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대법원, 1974년 선포한 '
긴급조치 1호' 위헌 판결
1974년 선포된 대통령 긴급조치 1호가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침해해'위헌'이
라는 대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차한성 대법관)는
16일 유신헌법을 비판하고 정부 정책을비난하
는 유언비어를 날조혐의(대통령긴급조치ㆍ
반공법 위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한 오종상(69)씨의 재심 사건을 파기자판,
대법관 전원 일치 의견으로 일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모든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 1430년 오늘,
조선 세종 12년 관노에게 산후 100일간 복무 면제를 상정소가
건의하자 허락/
우리는 2012년에 임신한 여성근로자에게 산전, 산후
90일의 휴가제를 실시했는데 이미 584년 전에 관청에서 근무하는 여자 노비에게 산전 30일, 산후 100일의 휴가를 주었다. 또한 출산한 관노의 남편에게도 30일간의 육아휴가를 주었다
▶ 2019년 현재는,
출산율 0.98명 '최악 저출산'…
韓, 세계 첫 0명대 국가 됐다
통계청이 27일 발표한 ‘2018년 인구동향조사 출생ㆍ사망통계 잠정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98명으로 출생통계 작성(1970년)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여성이 가임기간(15~49세)에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출생아 수가 한명도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출산율 하락 속도도 빠르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1971년 4.54명을 정점으로 1987년 1.53명까지 떨어졌다. 1990년대 초반에는 1.7명 수준으로 잠시 늘었지만 이후 다시 빠르게 줄기 시작해 2017년 1.05명으로 역대 최저를 기록한 바 있다.
보통 인구유지에 필요한 합계출산율을 2.1명으로 본다. 하지만 한국은 이의 절반에도 못미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서는 평균(1.68명)은커녕 초(超)저출산 기준(1.3명)에도 못 미치는 압도적인 꼴찌다.
사실상 세계 유일 '출산율 0명대' 국가
‘출산율 0명대’는 1992년 옛 소련 해체, 1990년 독일 통일 등 체제 붕괴ㆍ급변 때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마카오ㆍ싱가포르 등이 1명 미만을 기록하고 있지만, 이들은 한국과 동일 선상에서 비교가 힘든 도시 국가다. 사실상 한국이 외부 충격이 없었는데 합계출산율 1명 선이 무너지는 세계 유일 국가가 되는 것이다.
김진 통계청 인구동향과장은 "출산이 많이 이뤄지는 연령대가 30대 초반인데 이 인구가 2018년 기준 전년 대비 5% 감소했고, 혼인 건수도 지난해까지 7년 연속 감소하고 있어 출생아 수도 함께 줄었다"며 "이런 출산율로는 앞으로 인구감소 속도가 굉장히 빨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출생아 수는 32만6900 명으로 전년 대비 3만900명(-8.6%)이 줄었다. 이에 따라 조(粗)출생률(인구 100명당 출생아 수)은 6.4명으로 0.6명 감소했다. 구체적으로 해당 연령 여성 인구 1000명당 출생아 수를 따지는 모(母)의 연령별 출생율은 40대를 제외한 모든 연령에서 감소했다. 20대 후반이 47.9명에서 41.0명으로 가장 크게 줄었다. 주 출산 연령인 30대 초반에서도 97.7명에서 91.4명으로 낮아졌다.
20대 후반 출산율이 30대 후반 출산율보다 낮아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안정된 일자리를 찾을 때까지 결혼을 미루는 풍조로 만혼(晩婚)이 일반화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분석된다. 평균 출산연령은 32.8세로 전년보다 0.2세 상승했다. 첫째 아이는 31.9세, 둘째 아이 33.6세, 셋째 아이 35.1세였다.
인구 감소 시점 앞당겨질 듯
이에 따라 한국의 인구 감소 시점도 빨라질 전망이다. 통계청은 2016년 장래인구 추계에서 한국의 총인구 감소 시점을 출산율 저위 추계(최소 인구 가정) 기준으로 2028년이 될 것으로 공표했었다. 하지만 최근 출산율이 예상보다 빠르게 떨어지면서 총인구 감소 시점이 이보다 앞당겨질 가능성이 크다. 통계청은 장래인구 예측 모형을 개선해 이런 내용의 장래인구 특별추계 결과를 다음 달 발표할 예정이다.
