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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뒤는 불암산, 그 앞은 도솔봉, 앞 왼쪽은 하강바위
數峯迢遞入雲間 몇 봉우리 아득하게 구름 사이로 들어가
雲母輕明隔翠鬟 푸른 산 저편에 운모가 산뜻하게 반짝이네
自笑老年全眼錯 우스워라 노년에 눈이 온통 흐릿해
倩人要問是何山 사람 시켜 물어야겠네 무슨 산이냐고
ⓒ 한국고전번역원 | 강여진 (역) | 2009
――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 1629~1703), 「수락산을 바라보며(望水落山)」
▶ 산행일시 : 2020년 8월 30일(일), 흐림, 엄청 더운 날
▶ 산행시간 : 6시간 38분
▶ 산행거리 : 도상 11.2㎞
▶ 교 통 편 : 전철과 버스 이용
▶ 구간별 시간
09 : 12 - 4호선 전철 상계역, 산행시작
09 : 55 - 불암정(佛岩亭, 300m)
10 : 35 - 불암산 석장봉
11 : 17 - 덕릉고개
11 : 55 - 305m봉, ┳자 능선 분기
12 : 06 - △372.6m봉
12 : 44 - 도솔봉(538.5m)
12 : 55 - 치마바위
13 : 50 - 620m봉, ┫자 갈림길
14 : 04 - 수락산 주봉(△640.6m)
14 : 12 - ╋자 갈림길 안부
14 : 34 - 내원암
14 : 42 - 금류폭포
15 : 36 - 옥류폭포
15 : 50 - 청학리 수락산마당바위 입구 버스정류장, 산행종료
1-1. 산행지도(불암산, 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 성동 1/25,000)
1-2. 산행지도(수락산, 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 성동 1/25,000)
▶ 불암산(佛岩山, △509.7m)
요즘 일터로 출근하는 날마다 마치 전쟁터에라도 나가는 듯한 비장한 기분이 든다. 산행도
마찬가지다. 소리 없이 코로나19가 한 발 한 발 내 곁에 다가오는 느낌이다. 오늘도 무사할
까? 하루하루가 아슬아슬하다. 4호선 전철 상계역사에서 바라보는 불암산이 안개에 가린 것
조차 불암산 또한 마스크를 써서 알아볼 수 없는 게 아닌가 한다.
불암산을 오르는 많은 등로 중 하나이다. 상계역 1번 출입구에서 나가자마자 대로를 건너고
직진한다. 오른쪽 중계중앙하이츠 아파트의 끄트머리 사거리에서 좌회전한다. 상계제일중학
교 앞을 지나고 한산한 언덕바지를 약간 오르면 재현중학교 정문이 나온다. 그 왼쪽 울타리
를 끼고 도는 소로를 따라 계곡을 건너면 근린공원이고 이정표가 안내한다.
직진하는 대로는 계곡 쪽으로 가고 왼쪽 소로는 곧장 능선을 오른다. 불암산 정상 1,865m.
왼쪽 소로를 따라 능선을 오른다. 완만한 바윗길이다. 후덥지근한 날씨라 첫 피치부터 땀난
다. 가파를만한 바위 슬랩에는 발이 걸리게 볼트를 박고 쇠줄 핸드레일을 설치했다. 슬랩은
한 피치 오르고 나면 잠잠해지기를 반복한다.
등로는 만나는 지능선 또는 지계곡마다에서 모여든다. 마사토 깊게 패인 등로는 슬랩 지나고
도 차츰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만만치 않은 오르막이라 한 발 한 발 호흡에 맞춰 천천히 걷는
다. 암벽을 비스듬히 오르는 대슬랩이 나온다. 여러 발걸음에 닳고 닳아 핸드레일 잡고도 미
끄럽다. 이어 데크계단 길게 오르면 300m봉 불암정이다.
첫 휴식한다. 오늘 산행준비가 매우 소홀했다. 서울시의 간곡한 당부대로 제발 집에 좀 있으
시라는 가족들의 사정을 뿌리치고 나온 탓이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먹거리는 물
1.5리터, 김밥 한 줄, 빵 2개가 전부다. 아침에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일기예보는 하루 종일
그럴 거라 했다. 지난 8월 9일 도봉산 산행 때 폭우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김밥도 먹히지
않던 것을 고려했다.
