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둥이 시인 한하운(韓何雲, 1919-1975)이 쓴 [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을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호적도 없이 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 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올시다. 과거에는 문둥병에 걸린 사람을 문둥이 또는 나병환자라고 불렀습니다. 영어로는 한센 병자라고 부르지요.
문둥병 환자를 돌보는 대표적인 기관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손양원 목사님이 사역한 곳으로도 유명한, 바로 전라남도 여수에 있는 애양원(愛養院)입니다. 이 애양원이 세워진 과정을 보면 감동적이고 눈물겹기 그지 없습니다. 한 낯선 선교사가 길거리에서 만난 문둥병에 걸린 여인을 [못 본 체하지 않은]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선교사의 이름이 포사이드(Wiley Hamilton Forsythe) 입니다. 포사이드(Wiley Hamilton Forsythe)는 1873년 12월 25일 미국 켄터키 주 해로스 버그에서 태어났습니다.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고(1890-1894), 1898년 루이빌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인턴 과정을 마친 후, 쿠바에서 벌어진 미국과 스페인 전쟁 때 군의관으로 참전했습니다.
포사이드는 1904년 8월 10일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의료 선교사로 파송되어 조선에 입국했습니다. 그는 전라북도 전주에서 순회 진료를 하며 고아원을 운영했습니다. 1905년 어느 날 망골(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했던 말목 장터 근방 마을)에서 강도에게 습격 당한 부상자를 치료해 달라는 간청을 받고 마을에 찾아가 부상자를 치료해 주고 밤이 늦어 그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포사이드는 괴한에게 습격을 당했습니다. 귀가 잘리고 두개골이 깨지고 얼굴과 목에 큰 상처를 입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 착한 이웃 사람들이 그를 조심스럽게 전주로 데려와서 치료 받게 했습니다. 그러나 귀와 머리의 상처가 깊어 순조롭게 아물지 않아 미국으로 가서 치료를 받고 2년 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포사이드는 목포에서 의료 선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선교사 오웬(Clement Carrington Owen) 은 복음 전도자와 의사의 자격을 갖추고 1898년 조선에 입국하여 서울에서 한국어를 배울 겨를도 없이 서둘러 목포로 내려가 유진 벨이 개설한 목포 선교부에 합류하여 열심히 한국어를 배우고 의료 선교를 하며 교회에서는 성경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화순, 보성, 장흥, 순천 등 13개 군이 그의 선교 지역이었다. 1개월씩 순회 선교를 했습니다. 때로는 2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430명에게 학습(교리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1909년 3월-4월 초에 광주 남쪽 250리 지역에서 순회 진료를 하던 중 과로로 인하여 쓰러졌습니다.
그때에 한국인 친구가 그를 가마에 태우고 광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여행길에 먹지도 못하고, 차가운 북풍에 시달리며 산을 셋이나 넘는 고단한 여행을 해야 했고, 새벽 2시가 되어서야 광주에 도착했습니다.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차도가 있는 듯했으나 토요일에 갑자기 폐렴이 악화되었습니다. 닥터 윌슨이 오웬의 몸 상태를 보고 걱정이 되어서 목포에 있는 닥터 포사이드에게 도움을 청하는 전보를 쳤습니다.
닥터 포사이드는 전보를 받고 4월 4일 광주로 향했습니다. 조랑말을 타고 가던 그는 광주 길목 40리 밖 나주에서 길가에 쓰러져있는 한 여인을 발견합니다. [못 본체 하지 않았습니다.] 포사이드는 가던 길을 멈추고 길에 버려진 그 여인을 살펴봅니다. 손과 발은 짓물렀고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온통 상처투성이였고, 걸친 누더기 옷은 피고름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문둥병 환자였습니다.
닥터 포사이드는 위독한 동료 선교사의 병을 고치러 가는 바쁜 길이었지만 길가에 버려져 신음하고 있는 환자를 그냥 버려두고 지나칠 수는 없었습니다. [못 본체]하지 않았습니다. 포사이드는 피고름을 흘리고 있는 그 여인을 감싸 안아 자신의 말에 태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말고삐를 잡고 걸어서 광주로 들어 왔습니다. 광주에 도착한 닥터 포사이드가 그의 조랑말에서 문둥병 환자인 여인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아 내리는 것을 구경꾼들과 함께 지켜보고 있던 당시 광주에서 깡패로 악명이 높던 최흥종은 마음에 가책과 충격을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선교사들의 일을 적극 도왔고, 나환자를 돕는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포사이드 선교사에게 광주는 낯선 곳이었고, 잠깐 다녀가는 곳이었습니다. 포사이드는 동료 선교사 닥터 윌슨을 찾아가서 그 여인에 대한 치료와 거처를 부탁해 보았으나 마땅한 거처가 없었습니다. 그는 고심 끝에 광주 동남쪽에 위치한 옹기 가마터를 발견하고 그곳을 그 여인의 임시 거처로 정하고, 선교사들이 쓰던 침구와 옷가지를 얻어 챙겨주고 목포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닥터 포사이드와 길가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던 나병 환자 여인과의 우연한 만남은 한국에 나병 환자를 위한 병원이 세워지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닥터 포사이드가 목포로 돌아가고 나서 파란 눈 노랑머리 서양의사가 나병 환자를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자 나병 환자들이 하나 둘씩 광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닥터 포사이드의 동료 선교사 닥터 윌슨을 비롯해 광주 지역 선교사들은 닥터 포사이드의 헌신적인 행동에 감명을 받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병든 사람을 치료해 주는 나병환자 병원시설 준비를 서두르게 됩니다. 그러나 뜻밖의 어려움에 부딪치는데 광주 주민들이 병원의 설립을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나병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병원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광주 한복판에는 안 된다는 항의였습니다. 선교사들은 우여곡절 끝에 1912년, 광주군 효천면 봉선리에 나병 환자 수용소와 병원을 세우게 됩니다. 닥터 포사이드와 한 나병 환자의 우연한 만남이 계기가 되어서 4년만에 병원과 수용소가 준공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병원을 찾아 든 환자가 600명에 이르자 시설이 비좁아 1925년 전남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에 터를 닦고 애양원(愛養院)을 건립하여 이주하게 됩니다. 신명기 22장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 그것들을 일으킬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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