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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6일 [주님 만찬 성목요일]
루카 4,16-21
발씻김과 성찬례는 하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이들과 구분되는 특징 하나가 있다면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어? 예수님 안 믿는 사람들도 사랑할 줄 아는데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신 유일한 이유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완성하러 오신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사랑이 아니면 부모를 사랑할 수 없고 형제를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이웃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을 가능하게 해 주는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요? 성찬례입니다.
말씀으로는 목욕을 하는 것처럼 어느 정도 사랑을 위한 준비를 시킬 수 있지만, 자아와 삼구를 완전히 씻지는 못합니다.
자아와 삼구는 하느님의 피가 아니면 씻겨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서 부모의 피 흘림이 아니면 그것이 씻겨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유튜브에서 보면 앞이 안 보이는 아빠가 아기를 혼자 키우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이도 선천 백내장으로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빠는 혼자 젖동냥해가며 아기를 키웠고 그것이 ‘세상에 이런 일이’에 방영되었습니다.
덕분에 후원금이 들어와 아기를 수술할 수 있었습니다. 아기는 왼쪽 눈은 잃었지만, 오른쪽 눈은 0.2라는 시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16년이 지난 뒤 아들은 고등학생이 되었고 공부도 잘하여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제작진은 아들에게 16년 전에 아버지가 자신을 키우기 위해 고생했던 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손을 꼭 잡습니다.
마치 나무토막에 불이 붙으면 그 안에 있는 물과 진액이 빠져나오는 것처럼 아버지의 피는 아들의 자아를 눈물로 빠져나오게 한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바다를 거닐며 바다의 색깔과 파도의 색깔을 설명해줍니다.
먼저 부모를 사랑하지 못하면 형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형제는 부모의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하려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 이야기에서 아이는 형제가 없습니다.
저는 90cm밖에 크지 못한 ‘대성이’의 예를 들고 싶습니다. 대성이는 선천성 왜소증을 앓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이지만, 다섯 살짜리 동생에게 장난감을 빼앗깁니다.
하지만 동생을 용서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를 합니다.
제작진이 어떻게 참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대성이는 대답합니다.
“형이니까요!”
자신을 동생의 형으로 만들어준 이가 부모입니다.
대성이는 아빠, 엄마가 자기를 위해 얼마나 고생하는지 잘 압니다.
그래서 아버지 폐지와 폐품을 줍는 것을 고사리손으로 도우려고 합니다.
미안해하는 아버지를 오히려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자신은 괜찮다며 위로합니다.
자아가 부모의 피로 죽은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아이가 어떻게 형제를 미워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사랑을 받은 동생은 형이 수술을 할 때 눈물을 흘립니다.
동생도 철이 없는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성찬례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발씻김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요한은 이미 성찬례에 관한 내용이 공관복음에 기록되어 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대신 그 성찬례의 의미를 더욱 깊이 새기는 발씻김 예식을 넣음으로써 발씻김을 통해 성찬례의 의미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한 것입니다.
성찬례의 목적이 하나 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서 형제들을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우리가 성찬례 없이 사랑이 가능했다면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살과 피를 내어주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찬례가 어떻게 우리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까요?
바로 오늘 복음의 발씻김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찬례에 참여하나요?
성찬례를 통해 사랑을 방해하는 자아와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이 눈물로 빠져나오나요?
유다는 예수님을 한 번 배반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 배반했습니다.
둘 다를 위해 예수님은 피를 흘리셨습니다.
베드로는 유다를 더는 미워할 수 없습니다.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피 흘림을 통해서만 이웃 사랑이 가능한 것입니다.
한 부모의 피 흘림이 한 형제를 만들 듯이, 하느님의 피 흘림은 모든 피조물을 형제로 만듭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6일 [주님 만찬 성목요일]
루카 4,16-21
그 어떤 유언보다도 설득력 있고 값진 유언, 세족례(洗足禮)!
최후의 만찬! 그 광경이 화폭에 담겨 여기저기 볼 수 있기에 우리 눈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 생각만 해도 섬뜩하고 살 떨리는 표현입니다.