불암정 첫 휴식에서 물을 반쯤이나 마셔버린다. 물 부족으로 된 곤욕을 치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불암정 주변에는, 수락산 곰봉 매월정 주변에 김시습의 시판을 세웠듯이, 사명대사 유
정(四溟大師 惟政, 1544~1610)의 몇 개 시판을 세웠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때 강화정사
로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강화를 맺고 포로로 잡혀간 동포 3,500여명을 데리
고 귀국하였다.
시판에 새긴 사명대사의 「대마도에서 꿈에 한강을 건너다 깨면서(在馬島夢渡漢江覺而
作)」이다. 이 시를 읊어보며 대사를 추모한다. 번역은 시판보다 개성상인이란 분이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번역이 나은 것 같아 그에 따랐다.
秋院寥寥夜正長 가을 동산 적막하고 밤은 길기만 한데
月明寒葉下橫塘 밝은 달 아래 서늘한 잎이 긴 못에 떨어지네
歸心不怕鯨波險 돌아갈 마음에 고래 뛰는 파도도 두렵지 않거니
夢裏蔥蔥到洛陽 꿈속에서 총총히 서울에 이르렀네
불암정을 약간 내리면 야트막한 ┫자 갈림길이다. 왼쪽은 폭포약수터를 오가는 길이다. 물
보충하려고 그리로 잠시 따라가 본다. 계류 잴잴 흐르는 계곡 건너고도 한참 사면을 돌아갈
것 같아 그만 두고, 계류나마 꾹꾹 눌러 담는다. 주등로로 가는 샛길을 오르고 연속해서 가파
른 대슬랩이 이어진다. 불암산 서벽 자락이다. 얌전히 등로 따른다.
석장봉. 불암산 정상을 오르지 않는다. 이도 용기다. 금세 안개가 덮칠 기세다. 그러면 거기
에서의 조망도 무망일 터. 석장봉 암반에서 안개 잠깐 걷힌 틈을 타서 불암산을 바라보고 수
락산을 향한다. 석장봉 암릉을 간다. 암면이 축축하여 미끄럽다. 달달 긴다. 주등로인 데크계
단과 만나고 왼쪽으로 폭포약수터 가는 ┫자 갈림길 지나 뚝뚝 떨어진다.
숲길에 들면 모기가 극성이다. 이미 숱하게 물렸다. 가뜩이나 후끈한 대기에 온몸이 가렵기
까지 하니 여간 괴롭지 않다. 명나라 개국공신 호유용(胡惟庸, ? ~1380)이 모기에 물려 죽
임을 당했다. 그의 고통이 오죽했을까. 어쩌면 명 태조 주원장은 ‘공신은 우환’이라고 한 유
기(劉基, 1311~1375)의 말에 공감했다. 주원장은 호유용을 모반죄로 처형하면서 모기떼가
달려들어 물도록 그를 벌거벗기고 꿀을 발라 숲속에 묶어두었다.
안부. 직등은 오를 수 없는 암벽이라 오른쪽 사면을 돌아 얕은 골짜기로 오른다. 등로 살짝
벗어난 암봉인 410.5m봉은 들르지 않는다. 크랙 비집어 슬랩을 올라야 하는데 안개가 도와
준다. 불암산이 안개에 캄캄하니 가렸다. 안개가 걷히면 마음이 변할까봐 서둘러 내린다. 덕
릉고개 쪽에서 오르는 여러 등산객들과 만난다. 그들 또한 땀으로 목욕한 모습이다.
바닥 친 안부는 덕릉고개다. 덕릉고개(德陵--)는 선조(宣祖, 1552~1608)의 아버지인 덕
흥대원군(德興大院君, 1530~1559)의 묘소인 덕릉이 이 고개 동쪽에 있는 데서 유래된 이름
이라고 한다.
2. 불암정에서 바라본 석장봉, 오른쪽 불암산 정상은 안개에 가렸다.
