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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 원문보기 글쓴이: 낙민
15~16세기 善山-金泉 지역 儒學者들의 교류와 朝鮮 性理學의 전개.pdf
15~16세기 善山-金泉 지역儒學者들의 교류와 朝鮮 性理學의 전개
김성우*
82)
[초록]
조선 성리학은 15세기 중․후반까지만 해도 경상도 선산지역의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교
육 활동을 통해 鄕學으로, 그리고 父子 간의 전승을 통해 家學으로 전수되고 있었다. 吉再
가 선산 출신 제자들을 중심으로 교육 활동을 전개하고, 그의 제자 金叔滋가 아들 金宗直과
金孟性을 훈육한 사례가 그런 경우였다. 學派 활동은 김종직이 제자 양성에 나서고 세를 결
집한 15세기 중․후반 이후 시작되었다. 향학․가학으로부터 학파로 분립되어 가던 15세기
중․후반은 선산을 중심으로 그 주변 지식인들이 성리학의 대열에 합류하는 과정이기도 했
다. 선산이 앞서 가고 주변 군현들이 따라가면서 학파 활동은 더욱 힘을 받았다.
선산의 감화를 받으면서 성리학의 확산에 크게 기여한 지역 가운데 한 곳이 오늘날 김천
시[개령, 김산, 지례]였다. 새로운 학문으로서의 성리학, 새로운 정치 지향으로서의 道學 정
치는 두 지역 지식인들이 긴밀하게 교류하고 또 전승하는 가운데 또 한층 더 강해졌다. 본고
는 15~16세기 조선 성리학의 발전 과정을 선산과 이웃 고을인 김천 지역 유학자들의 교류
와 전승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본 논문이다.
* 대구한의대 호텔관광학과 교수
1. 머리말
2. 조선시대 선산과 김천 지역의 지리적 친연성
3. 1400~1430년대 吉再의 교육 활동과 김천 지식인들과의 교류
4. 1450년대 개령 현감 金叔滋의 지방관 생활
5. 1450~1490년대 金宗直의 性理學 운동과 김천 유학자들
6, 1520~1540년대 朴英의 講學 활동과 김천 유학자들
7. 맺음말
목 차
48 지방사와 지방문화 18권 1호
[주제어] 조선 성리학, 道學, 道統 인식, 선산, 김천, 吉再, 金叔滋, 金宗直, 金宏弼,
朴英
1. 머리말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중반 李滉에 의해 정립된 조선 道學의 道
統 인식은 성리학의 계승 과정을 매우 명료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
가 있다. 그는 조선 성리학이 鄭夢周를 鼻祖로 하여, 吉再-金叔滋-金宗直
-金宏弼-趙光祖를 거쳐, 李彦迪과 자신에게 연결된다고 이해했다.1) 그런
데 조선 성리학의 도통 인식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淵源 관계에 있는
학자들이 지역적으로 매우 편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몽주로부터 이황에 이르는 8명의 학자 가운데 조광조를 제외한 나머지
7명은 모두 경상도 출신이었다. 이 점은 초기 성리학에 관한 한 경상도가 매
우 선진적인 지역이라는 점을 시사해 준다. 이언적과 이황을 제외하면 모두
선산이 고향이거나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는 점도 주목을 끄는 대목이다. 길
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이 그들이었다.2) 이런 사실은 조선 개국 이래 16
세기 전반까지 성리학에 관한 한 선산이 독보적 지역이었음을 웅변해준다.3)
1) 홍원식, 2013, 「여말선초 낙중 사림들의 ‘학통’과 ‘도통’」, ‘낙중학’의 원류 조선전기 도학파의 사
상, 계명대 출판부, 10~14쪽; 이수환, 「16세기 전반 영남 사림파의 동향과 동방오현 문묘종사」,
같은 책, 95~101쪽.
2) 김종직은 흔히 밀양이 고향으로, 김굉필은 현풍 출신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이런 관념은
父系의 고향과 출생지를 고향으로 간주하는 17세기 전반 이후의 인식일 뿐이다. 16세기 후반까지
도 사족들은 父鄕, 妻鄕, 外鄕을 비롯한 다양한 고향들이 있었고, 여러 곳에 거처를 두고 있었다.
김종직은 외향 밀양에서 태어났지만, 부향인 선산, 그리고 처향인 김산도 고향으로 인식하고 있었
다. 김굉필은 외향 현풍 이외에도 선산에 노비와 田庄이 있어서 자주 내왕했고, 이런 연고로 선산
사람으로 간주되기도 했다(김성우, 2008, 「15,16세기 士族層의 고향 인식과 거주지 선택 전략-慶
尙道 善山을 중심으로」, 역사학보 198, 40~47쪽).
3) 조선 초기 선산은 경상도 전체에서 사상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으로도 가장 선진적인
지역이었다. 이런 선진성은 1520~3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경상도 또한 조선 전체에서 사회경제적
으로 가장 앞선 지역이었다. 충청도와 경기도가 경상도의 선진성을 따라 잡은 시기는 17세가 중․
후반 이후였다(김성우, 2012, 조선시대 경상도의 권력 중심 이동-영남농법과 한국형 지역개발,
태학사, 360~3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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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성리학이 이 같이 극심하게 지역적으로 편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조선 인재의 절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절반이 一善[선산]
에 있다.”는 李重煥(1690~1752)의 언설이다.
이런 지역적 편중성은 역으로 15세기~16세기 초반까지 성리학이 경상도
선산을 벗어나기 어려웠음을 의미한다. 성리학이 선산을 벗어나 경주/안강
[이언적]과 안동/예안[이황]으로 확산되고 또 그곳에서 대학자가 출현한 시
기는 16세기 초․중반이었다.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전국으로 확산된 시기는
士林派가 정권을 장악한 1565년(명종 20) 이후였다. 그런 점에서 고려 후기
중국에서 유입된 새로운 유교사상인 성리학이 선산이라는 제한된 지역을 벗
어나 경상도로, 그리고 전국으로 확산되기까지는 무려 150~200년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되었던 셈이다.
성리학이 선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15세기 중반까지 성리학은 이
지역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교육 활동을 통해 鄕學으로, 그리고 父子 간의 전
승을 통해 家學으로 전수되고 있었다. 길재가 선산 출신 제자들을 대상으로
성리학을 교육시키고, 이곳 출신 김숙자가 아들 김종직과 김맹성[孫婦의 父]
을 훈육한 사례가 그런 경우였다. 學派 활동은 김종직이 제자 양성에 본격적
으로 나서고 세를 결집한 15세기 중․후반 이후 시작되었다. 그런 점에서 그
는 향학․가학과 학파의 미분립이라는 과도기적 양상을 일거에 극복한 최초
의 스승이자 宗匠이 되었다.
15세기 중반까지 선산에 머물러 있던 성리학은 15세기 중․후반 이후 경
상도의 일부 지역으로, 그리고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
다. 향학․가학으로부터 학파로 분립되어 가던 이 시기는 선산을 중심으로
그 주변 지식인들이 성리학의 대열에 합류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
서 주변 지식인들이 선산 유학자들에게 감화를 받아 성리학자로 변신하는 과
정은 조선시대 정치사상사의 발전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흥미 있는 주제
가 될 수 있다.