강신욱 통계청장은 최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저출산 고령화가 예측보다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한국의 총인구 감소 시점이 앞당겨질 수 있다”며 “급격한 인구구조 변화로 인해 일자리ㆍ복지ㆍ연금ㆍ교육ㆍ주택 등 주요정책에 파급효과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이런 저출산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우선 20~30대 초반 인구 자체가 줄어들었다. 여기에 청년들의 혼인 연령이 갈수록 늦어지고 있다. 취업이 되지 않고, 주거비 부담 등으로 결혼 자체를 회피하는 것이다. 결혼을 해도 출산을 미루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가 많아지고 있는 것도 주요 원인이다. 휴직하기가 쉽지 않고, 양육비ㆍ교육비 등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것이 부담을 주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쉽게 말해 사회ㆍ경제적으로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경제 성장 및 고용에 악영향
문제는 이런 인구 감소가 우리 경제ㆍ사회 근간을 흔들 수 있다는 점이다. 생산가능인구가 줄면서 경제 활력이 떨어지고, 고령화에 따른 복지 부담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 경제 성장과 내수 및 고용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한국은행은 생산가능인구의 감소와 인구 고령화 등 인구구조 변화로 잠재성장률이 2000~2015년 연평균 3.9%에서 2016~2025년에는 1.9%, 2026~2035년에는 0.4%까지 추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국회예산정책처는 노동의 성장기여도가 1980년대 연평균 2.0%에서 2010년대에는 0.6%포인트로 떨어지더니, 2020년대에 -0.7%포인트로 마이너스로 돌아서고, 2030년대에는 -1.0%포인트로 확대할 것으로 전망했다.
해법을 찾긴 쉽지 않다. 박영범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고착화된 결혼 기피 현상을 깨는 게 중요한데 일자리 확대, 교육제도 개선, 일하는 여성에 대한 배려, 육아 혜택 확대 등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다 바뀌어야 한다”며 “범정부 차원의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폐쇄적인 일본도 노동력 확충을 위해 적극적으로 이민을 받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다”면서 “한국도 외국인 노동자, 이민자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받아들일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라고 덧붙였다.
손해용 기자 sohn.yong@joongang.co.kr
▶2011년 고추장 떡볶이의 원조
마복림씨 91세로 별세
고추장 떡볶이의 원조 마복림 91세로 사망(1920년 전남
광주에서 출생~)서울로 올라와 남편과 함께 신당동에서 미군물품 보따리 장사를 시작했다. 1953년 한 중국집에서 자장면 그릇에 가래떡을 빠뜨렸다가 자장소스 묻은 떡을 맛보고는 곧바로 ‘마복림식 떡볶이’ 가게를 냈다. 당시 연탄불 위에 양철냄비를 올리고 고추장과 춘장(자장의 원재료)을 풀어 떡을 넣어 판 것이 오늘날 신당동 떡볶이의 진짜 원조다.
▶2010년 대법원, 1974년 선포한 '
긴급조치 1호' 위헌 판결
▶2009년 멕시코 '마약왕' 아르투로
벨트란 레이바 사살
▶2008년 스리랑카 정부군 반군과
교전 120명 사살
▶2008년 '십대들의 쪽지'
. 발행 김형모씨 별세
▶2002년 세계최초로
비브리오균 유전자 완전해독
콜레라를 일으키는 비브리오 균의
현미경 사진. / 미 CDC 제공
▶1999년 LG화학 퀴놀렌계 항생제
`팩티브(factive)` 신약 발표회
▶1998년 이소정양,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 `미스 사이공`에 첫 한국인 주역
'미스사이공`에서 열연하는 이소정씨
▶1997년 환율변동제한폭 철폐
▶1997년 위안부 참상 첫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 별세
▶1995년 축구 응원단
‘붉은 악마(Red Devils)’ 탄생
1995년 12월 16일 오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응원단 ‘붉은 악마(Red Devils)’ 의 ‘전설’ 이 시작됐다.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 ‘칸타타’ 에서였다. PC통신 하이텔의 10여개 ‘축구동호회’ 운영자 10여명은 이날 축구 응원문화의 개선을 위한 회의를 갖고 이른바 `칸타타 선언`을 채택했다.
