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13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코 12,28ㄱㄷ-34
)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 The second is this: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There is no other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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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회개의 기도를 가르치신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돌아오게 되는 것은 그들이 회개하기 이전에 이미 하느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시고 그들을 사랑해 주시기 때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의 질문에 응답하시면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신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한 분이신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이를 안다면 이미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이 있는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호세 1―3장의
호세아의 혼인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호세아서의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간절히 부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호세아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따라갔던 아내를 다시 데려와 한결같이 사랑해 주었듯이, 하느님은 부르실수록 당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이스라엘을 한없이 품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호세아서의
마지막 부분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회개의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이스라엘의 회개는, 더 이상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하느님의 호의를 얻으려 하지 않거나 아시리아의 군사 원조나 군마와 같은 인간적인 힘에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을 하느님이라 부르지 않고 오직 고아와 같은 이스라엘을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단락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시는 것을 강조합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하느님께서 일러
주신 대로 회개의 기도를 바치며 하느님께 돌아갔다는 언급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에 앞서 하느님께서 먼저 그들이 우상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아도 될
만큼 그렇게 그들을 극진히 사랑하셨음이 강조됩니다. ‘마른땅’으로 비유된 이스라엘이 스스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슬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 도저히 싹을 틔울 것 같지 않던 이스라엘이 나리꽃처럼 피어납니다.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부어 주시는 사랑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말씀은 커다란 위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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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글을 쓰면서
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일상 삶 안에서 느낀 것, 또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15년째
글을 쓰고 있는 저를 두고 참 신기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그런 특별한 일과 특별한 만남을 자주 가질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자신은
매일의 삶이 똑같다고 하면서요.
삶을 유심히
바라보면 똑같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음을 깨닫습니다. 하고 있는 일이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날씨를
비롯한 각종 환경도 다르고, 일의 순서도 바뀌기도 합니다. 만나는 사람의 옷차림 역시 달라집니다. 어쩌면 관심을 두지 않고 살기 때문에 내
곁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일과 만남을 모르는 것이 아닐까요?
여행을 하다보면
관심이 있어야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그 관심은 어떻게 생길까요? 알아야 관심도 생기는 법입니다. 여행 전에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은 뒤에 가면, 볼 것이 아주 풍성해집니다. 하지만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가면 어떨까요? “아~~ 좋다.”는
하루 이틀이면 끝납니다. 아마 여행기간이 너무 길다며 투덜거릴 것입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야’를 외치면서 말이지요.
관심을 갖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관심이 특별한 일과 특별한 만남을 갖게 하며, 이것이 곧 사랑으로 이어지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이야기하시지요. 사실 이 둘은 분리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뜻에 따라 살 것이며, 하느님의 뜻은 이웃 사랑으로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이웃을 모른 체
하겠습니까? 이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베드로에게 “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이나
물으신 뒤에, 질문 끝에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고 말씀하시지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행동으로 이웃을 사랑함으로 인해 하느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관심’에서 시작됩니다. 관심을 통해 특별한 만남들이 이어지게 되고, 이로써 사랑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과연 주님께 또 이웃을 향하고 있을까요? 돈, 명예, 힘, 권력 등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어제 저녁에도
묵주기도를 하러 집 밖으로 나가면서 참 많은 사람을 보았고, 인상 깊은 장면들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좋은 세상에서 관심을
가지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 많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할 수 있는 많은 대상을 주신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칩니다.
내 꿈이 아무리
커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한 걸음, 한 걸음이다. 마법은 작은 걸음 속에 숨어 있다(김택진).
“Give
& Take”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마태 7,12)
황금률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이 말씀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종종 삶 안에서 깨닫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황금률을 뛰어넘으시지요. 자신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해주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모조건 베풀어 주셨습니다. 여기에 우리처럼 어떤 조건을 내거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냥
무조건 주시는 사랑이었습니다.
