없드랬습니다. 조선소 아저씨들 싸울 때요, 평소에는 둘이 못 드는 걸 싸울 때 보면 쌍절곤처럼 휘두른다니까? 그러는데 아무도 노조 이야기를 안 하던 시절이었어요.
근데 86년에 위원장 선거가 있을 때니까 아저씨들이 노조 얘기를 하시더라고. 제가 지나가니까 “야, 진숙이 니는 처자식도 없으니까 니가 대의원 한번 나가 봐라”이러는 거예요. 전 노조가 뭔지도 모르는데. 아저씨들이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뜻이 정 그러면 한번 해 보겠습니다” 이랬어요. (청중 웃음) 대의원이 뭔지도 모르고. 그때만 하더라도 노동조합 대의원에 출마하려면 조합원들 서명을 받아야 됩니다. 입사하고 처음으로 노조 사무실에 갔습니다. 그 서명용지를 달라고 그랬더니 노조에서 누가 출마할라구 그러냐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제가 출마한다고 그랬더니 니네 부서는 대의원이 이미 다 뽑혔대는 거예요. 그니까 88명을 즈들끼리 다 짜 맞춰 논 거예요. 누구패, 누구패, 이래 가지고. 그래가 “니는 내년에 나와라” 이러더라고. 내년엔 [위원장] 선거가 없으니까.
사람이 또 워낙 못 하게 하면 더 하고 싶습니다. 그게 뭔지도 잘 모르면서 하여튼 못 하게 하니까 꼭 해야 될 것 같은 거여. 몇 번을 가서 서명용지를 달라고 하니까 왜 꼭 할라구 그러느냐고 그러더라고. 그래 제가 점을 보니까 명이 짧다고 그러더라고, (청중 웃음) 그래가 죽기 전에 한번 해 보면 안 되겠느냐고.
몇 번을 가니까 한 날은 과장이 부르는 거예요. 과장이 불러가지고 사무실엘 들어가니까 관리자들 쫙 앉아 있고 과장이 앞에 앉아 있는데, “진숙이 왔습니다” 이랬더니 과장이 묻드라고요. “니 뭣 땜에 대의원 나올라 하나?” 지금 같으면 그게 부당노동행위인데 그런 걸 전혀 몰랐으니까.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전 딱 맞다고 생각하는 게 거기다 대고 내가 뭐라고 그랬냐면, “전 우리 회사의 어용 노조를 뿌리 뽑고 민주노조를 쟁취하기 위해서 출마했습니다.” (청중 폭소)
그때가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그런데 그런 걸 몰랐어요. 전두환이 진짜 정의로운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어디든 가면 전부 정의 사회 구현이었드랬잖아요. 그렇게 딱 얘기를 하고 나니까 관리자들이 일제히 저를 쳐다보는데요, 아, 저는 태어나서 그런 눈빛을 처음 받아 봤습니다. 지리산 천왕봉 일출이 그거보다 자글거리겠습니까? (청중 웃음) 과장이 이렇게 쳐다보고 암 말도 안 하더라고. “가도 되겠습니까?” 그랬더니 “어” 이러더라고. 그래서 나왔으요. 세상에 저는 제가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어려운 용어를, 그거 전문용어 아닙니까. (청중 웃음) 그거를 순서도 안 바꾸고 그냥 아!
그때부터 회사 분위기가 막 이상해지더라고. 막 일도 안 시키고요, 회사 생기고 나서 사십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사장님께서 노동자들 수천 명을 모아 놓고 교육을 하는 거예요. 사장님 특강의 제목이 뭐였는지 아세요? ‘베트남 공산화의 실체’였다. (청중 폭소) 뭐 과장, 계장, 직장 이런 사람들이 저를 쫙 호위를 해 가지고 교육하는데, 바닥에다 맨 앞에다가 앉혀 놓더라고.