본고는 이런 문제의식 아래 선산과 바로 이웃한 김천 지역 지식인들의 활
동, 동향, 그리고 선산 출신 유학자들과의 교류 양상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50 지방사와 지방문화 18권 1호
본고는 특히 4개의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첫째, 길재의 교육 활동과
김천 지역 지식인들의 교류 양상, 둘째 김숙자의 개령 현감 부임과 그곳 지
식인들의 양성, 셋째 김종직의 김천 생활과 지역 지식인들과의 교류, 마지막
으로 선산에서 꽃피운 松堂學派의 성립 과정에서 김천 지식인들이 끼친 영
향 등이다. 이 연구가 15세기 중․후반까지 특정 지역에 기반 하여 전승되어
오던 성리학이라는 소수 학문이 16세기 중․후반 중앙 정계를 뒤흔드는 사
림파 활동이라는 거센 돌풍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
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2. 조선시대 선산과 김천 지역의 지리적 친연성
오늘날 김천시는 조선시대 김산군, 개령현, 지례현과 김천역 등 3개 읍,
1개 역을 통합하여 형성한 거대도시이다.4) 김산군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개령현이, 서쪽으로는 지례현이 각각 위치해 있다. 김산군은 소백산맥을 따
라 동북쪽으로는 경상도의 대읍 상주로,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의 대읍 청주
로 각각 연결되었다. 이곳 출신 관료학자 曺偉(1454~1503)는 “김산은 경상
도와 충청도가 갈리는 곳에 놓여 있어, 일본 사신들로 상경하는 자들과 우리
나라 사신으로 일본에 가는 자들로 청주를 경유하는 이라면 반드시 이곳을
지나간다. 이런 이유로 관에서 접대하는 번거로움이 상주와 맞먹는 실로 교
통의 요충지이다.”고 교통도시 김산을 잘 표현하고 있다.5) 이곳에 20개 역을
관할하는 김천역이 남쪽 10리에 설치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김산군과 선산부 사이에 위치한 개령현은 낙동강의 지류인 감천 연안에
자리 잡은 작은 현이다. 이곳은 넓은 평야를 굽이쳐 흘러가는 감천으로 인해
기름진 들판이 넓게 펼쳐진 곳이다. 東國輿地勝覽 「開寧縣」조에는 “현 경
4) 오늘날 김천시의 전체 면적은 1,009㎢로, 경북의 5%, 전국 1%에 각각 해당한다(金泉市史 編纂委
員會, 金泉市誌(상), 1999, 「제1편 지리」, 71~72쪽).
5) 新增東國輿地勝覽(1486년 간행, 1530년 增補), 「金山郡」, <東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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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에 9곳의 저수지[堤堰]가 설치되어 전답에 관개하는 탓에 水利가 가장 많
다.”며 농업에 우수한 자연환경을 특별히 부연설명하고 있다.6) 한편, 지례현
은 김산군의 서쪽 방면을 따라 크게 발달한 소백산맥에 접경한 작은 현이었
다. 험준한 소백산맥을 넘어 서쪽으로는 전라도 무주와 경계하고, 남쪽으로
는 거창, 동쪽으로는 성주와 각각 연결된다. 이런 지리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산골에 자리한 작은 현에 불과했다. 조선시대 선산과
김천 지역의 지형 조건을 보여주
는 지도가 <그림 1>이다.
오늘날 김천시를 형성하고 있는
3개 읍은 험준한 산과 고개, 강이
나 하천이 중간 중간에 가로놓여
있는 탓에 교통이 좋지 않았다. 이
들 3개 읍을 지역적으로 통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감천
이었다. 감천은 대덕산(동쪽, 지례,
1,290m), 우두령(남쪽, 거창, 575m),
그리고 부항산(서쪽, 김산, 1,023m)
에서 각각 발원하여 지례 → 김산
→ 개령을 거쳐 선산에서 낙동강
본류와 합류하는 낙동강의 지류였
다. 감천은 지례 현청에서는 동쪽
1리, 김산 군청에서는 동남쪽 11리, 개령 현청에서는 남쪽 2리에 위치하면서
3개 군현의 중심을 지나갔다.7)
조선시대 김천 지역은 동쪽에 위치한 선산부와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 선
산과의 연관성 또한 감천이 선산 중심부를 지나 보천탄에서 낙동강과 합류한
다는 지리적 조건과 관련되어 있다. 선산 관아에서 감천까지는 남쪽 4리에
6) 신증동국여지승람, 「開寧縣」, <山川>.
7) 신증동국여지승람, 「金山郡」; 「開寧縣」; 「知禮縣」, <山川>.
<그림 1> 선산과 김천 지역의 지형 조건
52 지방사와 지방문화 18권 1호
불과했다.8) 낙동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작은 배들이 감천을
경유하여 선산, 개령, 김산, 지례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상주에서 선
산으로 이어지는 嶺南大路의 支線들이 이들 지역을 서로 이어주었다.
지례현에서 선산부까지는 걸어서 한 나절이면 족한 거리였다. 그런 사정을
18세기 후반 선산 읍내에서 가까운 문동에 거주한 盧尙樞(1746~1829)가 형
수[성산여씨]의 친정인 김산군 과내면 耆洞을 방문한 여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771년 5월 2일 그는 형수[盧尙植의 처]를 모시고 아침에 문동을 출발,
저녁나절에 기동에 도착했다. 이튿날에는 같은 군 조마면 장암에 있던 제수
[盧尙根의 처]의 집을 방문한 뒤 문동 집으로 돌아왔다. 귀가했을 때에는 아
직 날이 저물지도 않은 상태였다.9)
형수는 가마를 타고 갔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지만, 그가 홀로 돌
아올 때는 장암을 경유하고서도 한 나절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한창 건장했던
26세의 청년에게 지례 경계에서 선산까지의 여정은 그다지 힘든 것이 아니
었다. 일일생활 권역이었던 이러한 지리적 친연성으로 해서 조선 초기 이래
선산과 김천 지역 사람들은 큰 부담을 갖지 않고 육로나 수로를 통해 왕래하
고 또 물자를 교역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3. 1400~1430년대 吉再의 교육 활동과
김천 지식인들과의 교류
조선 초기 선산과 김천 지역의 인적, 물적 교류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吉再(1353~1419)의 冶隱集이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길재
는 고려 말 고향 선산으로 낙향하여, 금오산과 栗谷[밤실, 현 도량동 소재]에
서 서당을 열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개성의 成均館에서 李芳遠(1367~
1422)과 동문수학했던 인연으로 太宗의 특별한 知遇를 받았다. 정종 2년
8) 신증동국여지승람, 「善山都護府」, <山川>.
9) 盧尙樞(1746~1829), 盧尙樞日記 1771년 5월 2일~3일.
15~16세기 善山-金泉 지역 儒學者들의 교류와 朝鮮 性理學의 전개 53
(1400) 당시 世子였던 이방원의 추천으로 국왕 定宗을 알현한 사건은 그를
일약 전국적 명망가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고려 왕조에 대한 不事二
君의 충절을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방원은 그의 지조를 높이 평가
하는 한편, 그가 고향에서 연구하고 또 제자들을 양성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10)
고려 왕조에 대한 丹心, 성리학에 대한 열정, 제자들을 훌륭한 인재로 양
성한 탁월한 교사 같은 다재다능한 재능으로 인해 길재는 태종 대 이후 명성
을 떨쳤다. 전국적인 추앙 분위기 아래 그는 살아생전에 정부로부터 초상화
가 그려지는 영예를 안았다. 그의 초상화가 제작되자, 그의 인품과 학덕을
존경하고 따르던 수많은 학자, 관료, 그의 제자나 친구들이 그를 찬양하는
시를 지어 헌정했다. 야은집에 수록된 「讚詠諸詩」가 그것이다.
「찬영제시」에는 36명의 작자들이 참여, 모두 44편의 시를 남겼다.11) 이들
가운데는 길재의 스승인 李穡, 權近을 비롯해서, 卞季良, 成石璘, 河崙 등 당
대 최고위 관료들, 그리고 길재가 선산에서 講學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
원해준 경상도 관찰사 南在, 선산 부사 鄭以吾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자 朴瑞生, 동생 吉久, 그리고 동향인 선산의 학자들인 金峙, 蔣天
敍, 金克柔 등도 있었다. 이밖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찬영시를 헌정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지례 출신 張志道였다.12)
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장지도는 고려 말 문과에 급제, 起居注[門下省
산하 史官] 知宜州事를 역임하고 은퇴, 고향에서 자제들을 가르친 학자였
다.13) 그에게 감화를 받아 이름을 떨친 이들로 尹殷保와 徐騭이 있다. 스승
의 가르침을 받은 두 사람은 君․師․父 일체라는 신념으로 스승을 깍듯이
모셨다. 스승에게는 그를 봉양해줄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스승을
아버지처럼 모시면서, 명절이 되면 맛난 술과 음식을 드렸고, 특별한 음식이
10) 김훈식, 2012, 「15세기 朝家의 吉再 追崇과 인식」, 민족문화논총 50, 6~8쪽.