인간관계를 논할 때
종종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Give & Take”
이 말을 보면
take보다 give가 먼저 나옵니다. 즉, 받기 보다는 주는 것이 먼저라는 것이지요. 받으려 하기 이전에 먼저 주고, 먼저 베풀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남으로부터 대접을 받고 싶어 하면서도 상대에게 잘 베풀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는
주거니 받거니 해야 한다는 상호관계성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라는 식의 생각은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만들 수가 없지요. 그래서
남의 일에도 내 일처럼 흔쾌히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적군을 생포해 정보를 얻어야 하는 특수 임무를 맡은 한 독일 병사가 적진의 참호를 습격해서 홀로 있던 적군 병사와 맞부딪히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그 병사는 식사 중이었기에 손에 총이 아닌 한 조각 빵이 들려 있었지요. 무방비 상태로 습격당한 병사는 겁에 질린 나머지 엉겁결에 손에
들려 있던 빵을 독일 병사에게 건넸고, 독일 병사도 무의식적으로 이 빵을 받아 쥔 것입니다.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기치 않은 선물인 빵을 받은 독일 병사는 자기 임무 수행을 포기하고 그 병사를 풀어 주었다고 합니다. 빵 한 조각을 줌으로 목숨을
건진 것이지요.
“Give
& Take”가 이해되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손해 본다는 생각보다는 무조건 베풀어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을 닮은 우리를 가만히
두시지 않습니다. 분명히 커다란 선물이 하늘에 쌓여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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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 명품인생
가꾸기
-이기정신부-
부모님의 유산이
탐나고 배우자의 재산이 좋아서 사랑하는 것 좋을까요? 이런 게 병중에서도 급히 죽어야할 급살 맞은 돈 중독증 병신 아닐까요? 죽음의 사자들이
오기 전에 먼저 비참한 불행이 엄청나게 달려들 겁니다.
하느님의 숨결인
자연을 사랑한다면 몸과 마음이 시원하고 편해질 겁니다. 하느님 닮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면 평생 영생 사랑받을 일만 남아요. 명작 명품인생
가꾸기에 최고 전문가이신 예수님 말씀 기막힌 명언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 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코 12,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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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
-전삼용신부-
바쁘게 살아온
당신의 젊음에 의미를 더해줄 아이가 생기고
그날에 찍었던
가족사진 속에 설레는 웃음은 빛바래 가지만
어른이 되어서
현실에 던져진 나는 철이 없는 아들이 되어서
이곳저곳에서 깨지고
또 일어서다 외로운 어느 날 꺼내본 사진 속
아빠를
닮아있네
내 젊음 어느새
기울어 갈 때쯤 그제야 보이는 당신의 날들이
가족사진 속에 미소
띤 젊은 우리 엄마,
꽃 피던 시절은
나에게 다시 돌아와서
나를 꽃피우기 위해
거름이 되어버렸던 그을린 그 시간들을 내가 깨끗이 모아서
당신의 웃음꽃
피우길
SG
워너비,
김진호씨의
‘가족사진’
노래
가사입니다.
처음 이 노래를
들을 때 눈물이 많이 났었습니다.
가장 깊이 다가왔던
구절은 바로 “나를 꽃피우기 위해
거름이 되어버렸던 그을린 그 시간들”입니다.
‘이것이
사랑이다’
싶었습니다.
부모님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피가 되시어 우리 땅에 뿌려진 것도 연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를
읽다보니 이와 같은 정말 아름다운 구절이 나와서 너무 기뻤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하는지 되새겨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슬’은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아주 작아서
내리는지조차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아침이 되어야
식물들을 살리기 위해 그토록 이슬이 많이 내려있음을 보게 됩니다.
구약은 그리스도께서
이슬이 되어 이 세상을 꽃피우기 위한 소명으로 내려오셨음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0-11)
그런데 저의 큰
단점 중의 하나는 제 일에 바빠서 타인에게 관심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큰 일이 있을
때야만 관심을 가져주는 척 합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섭섭해 하기도 합니다.
