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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1)
요 1:1-13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 1:1-13 / [말씀이 육신이 되시다] 천지가 창조되기 전, 아무 것도 존재하기 전에 말씀이 계셨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분은 2)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3) 그분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며 그분이 만드시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4) 그분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이 생명은 모든 인류에게 빛을 주신다. 5) 그분의 생명은 어둠 속에서 비추는 빛이시며 어둠이 결코 그 빛을 끌 수가 없다. 6-7) 하나님께서는 침례 요한을 증인으로 보내 예수 그리스도가 참빛이라는 사실을 증거하셨다. 8) 요한은 빛이 아니었고 다만 그 빛을 증거하러 왔을 따름이었다. 9) 그가 온 후에 참빛이 세상에 들어왔다. 이 빛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이다. 10) 그분이 세상을 만드셨는데도 그분이 오셨을 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12) 그분이 자기 땅에 오셨으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영접한 사람들, 곧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13)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은 혈통이나 육체적 욕망이나 인간의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씀에 의한 것이다.
본문은 예수님의 존재의 위대함, 사랑의 위대함을 보여줍니다.
위대하신 말씀(1-4) 본 단락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합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초월성을 설명하기 위해 헬라의 철학적 용어인 ‘로고스’(말씀)를 차용합니다. 로고스는 헬라의 철학자들이 만물의 생성원리라고 생각했던 철학적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철학적 개념상의 어떤 존재가 아니라 실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계셨다’는 단어는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영원 전부터 언제나 존재해 오신 예수님의 선재성을 설명하면, ‘함께’(프로스; 향하여)라는 전치사는 예수님께서 성부와 영원 전부터 교제하여 오셨음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만물이 예수님께로부터 말미암았다고 사도 요한은 증언함으로써 창세기 1장에서 기술한 창조사역의 주인공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보여줍니다(히 1:2). 또한 사도 요한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밝힘으로써 이후에 요한복음에서 저술 된 생명을 살리는 표적들의 근거가 바로 예수님 자신 속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증언을 거절한 세상(5-11)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을 때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서 세상은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것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을 총칭합니다. 세상은 어둠 속에 있어서 참된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타락함으로 영적 지각 능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일찍 세상에 와서 예수님을 증언하였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를 거절하였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타락한 사람들이 모여 이룬 세상은 죄로 인해 절망적이고 어두워졌습니다. 그 어둠의 무지는 세상의 창조주도 알아보지 못하고 거절할 지경이었습니다.
영접하는 자(12-13) 그런 어두운 세상에도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혈통이나 의지와는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받아들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베드로를 비롯한 무식한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제자들이 될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보여줍니다.
적용: 당신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말해봅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복음의 핵심이며, 심장입니다. 바로 생명이며 빛입니다. 예수님께 관심과 시선을 모으십시오. 우리의 심장이 뛰게 될 것입니다.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습니다(골 1:16-20).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사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함께 하십니다.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 빛과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어두운 죄로 가려서 빛을 보지 못하고 생명의 길이 아닌 죽음의 길로 내 자신이 달려갈지라도 언제나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 설 교 >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주님
이기복 목사
교회 절기로 대림절 첫째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대림절을 영어로 Advent라고 합니다. 이 말은 라틴어의 합성어(ad+venire)로 “오다”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심을 기다리며 맞을 준비하는 계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구원한 메시아를 기다리는 신앙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셨을 때는 맞이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죄를 졌습니다.
오늘날도 성탄절은 해마다 돌아오건만 엉뚱하고 허황된 기대와 기다림 속에서 성탄절을 맞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금년 성탄절은 어느 해 보다도 가장 의미 있는 성탄절 가장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탄절을 맞이하길 소원합니다. 어느 해보다도 어두움이 엄습하는 때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고 맞이합니다.
1.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4절)
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로고스)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은 생명의 원천이면서 생명과 직결되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모든 생명은 빛이 있어야 존재합니다. 영적으로 예수님은 생명의 빛으로 오셔서 오직 예수님이 계신 곳에만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인생은 살았다고 하나 영적으로 죽은 인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죽음의 세력이 어두움이 물러가고 생명의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2. 절망의 세상에 희망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본문 5절에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말씀했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이 세상에는 영적 어두움이 임하였고 절망을 가져 왔습니다. 죄를 범한 인간의 세상에는 온갖 어두움의 세력들이 판을 칩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께서 희망의 빛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개인이나 가정이나 세화에도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희망이 넘치게 됩니다. 어두운 곳은 빛이 들어오면 밝아지고 어둠이 물러갑니다.
3. 죄악 세상에 구원의 빛으로 오셨습니다(9절, 12절).
예수님은 이 땅에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죄악으로 인하여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고 절망 속에 처해 있는 인류에게 구원의 밝은 빛으로 오셨습니다. 본문 9절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으니”라고 말씀하였고, 12절에는 “빛으로 오신 주님을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요 3:19에는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인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구원의 빛으로 오셨는데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어두움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금번 성탄절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영접하고,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영접하여 모두가 죄 사함의 은총을 입으시길 축원합니다.
4. 사랑과 평화, 치유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성탄절의 주제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이 땅에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예수님의 탄생으로 모두 기뻐하고 감격하며 사랑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처럼 어렵고, 외로운 이웃을 돕고 돌보는 사랑의 실천운동에 참여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탄절에는 평화가 실현된 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천군과 천사들이 찬송하길 “하늘에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찬양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과의 화평, 그리고 사람과 사람들과의 평화가 실현 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 세상의 치유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곳에는 각종 질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의 빛은 영적으로나 육신적으로 환경적인 각종 질병을 치유합니다.
5.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는 권세를 주십니다(11절, 12절).
본문 11,12절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즉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에게는 특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특권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입니다. 이 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들은 그 빛을 영접하지 않아 특권을 상실했습니다. 이방인들은 그 빛을 영접하여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금년 성탄절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여 여러분 안에 새 생명이 충만하길 바랍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희망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가난한 자가 부해지며,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축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이제부터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받은 줄 믿고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가고 세상을 이기는 축복이 함께 하길 축원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이동휘 목사
1. B.C.1000년경, 욥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이었습니다.
(욥1:8) (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그러나 욥은 하루아침에 종들이 죽임을 당하고 가축들이 불에 타거나 약탈을 당했습니다. 게다가 당일에 자녀들 모두가 한 집에 있었는데 갑자기 대풍이 불어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한꺼번에 압사를 당하는 환난을 당했습니다. 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욥 자신의 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심하게 번져 질그릇 조각으로 온 몸에서 흐르는 고름을 긁어내는 고통까지 당하게 되었습니다. 욥의 형편이 이러한데 그의 친구들이 찾아와 위로한답시고 위로는커녕 욥을 혹독하게 공박합니다. 한 마디로 겉으로 볼 때,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난 자”(욥1:8)같았지만, 사실은 남모르는 죄악이 있었기 때문에 그같은 엄청난 환난을 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없는 환난은 없다며 인과응보론을 내세워 욥을 심하게 공박할 때, 욥은 그 자신의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마음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욥23:1-9)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3)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4)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5)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6)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7)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하나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무죄함을 털어놓고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해결받을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탄식한 것입니다.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그러나 욥은 자신이 죽어서일지라도 반드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19:25-27)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 자신은 죽게 되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계시기 때문에, 그 때가 되면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아는데서 그치지 아니하고 직접 대면(對面)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욥은 이렇게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을 두고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라고 했습니다.
(27)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이 말씀,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는 욥은 자신의 내장이 다 녹아내려 죽은 뒤라도 하나님을 보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욥은 하나님 보기를 원하고 사모하여 쇠약해졌다는 것입니다. 욥은 이렇게 고난을 받으며 하나님 보기를 사모하다가 마침내 보게 되었습니다. 이를 욥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욥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지금까지 주께 대한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고 했습니다. 이는 이제 하나님과 대화를 통해,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게 되므로 욥은 영안이 열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놀라운 섭리에 대해 새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만나볼 것을 소망했던 욥이, 지금 자기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인지한 이상, 자기의 요구, 즉 하나님을 보기를 원했던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도 ‘언약’, 곧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되었음을 고백했습니다.
(시25:14-15) (14)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15)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시123:1-2) (1)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2)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욥은 자신의 내장이 녹아내리는 고통을 당하며 심신이 쇠약해질 정도로 하나님 보기를 원했지만, 결국 하나님을 육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사정을 다 알고 계시다는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섭리에 순종하고자 하는 놀라운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고난 뒤에 정금같이 단련된 영광이 오리라고 소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욥23:10)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하나님의 시련이 끝날 때에 용광로에서 연단받은 금처럼 내가 깨끗하고 순결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욥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 말씀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지켰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한 음식보다 더 귀하게 여겨 순종했다고 했습니다.
(욥23:11-12) (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욥은 참으로 극한 환난과 재난 가운데서도, “(욥1:21)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며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고 오히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 말씀을 끝까지 지킴으로,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귀로만 듣던 하나님의 말씀을, 이제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하나님을 경험하시는 은혜가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욥처럼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의 아픔과 상처가 있습니까? 그러면 욥처럼 그 모든 사정을 다 아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믿음을 가지시고, 하나님 보기를 소망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하는 은혜가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2. 오늘 본문에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그대로 빛이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고 했습니다.(창1:1-12)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즉 말씀하시는 대로 창조된 것입니다.
