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Ⅲ-29]역참 찰방(察訪)들이 본 오수사람의 DNA?
21세기 들어와서야 ‘세계적인 반려동물의 성지’로 급부상하고 있는 내 고향 오수(獒樹. 전북 임실군 오수면). 왜 성지(聖地)라는 거창한 단어를 들먹거리는가? 그야 물어볼 것도 없이, 1천년 전(아마도 10세기 후반)에 불길 속에서 제 몸에 물을 묻혀 주인을 살리고 죽은 '의견의 고장'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는 드물지 않은 ‘진화구주(鎭火救主)형’의 이 사건은, 13세기 중반 고려문인 최자가 1254년에 펴낸 <보한집>에 그 내용이 설화인 듯 실려 있지만, 주인(김개인)의 이름도 나오는 실화임을 의심할 여지는 없다. 당시 사람들이 이 고장을 ‘큰 개 오(獒) 나무 수(樹)’로 부른 까닭도 이해하기 쉽다. 김개인이 술에서 깨어나 죽은 개의 주검을 보고 ‘네가 나를 살렸구나’ 슬피 울며 노래를 부른 게 <견분곡>(아쉽게도 곡명만 전하고 노랫말은 전하지 않는다)이고, 무덤 가운데 지팡이를 꽂았는데, 지팡이에서 싹이 돋아 큰 나무로 자라났기 때문에 ‘개나무골’로 불리다 ‘오수’로 굳혀졌을 터. 언제부터 오수로 불렸을까?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문헌상 오수 지명이 처음 보인 게 1190년 이규보의 한시 구절이니, 그 이전이었을 것은 분명하다. 이 실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미물(微物)도 사람이 정을 준 만큼 그 은혜를 안다는 것, 그리고 주인이 어떤 식이든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은혜에 보답할 줄 안다는 것. 즉 보은(報恩)할 줄 아는 동물, 어쩌면 은혜를 쉽게 망각하는 우리 인간들에게 죽음으로써 '반면교사' 본보기를 보여준 게 아니었을까? 그러기에 당시 주민들이 보란 듯, 십시일반 추렴을 하여 광개토대왕비만큼 거창한 돌로 ‘개비’를 세웠을 것이다.
1천년 뒤 한 농부(유튜브에서 ‘심재석TV’를 찾아보시라. 굉장맹장하다)가 20여년 전 약초 재배를 하다 당시는 산과 들에 흔한 엉겅퀴에 주목했다. “겨우내 한가꾸(엉겅퀴)를 달려 먹으면 앉은뱅이도 일어선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나서였다고 한다. 엉겅퀴 종류가 20여개가 넘지만, 고향에서 자생하는 임실엉겅퀴에 주목하여 논이나 밭에 심어 처음으로 개발에 성공해 ‘농업기술명인’이 됐고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엉겅퀴의 효능을 전국으로 처음 알리며, 건강제품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효능을 입증하는 논문을 해외 학술지 등에 20여편 발표하기도 했다. 호(號)조차 “나는 엉겅퀴 농부”라는 ‘계농’(薊儂)이다. 그가 지난해 급작스런 뇌출혈로 25mg의 피가 뇌에서 빠져나가 응급실에서 열흘간 있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의사와 상담없이 그가 만든 건강제품(엉겅퀴 골프)를 수시로 먹었다한다. 그 결과였을지, 노출된 피가 거의 흡수되고 20일만에 지팡이도 짚지 않은 채 퇴원을 했다. 현재 입원 전과 동일하게 건강하다.
그와 어제 계룡에 사는 금석문학자 손환일 박사 연구실을 찾아 그 얘기를 하면서 말했다. “박사님, 제 생각인데, 오수의 DNA는 한 마디로 ‘보은’(報恩)같아요. 천년 전에 오수개가 주인에게 보은을 했듯, 작년에 자기를 알아줘 세계에 알리고 있는 제가 생사를 헤매자 식물인 엉겅퀴가 피를 깜쪽같이 사라지게 해 저를 살려준 것을 보고 든 생각입니다. 보은할 줄 아는 동물과 식물, 어때요? 그런데 오수에 사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심회장, 참 좋은 말씀, 맞는 결론같네요. 조선조 오수역참의 찰방 몇 분의 기록을 보니, 오수 사람들이 참 선한 것 같아요. 의리도 알고 심성도 착하고, 그러니 동식물도 감화를 받은 것같네요. 이기적 유전자인 DNA의 피 내림? ‘오수의 DNA=보은’ 지금도 그런가요?”