선언 참가자들은 30∼40대 직장인과 교사 등이 주축이었다. 이들은 평균 관중 1만명을 넘기지 못하고 비인기 스포츠로 전락한 프로축구의 ‘복권(復權)’ 을 꿈꾸며 모인 동호인 집단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후 국가대표팀 경기마다 300∼400명 단위로 한국팀 유니폼을 입고 자신들을 ‘서포터’ 라고 부르는 ‘단관’(단체관람:붉은 악마들끼리 사용하는 말임) 모임이 등장했다.
1996년 여름 한국―중국 국가대표팀의 축구경기가 열린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3만여명의 관중들 틈새에서 300여명이 될까말까한 일단의 ‘무리’ 가 붉은 색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섬처럼 떠있었다. 당시엔 ‘붉은 악마’ 란 이름도, ‘대∼한민국’ 이라는 구호도 없었다. 수만명 관중들 틈에서 이들의 존재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목놓아 ‘아리랑’ 과 ‘애국가’ 를 불렀다. 이날이 PC통신에서 한국팀 응원단을 모은다는 공고를 보고 ‘붉은 악마’ 가 처음 국가대표팀 경기에 나간 날이었다.
‘붉은 악마’ 라는 이름은 조직 탄생 1년 반만에 지어졌다. 처음 이름은 ‘그레이트 한국 서포터스’ 였다. 그러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한 해 앞둔 1997년 5월 1일 하이텔 축구동호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한국 대표팀을 만들겠다’ 는 공지와 함께 명칭을 공모했다. ‘레드 일레븐’ ‘레드 맥스’ ‘꽹과리 부대’ ‘쿨리건’ ‘레드 워리어즈’ 등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름에 ‘레드’ 가 들어가는 것이 가장 큰 공통점이었고, 그 중 1983년 멕시코청소년축구대회 이후 우리 대표팀의 별명으로 사용되곤 했던 ‘붉은 악마’ 에 대한 호응이 가장 컸다.
1997년 8월 ‘붉은 악마’ 가 한국 대표팀 서포터의 공식 이름으로 채택됐다. 붉은 악마를 상징하는 ‘치우천왕(蚩尤天王)’ 상은 기원전 2707년부터 109년간 중원의 배달국가를 다스린 인물로 전쟁에서 반드시 이겼다는 전설의 주인공. ‘붉은 악마’ 는 2002 한일월드컵을 통해 국제적 브랜드로 떠올라 세계인의 주목을 끌었다.
▶1996년 서울고법 형사1부,
12.12 및 5.18사건 항소심에서
전두환 전대통령에게 무기징역,
노태우 전대통령에게 징역 17년을
각각 선고
▶1994년 국회, WTO가입
비준동의안 통과
▶1993년 록히드사건의 중심인물인
다나카 가쿠에이 사망
▶1990년 해방신학자 아리스티드,
아이티 대통령에 당선
▶1988년 강영훈 제21대 국무총리 취임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 실시,
노태우 후보 당선
당선이 확정된 노태우 민정당 총재가
당원들의 환영을 받으며 당사에 들어서고 있다.
▶1984년 여수 돌산 연육교 개통
▶1984년</b> 프랑스, 북한통상대표부의
일반대표부 격상 시인
▶1982년 정부, 복역중인 김대중의
서울대학병원 이송과 도미 허용 발표
▶1981년 폴란드 교회,
계엄당국의 군사탄압 반대 선언
▶1980년 유엔, 팔레스타인해방기구
(PLO) 독립창설 촉구하는 결의안 채택
▶1978년 카터 미국 대통령, 중국과
수교하고 대만과 단교한다고 발표
▶1977년 국회, 12해리 영해법안 통과
국회에서 ‘12해리영해법안’이 통과됐다. 이듬해 4월30일 발효된 이 영해법에 따라 한국의 영해 범위는 12해리로 확정됐다. 다만 국제 항행에 이용되는 대한 해협의 영해는 종전과 같이 3해리를 유지했다.