(민 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사55:11)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어떤 백부장이 자신이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고 예수께 말씀드리자 예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고 하셨습니다. 이에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며 그의 거침없는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런 신앙을 기뻐하시고 이렇게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이어 유대인이라고 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이 백부장처럼 아무리 이방인일지라도 예수의 말씀 한 마디를 믿고 사는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천국가는데 필요한 것이 국적에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믿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자기들이 특별히 선택된 민족이며,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름 하나로 하나님의 특별한 가호를 받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라는 족보만으로도 구원을 얻어 당연히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신 바는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특수한 민족이나 특별한 계층만의 소유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민족에 관계없이 마음속에 신앙을 가진 모든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3:16) 백부장은 유대인이라 아니라 유대인이 멸시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 11:1)라고 했습니다. 백부장은 바로 이러한 믿음을 소유한 자였습니다. 백부장은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는 다른 어떤 것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께서 자기 종에게 “일어나라”고 다만 말씀 한 마디만 해주시기를, 중풍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자기 종에게 가시지 않으시고 지금 이 자리에서 다만 말씀 한마디만 해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백부장은 주의 말씀을 의심치 않고 믿었고 그 말씀의 권위와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권세있는 명령을 발하실 때, 종의 질병이 그 한 마디의 명령으로 곧 떠나가고 말 것을 확실히 믿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백부장은 눈으로 보지 않고 인간의 생사를 좌우하시는 주님을 전인격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믿는 믿음이야말로 가장 귀하고 숭고한 형태의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마라하는 제자는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제자들의 말에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습니다. 그후 8일이 지나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제서야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한복음20:24-29) 어떤 신체적 접촉을 한다거나 환상을 보는 따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외적 증거에 의지하지 않은 믿음이야말로 복된 믿음, 칭찬받는 믿음입니다. 백부장은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려 하지도 않았고, 예수의 몸이 닿은 손수건이나 그 밖의 다른 어떤 것들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면 충분하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러한 백부장의 태도는 예수님을, 전능하신 우주의 통치자,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으로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당시의 많은 군중들이 예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던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놀라운 그 무엇을 보여 달라는 그 요청 또한 오늘날 우리들의 요청은 아닙니까? 하늘로부터 오는 기적을 육안으로 직접 보게 되면 믿음을 가지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감각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확실한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십니다.(요한복음1:1)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몸으로 나타나신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것이 곧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것이 곧 인격적인 믿음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인격을 만나 보게 됩니다. 말씀 한 마디에 생사를 걸고 사는 사람이 흔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말씀 한 마디를 그대로 생활에 옮기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약 2:26). 과연 본문의 백부장은 ‘살아있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을 소유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한 믿음으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믿노라 하면서 이러한 실천적 믿음이 없다면, 우리의 생활 가운데 그와 같은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믿음이요 헛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확증할 수 있는 길은 그것을 다른 사람들 앞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예수의 참된 모습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믿고 행하시므로 말씀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시고, 그같은 성도 여러분의 삶으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백부장이 예수께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라고 했을 때, 예수께서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고 하셨습니다. 그 즉시 백부장의 종이 죽을 병에서 깨끗이 치유되었습니다. 어둠으로 상징되는 죽음에서 빛으로 상징되는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생명”이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곧 ‘빛과 생명’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 여러분, 말씀이 곧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 말씀으로 영혼이 소성되며 지혜롭게 되며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며 영안이 밝아 범사에 빛과 생명 가운데 거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시19:7-8)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3. 말씀이 육신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요1:12-13)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신분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신분은 ‘어둠’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음으로 ‘빛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빛의 자녀는 곧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요일 1: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성도는 모두가 다 빛의 아들, 낮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어둠’은 죽음, 죄, 사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빛’은 생명,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살전 5: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이처럼 예수 믿음으로 그 신분이 어둠의 자식에서 빛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를 누가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행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예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요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갈 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은 그 믿음으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갈 3: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 3: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과 더불어 복을 받게 됩니다,
(갈3:7-9)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장차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벧전 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고전 15: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또한 그 권세는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하지 아니하고 사망의 종노릇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전15:55-58)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겉으로 볼 때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여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진 것이나 배운 것이나 비록 겨자씨같이 하찮아 보여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누구나 할 것 없이 죽음에 이르게 되지만, 성도 여러분은 생명의 씨가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요일 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예수 믿음으로 부활과 생명, 그리고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했기 때문에 여러분 안에는 생명과 빛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4절)는 말씀은 예수가 빛과 생명의 원천이시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빛 가운데 사는 “빛의 자녀들”이 있고, 어둠에 사는 “어둠의 자식들”이 있습니다. 빛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에 예수 없이 사는 것은 바로 어둠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천지창조의 역사가 빛으로 시작된 것처럼 빛이 없이는 생명의 역사가 없습니다. 마치 빛을 떠나서는 어떤 생물도 생명을 지탱할 수 없는 것처럼 빛되신 예수를 떠나서는 아무도 생명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생명은 죽은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마음이 어둡고 혼돈 상태에 있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마음속에 밝은 빛을 지니며 그 빛을 통해 생명과 삶의 지혜를 가지게 됩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혼돈의 세상에 빛과 어둠을 나누이게 하셨습니다.(창1:1-3). 그 빛과 어둠을 나누이게 하신 말씀이 예수의 몸을 통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에 순종여부가 인간의 삶을 빛과 어둠으로 나누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했던 아담과 이브는 결국 빛가운데 거하지 못하고 어두운 동산 숲속에 숨었습니다. 그 어둠속에 사는 인류를 빛 가운데로 이끌어내시어 생명을 얻게 하고자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여러분의 삶에 빛과 생명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범사에 말씀 가운데 거하는 생활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빛과 생명을 증거하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눈높이 The Eye Level of God
요한복음 1:1-14
여러분은 오늘 말씀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아니면, 오늘 말씀에서 중요하게 짚어봐야 할 말씀들이 두 개가 있습니다.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분명히 알지는 못해도 뭔가 중요한 뜻이 있는 말씀 같다는 생각이 드시지요? 맞습니다. 중요한 뜻을 가진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과 짝을 이루는 말씀이 14절 말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영광은 오직 아버지의 독생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는 유명한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습니다. 그리고 동방에서 박사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가져 온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예수님께서 나셨다는 천사의 음성을 듣고 베들레헴 마구간으로 예수님을 찾아와 경배 드렸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가복음에는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아예 없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는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버전이 다릅니다. “그릭 버전 (Greek version)”이라고 할까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때에 세계는 그리스 문화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Greco-roman Culture”라고 하지 않습니까? 정치적으로 로마가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만, 문화적으로는 로마의 문화라는 것이 독자적인 문화라기 보다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로마 문화”라는 말이 생긴 것입니다. 그 당시 언어는 그리스말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 말만 하면 어디든지 가서 소통이 가능했습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그리스말을 할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십자가 위에 아람어, 그리스어, 라틴어 이렇게 3개국으로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 이렇게 명패를 붙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언어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그리스 사상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프로타고라스 (Protagoras, B. C. 485-414), 소크라테스 (Socrates, B. C. 469-399), 플라톤 (Platon, B. C. 429-347),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B. C. 384-322), 에피쿠로스 (Epicouros, B. C. 342-271) 이미 이런 사상가들의 철학과 사상이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요한은 마태나 마가나 누가보다 더 후에 그의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그 때가 학자마다 이견이 있긴합니다만 대략 서기 90년경이었습니다. 요한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이 그리스 말과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선교학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벌써 1세기 말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서를 기록했던 요한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이 얻은 결론은 그리스 문화권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접촉점 (contact point)”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에게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님의 이야기는 별 흥미가 없을 것입니다. 뭔가 복음과 그리스 문화가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이 필요하다는 것이 요한이 얻은 결론이었습니다.
요한이 찾은 접촉점이 바로 “로고스 (Logos)”입니다. 로고스는 그 당시 그리스 철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고스에 대하여 매우 다양한 이해가 있습니다만, 로고스 개념을 발전 시킨 헤라클레이토스 (Heraclitus, B. C. 535-475)같은 그리스 철학자는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되지만 변하지 않는 로고스에 의하여 지배된다”고 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있어서 로고스는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조화의 원리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에베소에서 살았습니다. 그 후 약 500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헤라클레이토스의 고향에 와서 살았던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로고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로고스는 요한일 발견한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리스 문화와의 접촉점이었습니다.
