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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和會(종교간 화합을 위한 모임) 會報
푸른 들 소리 [제 12권 9호](통권 203호)(2010년 6월 14일)
배움은 최선의 정신요법이다.
장기홍
카나다는 흔히 우리네 어머니들이 일이년간 자녀의 영어 학습을 위해 체재하는 나라이다. 남편을 고국에 두고 자녀의 공부를 위해 타향살이를 하는 소위 ‘기러기 부부’는 아마도 지구상에서 한국인들 밖에는 없으리라. 고독을 못 이겨 남편들은 자살도 한다.
배움을 위해 그렇게 목숨을 거는 한편에 그것과는 정반대되는 판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이번 나는 교포가 경영하는 카나다의 관광회사에 몸을 맡겼다가 그런 것을 경험했다. 토론토에서 출발하여 퀘벡주 몇 곳을 2박3일 일주하는 관광코스는 역사 공부가 되는 코스인데 가이드는 승객들의 호응이 없다는 핑계로 관광해설을 중도에 뚝 그치고 가이드 노릇을 포기하고 마는 것이었다.
동포 손님들은 놀자 판을 벌여야 좋아한다고 깨달은 가이드 같았다. 관광객의 다수는 유학생들이었는데 가이드가 제대로 했더라면 얼마나 공부가 많이 되었겠나 싶어 애석했다. 토론토에 돌아와 들으니 다른 어떤 한국인 회사의 가이드는 정말로 가이드 역할을 잘 하더라 한다. 그런데 그런 회사도 차츰 승객의 질이 가이드를 저하시켜 악화가 양화를 도태하듯 된다고 한다.
요즘은 전대미문의 ‘관광의 시대’이다. 그것이 중요한 평생교육의 한 과정이 되었다. 그러니 가이드는 손님 핑계를 하면 안 된다. 손님들은 여행객이기 때문에 밤낮이 바뀌는 등 피곤하여 졸기가 쉽다. 그러나 가이드의 말에 귀 기울이는 손님도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일본이나 서구에서 관광단에 끼어본 경험으로는 선진국 가이드들은 손님의 반응을 따지지 않고 한결 같이 자기 할 일과 할 말을 다 하고 마친다. 자기 책임을 다 하게 관광해설의 계획이 짜여 있는 것이다.
나는 귀로에 마이크를 빌어 “유모러스하게 사는 우리네 생활태도도 좋으나 배움에 진지한 선진 민족들을 따라가자면 좀 더 공부를 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박수를 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가이드는 묵묵부답이었다. 관광을 마치고 가이드에게 다가가 수고했다고 인사했더니 그는 마지못해 악수에 응할 뿐이었다. 그의 태도가 괘씸했으나 외국에서 고생하는 동포들이라 생각하니 측은했다.
그러나 민족은 공동책임이요 운명공동체이므로 서로 일깨울 필요가 있다. 우리 교포를 보면 대개 남의 아래서 몸으로 봉사하는 일에 종사한다. 노예생활에 가깝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모양만 다를 뿐 투쟁이 있고 경쟁이 있고 노예제도가 있다. 배움에 달인들이 되어 두뇌를 써서 사는 계층으로 차츰 바뀌어야 함은 물론이다.