저는
‘굳이 자주 만나고
오래 만나는 것만이 좋은 관계는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려고 하지만 한 구석에 자신의 일만 우선시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있음을 눈치 채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소년이 집에서
과일 잼을 훔쳐
먹었습니다.
아버지는 소년에게
벌을 내렸습니다.
“넌 오늘 밤 열리는
파티에 갈 수 없다.”
소년은 아주 우울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날 밤 파티에
다녀온 형이 자랑을 했습니다.
“오늘 참 대단한
파티였어.
화려한 춤과
음식들이 정말 환상적이었어.”
그러자 소년이
퉁명스럽게 대꾸했습니다.
“훌륭하면
뭐해.
내가 안 갔는데
뭘…”
아버지가 조용히
소년을 불렀습니다.
“아들아,
넌 다른 사람이
행복한 걸 보고 함께 기뻐할 줄 모르는구나.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이기심이 바로 죄란다.”
소년은 그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 소년이 장성해
프랑스의 지도자가 됐습니다.
쫓기는 유대인에게
자신의 신발을 벗어주고 자신은 눈길을 맨발로 걸었습니다.
그가 빈민구호단체
엠마우스를 설립한 피에르 신부입니다.
[임한창 국민일보
기자]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이기심이 바로 죄란다.”
그렇습니다.
이슬은 어디 하나
빠짐없이 모든 잎들 위해 살포시 내려앉습니다.
이것이
관심입니다.
저는
‘거름’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거름은 자신을 죽여
누군가의 꽃을 피워주는 것입니다.
땀이고 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이 사랑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슬’이란 단어는
‘아주 작은 일에까지
관심을 가져줘라’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우리도 주위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살포시 이슬이 되어주어 그들 봉우리가 활짝 열려 꽃과 열매를 맺도록 해야겠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알려주시는 사랑의 방법입니다.
이제 주위
사람들에게 눈빛 하나,
말 한마디라도
부드럽게 던져봅시다.
관심
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줍시다.
그러면 그들이 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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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길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내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여라.”
제가 좋아하는 말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는 것과 다를 것입니다.”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오늘 주님께서
율법학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비슷한 말씀을 또 하신 적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함께
매달렸던 죄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으로 들어 갈 것이다.’
율법학자와 죄인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었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는 어디에
있다!’라고 장소의
개념으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는 관계의 개념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은 하느님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그곳이 어느
시간,
어느 공간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나라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
정의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어 주는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주님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하느님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우주에
있는 모든 것들을 구성하는 원자들을 연구하였습니다.
이 원자들은 모여서
분자가 되고,
분자들은 또 모여서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됩니다.
어떤 것들은
생명체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변화하고,
우리 눈에는
사라지는 것 같지만 우리의 몸을 구성했던 모든 분자,
원자들은 없어지지
않고,
또 다른 형태를
이루게 된다고 합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100여개의 원자들이
모여서 형태를 이루고,
생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분을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불교는 살아 있는
생명체는 그 행위에 따라서 또 다른 생명체로 태어난다고 말을 합니다.
그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이는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말을 합니다.
교회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삶을 이야기 합니다.
‘온 마음과 온
정성과 온 열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유한한 몸은 변화하고,
생명의 불꽃은
꺼지는 것 같아 보이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준다고 믿습니다.
이 또한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십니까?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고 있습니까?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하느님나라를
살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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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맺는
사랑
-반영억신부-
하느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기본이 되는 것은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계명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그 계명에 근거하여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계명? 하면 십계명을
떠올립니다. 좀 더 요약하면, 사랑의 계명으로 말합니다. 과연 나에게 첫째가는 계명은 사랑인가요? 내가 무엇을 행하거나 판단할 때 하느님의
계명이 기준이 되고 있느냐에 따라 나의 신앙의 현주소가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적대자들에게 지혜롭게 대답하시는 것을 보고 율법학자 한 사람이 와서 주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질문을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12,30).는
것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
르12,31). 는 이중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시험하였던 여러 부류의 종교지도자들과는 달리 악의가 전혀 없이 열린
마음으로 질문하고 그 계명에 대하여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 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12,32-33). 하며 동의를 표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12,34).