그리스 철학의 “로고스”에서 복음과의 “접촉점”을 찾은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로고스가 계셨습니다. 그 로고스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로고스는 곧 하나님이셨습니다. 로고스는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모든 것이 로고스를 통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지음을 받은 것 중에서 어느 것 하나도 로고스 없이 지어진 것이 없습니다. 로고스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은 세상 사람들을 비추는 빛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로고스가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에서 사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영광은 오직 아버지의 독생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예루살렘에 살던 유대 사람들에게는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조금 떨어진 나사렛에 사는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난 예수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니까요. 물론 그의 탄생 이야기에 보통 사람들과 다른 이야기들이 있지만 말이예요. 이런 이야기를 그리스 문화권에 사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가서 한다면 누구도 그 이야기를 들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벌써 아네테에는 소피스트들 (sophists)이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사도행전 17장에 나옵니다. 소피스트들은 토론과 논쟁과 변론을 일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요한은 매우 흥미 있는 방법으로 그의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돈 리차드슨 (Don Richardson, 1935-)이라는 캐나다 선교사가 있습니다. 이 선교사는 뉴기니아 (New Guinea)의 사위 (Sawi) 부족에게 복음을 전한 선교사입니다. 이 사람이 1962년부터 15년 동안 사위 부족에게 선교했던 경험을 “평화의 아이 (Peace Child)” 라는 책으로 펴 냈습니다. 이 책이 너무도 유명해져서 지금 27개 언어로 이 책이 번역이 되었다고 합니다. 28분짜리 선교 영화로도 나왔고요. 사위 부족은 1950년 대까지도 석기 문화의 원시적인 삶을 살던 식인종이었습니다. 사위족은 정령 숭배 신앙을 갖고 있어 만물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습니다. 리차드슨은 이 사람들에게 “미아오 코돈”이란 이름으로 소개해 줍니다. 하나님은 모든 정령들보다 가장 위대한 분이라고 소개한 것입니다. 사위 부족의 문화의 특징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배반(背反)의 문화입니다. 상대를 잡아 먹기 위해 친하게 지내며 상대의 환심을 산 후에, 어느 순간 때가 되면 상대를 유인하여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골을 집에 걸어 놓거나 목에 걸고 다닙니다. 리처드슨이 예수님 이야기를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다가도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을 이야기 할 때는 그렇게 좋아했다고 합니다. 사위족의 최대 기쁨은 배반을 당한 사람이 낙심하거나 불행을 겪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리차드슨은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지 선교사 생활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위기에 봉착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온 마을이 시끄러웠습니다. 무슨 일인가 봤더니 사위 부족 가까이에 있는 해남 부족과 그 동안 적대관계에 있었는데 한바탕 전쟁을 치를 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해남 부족은 워낙 강력해서 전쟁을 해 봐야 질게 뻔했습니다. 그래서 사위 부족의 추장이 자기의 6개월 된 아들을 해남 부족 추장에게 바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치면 그 아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두 부족 간에 평화가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이 두 부족 간에 평화 조약을 체결하는 날이어서 바깥이 이렇게 요란하다는 것입니다.
리차드슨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이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 사이에 놀라운 “접촉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전도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제 여러분의 아들을 가슴 아프게 화해의 아이로 내어 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자기의 아들을 화해의 아이로 이 세상에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는 연약하여 병들거나 죽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평화는 깨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평화의 아이입니다.” 이렇게 전도했더니 사위 부족 사람들이 쉽게 복음을 받아 드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중에 우리가 두 번째로 주목해서 봐야 하는 말씀은 14절 말씀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에서 사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영광은 오직 아버지의 독생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o the Word became human and made his home among us.” 하나님이 인간이 되였다! 헤라클레토스와 그 후에 이 사상을 발전 시킨 철학자들에게서는 이런 개념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비록 요한이 로고스를 접촉점으로 해서 복음을 그리스 세계에 전파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요한이 소개한 진짜 복음은 "그런데 그 로고스가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 분 위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 충만했습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사셨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눈높이를 사람들에게 맞추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씀을 읽는 그리스 사람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들 말로 하면 로고스가 인간 세상에 내려 오신 것입니다. 처음에 별 문제 없이 요한복음을 읽던 그리스 문화권의 사람들도 이 장면에 와서 “흠, 흥미 있는 사상인데, 로고스가 사람이 되었다고? 이건 처음 듣는 말인데? 생각 좀 해봐야 하겠는데?” 이렇게 생각들 했을 것입니다.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은 요한복음 20:31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그분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의 관심은 유대인들에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스 문화권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가 소개한 하나님은 높은데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와 똑 같은 humanity (인간성)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나셔서 우리의 모든 삶의 실존적인 문제들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바로 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an come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요한복음 14:6)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이라도 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의 아들을 보내서 우리가 겪는 모든 아픔을 겪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한번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려고 내 눈높이까지 내려 오셨다!” 여러분 이런 찬양 가사가 있지요?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 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그 누군가가 누구인가요? 나의 사랑하는 친구인가요? 나의 부모님인가요? 아닙니다. 그분은 나에게 눈높이를 맞추고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다가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
요 1:1-14 / 김상복 목사
오늘 우리는 감사의 제목이 많이 있습니다. 먼저 할렐루야교회 창립 30주년을 맞이한 오늘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립니다. 30년 전 강남이 막 개발되던 때에 대치동 수정약국 뒷골목에 자그마한 교회가 섰습니다. 소수로 출발한 할렐루야교회는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12년 동안 대치동에 있었습니다. 양재동으로 이사하여 6년 동안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교회 부지를 구입하고 건축을 계획하고 실행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때쯤 분당 야탑동에 이 건물을 건축하고 입당을 했습니다. 그 이후 13년 동안 대학교, 대학원을 다녔고 군대도 다녀왔습니다. 제대 후에는 사회인으로 활발하게 직장을 다녔고 결혼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이제 할렐루야교회가 30세 청년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오늘 교회 설립 30주년을 축하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대치동에서 작게 시작한 할렐루야교회가 오늘날 한국의 우수한 교회로서 지역사회와 국가를, 북한과 세계를 섬기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또한 할렐루야교회의 제3대 담임목사가 취임하는 날입니다. 김승욱 목사님은 이 시대에 꼭 맞는 목사님이십니다. 과거에는 지구가 커보였지만 21세기 오늘날의 지구는 작은 공처럼 줄었습니다.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누가 금메달을 땄는지 실시간으로 알 수 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예술, 종교까지 지구촌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국제화 시대에 걸 맞는 목사님을 하나님께서 할렐루야교회 3대 목사로 세워주심을 감사합니다.
오늘은 또 저의 42년간의 교회목회를 마무리하는 날입니다. 21년 전에 제가 26년간의 미국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중고등학교, 대학교, 군대, 직장 생활 3년 반까지 다 하고 26살에 미국을 갔었으니까 한국에 익숙한 편인데도, 귀국해서 마음의 안정을 찾기까지 5년이 걸렸습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제 마음에 ‘아, 하나님이 정말 나를 한국에 부르셨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김승욱 목사님은 10살 때 미국에 가셔서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하셨어요. 감사한 것은 김승욱 목사님은 한인교회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고 주님께 헌신했습니다. 미국 신학교를 다녔지만 전도사와 담임목사는 계속 한인 교회에서 했습니다. 김 목사님은 캘리포니아 대학가의 학생과 교수가 주로 출석하는 데이비스 장로교회 담임 목사를 맡아 800명으로 성장시키셨습니다. 목회를 잘 하니까, 김 목사님이 34세 때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교회인 필라델피아 연합장로교회에서 담임목사로 모셔갔습니다. 그곳에서도 성공적으로 목회를 하셨습니다. 그러자 캘리포니아에 있는 남가주 사랑의교회에서 김 목사님을 모셔갔고 지금까지 그곳에서 목회를 잘 해오시면서 그 교회를 미국의 100대 교회 가운데 유일한 한인 교회로 성장시켰습니다. 작년에 교회에 거창한 드림센터라는 큰 프로젝트도 성공적으로 완성하셨습니다.
목사님은 젊지만 많은 목회 경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많이 경험한 목사님이십니다. 지금 할렐루야교회는 이런 목사가 필요합니다. 지구촌 시대에 할렐루야 교회와 한국 교회가 국제화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시대적 요구에 꼭 맞는 목사님을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보내주셨습니다. 우리 교회의 3대 담임목사님을 청빙하기로 했을 때, 저는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셨다고 믿고 기도만 했습니다. 목사님을 선정하는데 전혀 관여하지 않고 완전히 청빙위원회에 맡겼습니다. 왜? 저는 정말 자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정한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을 찾아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독립교회이기 때문에 어느 교단의 목사님이 오셔도 괜찮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의 모든 교회는 다 형제자매들이고 모든 신도는 우리 가족이며 모든 목사님들은 다 우리의 동역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곳에서 오시든 상관이 없습니다.
