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자화상 (외 2편)
강희근
그는 그림을 그릴 줄 모른다
그는 남의 그림으로 제 모습 쓰기는 하는데
가만히 보면
에드바르 뭉크의 담배, 또는 손, 또는
빈약한 수염 같은 데에 골몰한다
실제로 한 번씩 일찍이 끊어버린 담배, 에쎄
같은 선 여린 것들 중에서
한 까치 뽑아 문다
과거에 물었던 것들은 호흡기로 들어가
위장으로 내려가 저장되는 연기,
생연기를 내는데
지금 꼬나든 것들은 그냥
호흡기를 통과하거나 위장에 가서 집 짓는
연기, 생연기가 아니다
뭉크의 것처럼
영혼 사르는, 살라서 불타는 연옥 같은 데
어리는 붉디붉은 원색이거나
물살 같은 쭉 쭉 뻗치는 직선,
가드레일 같은 직선이다
그는 그림을 그릴 줄 모른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메타슈 미술관에 들렀다
온 이후
렘브란트 그림의 손, 또는 손가락의
색깔에 대해 쓴다
아니 여자의 손과 남자의 손에 대해 쓴다
가회를 지나며
향기가 나는 산 밑에서
산으로 드는 길목 지키는, 중학교 지도주임 같은
마을
초등학교 중학교가 안쪽에 자리잡아 있고
농협이 있고
딸린 창고가 있고 마당이 있고
옛날의 전성시대에 있던 술도가는 어디쯤 있는가
그 술도가 딸이 대처로 나가 시인이 되어 있다는
소문인데
진주에서 가회로 가는 버스 기다리는 사람
어쩌다 만나면
농대를 나와 그곳 중학교 수학문제를 풀고 있는
선생하는 친구 생각이 났다
마을은 향기와 단풍이 물드는 철에 가슴 제 먼저
익어서
찻길로 내쳐 가면 산이 나오지 않는다고
호루라기 호루루 불어줄 것 같은
그래도 색시 같은, 색시의 치마 같은 계절,
계절 뒤로 들어가면 골짜기가 요염한 데가 있어
바람 흔적 미술관이라는 제법 설레는 이름 달아주는
사람 생겨난다
가만 있거라
감나무 한 주 서 있는 면사무소 어디 있는가, 잠시
머물다 가자 자판기 커피 뽑아들고 한 박자 쉬다가
또 한 모금 쉬다가 가자
섬, 그리고 섬
사랑이여
사랑은 섬으로 가 있는가
섬으로 다 건너가 저녁 무렵 노을에 젖고 있는가
섬 가운데 섬처럼 의연히 물결이다가 일렁이다가
아득한 노을 너머 그리움이 되고 있는가
나는 섬이라면 그 이름을 적어
사랑에게 드리고
갈매기처럼 빙빙 돌거나 등대처럼 기다리는
사람,
섬은 아깝고 애틋한 것
꽃철에 꽃으로나 내리는 땅이거늘
나는 그 섬에 사랑의 쪽지를 놓고 돌아가네
배는 흔들리고 바람 불고
사랑이여 아직 살아보지 못한 섬에게 손 흔들어
인사할 수는 없네
아, 사랑의 일기는 밤하늘 별들이 쓰고
나는 별자리와 별자리 오가며 일기를 읽으리라
한 줄의 아리는 아름다움이 있는가 있다면 사랑이여
사랑의 행간에 있네
시집 『리디아에게로 가는 길』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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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 1943년 경남 산청 출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연기 및 일기』『風景譜』『사랑제』『기침이 난다』『바다, 한 시간쯤』『깊어가는 것은』『물안개 언덕』『새벽 통영』『그러니까』『프란치스코의 아침』『리디아에게로 가는 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