하고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 중에는 이렇게 마음이 열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고 하였지 아직 들어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축구경기에서 골인을 한 것과 골인할
뻔한 것은 분명 다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자캐오
이야기(루카19,1-10)를 기억하시지요? 예수님께서 “오늘 이집에 구원이 내렸다.”고 하셨습니다.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신 것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율법학자는 학자답게 이론으로 알고 있었고, ‘훌륭하십니다.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자캐오는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하며 즉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야말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7).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충실하여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열매 맺는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함으로써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이 이중계명의 사랑은 모세와 이스라엘백성에게 주어진 십계명의 핵심정신이고, 동시에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의 핵심정신이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헌신으로 요약됩니다(손희송).
사랑은 사랑을
낳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한 그 사랑으로 사랑하여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아진다면, 그리하여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이
열매 맺는 삶입니다. 특별히 주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성사에로 인도되어 구원을 선물로 얻는다면 그보다 더 큰 열매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많이
사랑하십시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
하십시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그러므로 실행함으로써 열매 맺는 사랑에 목말라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그 ‘앎’이 온몸 세포 하나하나에 배어 있는
것과는 분명 다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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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사랑의 선물
-깨달음의
은총-
-이수철신부-
어제
목요저녁미사중 떠오른 오늘 강론제목, '하느님 사랑의 선물-깨달음의 은총'입니다.
돌아보니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선물이었습니다.
이런
깨달음의 은총에 감사합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깨달음이 회개입니다.
그러니
오늘 강론은 사랑의 고백이 되겠습니다.
강론을
쓰는 새벽시간 온통 하느님 사랑의 선물에 에워싸여 있는 느낌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현존의 느낌이 생생합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잘 마련된 집무실의 책상, 게시판, 연초록 향기로운 긴 책상등
모두가
최빠코미오 원장수사를 통해 하느님이 주신 넘치는 사랑의 선물들입니다.
27년째
무사히 요셉수도원에 살 수 있었던 것도,
또
안식년을 성공리에 마치고 귀원할 수 있었던 것도
수도공동체를
통해 주신 하느님의 놀라우신 사랑의 선물입니다.
집무실
의자 옆에 늘 바라볼수 있는 아름답고 거룩한 성모님 이콘 역시
며칠전
서레몽수녀를 통해 주신 하느님 사랑의 선물입니다.
안식년
동안 무수한 형제자매들을 통한 하느님의 한량없는 사랑의 선물이었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이 보내주신 사랑의 수호천사들이었습니다.
도대체
하느님 사랑의 선물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산티아고
순례, 장장 800km 2000리, 12kg 배낭을 메고
하나도
지치지 않고 넘치는 활력으로 준비해간 미사도구로 매일 미사를 드리고 성무일도를 바치고
묵주기도를
드리며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얼마나 놀라운 하느님 사랑의 선물인지요.
또
이렇게 무사히 귀원하여 사랑하는 수도형제들과 살 수 있음은,
사랑했던
무수한 형제자매들을 만날 수 있음은 얼마나 놀라운 하느님 사랑의 선물인지요.
엊그제
양일간의 사랑 체험도 하느님 사랑의 놀라운 사랑의 선물이었습니다.
"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롭게 사십시오.“
고백성사시
말씀의 처방전과 함께 며칠전 선물받은 꽃꽂이 병에서
곱고
향기로운 후리지아꽃 한송이씩 주며 당부한 보속입니다.
이것은
보속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자비의
성사, 고백성사를 통해 하느님 주신 사랑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하느님 사랑의 선물을 까맣게 잊고 지내는지요.
이렇게
사랑의 선물을 받고 있음을 생생히 체험할 때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입니다.