11) 길재에게 두 편 이상의 시를 헌정한 이들로는 南在, 卞季良, 權近, 金峙, 李那, 裵楠, 裵桓 등 6명이
었다(吉再(1353~1419), 冶隱集, 「冶隱先生言行拾遺」(下), <讚詠諸詩>).
12) 吉再, 冶隱集, 「冶隱先生言行拾遺」(下), <讚詠諸詩>, ‘次韻’ 張志道.
13) 新增東國輿地勝覽, 「知禮縣」, <人物>, ‘本朝’, 張志道.
54 지방사와 지방문화 18권 1호
생기면 언제나 대접해 드렸다. 그리고 스승이 돌아가자, 두 사람은 스승의
산소 옆에 廬幕을 짓고 3년 동안 侍墓살이를 했다.
心喪 3년이 끝나갈 무렵 윤은보의 부친이 사망하자, 그는 다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윤은보는 스승상과 부친상을 맞아 모두 6년 동안이나 시묘
살이를 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윤은보와 서즐 두 사람은 모두 효자로 칭
송되었고, 1432년(세종 14) 정부로부터 孝子 旌門이 내려졌다.14) 두 사람은
1434년(세종 16)에 편찬된 三綱行實圖 「孝子」 편에 <윤은보가 까마귀를
감동시키다[殷保感烏]>는 제목으로 그들의 행실이 소개되는 영예를 안았
다.15)
서즐은 훗날 장성하여 선산으로 장가들어 坪城[들성]面 고아에 거주하게
되었고, 이런 인연으로 그는 이후 선산 사람이 되었다. 그가 선산사람이 된
것은 당시 婚俗이 壻留婦家婚, 곧 “사위가 아내 집[丈家]에 들어가 사는 이른
바 ‘丈家 풍속’이었기 때문이다. 처가로 장가를 든 사위는 대체로 그곳에 정
착하여 妻鄕을 고향으로 삼는 경우가 다반사였다.16) 세종 14년 효자로 정려
된 그는 포상으로 司涓[정9품]이라는 관직을 하사받았으며, 90 이상의 수를
누린 복 노인으로 칭송받았다.17)
1392년 조선이 개국한 지 20~30년이 지난 1410~1420년대를 전후한 시기,
선산의 대유학자 길재는 지례 출신 관료학자인 장지도와 교류하고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길재에게 헌정하는 시를 바쳤다. 그의 제자 윤은보와 서
즐이 부모상과 사부상을 당해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시묘하면서 3년상을
지낸 것은 모두 스승 장지도의 직접적인 훈도와 길재의 간접 교육 덕택이었다.
조선이 개국한지 4,50여 년이 경과한 세종 대(1418~1449)까지 선산 유학
자들과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김천 지역은 지례였다. 가장 거리가 멀고, 또
사회경제적으로 낙후되었던 지례가 선산과 이렇게 교류했다는 사실은 다소
14) 신증동국여지승람, 「知禮縣」, <孝子>, ‘本朝’, 尹殷保.
15) 三綱行實圖(1434년; 세종 16), 「孝子圖」, <殷保感烏>.
16) 김성우, 「15,16세기 士族層의 고향 인식과 거주지 선택 전략」, 40~47쪽.
17) 신증동국여지승람, 「善山府」, <寓居>, ‘本朝’, 徐騭; 崔晛(1563~1640), 一善志, 「人物」, <徐
騭>, “知禮人 寓居本府高牙里 … 年逾九十而卒”.
15~16세기 善山-金泉 지역 儒學者들의 교류와 朝鮮 性理學의 전개 55
역설적이다. 두 지역 인물들이 교류하는 데는 두 지역을 경유하여 흘러간 낙
동강의 지류 감천의 역할이 컸다. 이렇게 두 지역의 교류가 빈번한 상황에서
서즐 같은 이는 선산 사람과 결혼하여, 고아에 사는 선산 사람이 되었다.
4. 1450년대 개령 현감 金叔滋의 지방관 생활
다음으로 선산 유학자와 김천 지식인들의 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사례는
개령 현감 시절 金叔滋(1389~1456)의 지방관 생활이었다. 김숙자는 1389년
선산 영봉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는 고려 왕조의 멸망을 예감한 길
재가 고향으로 내려와 은둔한 이듬해였다. 한 동안 고향 봉계에 은둔했던 길
재는 12년만인 정종 2년(1400) 국왕 정종과 세자 이방원의 알현을 계기로
고향에서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그가 서당을 열자 선산
출신 청년들, 경상도의 신진기예들, 그리고 전국의 인재들이 그의 문하로 몰
려들었다. 널리 알려진 제자들로는 선산 출신 吉久(동생), 金叔滋, 蔣天敍, 金
克柔 등과 경상도 출신 朴瑞生(비안, 수제자), 玉沽(군위), 李甫欽(영천) 등이
있다.18)
그의 교육에 힘입어 제자들은 이후 문과에 급제, 중앙관료로 대거 진출했
다. 개국 이래 60년 동안 선산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한 이는 36명이나 되었
다. 이들 가운데는 集賢殿 學士 5명, 2품 이상 宰相級 고위 관료 10명이 포함
되어 있었다. 이들은 조선 제4대 군주인 世宗(치세 기간: 1418~1450)의 각
종 정책의 입안자 혹은 책임자로 맹활약했다. 農事直說(1429)의 편찬 책임
자 鄭招, 1430~1431년 水車 제작 및 보급 책임자 朴瑞生, 세종의 <勸農敎
書>(1444) 찬자 河緯地 등이 그들이었다. 선산 출신 문관들의 배출과 관련하
여 주목되는 또 다른 사실은 이들 다수가 선산 읍내 영봉리 출신이라는 점이
었다. 이곳 출신으로 문과에서 장원 혹은 부장원으로 합격한 이는 모두 6명
18) 최영성은 金克一(청도), 曺尙治(영천), 崔雲龍(전라도), 아들 吉師舜도 길재의 제자라 파악하고 있다
(최영성, 「야은 길재와 그 문생들의 도학사상」, ‘낙중학’의 원류 조선전기 도학파의 사상, 159쪽).
56 지방사와 지방문화 18권 1호
[田可植, 河澹-河緯地 부자, 兪勉, 鄭招, 鄭之澹]이었다. 이런 명성으로 인해
훗날 선산 부사로 부임했던 김종직은 영봉리를 ‘壯元坊’이라 칭송할 정도였
다.19)
선산 土姓인 일선김씨 가문의 김숙자도 ‘장원방’ 영봉리 출신이었다. 9세
가 되면서 공부를 시작한 그는 12,3세 무렵 길재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그는 16세가 되면서 선산 鄕校에서 본격적인 과거 공부를 시작했고, 10년만
인 1414년(26세) 小科에 합격했다. 이후 서울의 성균관으로 옮겨 학업을 계
속하던 그는 스승이 사망한 1419년(세종 원년) 문과에 합격, 성균관 學諭에
임명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421년 그가 藝文館 注書에 임명되어 淸顯
職에 발을 디뎌 놓을 때까지만 해도 그의 전도는 양양했다.20) 높은 성리학적
소양에다가 길재의 제자라는 學緣, 선산 출신이라는 地望까지 겹치면서 그의
관운은 그야말로 탄탄대로 달리는 듯 했다.