청빙위원회는 한국과 전 세계에 계신 700-800명 정도의 후보자 목사님들의 명단을 만들었습니다. 후보자들을 압축하여 10명 쯤 되었을 때 후보 목사님들이 한 분씩 우리 교회 금요부흥회에 와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분들은 자신이 후보자인 줄도 모르고, 할렐루야교회가 금요일마다 타 교회 목사님들을 모시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들을 만나고 설교를 들으면서 ‘아, 저 분일 수도 있겠다!’고 여긴 분들은 2번씩 모셨습니다. 물론 그분들은 몰랐지요. 이런 과정을 거쳐서 최종으로 세 분이 선출되었고 그 세 분을 두고 투표를 한 결과, 만장일치로 오늘 취임하시는 김승욱 목사님이 결정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물론 김 목사님의 귀국 결정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김 목사님에게 “한국으로 돌아가라! 할렐루야교회로 가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사모님과 자녀들이 확인해 주었습니다. 제 경우에는 제가 할렐루야교회에 가는 것을 하나님과 저 둘 사이에서 나타났고 저는 순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제 아내도 딸들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김승욱 목사님은 아내와 자녀들이 적극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당신의 종이라는 것을 그 가족의 적극적인 동의를 통해서 알려주셨습니다. 오늘 오후 3시 취임예배를 마치면 김승욱 목사님은 저와 제 아내의 담임 목사님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김승욱 목사님을 기쁜 마음으로 담임목사님으로 맞이해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김상복 목사가 모든 의무를 다 마치는 날입니다.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여러분 덕분에 참 행복했습니다. 모든 목사님이 저만큼만 행복하게 목회를 끝낼 수 있다면 보통 축복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만나서, 훌륭한 분들, 사랑할 수 있는 분들, 사랑스러운 분들을 많이 만나서 기쁨으로 목회를 마무리하는 이 날, 여러분께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한쪽 눈을 감고 저를 봐 주신 것 감사합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의 30주년 생일이요, 새 목사님이 오시는 날이요, 구(舊) 목사님이 마무리하는 날이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참 기쁜 날입니다.
할렐루야교회는 분당에 아름다운 교회를 짓고 두 개의 건축대상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한국의 교회 건축 가운데 건축 대상을 받은 건물이 처음 생긴 것입니다. 한국건축사협회에서 대상을 결정할 때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종교 건물에 상을 주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라는 반대 의견에 어느 분이 “우리는 그 건물이 훌륭해서 뽑은 것이지 종교단체 건물이기 때문에 뽑은 것이 아닙니다. 종교 건물이라고 해서 제외시키는 것은 차별대우를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건축협회장께서 그 뒷이야기를 저에게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좋은 건물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할렐루야교회의 기초와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소망이요 생명이요 빛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섬기고 예배하는 유일한 분입니다. 본문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절)고 하셨습니다. 영원 전부터 영존하신 로고스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창조주이십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2-3절). 우리는 영존하신 로고스(말씀)시며 우주의 창조자이신 그분을 믿고 선포하고 섬깁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4절) 우리가 그분에게서 이 땅의 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함께 받았습니다. 인류의 소망이요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 여러분과 저의 구주시고 이 교회의 주인이시고 우리가 영원히 예배하고 전파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4-5절). 영원하신 하나님, 창조자 하나님, 생명이신 하나님, 빛이신 하나님, 이분이 인류의 소망이요 세상의 소망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소망이요 이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 담임목사도 여러분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일 뿐 교회의 주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주인으로 30년 동안 섬겨 오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6절). 요한은 사람이었습니다. 메시아가 아닌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죄성이 있고 장점과 단점이 함께 있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실망, 걱정, 근심, 고민도 있습니다. 목회자는 인간일 뿐입니다. 우리의 최고의 목회자는 이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사람을 선택했습니다.
저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제 자신도 잘 압니다. 저 나름대로 노력은 했지만 인간이기에 여러분을 만족시킬 수 없는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택해서 목회자로 삼으셨습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드높이는 목회자일 때만 교회의 축복이 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하려고 노력을 해왔습니다. 목회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맡겼기 때문입니다.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인간이 어떻게 하늘의 일을 합니까? 육신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영적인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선택해서 세워주시고 사명을 주셨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나서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 영적인 일을 하겠다, 하늘의 일을 하겠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할 수 없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할렐루야교회에 작은 선(善)이나, 작은 축복이 있었다면 담임목사라는 인간 때문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할렐루야교회와 여러분이 더 큰 열매를 맺을 시간이 왔는데 우리 가운데 주님이 역사하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역사를 하셔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육신을 가진 사람이 영적인 일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 이것이 사실입니다. 작은 축복조차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과 자비를 베푸신 것임을 알고 모든 영광과 찬송을 하나님께 올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틀림없는데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고 보내셨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김승욱 목사님을 볼 때마다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인 줄로 알고 존경해주시기 바랍니다. 김승욱 목사님은 이제 46세입니다. 여러분의 아들 뻘이나 동생뻘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 분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김 목사님을 존경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함으로써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주의 종이 되도록 함께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미국 교회에서는 ‘3P’라고 해서 목사님을 위해 세 가지를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첫째, “그분을 기도로 하나님께 올려 드려라(Pray him up)!” 목사님을 위해서 꾸준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위해 기도해주신 것처럼 김승욱 목사님을 위해 꼭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운데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께도 축복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분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단점만 눈에 보입니다. 늘 기도로 받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둘째, “그분을 칭찬(격려)해 드려라(Praise him up)!” 담임목사는 성도들이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만 성도들이 격려하고 기도하고 칭찬하고 사랑해 드리면 그분이 점점 더 꽃이 필 수 있습니다. 김 목사님은 지금 46세에 우리 교회에 오셨는데, 저는 50세에 와서 어느덧 71세가 되어 21년째 목회를 하고 은퇴를 했습니다. 김승욱 목사님은 앞으로 25년을 더 해야 지금 제 나이가 됩니다. 오랜 시간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손들과 함께 목회를 하셔야 되니 여러분이 꼭 기도해주시고,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분을 칭찬하고 격려해서 그분에게 힘을 실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목사님이 용기가 나고 더 목회를 잘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훌륭한 자격을 갖춘 목사님을 모셨지만 그래도 인간에 불과하니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좋은 목사로 만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사례비를 꼭꼭 드리라(Pay him up)!” 미국 교회의 이 세 가지 말이 오늘 우리 할렐루야교회에도 적용이 됩니다.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고 격려하고 좋은 목사로 세워서 김승욱 목사님의 리더십 때문에 할렐루야 교회와 여러분의 가정뿐만 아니라 이 지역사회가 복을 받고 한국 교회가 복을 받고 우리 민족이 복을 받고 세계에 큰 축복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하나님께서 선택해서 사명을 주신 김 목사님과 함께 계속 나아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은 예수님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10-11절). 영존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 빛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오셨는데 세상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12-13절)고 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슴에 역사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을 깨닫고 받아들이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것은 혈통으로 육정으로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며 우리가 전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할렐루야교회와 여러분과 저와 김승욱 목사님이 하나가 되어,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한 것처럼 이 놀라운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절). 예수님만이 영화로우신 분입니다. 우리가 영광스러운 신앙인이 되려면 그분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에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와 친해져야 합니다. 그를 깨닫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그분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요 생명임을 알고 그분에 대해 증거 하는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와 같은 교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
요 1:1-5 / 이정익 목사
예수님은 처녀의 몸에서 잉태되어 세상에 오셨습니다. 구약성경은 이 사실에 대해서 여러 번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일념으로 그렇게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바로 오늘이 그 성탄절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그 예수가 누구신지에 대해 말씀을 나눴습니다. 요한은 예수는 왕이시고 영광의 주시오, 또 영생의 주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요한은 그 예수님을 또 다른 차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창세기 1장의 내용을 압축해서 기록한 말씀입니다. 본문을 보면 요한은 또 몇 가지로 예수를 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 오심
1절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나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2-3절에서는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그”와 “말씀”은 예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정신 차리지 않고 읽으면 헷갈립니다. 여기서 소위 삼위일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는 아주 어려운 교리이고 난해한 신학입니다. 우리가 흔히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성부, 성자, 성령”을 말합니다. 이 세 분은 속성은 하나이지만 격이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는 없습니다. 삼위일체는 성경을 공부하고 복음을 전파하다가 만들게 된 신학이론입니다. 그렇지만 삼위일체 개념은 균형 있는 신앙이고 건강한 신학입니다. 균형 없이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거기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한때 예수론만 강조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는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만 강조했었습니다. 또 한편에서는 성령론만 강조되기도 했습니다. 그 때는 성령 받고 능력 받는 것만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한쪽으로 치우친 편협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균형 있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삼위일체 신앙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6-20절을 보면 삼위일체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 가운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는 단순히 종교적인 의식이 아닙니다. 세례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의미합니다. 세례 받을 때 우리는 사죄의 은혜를 입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소속이 하나님께로 이전되게 됩니다. 즉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새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는 나의 이전의 삶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에서 살아가는 새 삶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삶에서 세례 이전과 이후는 엄청나게 신분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서의 세례는 과정이고 생명이고 주님의 부탁이고 명령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을 보면 그 세례를 줄 때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주라고 하셨습니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세례를 베풀 때 삼위일체의 하나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이 삼위의 하나님 모두가 창조사역을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소서!” 했을 때,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요한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오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빛으로 오심