카나다는 프랑스의 땅이 될 번했다. 프랑스 사람들의 식민지가 다 된 것 같았었는데 그만 영국이 그것을 빼앗았다. 미국이 독립하자 북미를 모두 합쳐 온통 미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북미대륙은 미국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은 카나다를 독립시킴으로써 현재와 같이 북미주는 미국과 카나다의 땅이 된 것이다. 북미가 힘의 균형의 산물이듯이 늘 결과는 힘으로 결정된다. 앞으로도 실력으로 판가름이 난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서로 배움을 장려하여 (겨레가) 실력을 기르자. 과중한 과외공부를 시키면 못쓰게 된다. 밤늦게 까지 학교에 잡아두어 지옥살이를 시키면 안된다. 순리에서 벗어나면 정신에 이상이 온다. 문명이 제멋대로 치달아 요즘은 사람들이 제 정신이 아니다. 바로잡느라 정신치료를 받는다고 야단이다. 음악이나 미술을 요즘은 치료라 간주한다. 바른 지식과 이성을 갈고 닦는 것이 최상의 치료이다. 순리대로 공부하는 것은 그 자체가 치료의 효과가 있다. 바른 지식이 몸에 배면 정신이 바로 된다. 지성(知性)을 기르는 것이 상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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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다 기행 (속)
장기홍
이번 세인트로렌스강을 따른 버스관광의 동승자는 모두 47명이었다. 10년 전에 주문 제작되었다는 우리 관광버스는 아예 안전띠가 없다. 지금은 안전띠를 안 매면 벌금이 170불(한화 17만원)이라는데 이 차는 그것과 모순된다. 그 벌금은 근래 정해진 것이고 이 버스는 그전에 만든 것이기 때문에 면제된다고 한다. 버스는 안에 변소가 있으나 가이드는 변소를 가급 사용하지 말아 달라하여 불편했다. 가이드는 손님의 반응이 없다는 이유로 관광설명을 몇 번 중단하더니 그만 두고 말았다. 나는 가이드에게 ‘남의 눈치를 보지 말고 자기 걸음을 걸어가면 된다’고 말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고 이번 관광은 가이드를 잘못만나 잡치고 말았다. 승객의 반은 학생들이었는데 가이드는 학생들이 승객의 전부인 양 반말을 하고 통솔 지배하려들었다. 그는 숭객을 장악하는 데만 열중했다. 그는 우리가 내려 변소를 이용한 가게에서 사과파이를 몇 사들고 들어오더니 승객들에게 코미디 식으로 일이삼등을 뽑아 시상식을 하는 등, 손님들을 놀리는 식이었다. 우리 가이드는 열등감이 있는, 심리에 문제가 있는 사람인지 손님들을 휘어잡고 복종시키기에만 급급하다. 그래놓고는 손님들 반응이 없어 재미가 없다 핑계하고 뚝 그치기를 잘 한다. 귀로에는 도로공사가 있어 우회하느라 시간이 많아 늦어지고 말았다. 마중 나올 사람들과 연락하기 위해 나그네인 우리는 가이드의 전화를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가이드는 세 사람에게만 전화를 빌려 주겠다 하여 선착순으로 손을 들라 한다. 손을 먼저 드는 사람 순으로 일이삼등을 매겨 전화를 빌려주겠다는 것이다. 이는 손님들에 대한 정중한 태도가 아니다. 그는 전직이 식당경영이었다고 하는데 관광회사의 경영자는 가이드의 교육적 중요성을 더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관광사업은 시민교육을 위해 더 없이 좋은 기회이다. 평행교육을 위한 가이드의 역할은 크다.
이번의 내 여행을 회고할 때 빠뜨릴 수 없는 화제 하나는 토론토의 어느 교회에 갔던 일이다. 우리 중학교의 대선배이신 김박사님의 인도로 주일날 교회에 나갔는데 나를 알아본 담임목사가 인사를 하며 자기가 연세대에서 내 강의를 한학기간 들었다고 한다. 나는 1970년대 중엽에 연세대에 출강을 한 일이 있는데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은사가 나를 연세대로 이끌었으면 하여 그 전초작전으로 내게 출강을 부탁한 것이었다.
나는 프린스턴대학에서 1976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 전후한 시기였다. 내가 연세대 교정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당시 연세대에서 인사권을 쥐고 있던 물리학 교수 한분이 내게 다가와 악수를 청하게 되었다. 나는 마침 양식을 하던 중 오른 손은 나이프를 왼 손은 포크를 쥐고 있었으므로 옳게 대응을 못하였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면 얼른 일어서서 손을 털고 그와 인사를 나누었을 것이나 엉거주춤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나는 꼭 연세대에 옮길 결심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은사의 권유로 출강을 하고 있었던 터이므로 눈치가 빠를 필요도 없었던 것 같다. 여하간 인사문제는 그것으로 끝이 났고 재론되지 않았다. 그는 나를 거만하다고 보는 오해를 하고 말았음에 틀림없다. 나는 일생 그런 오해를 흔히 받고 살아왔다.
여하간 그때 청강생이던 지질학 대학원생이 지금은 목사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나는 특별한 감흥으로 그의 설교를 들었는데, 마침 어머니날 주일이었으므로 그는 생태계 위기와 환경문제를 가지고 어머니날 기념설교를 했다. 예배가 끝날 무렵 나는 앞으로 나아가 목사의 양해를 얻어 교우들을 향해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마지막 역사책을 쓰면서 책제목을 ‘어머니 지구’라 했다”고 거들었다. 인류가 그 아들이란 뜻에서 어머니라고도 할 수 있지만 어머니 대신 하느님이라 해도 말이 된다고 하면서 인생과 역사는 하느님이 누구인가 하고 찾아가는 과정이라 했다. 이것이 동기가 되어 목사는 나더러 수요일 오후에 교회에서 말을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나는 선(善)과 사랑에 관해 이야기했다.