주님
주신 사랑의 이중계명인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우리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고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하여
저절로 율법의 완성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행은 의무라기 보다는 하느님 사랑의 선물에 대한 자발적 사랑의 응답이자 표현입니다.
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듯 마음을, 목숨을, 정신을, 힘을 다하여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미사와 성무일도를 바치고,
맡은바
소임의 일은 물론 렉시오디비나에 충실하며 찾아오는 손님들을 따뜻이 환대합니다.
하느님은
호세아 예언자를 통해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사랑의
하느님께 돌아가는, 사랑의 응답이 바로 회개요 회개에 따른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의 선물입니다.
하느님께
돌아와 놀라운 하느님의 사랑을 먹고, 마시고, 호흡할 때
누구나
깨닫는 최고의 사랑의 시인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호세아의 입을 빌어 사랑의 시를 읊으십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얼마나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랑의 시인지요.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호세아
예언자처럼 이런 하느님을 닮아갈 때 우리 모두 '사랑의 시인'이 되고 '사랑의 신비가'가 됩니다.
호세아는
물론 모든 예언자들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하여
시편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바치는 성무일도는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시편들로 가득합니다.
사랑을
가득 담아, 끊임없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시편을 노래할 때
우리
모두 하느님을 닮아 사랑의 시인이 되고 사랑의 신비가가 됩니다.
호세아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하느님
사랑의 선물을 깨달아 하느님 당신께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런 회개의 사람들이 지혜로운 분별력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사랑의 선물이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은혜로운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를 당신 사랑과 생명으로 충만케 하시어 우리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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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순교
-인영균신부-
서울에
기차를 타고 올 때 봤습니다. 한 엄마가 어린 자식 둘을 데리고 기차에 탔습니다. 자리는 두 개를 끊었습니다. 무거운 가방을 몇 개나 지고
왔습니다. 먼저 아이 둘을 자리에 앉히고 간식을 꺼내 먹도록 했습니다. 아이들이 맛있게 먹고 있는 중에도 엄마는 가방을 힘겹게 짐칸에
올렸습니다. 엄마가 아이들 사이에 앉으려 해도 아이들은 먹는데 바빠서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짜증을 엄마에게 내었습니다. 그렇게
피곤한데도 그 엄마는 힘든 기색도 하지 않고 한참 서 있다가 아이들을 타일러 겨우 아이들 사이에 앉았습니다. 이 장면을 지켜 보면서 약한 여자는
자식을 키우면서 인내의 강한 사람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이다.” 이레네오 성인이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참으로 기쁘게 해 드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지요. 사실
하느님은 우리
눈에 안 보이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도 쉽습니다. 생각으로만 머리로만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지요.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몸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내 온 존재로 움직이면서 드러나야 사랑은 사랑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도 우리
몸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함께 사는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증명됩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강해야 합니다. 인내를 요구합니다. 그 엄마처럼
사랑은 인내를 통해 확인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마음의 순교입니다. 믿는 사람에게 사람에 대한 사랑은 곧 하느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오늘
내가 인내해야 합니까? 그러면 주님을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한 위대한 순교자가 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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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마르 12,34)
-오상선신부-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는 것
같습니까? 아니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나요? 하느님 나라는
어느날 느닷없이
죽어서 도달하는 그런
실재는 아닐지
모릅니다. 지상에 사는
동안 하느님 나라를
가까이 느껴야 비로소 하느님
나라를 누릴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맛보고 사는 사람만이 천국을
그리워하며 죽음을 두려운
가운데서가 아니라 복되게 맞이할 수
있겠지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는 사람은 지상나라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다스리심을 깊이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오늘 나는
하늘나라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한번
재어봅시다.