4절을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오셨고, 동시에 생명과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께 가면 그 빛을 이어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생명, 빛, 사랑, 진리라는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빛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빛은 어둠을 밝게 만들고 죄를 태워버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불의를 멀리하게 되고 죄를 멀리하게 되고 멸망에서 멀어지게 되고 심판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는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의 사람들은 이 빛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밝은 것보다는 적당히 어두운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 삶이 어두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정신이 어둡고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에는 “어둠의 자식”이라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빛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빛이 없으면 온갖 부정적인 것들이 자라나게 됩니다. 금년 전반기에 비가 많이 왔습니다. 비가 많이 왔다는 얘기는 구름이 많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일조량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각종 채소들과 과일들이 자라지 못했고 농사가 잘 안되었습니다. 특히 벼농사는 일조량이 풍부해야 하는데 비가 많이 와서 구름이 많이 끼면 곧 바로 벼에 도열병이 발생하고 벼멸구가 왕성하게 됩니다. 도열병은 일조량이 적으면 발생하는 병입니다. 일조량이 부족하면 습한 곳이 많게 됩니다. 그러면 그곳에 곰팡이가 발생하고 이끼가 끼고 벌레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농사를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 햇빛이 적기 때문입니다. 빛은 그런 역할을 합니다. 세계적으로 맛있는 사과는 캘리포니아 산 사과입니다. 캘리포니아는 사막지역이라 연중에 거의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매일같이 따가운 햇빛이 내리쬐기 때문에 일조량이 풍부합니다. 그래서 벌레가 없습니다. 심지어 여름에는 모기도 별로 없습니다. 이렇게 벌레가 없으니까 농약을 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과일이 빛깔이 좋고 맛이 좋아 껍질 채 먹는 것입니다. 이렇게 식물이나 채소나 과일이나 자연 모두가 햇빛을 필요로 합니다. 햇빛이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를 받아들이면 먼저는 내 안이 밝아집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밝아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이나 이 세상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빛이 밝으면 다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적나라하게 들어나는 것을 꺼립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의 치부가 전부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밝은 빛을 싫어하고 그 대신 어둠을 좋아합니다. 많이 밝은 것보다 적당히 어두컴컴한 곳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도 큰 교회를 좋아합니다. 큰 교회에 가면 적당히 사람들 속에 묻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그만 교회에 가면 자기가 훤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싫어합니다. 또 앞자리도 싫어합니다. 앞자리에 앉으면 자기가 훤히 나타나버립니다. 그래서 뒷자리를 좋아합니다. 뒷자리는 자세가 참 편안한 자리입니다. 졸기도 좋고 전화 문자도 하고 메일도 볼 수 있고 주보도 읽기도 좋습니다. 그래서인지 예배가 시작될 때면 언제나 앞자리는 많이 비어있습니다. 또 선을 볼 때도 밝은 곳은 피합니다. 좀 컴컴한 곳에서 선을 봅니다. 밝은 곳에서 보면 내 얼굴 주름살이 훤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을 보는 곳에 가면 한결같이 어두컴컴한 곳에 촛불을 켜 놓습니다. 그런 곳에 가서 앉아 있으면 다 돋보이게 됩니다. 이렇게 이 세상은 이렇게 어두운 곳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두운 곳을 좋아하면 부정적인 결과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마치 햇빛이 없는 곳에 곰팡이가 일고 이끼가 끼고 벌레들이 모여드는 것처럼 빛이 없는 곳은 우범지대가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 세상의 각종 불의가 다 모여들게 됩니다.
예수는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 빛은 생명을 주는 빛이고 들추어내는 진리의 빛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무섭게 심판을 하는 빛이기도 합니다. 이 빛 되신 예수를 내가 받아들이고 영접한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어둠의 세상은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으로 오심
4절을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길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빛을 이어받은 자임과 동시에 예수의 생명을 이어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생명이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생명과 구원받지 못한 생명은 엄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해 어둠속에 있는 생명은 살아있으나 죽은 생명입니다. 옛날에 구원받지 못한 나, 이 빛을 모르던 나와 구원받은 나와는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용, 모양, 속성, 질, 색깔 등 전체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옛날과 비교해 보십시오. 예수를 모르고 살 때의 나와 오늘 예수의 자녀가 된 이후의 나를 비교해 보십시오. 얼마나 다릅니까? 내용이 다르고 질이 다르고 색깔이 다르고 모양이 다를 것입니다. 분명 예수는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그 생명이 오늘 나에게 주어졌습니다. 고로 나는 나이지만 예전과 엄청나게 달라진 나입니다. 질이 잘라졌고 내용이 달라졌고 색깔이 달라졌고 모양이 달라졌습니다. 예수의 생명을 이어받으면 그렇게 달라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면 달라지고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진정 예수의 생명을 이어받았다면 나는 품질이 달라져야 합니다. 모양도 달라져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그 생명의 능력 가운데 우리를 붙드셨기 때문입니다.
김익두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만나고 변화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갖고 있던 많은 쓴 뿌리가 없어지게 되었는데 그 중에 가장 먼저 없어진 것이 바로 술이었습니다. 술에 인박혀 살았던 분이었지만 예수를 만나고 그 술을 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술친구들이 자꾸 찾아와서 술을 먹이려고 유혹하고 시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익두 씨가 “나는 요즘 약을 먹고 있어 술 마실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약을 먹느냐고 친구들이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나는 신구약을 먹고 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안에 생명 되신 예수가 들어오시니 변화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메고 있던 멍에를, 쓴 뿌리를, 인박힌 술을 딱 끊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가 주시는 생명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생명을 낳게 합니다.
길로 오심
5절에서는 “빛이 어두움을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런 길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는 빛으로 생명으로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참된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가 없이는 내 앞길도 운명도 미래도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불안하고 미래가 두려운 것입니다. 사람이 앞길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답답한 것도 없습니다. 안개가 짙게 깔려 보십시오. 얼마나 답답합니까? 마찬가지로 미래가 불투명하면 너무나 답답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불확실성의 시대라고도 합니다. 미래가 너무도 암담하고 불투명합니다. 그런데 오늘날만 그런 게 아닙니다. 옛 우리 조상들도 지금까지 깜깜한 상태에서 어둡게 살아왔습니다. 자신의 운명도 모르고 미래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내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문화를 보면 절차가 그렇게 복잡한 것입니다. 장례절차만 봐도 그렇습니다. 얼마나 복잡합니까? 그것이 죽음이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만든 절차들입니다. 모두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불안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어느 날 선교사들을 통해서 이 빛 되신 예수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보니까 예수가 빛이시고 길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이 그제야 훤히 앞길을 보게 된 것입니다. 미래가 보이고 운명이 보이고 천국이 보이고 내세가 보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본 사람과 보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차이가 나겠습니까? 본 사람과 보지 못한 사람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그 길을 보았고 그 세계를 보았습니다. 그는 미래를 훤히 내다보고 살았습니다. 자신의 운명까지도 훤히 꿰뚫고 살았습니다. 이다음에 천국에서 의의면류관이 주어질 것 까지도 다 알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무엇이 두려웠겠습니까? 항상 담대하고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사도 바울을 보고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빛을, 생명을 길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스데반을 보십시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는 태연했습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 하늘 문이 열리고 주님이 서서 내려다보시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그가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그런 것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원망하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나의 앞길을, 내 운명을, 내 미래를, 심지어 내세까지도 보고 믿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그것 때문에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빛이요 생명”이라고 외치셨습니다. 그 빛을 내가 품고 그 생명을 내가 품으면 나도 그렇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참 중요한 일입니다.
어떤 부인이 남편을 전도하기 위해서 10년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도 남편은 꿈쩍도 안했습니다. 믿기는커녕 매일 술에 찌들어 살았습니다. 매일 술만 마셔도 문제인데 한밤중이 되면 그 술 취한 친구들을 다 데리고 집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술상을 차리라고 했습니다. 주부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그 때마다 불평한마디 안하고 그 시중을 다 들었습니다. 게다가 술상을 아주 잘 차려 내놓는 것입니다. 남편의 술친구들은 그런 부인이 너무 이상했습니다. 자기들 부인 같았으면 난리가 났을 텐데 이 부인은 불평 한마디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불평한마디 없이 그 시중을 다 하십니까?” 했더니 그때 그 부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이 사람을 위해서 10년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실패했습니다. 전혀 듣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포기했습니다. 이제 나는 천국 갈 텐데 저 사람은 분명 지옥에 갈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평안하게 해 주려고 시중을 다 들어주는 것입니다.” 나의 길, 나의 미래를 알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이는 질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약속된 미래가 있는 사람은 오늘 조금 어려운 일이 있고 고된 일이 있고 가난과 질병과 실패가 있어도 그것을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가운데에서 평안함을 누립니다. 그러나 문제는 미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오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인간의 옷을 입고 오셨습니다. 오셔서 감추어진 길을 밝게 해서 길을 찾게 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우리의 소망이고 내일이고 미래이고 길이고 생명이고 빛이십니다.