그렇지만 두 번에 걸친 결혼이 그의 관직 생활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그
는 원래 고향 선산에서 谷山韓氏(韓變의 딸)와 결혼하여 3남 1녀[宗輔, 宗益,
상주 金仲老의 처]를 낳았지만, 1418년(태종 18) 아내 한씨의 世系와 행실이
문제가 되어 이혼했다. 두 사람의 이혼에는 며느리의 평소 소행을 탐탁지 않
게 여겼던 부친 金琯의 종용도 한 몫 단단히 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420
년(세종 2) 성균관 學諭로 재직하던 그는 밀양의 부호 朴弘信의 딸과 재혼,
처향인 밀양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3남2녀[宗錫, 宗裕, 宗直, 신천 康惕의
처, 여흥 閔除의 처]가 태어났다.
당시 관료들이 출세한 이후 고향의 전처를 버리고 권세나 재력이 있는 집
안의 여식과 재혼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이로 인해 嫡庶와 宗子․支
子의 구분이 문제가 되었고, 가계 계승권을 둘러싼 논란이 심각하게 벌어졌
다. 이런 상황에서 1417년(태종 17) 2월 司諫院은 兩妻 이상을 보유한 관료
들에 대한 처벌 규정을 마련하게 되었다.21)
19) 김성우, 2006, 「15, 16세기 ‘인재향’ 구미의 성장과 발전」,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상), 애드게이트, 169~192쪽.
20) 金宗直(1431~1492), 佔畢齋集, 「彝尊錄」, <先公事業> 4.
21) 태종실록 태종 17년 2월 23일.
15~16세기 善山-金泉 지역 儒學者들의 교류와 朝鮮 性理學의 전개 57
사정이 어떠했든 간에 김숙자의 재혼은 권력과 재력을 탐내서 조강지처를
버리고 부자 집 여식과 결혼한 것으로 비쳐졌다. 한변의 막내 사위 金宙가
성주 목사 李敢에게 이 사실을 진정했고, 이감은 다시 사헌부에 고발하게 되
었다. 이로 인해 김숙자는 이후 몇 차례 중앙 관직에 추천되었지만 번번이
낙오, 끝내 청현직 진출에 실패했다. 그가 기껏 역임한 관직으로는 경상 좌․
우도 兵使의 참모인 評事, 고령 현감, 개령 현감 같은 지방관 직, 선산 敎授,
성주 교수 같은 지방 교수직, 그리고 성균관의 學錄이나 司藝 같은 중앙 교
수직이 전부였다. 김종직은 부친의 신산했던 벼슬살이를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선친은 31세의 나이로 出身한 이후, 13년 동안 流落했고, 參外[정7품 이하]로부
터 大夫[종4품 이상]에 이르기까지 28년이나 걸리셨다. 그 동안 主簿 6 차례, 部令
2 차례, 현감 3 차례, 敎授官, 校理, 副正, 司藝 등을 한 차례씩 역임하셨다. 이렇게
몹시 불우하고 영락하여 끝내 평소 함양한 학문을 크게 행하지 못하셨다. 비록 하
나의 고을 자리를 얻어서 政事를 펼쳤다고는 하나 백성들에게 끼친 혜택은 고작
一縣에 그칠 뿐이어서, 온 세상에 그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셨다. 또 뇌물질 하는
刀筆吏 무리들과 관직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셨을 뿐이었다.”22)
관직자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생은 매우 불우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그
는 관료학자로서의 자신의 장점을 묵묵히 실천해 갔다. 그는 학문적 자질을
인정받아 성균관의 학록이나 사예, 선산과 성주의 교수직 같은 교육 담당 관
직을 주로 맡았다. 그가 고령 현감과 개령 현감 재직 시절 부임지에서 학생
들을 열정적으로 교육시킨 것은 이런 장점의 활용이라는 측면이 강했다. 그
의 교육자로서의 탁월한 능력은 훗날 후처 박씨 소생의 세 아들[김종석, 종
유, 종직]과 金孟性을 훈육하여, 15세기 중․후반 이들에 의해 조선 성리학
이 크게 꽃피는 토양을 마련해 주는 데 일조했다.
22) 金宗直, 佔畢齋集, 「彝尊錄」, <先公紀年> 2.
58 지방사와 지방문화 18권 1호
그가 개령 현감에 부임한 것은 61세 되던 1449년(세종 31)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4년 동안 근무한 다음, 1453년(단종 원년) 65세의 나이로 司宰監
副正에 임명되었다. 68세에 사망했으니 개령 현감은 그의 사실상 마지막 관
직이었다. 개령 현감 재직 당시 그는 炭洞, 谷松, 松林 등지에 3개의 저수지
[제언]를 축조하여 700~800結에 달하는 전답에 수리 혜택을 주었다. 동국
여지승람 「개령현」조에 “9개의 저수지가 설치되어 전답에 관개하는 탓에
水利가 가장 많다.”는 기록은 그의 개령 현감 시절의 치적이었던 셈이다.
그의 지방관 재직 시절의 많은 치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관내 학생
들에 대한 열정적인 교육이었다. 그는 고령과 개령의 현감으로 부임하여 두
곳 향교를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각종 祭器나 儀禮 관련 什器들을 정비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는 가능하면 釋奠祭 행사에 직접 참여, 儀軌에 따라
제사를 거행했다. 지방 관장의 근무를 마친 오후에는 校生 두 명씩을 따로
불러 日課를 강의하고, 한 달에 세 번 시험을 치러 상벌을 내렸다. 그의 이런
노력으로 두 지역 교생들의 학문 수준은 나날이 향상되었고, 마침내 소과 합
격자가 배출되기 시작했다.
그의 부임 전까지만 해도 두 곳은 단 한 명의 소과 합격자도 배출하지 못
한 그야말로 교육의 불모지였다. 인근 고을인 선산에서 이 무렵 40명 가까운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것과는 큰 대조를 이루는 부분이었다. 그렇지만 지방
관으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의 그의 열의와 노력 덕택에 고령에서는 朴霖威
가, 개령에서는 崔漢이 소과에 합격했다. 이후에도 두 곳에서는 소과 합격자
들이 계속 이어졌다. 훗날 개령 탄동의 鄭鐵堅, 鄭錫堅 형제가 모두 소과에
합격하고, 또 정석견이 대과에 합격하여 전국적인 명사로 발돋움한 것도 따
지고 보면 그가 남긴 유풍이라 할 수 있다.
개령 현감 시절 그가 이곳에 쏟아 부은 정성과 애정은 아주 각별했다. 개
령은 그의 개인사와 관련해서도 인연이 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조모 일선
김씨[金練의 여식]의 산소가 개령 북쪽 15리 소재산에 있었다. 조부 司宰令
金恩宥의 산소는 선산 서쪽의 하송산, 부친 진사 金琯과 모친 仁同兪氏[兪仁
貴의 여식]의 산소는 선산 서쪽 12리 봉암산에 있었다. 하송산과 봉암산은
15~16세기 善山-金泉 지역 儒學者들의 교류와 朝鮮 性理學의 전개 59
모두 개령에서 가까웠고, 소재산은 개령 경내에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김숙
자는 일찍이 조부모 산소의 墓祭를 거행하기 위해, 그리고 부모 3년상을 치
르기 위해 이곳을 자주 방문하거나 머물렀다.23)
뿐만 아니라 그의 남매[2남 2녀] 가운데 막내 누이는 萬戶 奇洪敬 가문으
로 출가하여 개령에 살고 있었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
던 기씨 부인은 무남독녀를 키우는 것조차 힘겨워 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누이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았고, 생질녀를 사족 집안으로 무사히 시집
갈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24) 이런 인연으로 마지막 관직이 된 개령 현감
시절 그는 이곳에 애정을 쏟아 부었고, 훗날 전국적 명성을 떨친 정철견, 정
석견 형제 같은 유학자들이 배출되는 토양을 마련해 주었다.