여러분이 하느님
나라와 아주 가까이
계시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을 한껏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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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깊이 사랑하기 위한 올바른 자기 사랑
-기경호신부-
인간은 사랑으로
창조되었기에 사랑을 먹고 사랑 속에 살아간다.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기에 사랑을 주고받는 일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사랑의 존재가
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오늘 말씀들을 통해 그 길을 찾아보자. 제1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는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14,2)고 하며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이들에 대한 축복’을 선포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의 풍요신을 섬겼고, 제관들은 재물에 눈이 멀어 있었다. 여기서 예언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오롯한 충성이요 그분께 대한 앎의 추구이며,
하느님을 아는 지식은 그분의 뜻과 계명을 알고 따르는 것임을 가르친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바라지 마음에 없는 희생제물을 바라지 않으시며,
형식적인 예배보다 진실한 마음을 더 좋아하신다. 회개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커가고 완성된다.
이웃을 사랑할 때
하느님 사랑도 커 가며 하느님을 만나는 새롭고 깊은 기도의 차원이 열린다. 또한 하느님 사랑은 이웃사랑의 원천이고 이웃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다. 그런데 하느님을 사랑하는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요, 이웃도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열등감을 지니고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나 자신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자신을 사랑하는
이는 자신의 빛과 그림자, 장점과 단점, 온전함과 상처들을 깊이 이해하고, 그런 자신을 남김없이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을 사랑하려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자기가치가 높아진 것처럼 보이려는 허풍이나 과장을 그만두고, 남을 헐뜯지 말아야 한다.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길 줄
알아야 하고, 뭔가 잘못했을 때에도 변명하고 합리화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다른 이들의 행동과 반응, 환경에 따라 존귀함이 달라지지 않고
‘있음’ 자체로 존엄하기에 남과 비교하거나 스스로를 혐오하거나 비하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분노하지 않는다. 자기가치감이 부족한 사람은 자신의 부적절함과 경솔함을 싫어하고 자신을 미워한다. 이런 사람이 우울감이나 불안감을
이겨내는 한 가지 방법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려거든 마음을 열어 관계를 맺고 어울리며 자신을 돌볼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이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로부터 반드시 사랑받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남의 주의를 끌고
인정받으려는 과도한 성취욕을 자제할 줄 안다. 우리는 무엇을 이루느냐에 따라 더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며, 늘 어디에서나, 그리고
절대적으로 좋은 사람이어야만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자신을 사랑하려면
먼저 자신을 믿어야 하고 자기불신을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확대하거나 투사하지 말아야 한다. 이분법적 사고와 흑백논리는 올바른 자기 사랑의
걸림돌이다. 이런 사고는 완벽주의에 빠지게 만들고 사소한 실패에도 자신을 완전한 패배자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또한 단 한 번의 부정적 사건을
마치 끝없이 반복되는 실패의 본보기처럼 생각하는 과잉일반화의 잘못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자신을 올바로 사랑하려면 한 가지 잘못된 일에만 계속
집착함으로써 나머지 잘된 일은 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지레짐작으로 성급히 결론짓거나, 사소한 일을 큰 재앙으로 여기는 과잉확대
혹은 중요한 것을 지나치게 축소해서 받아들이는 과잉축소의 잘못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자신을 참으로
사랑하는 이는 늘 ‘하지 않으면 안 돼’, 혹은 ‘해서는 안 돼’와 같은 엄한 규율을 자신에게 지나치게 적용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를 자신에게 지나치게 적용하면 불필요한 죄책감이나 수치심 그리고 자기혐오감을 불러일으키며, 다른 이들에게 적용하면 분노, 욕구좌절감 및
실망을 느끼게 된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는 인생의 어려움이나 책임을 피하지 않으며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라도 자신의 빛과
그림자를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하느님과 이웃을 더 깊이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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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신부-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 인간은
결코 하느님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행복할 수 없는
사랑의
존재들입니다.
사랑의
시작은 언제나 하느님
사랑으로 시작됩니다.
인간의
사랑은 마지막까지
목마르지만 하느님
사랑은 인간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갑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우리는 참된 성숙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우리는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아껴주신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을
믿어야합니다.
사람의
길은 하느님께로
가는 사랑의
길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인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사랑을
뜨겁게 다시 찾게
됩니다.