‘오수의 DNA=報恩’. 과연 그러한가? 손박사가 언급한 조선조 오수찰방 두 분과 17세기 말 한 문인(이하곤)의 글에서 보이는 ‘오수사람의 기질과 심성’ 그리고 ‘오수개’에 대한 얘기를 정리하는 까닭이다. 먼저 찰방(察訪)에 앞서 오수역참(驛站)에 대해 알아야 한다. 조선조 역참제도는 국가의 명령이나 공문서를 전달하고, 공무로 출장 가는 관리에게 말과 숙식을 제공하던 ‘국가 통신·교통 네트워크'인데, 풍부한 물산의 집합지 오수역은 호남 지방의 교통과 통신을 담당하던 핵심 물류 거점이었다. 예전의 이리역(현 익산역)의 허브역할보다 더 했다. 전라도지역 10여개 이상의 주변 소역(小驛)을 총괄하는 중심역으로, 수많은 역졸과 수백 마리의 역마가 대기했단다. 찰방은 역참을 총괄하여 관리하는 종6품 공무원. 오늘날로 치면, K-레일 지역본부장. 가장 유명한 최주하(崔柱夏.1659-1729) 찰방은 현감도 지낸 청렴한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인심을 샀다고 한다. 강직한 성품으로 파직을 당하자 오수면민들이 촛불혁명처럼 들고 일어나 다시 복귀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불의에 항거하는 오수사람들의 기질을 보여주는 흔치 않은 사례일듯. 시시비비를 가리고, 은혜를 베푼 이에게 의리를 지키는 강직하고 의로운 기질을 보여준 것이다. 최찰방이 오수 사람들을 ‘충효와 예절을 알기에 대접받아 마땅한 존엄한 백성’으로 바라보며, <오수전>(獒樹傳)도 썼다는데 전하지 않아 안타깝다. 1713년 양로청(현존 시설)을 전국에서 처음 신설하는 등 무한한 존중과 애정을 보여줬기에, 선정비를 세워 제사도 지냈다고 한다. 땅에 묻힌 파비를 2017년 오수역참지에 복원했다.
또한 김우동(金羽東) 찰방은 “이곳에 사는 백성들의 마음씨가 돈독하여 예로부터 훌륭한 사람이 배출되었는데, 오수개 실화의 주인공이 그렇다. 덕망이 있기에 큰 개를 기를 수 있었고, 큰개도 그런 주인을 위해 죽을 수 있었다. 그러니 지팡이가 능히 살아나 무성해졌고, 개무덤과 나무로 인해 땅이름을 얻었다. 후세 사람들이 이 얘기를 듣고 나무를 함부로 자르거나 벌목하지 못하게 했다.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착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오래 전해져도 더욱 새로울 것이다.’ 30년 전에 오수찰방을 하신 선친도 ‘김개인 같은 정성으로 하면 남을 감복시킬 수 있다. 백성을 다스릴 때 갓난아이 돌보듯 하라’고 당부하셨다. 옛 노인들이 아버지에 대해 전하길 ‘그런 분은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을 것’이라며 ‘임기를 마칠 때는 수레를 잡고 가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중략) 최주하 찰방이 모함으로 파직당하자 사람들이 모두 잘못됐다고 분노했다. 그가 돌아가자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우고 향을 세우고 정성껏 제사를 모셨으니, 이 역시 세상에 드문 일이라고 하겠다.(후략)”라고 1845년 <여지도서>(輿地圖書) <오수역지서>에 기록했다.
또한 17세기 문인 이하곤(李夏坤/1677-1724)은 <두타초> 문집 가운데 <남유록>(南遊錄)에 “오수역에 이르니 시내와 산이 수려해 내 고향같다. (중략) 세상에 전하는 ‘오수개’ 이야기를 생각하며 비 오는 밤에 시 한 편을 짓는다. ‘千秋尙說義獒名/ 微物猶存愛主誠/ 借問世間卿相輩/ 幾人爲國更捐生”(천추상설의오명/ 미물유존애주성/ 차문세간경상배/ 기인위국경연생: 일찌기 천 년 전에 ‘의오’라는 이름의 개가 있어/미물이지만 주인이 정성으로 사랑하였다/세간에 벼슬아치들에게 묻노니/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라며 부박한 관료들을 비꼬았다.
이 한시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千秋’이다. 숫자상으로 ‘1000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보면 당시가 17세기이므로 서기 600년대가 될 터이나, '만(萬)'이라는 숫자를 많다는 뜻으로 강조하듯, ‘천추’를 그저 ‘오래 전의 세월’이라고 쓴 수식어로 본다고 해도 서기 900년은 되지 않을까? 설화문학의 대가 최래옥(85) 교수는 ‘오수개 실화’가 <보한집>이 나온 1254년보다 최소 300년은 앞서 발생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2023년 탁본으로 밝혀진 의견비 건립연대 간지가 ‘임술년 3월중’(壬戌年 三月中‘인 것은 거의 확실한 듯한데, 그 임술년이 962년은 아닐까? 면민 80여명의 이름이 확인되는 마당에다 여러 가지 방증으로 봐, 10세기말 아니면 11세기초(1022년) 임술년으로 건립연대를 비정(比定)해도 되지 않을까? 또한 ‘술’(戌)이 ‘개 술’자이므로, 사건 발생 십 수년 만인 '개띠 해'를 맞아 면민들이 주인을 살리고 죽은 충견, 의견을 추모하고, 그 고귀한 희생정신을 본받자며 십시일반 돈을 모아 거대한 ‘개비’를 세우지 않았을까(화강암 돌을 기부한 김여산은 ‘금물대시주’로 확실히 刻字되어 있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 그렇다면, 이 개비야말로 지구촌에서 가장 오래되고(the oldest) 유일무이한 개비로서, 당장에 국보가 됨과 더불어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 것도 가능할 터인데. 그렇게만 된다면, 세계 각국의 반려동물 인구들이 앞다퉈 대한민국의 벽촌, 조그만 소읍 오수의 현존하고 엄존하는 오수의견비를 보러, 만지러, 인증샷을 찍으러 구름같이 모여들지 않을까? 딜럭스한 반려호텔 건립이 급선무가 아닐까? 소재지 전체가 반려동물 친화 문화도시로 반려관련 샵으로 '먹고 살 일'이 걱정되지 않은, 오수가 되지 않을까? 언제까지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을 것인지, 나는 궁금하다. 오직 무상한 세월이 원망스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