사장이 첫 마디가 큰일 났다 이거야. 우리 회사에 도산 세력이 들어왔다는 거야. 근데 그때는 민주노총도 없고 막 이런 거 없을 때거든요. ‘다함께’도 없고. (청중 웃음) ‘도시산업선교회’라는 조직이 있드랬나 봐요. 근데 난 몰랐거든. 도산 세력이 들어오면 회사가 도산을 하는데 진숙이가 도산 세력이다 이거여. 그러더니 진숙이는 지하에서 특수 훈련을 받아서 6개월을 굶어도 안 죽는댄다? (청중 폭소) 아, 내가 무슨 바퀴벌레입니까? (청중 웃음)
근데 그때는 그런 얘기가 통했어요. 뭐 빨갱이, 위장취업자, 이러면 아무도 옆에 안 오던 시절이거든요. 그래가 베트남이 공산화된 얘기를 막 하는 거예요. 그러드니요, 결론이 뭐였냐면요, 베트남 공산화에 진숙이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단다? (청중 폭소)
나는 진짜 쪽 팔리는 게요, 그때 베트남이 어떻게 된 맥락인지를 몰랐어요. 베트남의 남과 북 민중이 미국과 맨주먹으로 18년을 싸워서 이른바 해방을 쟁취해 냈다는 얘기를 한참 이후에 리영희 선생님의 책을 보고 알았습니다. 그때 얘기를 들으면서는요, 베트남의 어떤 회사에서 하룻동안 데모한 줄 알았어. (청중 웃음) 그러다 회사에다가 뭐라고 얘기했냐면요 “좋다, 그 회사가 데모한 날, 내가 출근했는지 안 했는지 출근부 뒤벼 봐라.” (청중 웃음) 전 그때 출근 하나는 진짜 자신 있드랬거든요. 일요일도 없이 출근했으니까. 그래가 “내가 출근 안 했으면 베트남 간 거 맞다. 근데 출근 했으면 베트남 안 간 거 니들이 인정해라” 이랬거든요. (청중 웃음) 그랬드만 야들이 뭐라고 그러느냐면 진짜 거물은요 현장에 직접 안 가고 뒤에서 배후 조종 헌댄다? 이미 자본은 그렇게 만국화된 노동자들을 인정해 줬는데 우리 수준은 전혀 그게 아니드랬지요.
그런 얘기를 사장이 막 하는 거예요. 막 일도 안 시키고요, 한 날은 웬 낯선 놈들이 와 가 사진을 찍어 가더라고. 난 언론사에서 인터뷰하려고 온 줄 알았다. 내가 드디어 뜨나 보다 이랬는디요, 걔네들이 누구였냐면, 우리 회사가 배만 만든 게 아니라 탱크도 만들고 군함도 만들었습니다. 각급 방위산업체였어요. 보안사 새끼들이 상주를 하고 있드랬는데 걔들이 걔들이었던 거여. 내가, 말을 안 하고 상주를 하니 내가 아나, 걔들을?
한 날은 일하는데 나오라는 거여. 나가니까 왠 떡대 같은 놈들이 지키고 있다가 시커먼 보재기를 확 덮어씌우더라고. 그러더니 양 옆에서 이렇게 잡아가지고 어딘가를 끌고 가는 거예요. 난 얼루 가는지도 몰랐드랬지. 얼만큼 차를 달려서 멈추고 내리고, 뭐 ‘충성’ 이런 소리가 나고 철문이 ‘쩡’ 하고 열리고요. 지하로 내려갔어요. 그 어느 방에 문이 열려서 그 안에 들어가는데 보재기를 벳기고 보니까, 상상이 되십니까? 방이 다 빨간 방이었습니다. 벽도 빨갛고 욕조도 빨갛고 세면기도 빨갛고 바닥도 빨갛고요. 방 가운데에는 버얼건 밧줄이 내려 와 있어요.