이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영해 면적을 계산해 보면 우리 국토 면적의 약 72%에 달하는 7만1000㎢정도에 달한다. 영해는 연안국이 영토 관할권에 준하는 배타적 관할권을 행사하는 해상 영역으로 영해 내에서 어업 등 자원을 독점할 수 있다.
이렇게 경제적 이익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종래 영해의 개념은 분분했고, 나라 간에 많은 갈등을 빚어 이에 대한 논의 작업이 오랫동안 전개돼 왔다.
한국이 정한 영해 범위는 국제적 논의 과정을 따라가는 것이면서도 국제 사회의 공식적 합의보다 한 발짝 앞선 것이다. 전통적 해양법을 성문화하려는 작업이 갖은 진통과 곡절 끝에 유엔 해양법 협약 마련이라는 결실을 맺은 것은 우리의 영해법 통과보다 5년 뒤인 1982년이었다.
이 협약은 모든 선박과 항공기의 무해(無害) 통행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연안국은 12해리 범위 안에서 영해의 폭을 결정할 권리를 갖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의 억지 주장도 결국 독도 자체가 탐나서가 아니라 자기 영토의 한계를 어디로 볼 것이냐에 따라 12해리의 범위가 확 달라지기 때문이다.
▶1975년 부주석 강생(康生) 사망
▶1975년 중국, 제5호 인공위성 발사
▶1969년 영국 하원, 사형폐지법안 통과
▶1965년 영국의 소설가
윌리엄 서머셋 몸 사망
▶1965년 국내 최초로
텔렉스 개통(400회선)
▶1963년 최고회의 해체
▶1960년 미국 민간여객기
뉴욕 상공서 충돌. 134명 사망
▶1959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발족
▶1958년 콜롬비아의 보고타시
대화재 93명 사망
▶1957년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정년 퇴임
▶1950년 ‘국민방위군 설치법’ 발효
국민방위군 설치법’에 의해 국민방위군
지게부대에 지원한 사람들이 3,4일씩
굶어가며 걸어서 대구훈련소에 도착해
줄지어 서 있는 모습
▶1950년 트루먼, 국가비상사태 선언
트루먼 미국 대통령
▶1949년 페루, 한국정부 승인
▶1947년 북한, 화폐개혁 실시
▶ 1946년맥아더원수,
극동군사령관에임명
▶1945년 미군정장관 러치 소장 임명
▶1945년 모스크바
삼상회의 시작(~25일)
독립 한국의 장래를 논의하기 위한 모스크바 삼상 회의가 시작되고
1945년 오늘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다.
모스크바 3상 회의로 불리는 이 회의에서 우리 나라의 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 등의 내용을 담은 모스크바 협정이 체결됐다.
우리 나라를 5년 동안 신탁통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내 정당들과 사회단체들은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좌익 세력은 이듬해인 1946년 1월부터 갑자기 신탁통치 찬성 입장으로 돌아섰다.
좌익 세력은 모스크바 협정을 우리나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국제적 합의로 받아들였다.
이후 우리나라는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익의 충돌로 극심한 국론분열을 겪게 됏다.
이듬해인 1946년 3월 20일 모스크바 협정에 따라 우리나라의 임시정부 수립방안을 협의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하지만 미소공동위원회는 우리나라 좌우익의 대립과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난항이 거듭됐다.
결국 1947년 7월 미소공동위원회는 임시정부의 수립이라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 사항을 실현하지 못한 채 결렬됐다.