이제 이 식사가 끝나면 더 이상 지상에서는 식사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저녁 만찬이 끝나고 나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직 끔찍한 고통과 참혹한 죽음뿐입니다.
과거 사형이 집행되던 시절, 최고수들에게 ‘그날’이 확정되면, 교도소장이며 간수들이며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바라보는 눈빛에 뭔가 안쓰러움이 느껴지고, 갑자기 친절해지고, 특식도 제공해 주고...일종의 특별 대우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최고수들은 직감합니다.
드디어 때가 왔다는 것을.
어찌 보면 예수님을 위해 차려진 최후의 만찬도 일종의 특식이었습니다.
이 시간이 끝나면 이제 남아있는 것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골고타 언덕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외아들이셨지만, 동시에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지니셨던 분, 철저하게도
한 인간 존재였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어찌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초조와 번민이 밀물처럼 밀려왔을 것입니다.
그 극한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유혹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끝끝내 아버지의 뜻에 철저하게 순명합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혹독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합니다.
스승님께서 그토록 엄청난 고통을 겪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모습을 한심 그 자체입니다.
아직도 돌아가는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재정 책임자였던 유다 이스카리옷을 예수님을 팔아넘기기 위해 골몰하고 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지키지도 못할 헛맹세를 남발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예수님께서는 놀랄만한 광경을 연출하십니다. 이른바 세족례였습니다.
세족(洗足)은 무엇입니까?
발을 씻어주는 행위입니다.
통상 세족은 종이 주인에게, 신하가 임금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해드리는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왕 중의 왕이요, 인류 만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신하요 제자, 종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행하신 세족례는 그 어떤 유언보다도 설득력 있고 값진 유언이었습니다.
“주님이요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요한복음 13장 14~15절)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만찬 성목요일>
(2023. 4. 6. 목)(요한 13,1-15)
<사랑>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겉옷을 입으시고 다시 식탁에 앉으셔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12-15)”
사랑은 ‘같아지는 것’이고, ‘내려가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일은, 제자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신 일이고,
“사랑은 같아지는 것”, 또는 “사랑은 내려가 주는 것”이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극진히 사랑하셨다.’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특히 중요한 말씀은,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사랑 실천’은 신앙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신앙은 사랑으로 증명되고, 사랑은 신앙으로 완성됩니다. 사실상 신앙과 사랑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르치는 입장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내가 먼저’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말씀은, “너희끼리만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사랑하여라.” 라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마태 5,46-47)”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일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성목요일에
‘세족례’를 거행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식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세족례 예식을 한 번 거행한 것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 실천은 일 년 열두 달, 날마다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성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 후에 ‘성체조배’를 실시합니다.
그 성체조배는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마태 26,40)” 라는 말씀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사랑은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과 함께 있어 주기를 바라셨고,
지금도 신앙인들이 당신과 함께 있기를 바라십니다.
‘함께 있다.’ 라는 말을 요한복음에 있는 ‘머무르다.’ 라는 말에 연결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4).”
이 말씀에서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는 “내가 너희 안에 머무르고 있으니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찾아서 어디 먼 곳으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내 안에 머물러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내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내 안에 계신 예수님 안에서 머무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체조배’ 라는 형식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은 함께 있어 주는 것”이라는 말은, ‘마음’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몸’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하는 일입니다.
성삼일 전례는 공동체가 함께 한 마음이 되어서 ‘예수님 곁에서, 또는 안에서 머무르는 일’입니다.
‘공동체’ 라는 말과 ‘함께’ 라는 말은 모두 ‘사랑’에 연결됩니다.
수난과 죽음을 앞둔 예수님 곁에 머무르면서 깨어 있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우리는 장례미사 때 시편 23편을 화답송으로 노래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시편 23,1-4).”
우리가 ‘어둠의(죽음의) 골짜기’를 갈 때, 주님께서는 우리 곁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제 홀로 외롭게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주님을 위해서 우리도 주님 곁에 함께 있어 주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 묵묵히 예수님 곁에 계셨던 것처럼......
<그냥 함께 있어 주는 것도 ‘큰 사랑’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