옷을 벳기고 군복을 갈아 입혀요. 신발을 벳기고 고무신을 갈아 신깁니다. 얘네들이 실실 웃으면서 하는 얘기가 왜 옷을 갈아 입히는지 아녜. 그게 첫 질문이었습니다. 내가 알 게 뭐예요.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그래가 쫄아 있으니까 알몸으로 작업을 하면 자못 기분은 좋은데 살점이 묻어난답니다. 그리고 맞았습니다. 그 상황이 어떤지는 각자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패기만 하는 게 아니라 야네들이 또 다 나가요.
그러고 나면 인상 좋은 놈이 하나 들어 온다. 그래가 나보다 더 흥분을 해요. “오, 연약한 여자를 누가 이렇게 때렸어? 야이 나쁜 새끼들!” 그리고 막 “커피 한 잔 할래?” 이러고요, 그리고 귀에다 대고 이 방에 도청장치 돼 있으니까 내 말 잘 들으랴. 저 새끼들이 인간도 아니래요. 너를 죽여서 어디다 버린다는 것까지 다 짜 놨대. 얼마 전 송도 앞바다에서 대학생 시체 떠오른 것도 저 새끼들이 한 짓이랍니다. 실지로 제가 거기 가기 한 달 전에 송도 앞바다에 대학생 시체가 떠올랐어요. 근데 허리에 시멘트 덩어리가 매달려 있드랬습니다. 근데 그게 지금도 의문사에요. 자살로 돼 있습니다, 그 죽음이. 이런 시대가 멀지 않은 과거에 우리들한테는 있드랬는데요.
그런 얘기를 막 하면서 너 같은 여동생이 있어서 하는 소리래요. 너를 꼭 살리고 싶다 이거야. 자기한테 협조를 해 줘야 나를 살릴 수 있대는 겁니다. 내가 너한테 이런 얘기를 하면 자기도 무사하질 못하대요. 그건 너하고 나만의 비밀이랜다. 손가락 걸고 얘기하고. 저는 걔가 진짜 내 편인 줄 알았드랬습니다.
그래가 걔가 또 나가요. 그러고 나면 여덟 명, 아홉 명이 또 들어와 가지고 막 그 작업을 또 합니다. 이거를 몣 번을 반복하면요, 나중엔 걔가 기다려져요. 그리고 간첩이 안 될 재간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생산되는 간첩은 1백 프로 메이드 인 대공분실이라고 확신을 합니다. (청중 웃음)
그걸 몣 번을 하면서 낯선 놈 사진을 봬 준다. 근데 나는 얘를 모르면 죽는 거여. 그걸 몣 번을 하면 아는 놈이 된대니까? 근데 문제는 알리바이가 안 나오는 겁니다. 그래가 그걸 몣 번을 하다가 나중에는 거꾸로 매달아 놓습니다. 밧줄이 그런 데 쓰는 거예요. [밧줄에서] 풀려나고 나니까, 여러분 이렇게 온몸이 터졌는데 거꾸로 매달려 보셨습니까? 피가 이렇게 고여 있었어요. 나는 처음에 박이[머리가] 터진 줄 알았습니다. 근데 얘네들은 보이는 데는 또 안 때려요. 나중에 보니까 눈으로 피가 나왔드랬습니다. 우리가 피눈물, 피눈물 얘기하지요? 피눈물이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제가 입고 갔던 옷을 던져 줍니다. 옷을 보고 눈물 흘려 본 적 있으십니까? 옷을 보는 순간에 이거 살아서 집에 간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습니다. 지네들 말대로 돌맹이 매달아서 송도 앞바다에다 던질 거 같으면 알몸인 제가 훨씬 낫지요? 근데 옷을 갈아 입으라는 거여. 옷을 벗는데 군복이 안 벳겨졌드랬습니다. 여기다 대고 얘네들이 또 안티프라민 발라 준다. 터진 상처에 안티프라민 안 발라 보신 분들, 꼭들 한번 발라 보셔. 맞을 때보다 더 아픕니다. 그리고 멍든 데 쇠고기 갈아서 붙이면 된다는 분들 진짜 고마운 분들이시지요? 전 그분들의 은혜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가 처음에는 살아서 나왔으요. 나왔는데, 그런 데 갔다 와 미치는 사람들 얘기가 요즘은 더러 한번씩 나옵니다. 테레비에도 나와요. <박하사탕>이라는 영화도 있었습니다. 그런 영화들을 보면서 우리는 종종 착각을 합니다. “야! 이런 게 영화로 만들어질 만큼 세상이 달라졌구나!” 그런 데 갔다 와서 미치는 사람들 얘기가요, 저는 광주 망월 [5ㆍ18] 묘지에 가서 다 아팠습니다. 거기에 스물네 살이라는 최동희라는 젊은이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그런 데 갔다 와서 결국 미치죠. 지 손으로 지 목을 끊습니다.