나는 며칠전 토론토에서 겪은 선행(善行)의 장면에서 실마리를 이끌어 이야기를 전개했다. 며칠 전 점심식사 후 커피집 마당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날따라 바람이 세게 불어 내 모자가 날아갔다. 어느 초로의 신사는 내 모자를 주워주려고 한없이 따라가는데 모자는 계속 굴러가는 것이었다. 내가 그 뒤를 따라 갔으나 그는 꼭 주워주겠다는 결심으로 달려가다가 결국 모자를 주워주었다. 나는 고맙다, 친절에 감사한다고 말은 했지만 그의 마음 바닥에 있는 “기회만 있으면 무슨 조그만 좋은 일이라도 하겠다”는 마음가짐 곧 선의(善意)를 엿보고 감격했다고 청중을 향해 말했다. 하느님은 선과 함께 악도 만들어 선악의 연출이 되게 점지한 고약한 하느님이지만 예수는 아버지의 흠을 일신에 덮어쓰고 무조건적 사랑을 주장하고 실천했다는 점에서 하느님보다 위대하다고도 말해보았다.
내 담화 도중 어느 교우는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실천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자기는 실천을 못하여 자책한다고 했다. 거기 대해 나는 “당신은 자책이라도 하지만 나는 자책도 않고 말만 하니 뻔뻔스럽다”고 스스로 흉을 보았다. 그러나 진정한 이론 곧 사상은 그 나름의 실천이며 실천 이상이다. 권선징악은 아무리 선전해도 부족하다. 우리 민족은 제 나름의 사상이 없어 결격이었다. 실천가는 허다하다. 그러나 굵은 사상의 주인공들을 낳지 못한 것은 우리 겨레의 결점이다. 사상은 고귀하고 훌륭한 사상의 반복 역설은 늘 필요하다. 나는 이날 우리가 신을 어떻다고 보아야 할지에 관해 나의 사상을 이야기했다. 내장(內裝)된 선악의 짝이 서로 작용, 필요, 요청하며 자동적으로 일이 되어가도록 세상은 그렇게 창조되어 있고 창조되어간다고 말했다. 그 창조 자체가 하느님이다. 뜻이 전달되기를 바라지만 별로 기대는 할 수 없다. 전달이 되려면 화자와 청중이 근사해야 하는데 그것은 기대할 수 없다. 나는 니체가 그랬던 것처럼 대중에게 기대를 걸지 않는 편이다.
한 시간 이상 말한 뒤 질문에 답하면서 나는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의 공로를 긍정적으로 말해버렸다. 모두들 작별을 고한 뒤였는데, 교포 한분이 다가와 자기는 장면 정권 하의 실무자였다고 하면서 장면정권을 그대로 두었더라면 박정희보다 더 잘 했을 것이니 내 견해가 못마땅하다고 했다.
김형석 교수님과의 인연 -Ⅰ
강병조
고(故) 김형석 교수님을 모르시는 분이 아마 많을 것 같다. 돌아 가신지가 벌써 24년이나 되었으니 젊은 층에서는 모르는 것도 당연하리라 생각한다. 필자가 의과대학 재직 시 함석헌 선생님을 아느냐고 물어보면 아는 학생들이 거의 없었다. 정말 격세지감을 느꼈었다.
김형석 교수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셨는지를 아는 것이 독자들에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오늘 글을 쓴다.
필자는 1962년도에 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의예과 출석부는 가나다순으로 되어있었다. 영어 교과서는 <리더스다이제스트> 이었다. 첫 영어 수업에 김형석 교수님이 출석을 다 부르시고 나서, 서론도 없이 막 바로 1번인 필자에게 다이제스트 해석을 하라고 하셨다. 마침 예습을 해 갔던 터라 자신 있게 읽고 해석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학생들이 폭소를 했다. "cocktail party"를 "닭 꼬리 파티"라고 번역했기 때문이다. 당시 필자는 "cocktail party"가 무엇인지 몰랐다. "cocktail"을 영한사전에서 찾아보니 "닭 꼬리"로 되어있어서 자신 있게 번역했던 터였다. 그러자 김 교수님이 학생들을 진정시키고는 필자를 칭찬하여 주셨다. 철저하게 번역을 잘했다는 것이었다.