흑암의 땅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
요 1:1-4 / 박덕기 목사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의 은총과 기쁨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금년에도 어김없이 성탄절이 찾아왔습니다. 전쟁과 테러로 살상이 난무한 세상, 눈만 뜨면 온갖 비리가 폭로되는 죄악으로 가득 찬 부패한 세상, 갈등과 대립, 불신과 혼돈, 실망과 좌절, 경제 불황의 한파 속에서 우리는 또 다시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작년 12월 22일 주일 설교의 서문에서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제 16대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었습니다. 그리고 새 대통령 당선자에게 바라는 국민의 기대도 큰 것 같습니다. 새 대통령 당선자가 겸손하고 정직하고 깨끗하게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저 역시 간절합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새 대통령 당선자는 메시아도 아니고 구세주도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도 역시 한 사람의 불완전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새 대통령 당선자의 첫 마디는 ‘갈등과 대립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러나 이 말이 얼마나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말입니까? ‘갈등과 대립의 시대가 끝났다!’고 선언만 해 버리면, 정말 이 땅의 모든 갈등과 대립이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입니까? 대통령 당선자보다 더 똑똑한 사람 10명 100명을 합해도 그런 일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인류 역사가 존속하는 한 갈등과 대립의 역사는 결코 끝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후보들의 공약대로만 되면 우리나라는 금방 유토피아 같은 세상이 되겠지요. 그러나 인간 지도자의 힘으로는 결코 이 세상이 이상향이 될 수없습니다. 오직 인류의 소망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그 일이 가능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작년에 제가 하였던 말은 모두 예언처럼 적중하고 말았습니다. 갈등과 대립의 시대가 끝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심화가 된 것 같습니다. 정당간의 싸움은 물론, 지역간의 갈등도 여전하고, 진보다 보수다 해서 계층간의 갈등과 대립의 골은 더욱 깊어간 갑니다. 정말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볼 때 만족함이 없는 우리네 현실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볼 때 만족함이 없음을 느낄수록 인류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심을 더욱 절감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이 왜 그토록 독특하고 귀한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다른 종교의 창시자나 어떤 영웅의 출생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무이하고 독특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 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너무도 익숙하게 잘 아는데, 이 시간 다시 한번 ‘말씀’을 ‘예수님’으로 고쳐서 읽어보도록 하시겠습니다.
“태초에 예수님이 계시니라. 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절의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는 말씀도 “예수님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말씀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좀더 나아가 이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의 제 2위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3절에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또 다른 말로 바꾸면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2천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의 마구간에 탄생하시므로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하신 분이 아니라, 태초부터 아니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선재하시던 제 2위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했는데, 이 말씀을 또 다른 말로 바꾸면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라는 의미와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이 지구상에 탄생하신 사건, 이 사건보다 더 경천 지동할 사건이 없기 때문에 역사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B. C와 A. D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육신 곧 사람이 되셨다’는 예수님의 탄생 교리를 가리켜 Incarnation 道成人身 곧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태초부터 계시던 예수님 곧 성자 하나님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으로 그 본질이 변해버렸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은 그대로 가지신체 성탄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의 인성을 덧입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는 참 하나님이신 신성과, 참사람이신 인성이 신비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에게 이 두 가지 성품이 있어야만 합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셔야만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고, 예수님이 참사람이어야만 우리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탄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하늘의 보좌와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너무도 황공하면서도 우리에게는 너무도 기쁘고 복된 날인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빛이라고 하신 말씀이 여러 번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고 5절에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으며 9절에 “참빚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을 빛으로 말씀하고 있을까요?
1. 빛은 만물이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빛은 만물의 생존과 성장과 활동 등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따라서 빛이 없으면 만물의 활동과 성장이 정지되고 맙니다. 또한 생존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이 빛은 1)아름다움의 근원입니다. 빛이 있어야 사물의 아름다움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두움 속에서는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빛은 이 세상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미를 산출해 냅니다. 빛은 마치 그림물감과 같이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을 아름답게 그려 놓은 것입니다. 단풍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한들 그것을 볼 수 있는 빛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바다 속으로 떨어지는 저녁놀의 찬란함도, 천진스런 아이들의 웃는 모습도, 건축물의 웅장함이나 예술품의 정교함도 이를 드러내는 빛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스위스의 그 아름다운 경관도) 2)빛은 본질적으로 순수합니다. 이 빛은 그 순수성에서 흠이 없습니다. 본질이 순수하기에 그 빛이 가는 곳마다 순수한 본성을 발휘합니다. 3)빛은 부패하지 않습니다. 대기도 오염될 수가 있고 땅도 더러워 질 수 있으며 바다의 물도 불결해 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빛은 전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이렇듯 빛이 만물에게 필요하듯이, 예수님은 모든 인류에게 꼭 필요한 구세주이신 것입니다.
2. 빛은 하나님의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1)빛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은사입니다. 빛은 어느 한 민족이나 나라나 계급이나 신분에만 속하지 않고 모든 사람, 모든 민족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지혜롭거나 어리석거나, 감사하거나 불평하거나, 선하거나 악하거나 간에 다 같이 소유할 수 있는 게 빛입니다. 이렇게 빛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첫 번째 은사인 것입니다. 2)빛은 값없이 주시는 은사입니다. 값이 하나도 없고 대가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이 빛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모든 은사는 다 값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온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인 것입니다.
3. 빛은 성삼위 하나님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1)빛은 하나님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과 가장 유사한 것이 영이라고 한다면, 빛은 그 다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딤전 6:16에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신다”고 했고, 약 1:17에 하나님은 “모든 빛들의 아버지”라고 했으며, 요일 1:5에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했습니다. 2)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요 1:9에 예수님을 가리켜 ‘참 빛’이라고 했고, 요 8:12에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고, 요 9:5에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3)빛은 성령의 상징입니다. 행 2:3에 성령을 가리켜 “불의 혀”와 같다고 했으며, 성령의 역사를 가리켜 우리는 성령의 조명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이 세상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그 어둔 세상에 사는 인생이 흑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찬송가에 ♬온 세상이 캄캄하여 참 빛이 없었더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 9:2에 보면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한 아기 곧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흑암이라는 말은 무지, 죄악, 불행, 사망, 지옥을 묘사할 때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왜 온 세상이 캄캄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어두워졌습니까? 그 이유는 흑암의 권세를 잡은 곧 마귀가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만들고 어둡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세상이 얼마나 죄악으로 캄캄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어두워졌습니까? 스와핑 클럽이라는 말 들어보셨지요? 무슨 말입니까? 부부교환클럽이라는 말입니다. 이 정도가 되면 노대통령의 말처럼 막가자는 것이지요. 최근에 두 아이를 강물에 던져 버린 사람은 또 집사라지요. 아이들은 자기가 죽여서 죄가 없으니까 천국에 가고, 자기는 살인한 죄를 회개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했다면서요? 이렇듯 사람들의 마음이 도대체 얼마나 어둡고 캄캄한지 몰라요. 그래서 걸핏하면 자살을 합니다.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했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하루 강아지 같은 인생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고,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 줄을 모릅니다. 지옥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곳인가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문맹보다 컴맹보다 훨씬 더 캄캄하고 무지한 인생들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인생을 가리켜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은 그 마음이 어두워도♬ 오늘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절망과 한숨, 증오와 분노, 갈등과 분열, 남북간의 긴장, 지도자들에 대한 실망, 무너지는 교육현장, 꼬리를 무는 자살 소식 등은 모두가 어두움 가운데 사는 인생들이 저지른 어두운 행위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인류의 참 빛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삶을 바로 비추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어떤 철학자도, 공자도, 석가도, 어떤 정치 지도자도 우리의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어두움은 절대로 어두움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흑암 가운데 사는 인간이 절대로 인간을 밝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지성인의 눈이 내일을 봅니까? 천국을 봅니까? 구원을 봅니까? 소크라테스가 말한 대로 ‘네 자신을 알라’고 하지만 내 지식으로 내 자신을 볼 수 있습니까? 예수의 빛이 비추어주지 않는 한 우리는 내 자신의 참모습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비추지 아니하면 소경과도 같은 인생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세계적인 문호 헤밍웨이는 자살로 그의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유서에서 그는 자살의 이유 중에 한 가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자신의 영혼은 필라멘트 끊어진 전구처럼 고독하고 어둡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지성과 문학적인 재능으로 빛나던 그의 정신 깊은 곳에는 자살로 탈출구를 찾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필라멘트 끊어진 전구의 어두움 같은 것이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좌절과 불안과 절망과 죽음의 어두움은 아무리 문을 꽁꽁 걸어 잠근다고 해도 그 어디에나 스며들게 마련입니다. 인간실존 어디에다 이 어두움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어두움은 지성으로 밀어내 지지 않습니다. 좋은 환경이나 높은 지위로도 몰아낼 수가 없습니다. 큰 소리로 명령을 하고 폭력을 사용한다고 해도 어두움은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 어떠한 것도 인간의 내부와 삶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어두움을 몰아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두움을 몰아내는 것은 오직 빛 밖에 없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은 자연히 자취를 감추고 물러가게 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어둡고 무서운 어느 날 밤 미국 항공모함 한 척이 남태평양의 거친 바다를 헤쳐 나가고 있었습니다. 적의 잠수함 때문에 배 안의 모든 불은 꺼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돌아오지 않은 비행기 한 대가 있었습니다. 이 비행기는 그 넓은 바다에서 빠지지 않고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인 항공모함을 찾아 새까만 밤하늘을 거의 절망적으로 비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함장은 커다란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배에 불을 밝히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비행기는 곧 제 집을 찾아오는 비둘기처럼 갑판에 미끄러지듯 내려앉았습니다.