5. 1450~1490년대 김종직의 性理學 운동과 김천 유학자들
김숙자는 1420년 재혼 이후 밀양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아들과 딸들은 가
능하면 선산을 비롯한 이웃 고을들의 명문가와 혼인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
울였다. 자녀의 결혼에서 그가 가장 중시한 것은 “世族 여부와 家訓 유무”였
다. 그가 전처 한씨와 이혼한 것도 따지고 보면 처가의 세족과 가풍이 문제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는 중앙 관직 불허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지
만, 세족과 가풍을 최우선시 하는 가치관은 이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장녀
시집은 선산 영봉리에 거주하는 康居禮[신천강씨] 집안이었다. 시집살이를
한 장녀[別侍衛 康惕의 처]는 康伯珎(문과, 司諫)과 康仲珎(문과, 牧使) 형제
를 낳았는데, 이들 두 사람은 훗날 외삼촌의 제자가 되었고, 모두 과거에 합
격하여 김종직을 따르는 대표적 신진관료로 성장했다. 강거례 집안과 사돈을
맺게 됨에 따라, 그의 가문은 강거례의 사위인 당대 선산 최대 명문인 金之慶
가문(일선김씨)과도 연결되었다.25)
23) 金宗直, 佔畢齋集, 「彝尊錄」, <先公譜圖> 1; <先公紀年> 4.
24) 金宗直, 佔畢齋集, 「彝尊錄」, <先公事業> 2.
60 지방사와 지방문화 18권 1호
큰 아들 종석과 둘째 아들 종유는 각각 김해의 司直 裵, 안동의 司醞署
令 權恢의 여식과 결혼했다. 김해배씨와 안동권씨가 모두 盧異(광주노씨, 문
과, 正言)의 외손녀, 생질녀라는 점에서, 사실상 두 아들은 합천 출신 노이의
집안으로 장가든 셈이었다. 강직한 성품이었던 노이는 正言 재직 시절인
1404년(태종 4) 태종에게 직언했다가 밉보여 관직에서 축출되었고, 이후 고
향에서 생을 마친 불운한 관료였다. 태종은 그를 비록 내쳤지만, 1419년(세
종 원년) “노이와 李陽明은 사람들이 다 착하다고 칭했는데도 등용하지 못했
으니, 이 일이 나의 평생의 한이다.”고 뒤늦은 후회를 하기도 했다.26) 그의
문과 同年으로는 琴柔, 河演, 金從理 등이 있었다. 후술하겠지만 김산 출신
금유는 김종직의 처가인 창녕조씨의 인척이었고, 선산 출신 김종리는 김숙자
의 5촌 조카였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김숙자는 그보다 한 세대 선배인 그를
잘 알고 또 존경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연유로 그는 두 아들을 모두 노
이 집안으로 장가보냈다.
막내아들 종직은 김산 봉계리에 거주하는 曺繼門[창녕조씨]의 여식과 결혼
했다. 며느리 창녕조씨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외증조부인 옥과 현감 琴克和의
지극한 돌봄 속에서 성장했다. 외증조부는 그의 형 琴克諧가 일찍이 세상을
떠나자 斬衰 3년을 입었다. 그의 조카 琴柔를 자기 자식처럼 사랑했으며, 또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 관료로 대성할 수 있도록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
한 효성과 우애로 인해 금극화는 동국여지승람에 「김산」을 대표하는 인물
로 등재되는 영예를 안았다.27) 훗날 대사성, 대사간 등 고위관직을 역임했던
금유는 노이와 문과 동년으로 평소 친분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봉화금씨 가문의 가풍과 내력을 잘 알고 있던 김숙자는 조계문 집안과 혼
사를 맺으려 했다. 그렇지만 1451년 김종직과 창녕조씨가 혼약한 이후 조씨
25) 金澍(증조, 문과)-金楊普(조)-金地(부, 문과, 현감)로 이어지는 김지경 가문은 선산의 대표적 토
성인 일선김씨 가운데서도 가장 현달한 가문이었다. 김지경 자신도 문과에 합격하여 홍문관 부제
학,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했으며, 성종 대 우의정을 역임한 金應箕(문과)가 그의 아들이었다(최현, 일선지, 「인물」, ‘金之慶’).
26) 태종실록 태종 4년 5월 3일; 세종실록 세종 1년 3월 25일.
27) 신증동국여지승람, 「김산군」, ‘寓居’, 本朝.
15~16세기 善山-金泉 지역 儒學者들의 교류와 朝鮮 性理學의 전개 61
의 모친인 하빈이씨가 사망한 탓에, 두 사람은 3년이 지나도록 혼인식을 올
리지 못했다. 이 기간 동안 조계문 가문이 가난하다 하여 파혼을 주장하는
이가 나타났고, 심지어 아내 밀양박씨도 파혼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다.
그렇지만 김숙자에게 며느리 집안의 가난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이미 혼약한 상황에서 파혼한다는 것은 앞날이 창창한 아들의 미래에 큰 장
애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 그는 아내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거
듭된 파혼 요구에도 불구하고 자식의 결혼을 밀어붙였고, 결국 1453년 아들
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이후 김종직은 1456년 부친상을 당할 때까지 처가
봉계에서 4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냈다.
사실상 김종직이 김천 지역과 인연을 맺었던 것은 19세 되던 1449년(세종
31)이었다. 당시 개령 현감으로 재직 중이던 부친을 따라 두 형과 함께 이곳
에 내려온 것이 그 계기였다. 이곳에서 김종직 3형제와 이곳 출신 김맹성은
부친으로부터 성리학을 전수받고 또 과거 공부를 함께 했다. 이들은 이후 김
산 직지사의 말사인 능여사에서 과거 공부를 이어갔다. 이렇게 맺은 김천과
의 인연은 그가 29세 되던 1459년(세조 5) 대과에 합격, 본격적인 관료 생활
을 시작하면서 끝이 났다.
19세부터 27세까지 9년 동안 김천 지역에 머물렀던 김종직은 이곳 지식인
들과 폭넓게 교유했다.28) 화순최씨 가문의 崔漢公(문과, 典翰), 崔漢候(문과,
대사간) 형제와 그의 동서인 崔漢伯(무과, 우후), 그리고 崔漢禎(문과, 이조
참의), 崔漢良(문과)을 비롯해서, 양천허씨 許琮(문과, 우의정), 許琛(문과, 좌
의정) 형제, 벽진이씨 李約東(문과, 참판), 연안이씨 李淑瑊(문과, 전라도 관
찰사) 등이 그들이었다.
이렇게 오랜 기간 거주하고 또 지식인들과 폭넓게 교유한 인연으로 이곳
출신으로 그의 제자가 된 이들도 적지 않았다. 鄭以僑[연일정씨 鄭從韶의 아
들, 최한백의 사위, 문과, 대사성], 처남 曺偉(문과, 참판), 曺伸 형제, 楊守泗
28) 김종직의 청년 시절 시집인 悔堂稿에는 150여 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김천 지역
과 관련된 시가 무려 40여 수나 되었다(정경주, 2014, 「점필재 김종직과 김천」, 초기 사림파 형성
과 점필재 김종직, 한국국학진흥원, 1~21쪽).
62 지방사와 지방문화 18권 1호
[중화양씨, 문과, 좌랑], 정석견[해주정씨, 문과, 참판], 李世仁[성산이씨, 문
과, 홍문관 부제학] 등이 그들이었다. 모친상을 마치고 처가살이를 결심했던
그가 봉계에 잠시 머물렀던 1482년(성종 13), 김산 군수로 재직하던 李仁亨
[문과, 대사헌]도 그의 제자였다.29)
김숙자 이래 가문의 전통이 된 세족과 가풍 중시 풍조는 김종직에게도 그
대로 이어졌다. 그가 차남 金緄의 아내를 동문이자 평생 동지였던 김맹성[해
평김씨, 문과, 수찬]의 딸에서 찾고, 제자 이인형의 아들 李翮에게 딸을 출가
시킨 것이 그런 경우였다. 그는 평생 동지로 허여했던 김맹성과 더불어 아들
과 딸을 맞교환했던 셈이다. 당시 김맹성의 집이 개령 횡천리에 있었던 탓에
아들 곤은 주로 개령에 거주했다.30) 이처럼 김숙자로부터 이어진 이 가문의
김천 지역과의 인연은 아들 김종직으로, 그리고 손자 김곤으로 내리 3대에
걸쳐 이어졌다.