진짜 미치겠더라고요. 잘라고 이렇게 누우면 형광등 끈이 밧줄로 뵙니다. 길거리 다니는 사람들은 전부 그 새끼들로 보이는 겁니다. 시내버스를 타면 기사 아저씨가 백미러로 쳐다보는데 그 새끼인 겁니다. 정거장도 아닌데 내려서 막 도망가면 세상 사람들이 전부 나를 잡으러 쫓아오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열흘쯤 지났는데 또 왔어요, 그놈아들이. 두 번째 감방은 다 노란 방이었드랬습니다. 두 번째 왔다는 거는 이미 내 발로 못 걸어 나간다는 거 아닙니까? 글마들 손에 맞아 죽던지 아님 간첩이 되든지 둘 중의 하나밖에 없드랬어요. 그래가 그 고통을 당하고 죽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죽자 그래가지고 옷 갈아 입힌다고 이러는 순간에 저 벽 끝에 가서 벽을 꽝 박았으요. 근데 여러분 참고하세요. 대공분실의 벽은 방음장치 때문에 스티로폴로 돼 있다. (청중 웃음) 저는 진짜 장렬히 전사할라 그랬는디요, 거기서는 빌어먹을 장렬히 전사도 안 됩니다. 그래가 스티로폴 밥이 머리에 이래 묻어 있는 거예요.
그러고 나니께 더 고통스러운 게 화장실에 갈 때도 볼일 볼 때 문 열어 놓고 봐야 되는 겁니다. 걔네들 지키고 있는데. 얘네들은요, 지네들이 그렇게 하다가 죽는 거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스스로 목숨 끊는 건 용납을 안 하는 족속들입니다.
그래가 그 대공분실이라는 데를 세 번을 갔드랬습니다. 나중에는 돈이 3천만 원이래요. 얘네들이요, 첫 번째 대공분실에서 나올 때 뭐라고 상부에 보고했는지 아십니까? 자생적 공산주의자였다? 그때는 그런 공산주의자도 있드랬습니다. 3천만 원을, 포장도 안 한 돈을 책상 위에 쌓아 놨습니다. 그리고 얘네들이 하는 얘기가 사표를 쓰면 이 돈을 준대요. 그리고 이 사실은 아무도 모른답니다.
결국에 얘네들이 요구하는 게 이거였구나! 내가 몟 달을 그렇게 고통받았던 게 결국 결론이 이거였다고 생각하니까 용서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여러분들 피가 거꾸로 솟아보셨습니까? 진짜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드랬어요. 그래가 책상을 뽑아서 얘네들한테 확 엎을라 그랬거든요. 참고하세요. 대공분실의 책상은 안 뽑힙니다. (청중 웃음) 볼트로 고정이 돼 있어요. 그니까 허리만 아프고 이게 안 들리는 거여. 그래가 책상에 올라가 걔네들을 주어 뜯었습니다. 나중에는 방송구라는 걸 채워 놓더라고요. 통닭구이라고 그러지요, 양손 양발을 묶어 가지고. 입에 채워 넣는 수갑이 있습니다. 그거를 차고 있으면요, 풀러도 혓바닥에 아무 감각이 없으요. 말을 못하게 채워 놓는 거예요.