3. 불암산
4. 불암산 남릉 주등로
5. 불암산, 수락산 도솔봉 동릉 △372.6m봉 전망바위에서
6. 수락산 도솔봉 동릉 △372.6m봉 전망바위
7. 도솔봉(兜率峰, 538.5m)
8. 왼쪽 뒤는 불암산, 앞은 도솔봉
▶ 수락산(水落山, △640.6)
물이 달랑달랑하니 더 마시고 싶다. 물을 어떻게 구할까 하는 생각뿐이다. 하도 허기져 빵을
꺼냈으나 물이 없으면 도저히 씹지 못하겠다. 덕릉고개에서 도솔봉 까지 가는 2.5km가 오늘
산행의 최대 난코스가 될 것이다. 물만 있으면 부드러운 미음완보가 제격인 숲속 산책길인
데, 물이 없으니 걸음걸음이 팍팍하다. 군부대 철조망 아래 사면을 돌 때는 귀기우려 골짜기
물소리 찾는다. 조용하다. 내 거친 숨소리만 들린다.
이에 더하여 땀으로 속속들이 젖는다. 젖은 바지자락이 다리에 휘감긴다. 산행에는 통이 좁
은 바지가 영 불편하다. 통이 넓은 핫바지가 백번 낫다. 305m봉은 ┳자 능선이 분기한다. 왼
쪽은 도솔봉, 오른쪽은 순화궁고개를 지나 국사봉으로 간다. 송전철탑 밑을 지나고 한 차례
슬랩을 오르면 노송이 반기는 너른 암반이다. 경점이다. 남쪽으로 시원스레 조망이 펼쳐진다.
봉우리 같지 않은데 등로 옆에 삼각점이 있다. 성동 409, 1994 복구. 장의자 놓인 전망 좋은
쉼터를 지나고 도솔봉 오른쪽 사면을 데크로드로 간다. 도솔봉을 오를까 말까 몇 번이나 망
설이다 그냥 간다. 안개로 도봉산과 북한산은 가렸다. 많은 사람들이 수락산을 오른다. 거리
두기를 의식하며 걷는다. 치마바위. 크랙 사이를 재밍하듯 비집어 직등한다.
치마바위에는 좌판 주위로 많은 등산객들이 모여 있다. 얼음물부터 산다. 0.5리터짜리가
2,000원이다. 싸다. 20,000원이라고 해도 주저하지 않고 사겠다. 단숨에 한 병을 탈탈 털어
비우고 또 한 병을 산다. 살 것 같다. 비로소 눈에 초점이 잡히고 주변 경물이 또렷이 보인다.
도솔봉과 불암산이 가경이다. 이럴진대 좌판이 오아시스가 아니겠는가! 오래 머문다.
치마바위 지나고 등로는 하강바위를 왼쪽 밑의 슬랩을 길게 돌아가는데 나는 예전처럼 암릉
을 직등한다. 바위 턱 올라 약간 비스듬한 테라스를 살금살금 지나고 하강바위에 다다른다.
예전의 암릉 길이 더욱 험해졌다. 지난 장마 때 폭우가 그랬을 것. 슬랩을 다독이던 흙이 모
조리 쓸려나갔다. 바로 내리기 어려워 뒤돌아서 하강바위 밑으로 간다. 이다음 슬랩에서는
경솔했다. 트래버스를 해야 하는 슬랩이 젖어서 미끄럽다. 바위틈새 풀뿌리 움켜잡아 추락을
면하고, 이어서 직등해야 하는 슬랩의 크랙도 이끼가 끼어 미끄럽다. 손등 가죽이 벗겨지게
재밍하여 오른다. 식겁한다.
이렇게 오른-반대편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지만-암봉이 수락산 최고의 경점이다. 하강바위,
도솔봉, 불암산을 한 눈에 바라보며 혼쭐난 가슴을 진정한다. 이제 험로는 다 끝났다. 무리지
은 등산객들에 섞인다. ┫자 갈림길인 620m봉(철모바위)을 지나면 등로 약간 비킨 사면에
매점이 성업 중이다. 들른다. 얼음물 한 병을 또 사서 점심으로 싸온 김밥 말아 먹는다. 그리
고 수락산 정상인 주봉에 올라서는 좌판에 줄서서 빙과인 비비빅을 사먹는다. 1개에 1,500
원이다.
