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하는 보위>
1960년대 유행의 첨단을 걷던 런던에서는 팝 뮤직, 패션, 사진, 그래픽 디자인,
팝아트가 활기를 띄고있었다.
폴 매카트니는 한 예술가를 만나 비정규적인 미술교육을 받으면서 영국 팝아티스트들의
작품에 대해 알기 시작했다.
그리고, 앨범 재킷 디자인에 관여하기도 했다.
어느 날 그는 워홀의 영화 <엠파이어>를 보고 그 무의미함에 고무되어
영화 카메라를 사서 직접 실험적인 홈무비를 찍기도 했다.
매카트니는 회화에 대해 느슨한 접근방식을 좋아했다.
폴 매카트니는 장 콕도의 스케치 작품들을 구입하면서 미술품 소장을 시작했다.
그리고, 피아노와 가구들의 장식을 예술가에게 부탁했다.
시각적인 장난으로 유명한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그는 안녕(au revoir)이라는 글씨가 쓰여있는 커다란 초록색 사과 그림을 소장하였는데,
사과 이미지는 비틀즈가 창랍한 기구의 로고가 되었다.
매카트니에게 그림은 오랜동안 그의 꿈이었지만,정식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것 때문에
그동안 망설여 왔었다.
하지만 그는 정규 음악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다.
그러던 차 "인생은 40부터 시작된다"며 뭔가 새로운 것을 찾던 중 부인의 소개로 만난
미술품 수집가를 통해 알게된 윌리엄 드 쿠닝의 도움으로 그림을 시작했다.
폴 매카트니와 웰렘 드 쿠닝.
매카트니는 드 쿠닝으로부터 그림에 관한 조언과 격려를 받았다.
매카트니가 그림을 시작했을 때 그는 어떤 종류의 작품을 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는 채
물감과 붓을 가지고 움직여보고 싶은 충동만 있었다.
그는 드 쿠닝의 자유에 대한 강조와 주택 도색용 붓을 사용한 즉흥적 접근방식에
영감을 받아 자신의 본능을 믿고 상상력에 따라 그리는 과정 중에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찾아보기로 했다.
매카트니는 추상과 구상을 다 그렸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은 서정적이고 색채가 강조된
표현주의적 특성을 지녔다.
물감이 떨어지는 느낌, 튄 듯한 붓자국, 물감으로 휘갈긴 듯한 자국과 선들,
선명한 색깔, 거친 스케치 등은 추상표현주의와 1980년대에 유행한 독일의 신표현주의의
영향을 보여준다.
그는 인물과 풍경을 그렸지만 객관적 사실주의적 표현은 피했는데,
정확성은 부자연스러운 결과를 낳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림에 두려움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초현실주의자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꿈과 무의식"은 매카트니에게도
가끔 가사와 멜로디에 대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고
그림의 이미지에도 이를 응용했다.
그는 음악과 시각예술에 공통되는 창조성이 소리와 색채에 생기를 불어넣는다고
믿으며 예술가는 한가지에만 제한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어떤 그림들은 가면과 켈틱(Celtic-인도 유럽 어족의 한 어파로서
Irish, Scots Gaelic, Welsh, Breton의 여러 언어를 포함)모티브를 포함하고 있는데
상징적이거나 비유적이며 이런 스타일은 샤갈이나 나이브 아트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걸쳐 자연과 현실에 대해 야생적이고 소박한 태도를 보여준 미술)를
떠올리게 한다.
매카트니의 그림 주제는 종종 자전적인데, 그가 만났던 유명인들 워홀이나
엘리자베스 2세 같은 이들의 초상화가 포함된다.
그런 까닭인지 매카트니는 여왕의 기사 작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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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카트니는 그림을 그리는 유명인이라는 신드롬을 경계했고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을 꺼렸다.
하지만 피드백을 얻기 위해, 유명인으로서의 지위를 이용하려하기 보다는
자신의 작품의 예술적 가치에 관심을 보이는
큐레이터에게 결국 전시 기획을 동의했다.
1999년 600점이 넘는 작품에서 추린 73점으로 매카트니의 전시회가 독일을 시작으로
영국까지 순회전이 열렸다.
매카트니는 전문가의 영역을 벗어나서 자신의 그림을 대중의 평가에 노출시키는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림이 불리한 평가를 받을 것임을 깨닳았다.
그는 비평을 피하기 위해 기자들에게 자신이 그림 그리기를 진지하게 생각하지만,
'진지한 아마추어' 이상의 것은 시도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매카트니는 종종 방어기제로 자신을 비하하는 말을 한다.)
그에게 그림 그리기는 즐기는 것이며 치료적 역할도 한다
많은 그의 그림들은 풍부함과 유머, 즐거움으로 특정지어진다.
유명인이 하는 모든 일은 뉴스 미디어의 관심을 끌기 마련이다.