그랬드랬는데요. 막 회사에서 사장이 직접 뭐 베트남 공산화에 대한 실체 특강을 할 때, 그 와중에 제가 대의원에 출마를 해서 난생 처음으로 일등을 해봤드랬습니다. 일등으로 대의원에 당선이 됐드랬다, 가문의 영광 아닙니까? 그래 막 대의원대회를 갔는데요, 그때 대의원 88명이 전부 완장들만 앉아 있어. 다 관리자들이 대의원이었습니다. 걔네들이 결산 보고서를 보고 있는데 나만 안 주더라고? 왜 안 주냐고 그러니까 인쇄를 87부밖에 안 했댜. 그래가 옆에 아[사람] 꺼를 뺏어서 보니까 그때 어용 노조가 어땠드랬냐면, 우리 아버지가 살아 계셨는데 돌아가셨더라고. 그러고 장례비를 내가 받아 먹었시요. 그 다음 페이지에는 우리 아버지가 살아서 환갑이더라? 엄마도 몣 번을 돌아가시고 살아 나시고. 집구석을 완전히 귀곡산장을 만들어 놨시요.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내미, 딸내미요? 노조에서 시집 장가를 몣 번을 보내 주고요. 경조비 떼어먹을라고 노조 대의원이라는 새끼들이 그 짓을 한 거여요.
그리고 어용 노조가 경제적인 부분에 대한 권한들이 굉장히 강했드랬습니다. 조합원들 화이바나 그런 것도요, 회사 돈 받아서 노조에서 이걸 다 구입하게 돼 있더라니까? 화이바하고 안전화 이런 거를? 근데 화이바도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한방 맞으면 그대로 꽂히는 거야, 다! 안전화도요, 앞에 그게 쇠로 돼 있거든요? 워낙 철판에 이렇게 발가락 잘리는 사고가 많으니까, 앞에 쇠로 돼 가지고 발가락 잘라지지 말라고 그렇게 돼 있거든. 그런데 이 놈의 안전화가 죄 불량이 돼 가지고 철판에 부딪히기만 해도 쇠가 안에서 우그러지니까 그것 때문에 발가락이 찢어지고 그랬습니다.
그런 걸 조합원들이 신으라고 노조에서 사 주고 이랬대니까요? 조합원들이 다치면 노조에서 위로금을 주게 돼 있는데, 2만 원 씩. 저도 몣번을 다쳤드랬어요. 손바닥에 지금 찢어진 상처 그대로 있습니다. 철판에 찢겨서 거의 맞짱을 떴드랬지요. 이 벽 한 몇 개만한 철판이 넘어져 가지고 두 다리 다 부러져서요, 병원에 육개월 동안 입원해 있고 이랬거든요. 근데 노조에서 위로금을 주게 돼 있는데 나도 여섯 번을 다쳤는데 그거를 한번도 몰랐거든요. 근데 여섯 번이 도장이 다 찍혀 있는 거여, 내 도장이. 게 보니까 딴 아저씨들 아무도 몰라 이거를. 그 전에 대의원 하던 새끼들이 다 해 먹은 거야.
대의원들 찾아다니면서, 내 돈 내놓으라고 했더니 나중에 이 새끼들 출근을 안 하더라고. 거 어떻게 햐. 집으로 가야지. (청중 웃음) 그 집에 가 가지고 그 임마가 밥을 먹으면 따라 먹고, 누우면 같이 자고, 아침에 나오면 따라 나오고 이거를 몣일을 하니까 나중엔요 회사를 출근을 안 하는 거예요. 그래가 며칠쯤 그렇게 하니까 이제 그 집에 가면, 그 집 딸내미가 골목 끝에 지키고 서 있다가, 내가 나타나니까 "온다!" 이러고 가 가지고 대문을 잠그더라고. 그 어떻게 햐, 인제. 대문 앞에서 돗자리를 펴고 앉아 있는 거여. 그랬더니 동네 아줌마들이 하루 저녁에 몣 명이 와서 물어보는 거여. 뭐 잘 보느냐고. 이사 가는데 택일도 하냐 그러고. 아니 왠 여자가 맨날 똑같은 시간이면 와서 대문 앞에서 돗자리를 펴고 앉아 있으니까 지금 같으면 인자 뭐 지역 주민 보고대회 이런 거라도 하겠지만, 그땐 그런 개념도 없을 때니까.