아마 수락산에 대해 가장 많은 시를 읊은 이는 서계 박세당이 아닐까 한다. 그는 40세에 관
직에서 물러나 수락산 석천동(지금의 장암동 일대)으로 들어가 집을 짓고 학문 연구와 저술
에 힘썼다. 석천계곡의 노강서원(鷺江書院)은 그의 둘째 아들 박태보(朴泰輔, 1654~1689)
의 충절을 기리는 사액서원이다. 노강서원의 ‘노강’은 해오라기가 있는 강, 곧 노량을 뜻한다.
박태보는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하는 소를 올리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해 모진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 가던 중 노량진에서 죽었다. 장살(杖
殺)을 당한 셈이다. 이때 그의 나이 36세였다.
서계 박세당의 시 한 수를 들어본다. 「여러 사람과 수락산에 오르다(與諸人登水落山)」의
3수 중 제3수다.
孤峯拔地勢嵬嵬 외로운 봉우리 땅에 솟아 그 형세 우뚝하니
乍似芙蓉掌上開 언뜻 보매 부용이 손바닥 위에 핀 듯하여라
高士至今留隱跡 지금까지 고사의 은거한 자취 남았는데
游人罕得到仙臺 노니는 사람 선대에 이르는 일 드물어라
瀑流朝見銀河落 아침에 폭포에서 은하수 떨어짐을 보고
鳧影宵從葉縣回 밤에 오리 그림자 따라 섭현으로 돌아오네
年少登山應不厭 젊은이들이야 이 산에 오름 싫어하지 않겠지만
衰遲敢望異時來 노쇠한 몸 감히 후일 다시 오길 바라겠는가
ⓒ 한국고전번역원 | 강여진 (역) | 2009
‘鳧影宵從葉縣回(밤에 오리 그림자 따라 섭현으로 돌아오네)’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전한
다. 이런 고사를 보면 지금처럼 인터넷 등의 정보통신이 없던 그 시기에 외국의 종이 전적을
입수하여 자기 것으로 체득한 선인의 지식이 놀랍기만 하다.
“후한(後漢) 명제(明帝, 재위 57~75) 때 도술을 지닌 왕교(王喬)가 섭현 영(葉縣令)을 지
내면서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조정에 와서 명제를 알현하였다. 그가 먼 거리인데도 불구하
고 자주 오고 수레도 타지 않았으므로, 이를 이상하게 여긴 명제가 비밀리에 태사(太史)에게
그 진상을 알아보라고 명했는데, 태사가, 그가 오는 시기에 한 쌍의 오리가 동남방에서 날아
온다고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오리가 다시 날아오는 때를 기다렸다 그물로 덮쳤는데, 그물
속에는 몇 해 전에 황제가 상서대(尙書臺) 관원들에게 하사한 가죽신 한 짝만 있었다고 한
다.《後漢書 卷82上 方術列傳 王喬》”
9. 하강바위(564m)
10. 앞은 코끼리바위, 맨 뒤 오른쪽은 620m봉 철모바위, 그 왼쪽은 배낭바위
11. 수락산 동릉 463.4m봉(미륵봉)
나는 동봉 김시습(東峰 金時習, 1435~1493)이 내원암(또는 그 근처의 수락정사라고도 한
다)에서 은거할 때 내원암 동쪽에 위치한 이 봉우리를 보고 자신의 호를 ‘동봉’이라 지었다고
생각한다.
12. 수락산 서릉 주등로, 맨 위는 배낭바위
13. 가운데는 하강바위
14. 맨 뒤는 불암산
15. 620m봉 철모바위에서 바라본 불암산과 도솔봉
16. 금류폭포 상단
17. 금류폭포 하단
▶ 금류동계곡
수락산 주봉을 테크계단으로 뚝뚝 떨어져 한 피치 내리면 ╋자 갈림길 안부다. 왼쪽은 석천
계곡으로 가고, 오른쪽은 내원암, 금류동계곡으로 간다. 오늘 수락산을 오른 이유도 사실은
금류, 은류, 옥류폭포를 구경하기 위해서다. 오른쪽으로 내린다. 잘 다듬은 계단길이다. 지능
선을 타는가 했더니 골로 간다. 수락산장을 지나고는 물소리 먼저 시원한 계류와 함께 간다.