따라서 매카트니의 전시회가 광범위한 언론의 취재를 받았고
(독일 전시 오프닝에 300명의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3만 7천명 이상이 전시회에 다녀간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의 화집 출판도 대성공을 이루었다.
모든 화랑이나 출판사가 매카트니의 작품에 관심을 가진건 아니었지만,
그는 화랑을 대여하고 직접 책을 출판할 만큼 부자였다.
소수의 무명 화가들이 발견되어 환영을 받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미술계는 정규 교육을 받은 젊은 화가들이나
확고한 명성을 가진 중견 작가들을 선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매카트니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미술계가 그의 그림을 주목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적 특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그림은 현대 미술의 흐름에서
어떤 새로움에 기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매카트니의 예술과 창의력 키우기에 대한 또 다른 헌신의 표시는 '페임 스쿨',
즉 리버풀 공연 예술학교에 대한 그의 재정적, 정신적 지원이었다.
매카트니는 100만 파운드(약 20억)를 기부하고
그의 명사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데이비드 호크니, 제인 폰다,
랄프 로렌과 같은 유명인사로부터 추가 지원을 끌어냈다.
그는 리버풀공연예술학교의 마스터 클래스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그때도 나를 사랑할 건가요
2004년 Paul McCartney 프라하에서
When I get old and losing my hair,
Many years from now
Will you still be sending me a Valentine,
Birthday greetings, bottle of wine
If I've been out till quarter to three
Would you lock the door
Will you still need me,
will you still feed me
When I'm sixty-four.
You'll be older too,
And if you say the word
I could stay with you.
I could be handy mending a fuse
When your lights have gone
You can knit a sweater by the fireside
Sunday mornings go for a ride
Doing the garden, digging the weeds,
Who could ask for more
Will you still need me,
will you still feed me
When I'm sixty-four.
Every summer
we can rent a cottage in the Isle of Wight,
if it's not too dear
We shall scrimp and save
Grandchildren on your knee
Vera, Chuck & Dave
Send me a postcard, drop me a line
Stating point of view
Indicate precisely what you mean to say
Yours sincerely, wasting away
Give me your answer,
fill in a form,
Mine for evermore,
Will you still need me,
will you still feed me
When I'm sixty-four.
지금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머리도 빠지고 나이가 점점 들어가도,
발렌타인 한 병, 생일, 카드를 보내주고,
와인도 보내주고. 그렇게 해주겠어요?
내가 세시 십오분 전까지 밖에 있으면,
당신, 문을 걸어 잠글껀가요?
내가 예순 네 살이나 되어도,
그때까지도 날 필요로 할껀가요.
그때까지도 나에게 먹을 것을 줄껀가요
당신도 나이 들어가겠죠.
그 말 한마디만 해주면..
나 당신과 함께 있겠어요.
퓨즈가 나가서 그 대 불이 꺼지면
그걸 잘 고치는 능숙한 사람이 될 수 있어요.
당신은 따뜻한 불가에서 스웨터를 짜구요,
일요일 아침이면 차 타고 놀러가죠.
정원을 손질하고, 잡초를 뽑아내구...
그 누가 이 이상의 것을 바라겠어요.
내가 예순 네 살이나 되어도,
그때까지도 날 필요로 할껀가요.
그때까지도 나에게 먹을 것을 줄껀가요
비싸지만 않으면
짜게 굴고 저축 열심히 해서
매년 여름마다
위그 섬에 오두막을 빌릴 수도 있어요.
베라, 척, 그리고 데이브 같은
손자 손녀들을 무릎에 앉혀 볼 수도 있구요.
엽서를 쓰거나 편지 좀 써주세요.
당신이 말하려 하는게 정확하게 뭔지,
어떤 관점인지 정확하게 써서요.
상투적인 문구는 치워 버리구요.
대답을 해보세요.
영원토록 내 사람이 되겠노라고,
그렇게 서류를 만들어 봐요.
내가 예순 네 살이나 되어도,
그때까지도 날 필요로 할껀가요.
그때까지도 나에게 먹을 것을 줄껀가요
폴 매카트니가 젊은 시절 그의 첫번째 부인인 린다와 함께 찍은 사진.
29년간 삶을 나눈 배우자였을 뿐 아니라 가장 믿을만한 음악적 동료이기도 했던 린다는 폴에게 있어서
'영원한 사랑'이었다. 그런 그녀를 폴은 8년 전 암으로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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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가 디자인 하는게 엄한데서 뚝 떨어진 능력은 아니구나. 폴메카트니 젊었을때보다 지금이 훨 귀여워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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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그림 괜춚네~~
폴 .. 폴;; 정말 예술적인 감각은 그 집안은 타고난듯 ㅠㅠ 에휴 ㅠㅠ 헤더 그여자 생각하면 한숨만 나오네요.. 린다여사가 일찍 돌아가시지만 않았어도 ; I will 들을때마다 제가 다 가슴이 아파요.이 노래랑 ㅠㅠ
블로그에 퍼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