하나님은 매우 큰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자신의 아들을 흑암의 땅에 세상을 밝히는 큰 빛으로 보내셨습니다. 마치 어두운 바다 같은 죄 많은 인간의 세계에서 배에 불이 켜진 것과 같이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새롭고 밝은 빛이 빛나기 시작하면서 세상의 어두움, 영적 무지와 어두움, 죄와 사망과 절망의 어두움들이 물러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일 2:8에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고 했고, 눅 1:78-79에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만이 진리의 빛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만이 소망의 빛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의 빛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의 빛이심을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흑암한 땅, 사망의 그늘에 살던 사람들에게 큰 빛으로 참 빛으로 오셨습니다. 죄보다 더 어두운 것이 어디 있으며, 죽음보다 더 절망적인 것이 어디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관머리 곁에서 가슴을 치며 하루 밤을 울어 새워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인생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며 절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들에게 예수님은 소망의 빛, 구원의 빛,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빛과 관련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요 8:12 /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일 1:7 /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마 5:16 /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엡 5:8-9 /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벧전 2:9 /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빛과 관련해서 이 성탄절 아침 우리송정 중앙 교회 성도들에게 꼭 한 가지 필요한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빛은 열을 발하고 그 열은 팽창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빛과 열은 쇠붙이로 된 철로라도 늘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빛 되신 예수님이 참으로 우리 마음에 비취시면 반드시 우리 마음이 넓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금년 성탄절이야말로 우리 송정 중앙 교회 성도들에게는 더 없이 기쁘고 즐거운 성탄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너무도 귀한 새 성전의 터를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마음이 돈 걱정 때문에 위축되고 좁아지고 움츠려들지 않았습니까? 바라옵기는 빛 되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비춰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의 마음이 넓어지고, 그 넓은 마음 그릇에 크신 복을 부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하는 이 세상은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평안과 두려움, 삶과 죽음이 교차합니다. 그러나 내세는 이 두 가지가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분리됩니다. 흑암의 권세 잡은 자 마귀가 있는 지옥은 한 줄기의 빛도 없는 완전한 캄캄함 자체이며 한 가닥의 소망도 없는 절망 그 자체일 것입니다. 그러나 빛이신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나라는 털끝만큼의 어두움도 없는 광명의 나라, 빛과 사랑만이 언제나 넘치는 소망의 나라일 것입니다. 그래서 계 22:5에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밤이 없는 저 천국에는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들이 다시 있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워 오듯, 죄악의 밤이 깊을수록 의의 태양으로 오실 주님의 재림도 가까워 오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우리 성도들은 한 구석도 어두움이 없고, 거짓이 없고, 부끄러움도 추함도 없이, 빛처럼 밝고 깨끗하고 아름답게 살다가, 다시는 어두움의 밤 한숨의 밤 절망의 밤이 없는 저 나라에서 영원토록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님을 찬양하게 되시기를 세상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세상의 빛
요 1:1-14 / 김상복 목사
40년 전에 제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 우리의 문화와 달라서 신기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밤이 되면 불을 켜놓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 때 불을 꺼놓지만 그 사람들은 온 집안의 불을 다 켜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미국 경제를 염려했습니다. ‘전기를 저렇게 낭비하니 참 큰일이구나. 백화점에 가 봐도, 가게에 가 봐도, 전부 불을 켜 놓아서 그 안에 무슨 물건이 있는지 다 보이게 해 놓았으니 도둑들이 좋아 하겠구나.’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옛날 캘리포니아의 오클랜드라는 도시에 범죄가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범죄는 주로 언제 일어나지요? 밤이지요. 도둑들도 어두워야 나타나기 시작하지요. 그래서 오클랜드 시장이 ‘밤을 밝히자’(Light the Night!)는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온 도시에 전깃불을 켜게 하니까 밤이 밝아졌습니다. 집안이 환해졌습니다. 부엌의 뒷문에도, 집밖의 으슥한 곳에도 어김없이 불이 켜졌습니다. 그 결과 오클랜드시의 범죄율이 떨어졌다는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그러자 캐나다의 토론토 시장이 또 같은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그랬더니 범죄가 줄어들었다는 동일한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 결과 미국과 카나다 전역에서 밤이 되면 불을 환하게 밝히게 되었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도 밤에 불을 환히 켜놓기 시작하더군요. 집에 불이 켜 있으면 누군가 집에 있다는 싸인이 되어 도둑들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타이머로 시간을 맞추어 놓으면 자동적으로 불이 켜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두움은 사람들의 마음마저도 어둡게 하여 범죄를 일으키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세에 어두운 때가 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지면 대 환란의 시기가 오는데 성경은 이 날을 ‘큰 날’(The Great Day)이라고 합니다. 어떤 때는 ‘그 날'(That Day)'이라고도 표기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보면 대 환란의 시기를 말한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스바냐 1장 14-15절에 보면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고 가까우니 그 날이 빨리 오도다. 보라! 여호와의 날이라. 그 날은 용사들까지도 비통하게 부르짖을 것이요 분노의 날이요, 환란과 고통의 날이며, 파멸과 황폐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며, 구름과 흑암의 날이로다” 하였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가까워지면 세상이 물리적으로도, 영적, 도덕적, 정서적, 지적으로도 어두워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인류의 시대를 마무리하실 시간이 가까울수록 세상은 점점 더 어두워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날 남산에 올라가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면 매연이 자욱하여 캄캄합니다. 비가 한 번 세차게 오고 나서야 좀 보일까 스모그가 가득 차면 땅에서 빛이 가려져서 어두워집니다. 물리적 어두움이지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해와 달과 별의 3분의 1이 빛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8:12). 모든 면에서 어두운 세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는 어두움에 대해 알아봅시다. 첫째, 물리적인 어두움입니다. 밤이라고 하는 어두움뿐만 아니라 육체의 질병도 어두움입니다. 최근에 어떤 분이 제게 전화를 해서 요즘 너무 혈압과 에너지가 떨어져서 제대로 활동을 못한다고 하시더군요. 몸이 약해지니까 마음도 약해지고, 영혼도 실족해서 낙심과 두려움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질병은 육체적 어두움입니다. 또한 노쇠현상도 어두움입니다. 생각처럼 몸과 마음이 움직여주지를 않습니다. 죽음도 물리적인 어두움이지요. 전에는 알지도 못했던 질병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습니다. 온갖 사고들, 무서운 무기들과 전쟁, 폭력과 폭행, 폭증하는 자살들, 죽음의 원인이 점차 더 늘어가고 있습니다. 어두운 세상입니다.
둘째, 도덕적인 어두움입니다. 요즘 이 사회가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하고, 선을 악이라, 악을 선이라 하면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이런 도덕적 어두움이 우리의 삶과 국가와 민족과 세계를 어둡게 합니다.
셋째, 이성적인 어두움입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의 어두움입니다. 무지와 편견과 비합리적인 사고방식, 지식의 악용 등이 얼마나 우리에게 어두움을 일으키는지 모릅니다.
넷째, 영적, 정서적인 어두움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탄에게 붙잡혀서 죄 속에 빠져 두려움과 증오와 불안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다섯째, 정치적인 어두움입니다. 이 어두움은 요즘 너무 심해서 온 국민이 염증을 느낄 정도입니다. 최근의 불법 대선자금 사태를 보십시오. 돈을 차에 가득 싣고 휴게소에서 바꿔 타는 것이 우리 정치의 현실입니다. 아이들이 부모를 걱정하는 시대입니다. 지도자들이 국민들을 걱정해 주어야 하건만, 지금은 백성들이 지도자를 신뢰하지 못하고 오히려 지도자들 때문에 속이 상해 마음이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여섯째, 경제적인 어두움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한 가구당 거의 3천만 원의 빚을 지고 있답니다. 전국적으로 404조라는 사상최대의 빚더미에 눌려 있습니다. 30세 미만의 사람들이 일할 일자리가 무려 46만개나 줄었답니다. 젊은이들이 갈 곳이 없습니다. 기업인들은 정치인들에게 돈을 주었다가 불려 다니면서 고생을 합니다. 주지 않았다간 정권을 잡은 다음에 당할 수 있고, 줬다가는 또 문제가 되는 진퇴양난의 모양입니다. 전경련 회장이 이런 말을 했다지요. “전경련이 봉이냐? 사방에서 와서 돈 뜯어가는 곳이냐? 죽도록 일해서 바쳐야 되고 빼앗겨야 되고 검찰에 불려 다녀야 된다. 사업에 투자해야 될 돈이 정치계로 들어가 어려움이 극심하다.” 정치가 어렵고 경제가 어렵고 사회가 어렵습니다.
일곱째, 사회적인 어두움입니다. 성폭력이 급격히 늘었습니다. 미성년들을 포함해 피해자들의 절반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당하고 있습니다. 친 가족들, 친척들, 동급생, 선후배, 이웃들, 교사, 학원 강사, 직장 동료, 상사 등 가까운 사람들에게 성폭력을 당해서 일생에 지울 수 없는 한과 아픔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의 음란 사이트 131개가 인터넷에서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업주들은 175억의 부당이득을 누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정서와 삶을 어지럽히고 망하게 하고 있습니다. 명문대학을 다니는 부유한 가정의 아이들이 유흥비 벌겠다고 편의점을 털어서 구속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어두움이 우리 주위에 가득하여 여러분과 제 마음이 어두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때는 화가 치밀어 오르고, 어떤 때는 속이 상하고 마음이 쓰라리고 괴롭습니다.