수락산장 아래 약수터의 물맛이 일품이다. 지난 폭우 때는 이곳도 지나기 어려웠겠다는 생각
이 드는 계곡이다. 암반을 누비는 계류를 건너고 건넌다. 수락산 정상에서 30분 걸려 내원암
절집이다. 아담하다. 동봉 김시습이 조석으로 바라보았을 463.4m봉이 그때도 저러했을 것.
수려하다.
내원암 대웅보전의 주련은 중국 남송대 선승 야보도천(冶父道川, 생몰연대 미상)의 게송을
걸었다.
虛空境界豈思量 허공경계를 어찌 생각하랴!
大道淸幽理更長 대도는 맑고 그윽하여 이치가 깊고 깊도다
但得五湖風月在 천지에 풍월이 있는 걸 안다면
春來依舊百花香 봄이 오면 옛날처럼 백화가 향기로우리
김시습의 동봉을 바라보며 내원암 절집을 내리고 숲속 길에 들면 오른쪽 계곡에 금류폭포
가 쏟아져 흐른다. 가파른 돌계단 내림이라 폭포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 없어 폭포의 전체 모
습을 살피기는 어렵다. 다만 몇 번이나 기웃거리다 폭포 아래 소에 이르러 탁족객들 사이로
그 일부만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알탕할 생각이 달아날 만큼 시원하다 못해 서늘하다.
대슬랩을 데크계단으로 내리면서 수락산 남릉 주릉이 하늘금으로 트일 무렵 그 아래 깊은 계
곡에 언뜻 보이는 비단 폭을 걸어놓은 듯한 물줄기가 은류폭포다. 데크계단을 다 내리고 그
리로 가는 길이 있을까 두루 살폈는데 지나치고 말았다. 은류폭포 이정표나 방향표지판은 없
고 그리로 가는 길 또한 분명하지 않다. 숲속 탁족객들의 웃음소리를 찾아가지 않은 것이 아
쉽다.
대로와 만난다. 운 좋은 차들은 대로 옆에 주차하였다. 계류 반반한 데는 여지없이 피서 나온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다. 나도 그 근처에 낀다. 그들처럼 나도 속옷차림으로 와폭 아래 소에
뛰어든다. 물속에 누워 바라보는 파란 하늘이 조금 열렸다. 자잘하던 와폭이 어느덧 대폭으
로 변한 건 옥류폭포다. 몇 번 이곳에 왔지만 옥류폭포를 온전히 보는 건 처음이다.
잡상인들의 난장에 옥류폭포를 보기가 어려웠고, 그들에게 돈을 내지 않으면 계류를 만져볼
수조차 없었다. 옥류폭포 아래는 수량이 많고 너른 계류가 흐른다. 가족 단위의 피서객들이
빼꼭히 들어찼다. 플래카드에 쓰인 말대로 청학천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의 자맥
질과 그들의 물장구를 바라보는 나 또한 즐겁다.
청학리 수락산마당바위 입구 버스정류장. 마스크 꺼내 쓰고, 당고개역 가는 버스 기다린다.
18. 하강바위 후면, 아래 골짜기가 은류폭포로 간다.
19. 금류동계곡
20. 금류동계곡
21. 금류동계곡
22. 옥류폭포 상단
23. 옥류폭포 하단, 전에는 잡상인들의 난장으로 이 폭포 구경조차 어려웠다.
24. 옥류폭포 아래, 위에는 ‘청학천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첫댓글 박세당의 아들 박태보는 조선의 인재였다는데, 정쟁중에 젊은 나이에 허무하게 죽었네요. 그에게 사용한 고문은 조선역사를 통틀어 가장 가혹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끝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고 하는데, 수락산에 서원이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