이처럼 김천 지역과 각별했던 그였지만, 김종직은 끝내 김천 사람이 되지
는 못했다. 처향에 정착하여 그곳 사람이 되는 것이 관행이었던 당시 상황에
서 그가 김천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은 그의 불행한 가족사와 관련되어 있었다.
1482년(성종 13) 2월 모친상을 마친 다음, 그는 중앙 복귀를 단념하고 처가
에서 평생을 보낼 것을 결심했다. 그가 선산 부사로 재직하던 1478년(성종
9) 4월 중앙정계를 평지풍파로 몰아넣은 戊戌獄事의 주범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宗室 朱溪副正 李深源과 進士 南孝溫, 三司의 관료들인
김맹성, 表沿沫, 金塊 등이 불운의 군주 端宗의 모후인 昭陵[顯德王后 權氏]
의 복권과 任士洪의 탄핵을 주장한 사건이었다. 소릉 복위는 세조가 감행한
癸酉靖難(1453)의 정통성을 부정할 가능성이, 임사홍 탄핵은 세조의 쿠데타
이후 정치적 실세로 자리 잡은 勳舊勢力에 대한 新進官僚들의 정치적 공세
의 가능성이 예고되는 것이었다.31)
29) 정경주, 「점필재 김종직과 김천」, 22~32쪽.
30) 金宗直, 佔畢齋集, “8월 緄의 아내가 개령 橫川里 집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善源[김맹성]이 喜孫
이라 이름 지었다. 그런데 10월 28일 곤의 아내가 밀양에 오자, 집사람[淑人]이 문밖에 나가 그
아이를 안아보려 했다. 그때서야 월초에 이미 아이가 夭死했음을 알게 되었다(1480년, 성종 11)”.
31) Edward Wagner, Literati Purges: Political Conflict in Early Yi Korea, Cambridge, Mass: East
15~16세기 善山-金泉 지역 儒學者들의 교류와 朝鮮 性理學의 전개 63
이 사건이 발발하자 왕실 최고 어른이었던 世祖妃 貞熹王后 尹氏(1418~
1483)가 크게 분노하고, 훈구관료들의 거센 역공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의 연루자들은 대부분 유배형을 가거나 과거 응시자격이 박탈되었다. 그
런데 왕실과 훈구관료들이 정조준 한 이는 다름 아닌 김종직이었다. 이 사건
의 연루자 대부분이 그의 동지[김맹성]거나 제자들[이심원, 남효온, 표연말,
김괴 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끝내 훈구관료들의 공세의 칼날을
피해갔다. 사건 당시 선산 부사로 재직하고 있었던 탓에 그가 직접 간여한
물정이 없었고, 더구나 국왕 성종이 그를 적극 비호해 주었던 탓이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중앙 정계 복귀를 단념해야만 했다. 모친상을 마친 그
가 봉계리에 景廉堂이라는 서재를 짓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려 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처가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해 4월 이곳
에 정착한 지 한 달 만에 아내 조씨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씨 사이
에서 태어난 아들 3형제와 손자도 모두 요절했던 탓에 창녕조씨 사이에서
난 남계 혈육은 전무했다. 처가에 남아 있기도 그렇다고, 친가로 돌아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하고 만 것이었다.32)
그런데 바로 그해 5월 국왕 성종은 그를 홍문과 修撰[정4품]에 임명, 중앙
으로 전격 소환했다. 정희왕후 윤씨가 위중한 틈을 타 왕실 어른들의 감시와
훈구관료들의 견제에서 벗어나려 했던 성종이 꺼낸 비장의 카드가 바로 김종
직의 복귀였다. 성종은 그를 중앙 관직으로 불러들인 직후, 7월에는 김맹성
등도 解配시켜 중앙 관직으로 복귀시켰다. 그가 김종직을 宗匠으로 하는 신
진세력들과 함께 政事를 꾸려가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이후 국
왕 성종의 각별한 신임 속에 김종직의 관로는 막힘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중앙 복귀 7년 만인 1489년(성종 20) 형조 판서(정2품)에까지 올랐다. 학문
적 명성에다가, 국왕 성종으로부터의 각별한 지우, 그리고 새로운 사회를 건
Asian Research Center, Harvard University Press, 1974/이훈상․손숙경 역, 「정치사적 입장에서
본 조선시대 사화의 성격」, 조선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Achievement and Ascription in Joseon
Dynasty), 2007, 일조각, 90~93쪽; 김성우, 2009, 「15세기 중․후반~16세기 道學運動의 전개와
松堂學派의 활동」, 역사학보 202, 7~12쪽.
32) 김성우, 「15,16세기 士族層의 고향 인식과 거주지 선택 전략」, 43~45쪽.
64 지방사와 지방문화 18권 1호
설하려는 개혁 성향 등으로 인해 그의 주변에는 무수한 제자들, 관료들이 몰
려들었다. 이때 이후 경상도 출신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출신들도 그의 문하
로 몰려들어, 그는 가히 전국적인 제자군을 거느리게 되었다. 이른바 佔畢齋
學派의 출현이었다.33)
권력과 명예를 동시에 획득한 김종직은 55세가 되던 1485년(성종 16), 18
세의 규수인 남평문씨[사복시 첨정 文克貞의 여식]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녀
가 崇年이라는 아들을 낳음으로써 그는 그토록 갈망했던 아들을 얻었고, 그
를 통해 가계가 계승될 수 있었다. 그는 1489년(성종 20) 59세의 나이로 정
계에서 은퇴, 부모의 묘소가 있던 밀양을 최종 고향으로 선택했다. 결국 남평
문씨와의 재혼과 밀양 정착으로 인해 그는 차츰 김산과 멀어지게 되었던 것
이다.
김종직의 김천 출신 동지와 제자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이들은 김맹성
과 정석견이었다. 두 사람은 김종직이 평생 동지로 꼽았던 7명 가운데 포함
될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34) 김맹성과는 사돈을 맺을 정도로 각별했고, 무
술옥사의 주모자라는 점에서 정치적 성향 또한 일치했다. 김맹성이야말로 그
의 가장 절친한 벗이자 동지 가운데 제1인이었던 셈이다.
또 다른 동지 鄭錫堅(1444~1500)은 개령현 탄동에서 아버지 端川 敎導
鄭由恭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형으로 鄭鐵堅과 鄭銀堅이 있었는데, 이들
도 모두 소과에 급제한 재원이었다. 그는 1474년(성종 5) 문과에 급제한 이
래 고속 승진하여, 연산군 대에 이르러 대사간, 이조 참판에까지 올랐다. 그
는 김종직의 제자들이 처단 당한 1498년(연산군 4) 戊午士禍에서 연로하다
는 이유로 참형을 겨우 면했다. 그렇지만 이때의 충격으로 1500년(연산군 6)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실상 김종직이 김천 지역에 머물렀던 청년시절 9년은 이 지역의 문풍
진작에 엄청난 전기를 마련한 일대 사건이었다. 金泉市誌(1999)의 ‘文鄕
33) 김성우, 「15세기 중․후반~16세기 道學運動의 전개와 松堂學派의 활동」, 4~14쪽.
34) 나머지 동지들은 表沿沫, 兪好仁, 김지경, 金潤宗, 南孝溫 등이었다(김성우, 「15세기 중․후반~16
세기 道學運動의 전개와 松堂學派의 활동」, 6~10쪽).