그래가 인제 대자보를 쓰자는 생각이 들대. 근데 그때는 지금처럼 대자보 쓴 거를 본 적도 없고 써 본 적도 없으요. 그래 달력을 찢어 가지고 달력 뒤에 "내 돈 내놔라, 이 도둑놈아" 이래가 그 집 대문에다 붙여 놓고 앉아 있으니까, 빚쟁인 줄 알았는지, 그 동네 가게 아줌마가 지네 집 외상값도 받아 달라는 거여. (청중 웃음)
그래가 이것도 아니다 싶어 가지고 뭔가 뽀다구 나게 할 만한 걸 막 찾으니까 머리띠를 매자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근데 지금처럼 뻘건 머리띠 이런 게 없을 때거든요. 집에 와서 머리띠 할 만한 걸 막 찾으니까 압박붕대가 나오대? 이거 땜쟁이들 집에 압박붕대 하나씩은 다 있거든요. 언제 뿌러질 지 모르니까. 압박붕대가 머리띠 매면 환상이다. 폭도 딱 맞죠, 약간 쪼여 주는 느낌도 들지. 그래가 매직을 세 가지를 산 거여. 까만 거, 빨간 거, 파란 거. 양 옆에 단결이라고 시커멓게 쓰고 혼자 하메 뭔 단결입니까? (청중 웃음)
가운데다가 태극마크까지 그렸어요. (청중 웃음) 얼마나 멋있습니까, 독립 투사 같고! 이걸 매고 집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래서 회사까지 가면서 아저씨들을 몣 명을 만났는데 멋있다는 말을 아무도 안 하더라고. 머리띠 매고 가니까 아저씨들이 "진숙이 이번에 머리 다친나?" 이러더라고요. (청중 웃음)
그래 이게 왜 단결이 안 되나 이래가, 회사에 가 유리 앞에 비춰 보니까 웬 걸 압박붕대가 단점이 매번 찍 늘어납니다. ‘ㄷ’은 여기 가서 붙어 있고, ‘ㄹ’은 여기 가서 붙어 있더라고요. (청중 웃음) 야! 이것도 아니다 싶어서 그 다음 날에 이제 잘라서 매고 거울을 보고 쓰는데요, 그땐 그걸 써 줄 놈이 없드랬어요. 요즘 여러분들 활동할 사람이 없다고 얘기합니다. 노조 간부들의 제일 큰 고민이, 간부 맡을 사람이 없다고 얘기를 해요. 여기에 있는 사람만 몇 사람입니까? 저는 이 사람들이 패배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게, 역사와의 약속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문제는 내가 안 변하는 건데, 내가 변하고 세상이 변했다고 주로 착각들을 하고 삽니다.