김 교수님은 강의 시간 중에 영어만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됨을 가르치셨고, 도덕과 정의, 그리고 종교도 가르치셨다. 제 3공화국의 독제정권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바른 소리를 하셨고, 일간지에 투고도 하셨다. 별명이 <고추 영감> 이었다. 감히 아무도 바른 소리를 할 수 없었던 그런 시기에 용감하게 목숨을 걸고 직언하시는 것을 보고 우리 제자들은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내며 존경하였다.
자택에서 가르치시는 <리더스 다이제스트> 야학 수업도 몇 달 들었다. 거기서도 대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시국에 대해서 바른 말씀을 많이 하셨다. 속으로 위태위태한 마음도 많이 느꼈다. 이 야학에서 나오는 돈은(수 억 원) 모두 가난한 학생들의 장학금이나 불우 이웃 진료비, 나환자촌 정착 기금, 시골 교회 건립비 등에 다 쓰셨다. 정부에서도 이 불법 야학을 폐쇄시키지 못 한 것은 자선 사업이 목적이었고 실제 그렇게 실천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필자가 결혼 후에 알게 되었지만, 김 교수님의 첫째 사위는 필자와 고등학교 동기 동창이었다. 김 교수님의 아드님은 필자의 후배인 의사이다. 며느리는 우리 집 사람과 고등학교 동기동창으로서 아주 가까운 사이이다. 이리 저리 얽힌 인연 속에서 김 교수님을 가까이서 바라보며 한 동안 지냈다.
삼덕동 자택에서 경북대학교까지 군화를 신고 걸어 다니시는 모습을 자주 뵈었다. 겸직을 금한다는 대학교의 방침에 따라 교수직을 포기하시고 야학 일은 계속해서 자선사업을 계속하신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김 교수님의 며느님의 말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김 교수님은 야학에서 번 돈은 "따님의 피아노" 한 대 사준 것 말고는 전혀 가정에 보태지 않았다고 한다. 정말 고추 영감이었다. 속옷이 다 떨어지면 기워서 입고 다니셨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김 교수님(개신교 장로)이 자기가 다니시는 교회에서 <이단>으로 몰려서 쫓겨나셨다는 소문을 들었다. 종교관이 다른 신도들과 틀리는 진보적인 입장이라는 것이 이유였다고 한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김 교수님이 별세하셨다는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들었다. 언제 어떻게 돌아 가셨는지도 몰랐다.
며칠 전 우리 <종교간 화합을 위한 모임>에서 장기홍 회장님이 저에게 김 교수님의 유고집을 보여주셨다. 정말 귀한 글들을 접하게 되었다. 필자도 들어보지 못 한 많은 말씀들이 있었다. 여기서 전부를 소개할 수는 없다.
제자들이나 후학들이 <김성혁 교수님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종교관>이라는 세미나라도 개최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막상 주최나 주관할 주체가 없다.
간장을 다 마셔보지 않고 손가락으로 조금만 찍어 먹어보아도 간장 맛을 알 수 있듯이, 여기서는 김 교수님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종교관을 맛만 보이고자 한다.
I. 김성혁 교수님의 약력
1916년 11월 6일 : 평남 대동군 시족면 건지리 494번지 (일명 담바위골)에서 김정서씨의
3대 독자로 출생.
1938년 : 평양 광성 고등보통학교 졸업.
1938년 ~ 1942년 : 전액 장학생으로 동경대 외국어대학 유학.
1943년 : 평남 안주고보에서 교편생활하심. 반일분자로 고발되어 43년 가을부터 44년 봄까
지 안주경찰서에 투옥.
1946년 : 학교 내 기독학생 써클 지도교사로 활동 중 반공주의자라는 이유로 체포됨.
1947년 10월 상순 (추석 3일 후) : 월남.
1947년 11월 ~ 1948년 3월 중순 : 서울 중동고에서 교편생활.
1948년 3월 18일 : 경북대학교 교수로 강의 시작.
1960년 4월 26일 : 4.19 학생의거를 지지하는 경북대 교수 입장선언문 초안 작성 및 발표.
1949년 ~ 1984년 2월 1일 자택에서 야학 실시.
1977년 4월 25일 : 야학실시를 교수 겸직이라는 당국의 해석으로 경북대 교수직을 자진 사
퇴. 시간강사로 계속 강의.
1985년 6월 18일 : 시간강사 해직.
1986년 11월 12일 오전 11시 5분 영면.