15~16세기 善山-金泉 지역 儒學者들의 교류와 朝鮮 性理學의 전개 65
金山’ 조에 따르면, 김산의 전성기는 성종 대[치세 기간: 1469~1494]였다.
그렇지만 1494년 연산군 즉위 이래 무오사화(1498), 甲子士禍(1504)가 연달
아 터지고 그 때마다 김종직의 제자들이 집중 피해를 입게 됨에 따라, 이 지
역 인사들도 엄청난 재난에 시달렸다. 이후 이 지역에서는 더 이상 인재들이
배출되지 않았다.35)
결국 김천 지역의 전성기는 김숙자-김종직 부자의 이 지역에서의 활동
시기와 일치한다. 두 부자의 인연으로 이 지역 지식인들이 점차 성리학자로
변모하게 되었고, 중앙 관료가 될 수 있었다. 이들 가운데 다수는 점필재학파
의 일원이 되어 성종 후반 整風運動을 주도했다. 바로 이런 정치사상적 성향
과 활동으로 인해 이 지역 출신 학자와 관료들은 연산군 대의 두 차례 사화
에서 혹독한 피해를 입고 침몰해 갔다. 그런 점에서 김천이 자랑하는 ‘문향
김산’은 결국 김숙자 부자와의 인연을 제외하고서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6. 1520~1540년대 朴英의 講學 활동과 김천 유학자들
김종직의 뒤를 이어 전국적으로 주목받은 이는 金宏弼(1454~1504)이었
다. 그는 조부 金小亨이 살았던 서울 정릉에서 태어났지만 외가가 현풍인 탓
에, 현풍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19세가 되던 1472년(성종 3) 벗
鄭汝昌과 함께 함양 군수로 재직 중이던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처음으로 배웠고, 이후 그것을 평생 실천하면서 道學者로 명성을 떨쳤다.
1477년(성종 8) 스승이 선산 부사로 재직하던 시절 참봉 元槪, 생원 李承彦,
생원 李鐵均, 진사 郭承華, 수재 朱允昌 등과 함께 그곳을 방문, 스승의 지도
를 받았다. 이런 인연으로 一善志의 저자 崔晛은 그를 선산의 인물로 기록
하고 있다.36) 그가 선산 사람이라는 점은 이견이 없지 않지만, 그가 선산 출
35) 김천시사 편찬위원회, 金泉市誌(상), 「제2편 역사」, <조선시대>, ‘문향 김산’, 199~202쪽.
36) 崔晛, 一善志, 「先賢」, ‘金宏弼’, “金宏弼: 府南仇彌里有宅田藏獲 往來遺躅”.
66 지방사와 지방문화 18권 1호
신 인물들과 밀접히 교류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흔적을 1494년(성종 25) 5월 경상도 관찰사 李克均이 추천한 경상도
의 隱逸之士 4명의 면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때 추천된 이들은 參軍 朴始
明(창원), 정철견(선산), 郡守 郭順宗(현풍), 생원 김굉필(현풍) 등 4명이었다.
이 가운데 곽순종은 동향인 현풍 출신이었고 정철견은 그의 동문인 정석견의
형이었다. 1495년(연산군 원년) 12월 정철견과 김굉필은 같은 날 軍資監 主
簿(종6품), 北部 主簿에 각각 임명되었다.37) 김굉필은 정석견과 동문이었고,
그의 형 정철견과는 같은 날 관직에 임명된 인연이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김굉필과 정철견이 서로 교유했을 가능성이 있다. 정철견은 선산 무래의 생
원 玉荊宗의 사위가 된 탓에, 결혼 이후 처향인 선산 사람이 되었다.38)
김굉필의 선산 지식인과의 인연은 정철견의 아들 鄭鵬(1467~1512)이 그
의 제자가 됨으로써 계속 이어졌다. 외향인 선산에서 태어난 정붕은 아버지
와 숙부의 가르침 속에 유학자로서의 소양을 쌓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
고 부친․삼촌의 동문인 김굉필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했을 것으로 여겨진
다. 그는 1492년(성종 23) 26세에 문과에 급제, 연산군 대에 삼사 관원[홍문
관 수찬,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 및 응교]으로 활약했다. 그렇지만 김굉필
의 제자라는 이유로 갑자사화(1504) 당시 경상도 영덕으로 유배되었고,
1506년 中宗反正 이후 해배되어 관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39) 그는 중종 초
반 동문인 成世昌의 주선으로 여러 차례 삼사 관원에 추천되었지만 出仕를
거부했고, 외직을 자원하여 청송 부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1512년(중종 7)
임지에서 향년 4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40)
정붕이 조선 도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그가 선산 출신 대유학자 朴英
(1471~1540)에게 스승 김굉필의 도학을 전수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1520
년 이후 선산 松堂에서 시작된 박영의 講學 활동은 그가 사망한 1540년까지
37) 성종실록 성종 25년 5월 20일(정미); 연산군일기 연산군 원년 12월 28일(정축).
38) 최현, ‘鄭鐵堅’, 「인물」, 일선지 “鄭鐵堅: 世居開寧 兄錫堅爲吏曹參判 公娶生員玉荊宗之女 居本
府西面.”
39) 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 9월 9일(병오).
40) 중종실록 중종 7년 9월 19일(경인), 靑松府使鄭鵬 卒記.
15~16세기 善山-金泉 지역 儒學者들의 교류와 朝鮮 性理學의 전개 67
20년 동안 지속되었다. 松堂學派는 1519년(중종 14) 己卯士禍 이후 단절되
다시피 한 조선 도학의 맥을 이어주는 역할을 수행한 학파로서, 16세기 초반
무렵 활동한 거의 유일한 학파였다. 이 학파는 徐敬德의 花潭學派(1540년
대), 李滉의 退溪學派(1550년대), 曺植의 南冥學派(1550년대) 등 明宗 대(치
세 기간: 1545~1567) 중반 이후 개화했던 학파들보다 무려 1세대 이상 빨리
활동을 개시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기묘사화 이후 꺼져가던 도학의 불씨를
되살린 학파라는 점에서 조선도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뚜렷했다.41)
近畿 출신 士林派의 영수 李浚慶과 신진기예 李珥가 김굉필-조광조 다음
으로 조선 성리학을 계승한 도학자로 박영을 꼽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송
당학파가 寒暄堂學派의 뒤를 이어 훗날 만개한 학파들의 선구 역할을 수행
하도록 가교 역할을 한 이가 바로 정붕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송당학파는 開
祖 박영과 더불어 그의 스승 정붕이 병칭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 사정을
1568년(선조 원년) 영의정 李浚慶의 다음과 같은 인식에서 확인할 수 있다.
許曄이 이준경을 뵈었더니, 이준경은 “지금 사람들이 모두 도학자로 趙光祖를
추앙하고, 朴英, 鄭鵬을 아는 이가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물었다.
허엽이 “박영, 정붕 뿐만 아닙니다. 제 스승인 閔箕도 학문과 행실을 두루 갖췄
으나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고 대답했다.
이준경이 “자네가 민기를 어찌 박영, 정붕에 비교하려 하는가?”라고 되물었
다.42)
이처럼 개령 출신의 학자들인 정철견, 정석견 형제와 선산 출신의 학자이
자 정석견의 조카인 정붕은 김종직-김굉필-박영으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
학의 연원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정철견과 정석견은 김종
직의 제자였고, 그의 아들/조카 정붕은 김굉필의 제자인 동시에 박영의 스승
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선산의 유학자들은 김천 지역의 유학자들에
41) 김성우, 「15세기 중․후반~16세기 道學運動의 전개와 松堂學派의 활동」, 20~31쪽.
42) 李珥(1536~1584), 石潭日記 선조 원년(1568).
68 지방사와 지방문화 18권 1호
게 영향을 주었고, 그들 또한 어떤 형태로든 간에 선산의 유학자들에게 영향
을 끼쳤다. 이렇게 조선 성리학은 성리학의 本鄕인 선산을 중심으로 인접 군
현들의 지식인들이 활발하게 교류하고 전승되는 가운데 발전하고 또 확산되
어 갔다.