그래가 그 다음 날엔 빨간 걸로 눌러서, 어째 내내 눌러 썼는지, 풀렀는데도 일주일 동안 이마배기에 단결이었습니다. 빨간 걸로 쓰고 가니까 회사에서 난리가 난 거예요. 봐라 진숙이, 뺄갱이니까 뺄갠 걸 좋아 한댜?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야, 이 새끼들아 그럼 불조심은 왜 빨간 걸로 쓰냐?" (청중 웃음) 그 말도 안 되는 반공 이데올로기들이 지금도 저는 대한민국을 지배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박근혜 같은 것들이, 이명박 같은 것들이 저렇게 설칠 수 있는 유일한 토대가 뭡니까? 반공 이데올로기에요, 아직도. 전 거기서 우리가 위축되지 않는 게 참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와중에 이제 대의원에 출마를 해서 걔네들 집 앞에 가서,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게 철야 농성이야. 그때는 그것도 몰랐시요. 한 달을 그거를 했다. 지금은요 철농 한다고 그래도요, 밥 다 먹고요, 뭐 지하철 막차 시간까지밖에 안 해요. 근데 그땐 그 집 앞에서 한 달을 진짜 다리를 뻗어도 안 된다고 생각을 했어요. 눕는 게 어딨습니까? 가만히 앉아 있다가 그 다음 날 아침이면 또 출근해서 잔업까지 다 하고 이랬드랬습니다. 그걸 한 달을 하니까, 얘네들이 그 돈을 다 주더라고. 그래가지고 아저씨들헌테 그 돈을 나눠주니까 월급보다 더 많았어요, 그 돈이. 그래가 아저씨들이 저만 지나가면 막 이러고요, 화장실에 낙서가 "진숙이를 국회로" 이런 게 막 나오고 그랬드랬어요. (청중 폭소)
한 날은 배 마스터 우[위]에서, 저 꼭대기 위에서, 아저씨 하나가 호루래기를 막 부는데, 호루래기 소리를 들어 보면 압니다. 저게 철판 지나가니까 비키라는 소린지, 누굴 불르는 소린지. 박자까지 넣어서 애절하게 부르는 거예요. 아마 두산중공업의 배달호[2003년 1월 9일 사측의 노조 탄압에 항의해 분신한 노동자]라는 사람의 호루래기 소리가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을 하는데요. 그래가 제가 쳐다 보니까 그때서야 호루래기 소리가 멈춥니다. 저 배 우에서 오십이 넘는 아저씨가 저를 향해서 이렇게 손을 흔들면서 웃는데요, 전 그 아저씨하고 5년을 넘게 같이 일을 했어도 그 아저씨가 그렇게 웃는 거를 처음 봤습니다.
그래서 전 그때 그 아저씨 웃음을 보면서 저하고 한 약속이, 내가 딴 거는 몰라도 저 아저씨의 저 웃음만큼은 지켜 드리자. 저는 그때 노동해방이라는 거, 뭐 거창한 이데올로기는 잘 몰랐습니다. 기양 저 아저씨들이 저렇게 웃으면서 출근하고, 저렇게 웃으면서 일하시고, 저렇게 웃으시며 집에 가면, 그게 저한테는 꿈이었드랬습니다. 대공분실에서 3천만 원을 보는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른 건 그 아저씨의 웃음이었드랬습니다. 내가 그 돈을 받으면 그 아저씨 웃음을 다시는 못 볼 것 같았드랬습니다. 그래가 저는 결국 그 돈을 못 받았습니다. 저는 그때 3천만 원이 아니라 한 50만 원 이렇게 얘기를 했으면 흔들렸을 거예요, 아마. 근데 그때 86년도에 3천만 원이면 꽤 큰 돈이거든요. 되게 감이 안 오는 거예요. 그러고 저는 노동조합을 이렇게 하면서 압니다. 저는 이 길에서 흔들렸던 적은 있었어요. 근데 저는 이 길을 후회해 본 적은 없습니다. 왜냐면 옳은 건 옳고, 틀린 건 틀렸다고 얘기하는 게 전 인간의 삶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이제 마흔여덟 살인데요, 제 나이에 비해서 저는 가진 거는 별로 없습니다. 그치만 그 삶이 별로 아쉽다는 생각을 안 해 봤어요.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말하는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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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혼자 울다가 미친듯이 웃다가 했습니다. 이분의 노동자로서의 진솔한 삶의, 투쟁의 이야기를 꼭 읽어봐 주세요(저로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들에 그저 놀랄 뿐입니다)~ 스크롤의 압박이 상당하여도 다 읽으시면 후회란 없을 겁니다. 강추~!!!^^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