▶1941년 세계최대 일본 전함
`대화(大和)` 진수
▶1920년 국제연맹총회,
상설 국제사법재판소규약 채택
▶1920년 중국 칸수 대지진으로
18만명 사망
▶1912년 발칸전쟁에 관한 1차
런던강화회의 개막(~1913.5.3)
▶1902년 독립운동가 유관순 출생
- 3.1 만세운동의 상징, 유관순
▶1901년 미국의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 출생
▶ 1598년 노량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 전사
이순신 [李舜臣, 1545~1598.12.16(음력 11.19)]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함으로써 7년을 끌어온 임진왜란도 사실상 파장 분위기였다. 전남 순천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한시바삐 조선에서 물러나고자 했으나 길목에는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버티고 있었다. 명나라 장군을 통해 퇴로를 열어보려 했지만 이순신의 반대로 이마저 어려워지자 고니시는 인근의 일본 수군에 도움을 요청, 500여척의 배를 긁어모았다.
남해와 하동 사이의 노량으로 적선들이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이 마지막 해전에 나선 것은 11월 18일(음력)이었다. 이날 밤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노량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500여척에 달하던 일본 함대는 불과 50여척 남짓만 살아남아 남해 쪽으로 도주했다. 이 해전으로 전쟁도 사실상 끝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전투, 그것도 승리가 확정된 전투 끝 무렵인 19일 새벽 갑자기 날아온 탄환이 이순신의 왼쪽 가슴에 꽂혔다. 이순신은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단 말을 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둔 것으로 알려진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무찌른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나를 넬슨에게 비기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기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ㆍ퇴각 왜군 전멸… 임진왜란 종지부
7년간 조선을 황폐화시킨 임진왜란(1592~98)에 정점을 찍은 결정적인 해전. 오늘날 경상남도 남해군 노량리와 하동군 노량리 사이의 좁고 물길이 거센 해협의 주도권을 놓고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전선 83척과 명나라 전선 63척이 일본의 500여 전선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당시 조선에 주둔하던 왜군은 명나라의 참전과 조선군의 활약으로 패전을 거듭하며 기세가 꺾인 상황이었다. 결정적으로 일본 통일 이후 15만 대군을 이끌고 한반도를 침략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다는 사실이 왜군 수뇌부 사이에 전파되면서 조선 정벌론은 갈수록 힘을 잃어갔다. 왜군은 퇴각을 모색했다.
이때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은 명나라군과 함께 노량 앞바다에서 왜군의 퇴로를 막기로 결정했다. 양민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약탈한 왜군이 또 언제 조선 땅을 노릴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한 명도 살려보낼 수는 없었다. 조선군은 순천왜성에 주둔해 있던 왜란의 선봉장 중 하나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와 순천 왜교에서 전투를 벌여 큰 전과를 올렸고, 궁지에 몰린 고니시는 사천과 고성에 주둔 중이던 왜군에 도움을 요청했다. 12월15일, 일본 수군 6만여명과 500여척 함선이 남은 군을 모아 퇴각하기 위해 노량으로 집결했다.
이튿날 새벽 4시, 이들의 진입을 예견해 이순신이 미리 매복시켜놓은 조선의 함선들이 일본 함선을 향해 맹렬하게 포를 쏘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일본 함선 50여척이 격파됐고 200여명의 왜군이 사망했다. 오전 8시, 아침 해가 노량 앞바다를 비췄을 때 일본군 전함은 이미 200척 이상이 완전히 파괴되고 150여척이 파손된 상태였다. 일본 수군은 150여척의 남은 배를 이끌고 서둘러 퇴각하기 시작했다. 조선과 명의 수군은 이들을 추격했으나, 이 과정에서 이순신은 관음포에서 일본군의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살아남아 일본에 귀환한 배는 겨우 50여척으로 알려졌다. 사망한 이들은 대부분 일반 병사들이었다. 왜군 지휘부는 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전쟁 후 일본의 권력지형은 크게 바뀌었다. 임진왜란에 불참하며 도요토미를 견제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열어 첫 쇼군(將軍)이 됐다. 전란 이후 조선과 관계개선을 꾀한 그는 화려하게 치장됐던 도요토미의 분묘를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폭파함으로서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에게 사후 책임을 물었다.
▶1568년 이황, `성학십도`를 지음
출처 네이버지식백과,솦츠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