사랑만이
하느님과
같은 사람이
되게합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께서
계시고 하느님께서 계신
곳에 언제나 사랑이
있습니다.
생명을
제대로 살기위해서는 우리가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만이 우리자신과
이웃의 아픔을 닦아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품어주셨듯이 우리또한
이웃을 품어주는 은총의
사순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수한
사랑의 말씀에
앞서 먼저 우리의 가장
아픈 곳을 침묵으로 품어주실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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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에게서
열매를 맺으리라.
-김기현신부-
살아가다보면 막연한
동경으로 무언가를 바라볼 때가 있는 거 같습니다.
예를 들어 시골의
삶을 생각해 보면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도시에 있는 사람
가운데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나중에 노후에는
시골에 내려가서 여유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
수입은 텃밭에서
나오는 거 조금 먹고,
방을 몇 개 더
마련해서 주말에 손님들 조금씩 받으며 살아가면 되겠지..
하는
겁니다.
시골에만 내려가면
여유가 많을 거 같고,
펜션 하는 일이
노년에 할 수 있는 만만한 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떤가요?
살아보면 생각했던
거와는 많이 다른 걸 느낄 겁니다.
처음 얼마간은
여유를 느끼겠지만 시골의 일이라는 것이 끝이 없습니다.
밭에서 풀 나면
매기 시작해야 하고,
웬만한 수리들은
사람을 쓰기 힘들어서 스스로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 수입을 생각해서
펜션을 했다면 주말에 손님을 받고 시중들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것이 노년에 할 수 있는 만만한 일이 아님을 느끼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멀리서 볼 때는
어떤 막연한 동경이 있었는데 가까이서 살아보면 그렇지 않은 것들을 보게 되고 환상이 깨지는 시기가 있을 텐데요.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최근에 만난
형에게서는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외국 유학에 대한 어떤 동경이나 로망이 있는 거 같은데 실제로 살아보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님을,
거기서도 그저
일상을 살아가게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부부들도
마찬가지죠.
결혼하기 전에는
많은 환상에 사로잡혀 결혼만 하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것만 같은,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하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펼쳐질 거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죠.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여행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를 갔다 오면
뭔가 대단한 무언가를 볼 거 같은데 막상 가보면 생각했던 그 무언가가 채워지지 않은 허전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내가 막연하게
그리던 것과는 다른 삶.
그런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나요?
루이스가 말하는
사람 중에 ‘어리석은 부류에
해당하는 사람’은 세상에 나의
갈망을 채워줄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여,
또 다른 것을 찾아
나서고자 합니다.
예를 들면 한
여자에게 만족을 얻지 못한다면 다른 여자를 찾게 되고,
이 번에 간
여행에서 그러한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면 또 다른 여행을 계획하는 겁니다.
공부도
마찬가지죠.
이 책을 읽고
채워지지 않은 것을 또 다른 책으로 채워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갈망을 해소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거듭되는
실망과 허탈함,
뭔가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아쉬움을 더 느끼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마 그보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 외에 그 갈망을 채워줄 수 있는 분이 없음을 깨닫는 사람일 거라 생각합니다.
“나는
싱싱한 방백나무 같으니,
너희는
나에게서 열매를 얻으리라.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오늘
하루,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느껴질 때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뭔가 있으려니 하며 헛된 기대를 품기보다,
하느님 안에서
충만함을 찾아 얻어 누릴 수 있도록 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전 본당을 떠날 때
신자들이 몇 분 안 되시기 때문에
그 분들이 세상을
떠나시면 장례미사를 봉헌해 드리기로
개인적으로
약속했다.
지난 월요일에도
연세 많으신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가서 전 신자들을 만났다.
미사를 봉헌하고
떠나면서 아쉬움에 인사를 하는데
이런 말을 해도
되는건지..
안 되는
건지..
모르지만,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야기 했다.
“누가 돌아가셔야 또
볼 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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