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女僧)
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슬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平安道)의 어느 산(山) 깊은 금첨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 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어휘풀이]
-가지취 : 취나물의 일종
-금점판 : 금광
-파리한 : 마르고 헤쑥한
-섶벌 : 재래종 일벌
-머리오리 : 머리 올. 머리카락의 가닥
[작품해설]
백석이 가지고 있던 공동체적인 공간에 대한 시적 관심은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가족적인 유대나 유년가 체험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은 한편으로는 민중들의 생활세계를 예리하게 포착해내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민중들의 삶을 위협하는 현실의 모순을 파헤치는 커다란 힘으로 고양되기도 한다. 이 「여승」과 「팔원」은 바로 그러한 특징을 잘 보여 주는 작품으로 백석의 대표적인 리얼리즘 시로 거론되고 있다.
이 시는 한 여승의 비극적인 삶을 통해 일제의 식민 수탈로 인해 파괴된 가족 공동체의 모습을 드러낸 작품으로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를 찾아 ‘금점판’을 떠돌다 급기야는 어린 딸마저 잃고 여승이 되어 버린 여인의 기구한 인생을 4연 12행의 짧은 구성으로 밀도 있게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가족 공동체마저 철저히 파괴해버린 식민지 현실과 민중들의 고난은 백석의 시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유년의 체험과 공동체적 향수와는 확연히 구분된 것으로, 가족사이의 유대와 사람과 사물사이의 친화관계가 완전히 해체된 것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해체는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의 경과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힘, 즉 일제의 식민지 지배라는 파행적 역사 과정의 소산이다. 그러므로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나 그를 찾아 떠돌아 끝내 자식마저 잃어버리고 여승이 된 여인이나 모두 그러한 역사 과정에서 희생당한 민중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역행적 구성 방법으로 시상을 전개 시키고 있는데, 1연은 여승의 현재 모습이며, 2~4연은 그녀가 여승이 되기까지의 삶의 궤적을 더듬고 있는 부분이다. 거의 모든 시행을 하나의 문장으로 배치함으로써 빠른 속도감을 느끼게 하고 있으며, 짧은 작품구조로써 그녀의 생애를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표현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비록 불교에 귀의한 여인이지만, 화자인 ‘나’의 눈에 비추어진 여승의 모습은 여전히 현실적 고뇌를 극복하지 못한 서글픈 모습으로, 마지막 두 시행에서 보여주는 ‘섧게 우는 산꿩’ 이나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여인의 머리오리’가 바로 그녀의 내면세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작가소개]
백석(白石)
본명 : 백기행(白夔行)
1912년 평안북도 정주 출생
1929년 오산보고 졸업, 동경 아오야마(靑山)학원에서 영문학 공부
1934년 귀국 후 조선일보사 입사
1935년 시 「정주성(定州城)」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며 등단.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
1942년 만주의 안동에서 세관 업무에 종사
1945년 해방 후 북한에서 문학 활동
1995년 사망
시집 : 『사슴』(1936), 『백석시전집』(1987), 『가즈랑집 할머니』(1988), 『흰 바람벽이 있어』(1989), 『멧새소리』(1991), 『내가 생각하는 것은』(1995),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1997), 『집게네 네 형제』(1997), 『백석전집』(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