II. 김형석 교수님의 사상.
<한-일 관계는 어떻게 하려는가? (여야 지도층 제위 귀하)>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살해한 사실 하나를 두고 생각해보자. 우리 측에서는 애국적 거사로 높이 평가하고 "안 의사" 대접을 하지만 일본 측에서는 테러행위로 보고, 안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볼 뿐이다. 과거 불행했던 한일 관계에 있어서 이런 중대한 동일 사건 하나를 보는 눈이 그들과 우리가 극과 극으로 다르다. 일본이 안 의사를 테러리스트 정도로 취급하는 것이 과연 역사 왜곡이냐는 문제를 다루기 전에 우리가 일본이었다면 우리도 그런 태도를 취하였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앞으로는 "역사 왜곡"이라는 비난을 하기에 앞서 "서로의 입장이 근본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여유 있는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2차대전전까지만 해도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는 일을 국제 도의상 그렇게 크게 범죄시 하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 고구려가 국경을 흑룡강까지 넓혔다는 역사 이야기를 듣고 한민족의 긍지를 느꼈다. 임진왜란이 완전히 뒤바뀌어 우리 군대가 일본에 상륙해 북해도까지 점령하고 예쁘장한 일본계집들을 모조리 잡아다 관비로 부려먹었다면 우리 후예들은 이런 역사를 배울 때 "우리의 군대가 그렇게도 용감했고 국운이 충천했던 것"을 자랑으로 생각할 것이지 남의 나라를 침략한 잔인무도한 백성이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고 침략을 당한 나라를 무기력한 나약한 나라로 여겼을 것이다. 남의 나라 영토를 침략하는 것을 범죄행위로 확정짓게 된 것은 2차 대전이 끝난 후부터였다. (소련은 2차 대전 후 에도 아프가니스탄을 뻔뻔스럽게도 무력 침략했고, 중공도 티벳을 그렇게 했다. 중공은 어떻게 일본 문부상의 망언을 규탄할 수 있을까!)
한일 간의 불행했던 사실에 관해서는 동일 사건에 대한 가치평가가 양국 간에 대단히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서로가 오해를 일으킬 말은, 서로 삼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며 혹시 경솔한 발언을 해, 상대편의 감정을 건드리는 일이 있어도, 망언이라고 규탄하기 보다는 좀 너그러운 반응을 보일 수는 없을까! 내가 이와 같이 말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앞으로 동북아에 있어서 한-미-일 세 나라가 해야 할 일이 너무도 크고 중대하기 때문이다.! 우리 세 나라는 민주우방으로서 영원히 결속해서 공산주의와 대항해야 한다! 이 큰 목적의식 앞에 사소한 감정은 너그럽게 넘겨야 한다.
나는 1941년 일본 동경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2년 후 왜경 고등계에 의해 체포됐다. 유치장 생활 4개월 후 검사국에서 풀려났으나, 그들 통치 하에서는 나는 설 땅을 완전히 읽게 되어 평양 북쪽 시골 고향에 와서 땅을 파며 농사짓기를 2년, 8.15해방을 맞았다. 나에게 있어서 8.15해방의 기쁨은 몇 배나 더 큰 것이었다. 그러나 평양에서 만 2년 동안 (1947년 9월까지) 내가 겪은 북한 공산당의 만행 (기상천외한 만행들)은 나로 하여금 "공산당 빨갱이들은 인간이 아니다"는 결론을 짓게 만들었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와 양심의 울림도 같다. 그러나 북한은 양심을 아주 무시해 버리는 동물 이하의 것들이다. 일제치하에서 살겠느냐, 북괴치하에서 살겠느냐 양자택일 하라면 나는 전자를 택하겠다. 북괴가 6.25남침을 했을 때 미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다 공산권 하에 들어가고 말았을 것이다. 미군이 우리를 도우려 올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민주국가인 미국의 우방인 일본이 우리 바로 옆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일 민주 우방인 일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미국은 한국을 북괴남침으로부터 지켜 줄 생각은 꿈에도 못했을 것이다. 민주 일본이 우리 옆에 존재했기 때문에 우리는 적화통일을 면할 수가 있었다는 이 고마운 사실을 잊지 말고, 앞으로 한 미 일 세 나라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공동이념 하에서 더욱 굳게 단결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정치, 문화, 경제 모든 면에서 일본을 앞서는 것만이 그들의 역사왜곡을 장난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추신. 민정당이 미친 듯이 해대는 현실 왜곡이 일본인들의 역사왜곡, 망언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다. (198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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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지 시 항 : 2010년 6월 모임
3木 모임 -- 2010년 6월 17일 (목) 7 시
장소: 경북대학교병원 606병동 회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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