7. 맺음말
성리학의 본향 선산과 이웃 고을인 김천 지역[개령, 김산, 지례]은 조선 건
국 이래 100여 년 동안 아주 각별한 관계에 있었다. 선산과 김천 지역이 모
두 낙동강 지류인 감천과 연결되어, 양 측의 인물이나 상품들이 활발하게 교
류했기 때문이다. 조선 건국 초기, 곧 1400~1430년대까지만 해도 선산과 가
장 깊은 관련이 있던 지역은 지례였다. 장지도라는 걸출한 관료학자가 배출
된 이곳은 그의 제자 윤은보와 서즐이 모두 효행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들이
선산 출신의 대유학자 길재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인연
으로 장지도는 훗날 길재를 위한 헌정 시를 썼고, 그의 제자 서즐은 선산 고
아로 장가들어 선산 사람이 되었다.
1440~1450년대 선산 출신 유학자들과 활발하게 교류한 지역은 개령이었
다. 김숙자가 4년 동안(1449~1453) 이곳의 지방관으로 재직하면서 제자들
을 양성했기 때문이다. 그의 노력 덕택에 이 지역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최한
이 소과에 합격했고, 정철견, 정석견 형제가 그 뒤를 이었다. 이 무렵 김산에
는 금극화 가문이 효행과 우애로 유명했다. 이 가문의 각별한 관심 속에 김
산 봉계리 조계문 가문은 이후 曺偉, 曺伸이라는 걸출한 형제를 배출했다.
이런 가풍에 주목한 김숙자는 막내아들 김종직을 조계문 집안으로 장가보냈
다. 조위 형제는 김종직의 손아래 처남인 동시에 그의 가장 출중한 제자가
되어 성종 대 후반 정국에서 매우 비중 있는 정치적 역할을 담당했다.
김종직이 김천 지역에 머문 기간은 개령 수학기, 김산 처가 생활 등 9년이
었다. 19세로부터 27세까지의 청년기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낸 셈이었다. 이
15~16세기 善山-金泉 지역 儒學者들의 교류와 朝鮮 性理學의 전개 69
곳에 거주하는 동안 그는 이 지역 지식인들과 폭넓게 교유했다. 김맹성[해평
김씨], 최한공, 최한후, 최한평, 최한량[이상 화순최씨], 허종, 허침[이상 양천
허씨], 이약동[벽진이씨], 이숙감[연안이씨] 등이 그들이었다. 그의 제자 가운
데 이 지역 출신들이 유독 많았던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조위, 조신 형제[이
상 창녕조씨], 양수사[중화양씨], 정석견[해주정씨], 이세인[성산이씨] 등이
그들이었다. 점필재학파의 주축이었던 이들은 성종 대 중․후반 중앙 정계에
서 주목받는 관료들로 성장해 갔다. 당시 점필재학파에서 위상이 가장 높았
던 이 지역 출신 인물들로는 김맹성, 조위, 정석견 등을 꼽을 수 있다.
1470~1510년대 선산 유학자들과 교류가 활발했던 지역은 개령이었다. 이
곳의 명문 정유공 가문[해주 정씨]은 정철견, 정석견이라는 걸출한 두 아들
을 두었다. 이들 형제는 모두 성리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학행으로 인정을
받았다. 성종 치세 말년 김굉필과 더불어 경상도의 隱逸之士로 추천된 정철
견은 선산으로 장가들어 이후 선산 사람이 되었다. 그에게는 정붕이라는 아
들이 있었다. 외가인 선산 신당리에서 태어난 그는 부친 정철견과 숙부 정석
견을 통해 김종직-김굉필의 학맥과 연결되었다. 그는 훗날 선산을 중심으로
松堂學派를 개창한 박영에게 김굉필이 주창한 도학의 정수를 전수해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성리학의 본향 선산은 조선 개국 이래
150여 년 동안 조선사회의 정치적․사상적 혁신운동을 선도하는 지역이었
다. 그렇지만 이런 활동들이 모두 선산의 유학자들의 노력만으로 이뤄진 것
은 아니었다. 선산이 앞서 가고 주변 군현들이 따라가면서 이런 활동들이 더
욱 더 힘을 받았다. 선산의 감화를 받으면서 성리학의 확산에 크게 기여한
지역이 바로 오늘날 김천시에 해당하는 개령, 김산, 지례 등 3개 군현이었다.
새로운 학문으로서의 성리학, 새로운 정치 지향으로서의 도학 정치는 두 지
역 지식인들이 긴밀하게 교류하고 또 전승하는 가운데 탄력을 받고 또 한층
더 강해질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15~16세기 조선 성리학의 발전 과정은
선산과 이웃 고을인 김천 지역 유학자들의 교류와 전승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정확한 이해가 불가능할 정도이다.
70 지방사와 지방문화 18권 1호
사실상 인근 지역 유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한 성리학의 확산 과정은 김천
지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선산을 중심으로 상주(북), 성주(남), 군위
(동) 등지의 유학자들도 선산의 문풍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또 역으로 선
산의 유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선산이라는 특정 지역의 소수 지식인들에
의해 家學이나 鄕學 차원에서 계승되던 성리학이 어느덧 學派 활동으로, 그
리고 정치운동으로 발전을 거듭해간 이면에는 서로 다른 지역들의 유학자들
의 교류와 전승이라는 과정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성리학의 확
산, 조선왕조 지배이념으로서의 道學의 정착 과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
기 위해서는 다양한 지역들의 유학자 상호 간의 교류, 전승, 발전 과정을 좀
더 주의 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본고가 이 점을 환기시키는
데 일조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투고일 : 2015. 4. 9. 심사완료일 : 2015. 5. 7. 게재확정일 : 2015. 5. 8.
15~16세기 善山-金泉 지역 儒學者들의 교류와 朝鮮 性理學의 전개 71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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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지방사와 지방문화 18권 1호
Exchanges among Confucian scholars in
Seonsan-Gimcheon Area and Evolution of
Neo-Confucianism in 15th-16th Centuries
Kim, Sung Woo*
43)
As late as in the early and mid-15th century, Neo-Confucianism used to be
taught at local communities or at homes by the local intellectuals, who wished
to propagate their Confucian knowledge to their students and children. Kil Jae
who taught students in Seonsan and Kim Suk-ja who gave private tutoring to
his sons, Kim Jong-jik and Kim Maeng-seong, were the representative figures
who engaged in the Neo-Confucian education for their students and sons.
It was after Kim Jong-jik started to recruit students and exerted academic
influences in the mid- and late 15th century that their educational activities
transformed into one of an academic lineage. This was also the period, in which
the intellectuals in and around Seonsan joined the Neo-Confucian school. Their
activities as an academic lineage gathered more impetus, as those in the
prefectures around Seonsan joined it.
It was Gimcheon city area (formerly Gaeryeong, Gimsan and Jirye areas)
that has contributed to the spread of the Neo-Confucianism under the influence
of Seonsan. The new political ideology of the Neo-Confucianism, as Tao
Learning (道學), gained more strength amid the academic exchanges and the
activities to form a Neo-Confucian school among the intellectuals of the two
regions. This paper examines the evolution of the Neo-Confucianism in the
* Professor, Daegu Haany University, Department of Hotel & Tourism
15~16세기 善山-金泉 지역 儒學者들의 교류와 朝鮮 性理學의 전개 73
15th-16th centuries in the context of the academic exchanges and the lineage
of the Confucian scholars in Seonsan and its neighboring district Gimcheon.
Key Words : Neo-Confucianism of Joseon dynasty, Tao Learning,
Recognition of Orthodox Confucian lineage, Seonsan, Gimcheon,
Kil Jae, Kim Suk-ja, Kim Jong-jik, Kim Goeng-pil, Park Ye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