최근에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희 교회 성도 한 분이 실직상태로 있다가 간신히 직장을 얻었는데 밤새도록 일하는 직장이랍니다. 밤 새워 한 달을 일하면 60만원을 번다고 합니다. 60만원이라도 필요하니까 가서 일을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60만 원짜리 직장도 없어서 헤매고 있는데, 부정한 돈 수백억 원이 정치인들의 손에 들어가고, 끝까지 거짓말하다가 결국 드러나는 이 어두운 사회가 국민들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어두움으로 가득 찬 세상을 보면 볼수록 우리의 마음도 어두워집니다. 어느 노처녀가 한 남자를 만나 사귀는데, 이 남자가 술을 마시고 찾아와서 얼마나 두들겨 패는지, 아파트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을 합니다. 결혼을 하기 전인데 편히 잠도 못 잔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어두우면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인생까지 어둡게 만들까요? 만약 인생을 끝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며 살라고 한다면, 아마 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태어나 세상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니까 그래도 살아가지, 끝에서 시작한다면 아마 대부분이 살고 싶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고통과 아픔과 슬픔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어둡게 하는 것들이 우리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는 반드시 빛이 필요합니다. 빛이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였습니다. 왜 어둡습니까? 마음속에 빛이 없어서입니다. 어두움으로 가득 찬 마음이 어두움만 일으키는 것입니다. 정서적 어두움, 이성적 어두움, 도덕적, 윤리적, 영적 어두움, 물리적 어두움을 곳곳에 일으키며 다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두운 세상에서 또 어두움을 일으키는 자가 아니라 빛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왜 어두움을 일으킬까요? 성경에 보니까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참 빛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계셨던 하나님이시고 우주의 창조자이며 생명의 근원이시오 자기 백성에게 육신으로 오신 참 빛이신데 “깨닫지 못하고 ... 그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1-5, 10). 그를 깨닫고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둘째는 어두운 마음속에 빛을 받아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1절에 “그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라고 하였습니다. 참 빛이 세상에 오셨는데도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 마음속에 빛이 없고 어두움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기 전에는 내 속에 빛이 없습니다. 나밖에 없어요. 내 속의 죄성(罪性)밖에 없어요. 죄와 허물로 영원히 죽은 어두운 상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깨닫고 알고 고백하고 영접할 때 비로소 예수님의 빛이 내 마음속에 비취기 시작합니다.
셋째는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라고 하였습니다. 성육신화 되신 영광스러운 예수를 바라보아야 마음이 밝아질 터인데... 왜 우리가 어둡습니까? 왜 속이 상합니까? 왜 희망이 없습니까? 왜 낙심이 됩니까? 왜 분노가 일어납니까? 내 속에 계신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밖의 어두움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윤리적, 도덕적 어두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어두움, 지적, 정서적, 영적 어두움, 어두움의 세계만을 매일 쳐다보니까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세상의 빛이요 나의 영원한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두운 밖만을 보아서는 여러분의 마음에 빛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눈을 들어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내 마음 속에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 내 가슴 속에 비추시는 성령의 빛, 그 빛을 바라보십시오. 눈을 그 분에게 고정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어두운 세상 속에서도 빛이 보이고 빛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를 바라보지 않고는 어두움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빛을 볼 수가 없습니다. 매일 정치인들이나 사회악만을 바라보면서 짜증을 내고 불평해서야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밝게 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어두움을 보다가도 눈을 돌려 여러분 마음속에 임재 해 계신 빛 되신 주님을 보십시오. 비로소 우리의 마음이 밝아집니다. 비록 우리가 캄캄한 세상 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속에 영원히 비춰주시는 성령의 빛, 그리스도의 빛, 말씀의 빛을 바라볼 때 우리의 마음이 환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 되시니...” 이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소망이요, 나의 목자요, 나의 방패요, 나의 힘이요, 나의 빛이십니다! 여러분! 어두운 세상만을 바라보아서는 내 마음마저도 어두워집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 내 마음에 오신 예수님,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의 빛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첫째로, 내 마음이 환해집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짜증이 나고 속이 상하고 화가 납니다. 그러나 예수를 바라보면 따뜻해집니다. 사랑을 느낍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화사한 사랑으로 밝아집니다. 빛으로 환해지면 여러분의 얼굴이 밝아집니다. 여러분의 언어가 밝아집니다. 여러분에게 희망이 보일 것입니다. 용기가 날 것입니다. 어두운 세상은 빛이 필요합니다. 어두움은 굳이 여러분이 보태지 않아도 이미 너무너무 많아요. 여러분과 저는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이요,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에 그동안 참으로 어려운 삶을 살아오신 분이 계세요. 아이들이 어릴 때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까지 혼자 살면서 어린 두 아이를 키우느라고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 가슴에 참 빛 곧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습니다. 남편은 없고 직장도 변변치 않아 자식을 다른 아이들처럼 학원에도 보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는 빛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분을 만날 때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았습니다. 대화를 해 보면 어려운 인생인데도 그 분에게는 늘 환한 빛이 있었습니다. 빛 되신 예수께 날마다 나아가서 그분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환해졌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소망이 생겼습니다. 며칠 전 제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고3인 그 딸이 좋은 대학에 수시입학으로 합격했다는 것입니다. 엄마는 딸의 등록금이 걱정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아이를 보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너를 붙여 주셨다. 네가 어떻게 자랐는지 너도 알지 않느냐? 그 어두움 속에서도 빛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여기까지 왔는데, 너를 합격시켜 주신 하나님께서 네 등록금은 주실 것이다. 너는 믿고 기도만 하라!”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이 가족은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 왔습니다. 이제 저 터널 끝에 빛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둘째 아이는 학교에서 일등 했다고 상을 받아 왔습니다. 엄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 하나만을 바라보고 환하게 살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러분! 밖은 대단히 어둡습니다. 성경 말씀처럼, 주님 오실 날이 가까이 올수록 더욱 더 어두워질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말씀처럼 이 땅은 삼분의 일 어두워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과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되심을 깨닫고 알고 마음에 모시고 그 분을 바라보면서 따뜻함과 밝음을 날마다 누리시기 바랍니다. 밝아진 마음과 밝아진 영혼, 밝아진 얼굴, 밝아진 말씨, 밝아진 태도 때문에, 우리가 어디에 가든지 이 어두운 주위를 날마다 밝혀주는 빛으로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1780년 5월 19일 오전 10시에 미국 동부의 하늘이 흑암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학교는 아이들을 서둘러 집에 돌려보냈습니다. 12시가 되니까 더 어두워졌고 미국의 동부가 흑암에 잠겼습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등불을 켰습니다. 심지어 새들마저도 둥지로 돌아갔습니다. 오후 1시 경이 되니까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것이 마지막 날인가 하는 공포가 일어났습니다. 그 때 코네티컷 주에는 상원과 하원이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하원은 바로 폐회를 하고 두려움에 떨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상원에는 데이븐포트라는 크리스천 상원의원이 있었습니다. 상원도 역시 폐회를 하자고 웅성대는 그 시간에 데이븐포트가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의장님, 오늘이 최후의 심판 날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그렇다고 해도 나는 주님이 오실 때 내가 맡은 일을 계속하다가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불을 켜십시오. 계속 회의를 하십시다!” 그때까지 겁에 질려있던 상원의원들이 이 말을 듣고 용기를 내어서 다시 불을 켜고 회의를 계속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어두움 속에서 두려워하고 헤맬 때에도 여러분은 빛이신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고, 그분을 날마다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참 빛이십니다. 예수님의 빛이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의 주위로 퍼져 나가기를 바랍니다. 성탄을 맞이하면서 여러분의 작은 등불들을 모든 사람에게 비춰주어서 여러분의 환한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하십시다. 빛이신 예수 안에서 참 평화와 소망을 누리며 미래를 향하여 전진하면서 세상의 어두움을 비추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말씀이 사람되어
요 1:1-4 / 김삼환 목사
요사이 온 사회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모든 민심이 너무 흉흉해지고, 강팍해졌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한 마음들이 우리를 저기압처럼 꽉 누르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안될 것 같고 큰 일이 날것만 같은 이러한 마음이 오늘 우리나라의 전체적인 분위기로 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은 이러한 일에 치우치지 말고 성도로서 이 시대를 바로 살고 또 우리 국민들에게 소망을 심어 주는 이런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어떤 교수가 맹물같은 액체를 가지고 모든 학생들에게 설명을 했습니다. 이 액체는 냄새가 지독하고 또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어떠한지 알아보기 위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앞에 이 액체를 놓을테니 냄새를 맡아보아 달라고 부탁하며 냄새를 맡게 했어요. 어떤 학생은 앞에 놓기도 전에 코를 막고 고개를 돌리는 학생도 있고, 찡그리며 세명 정도를 제외하고는 지독한 냄새 때문에 어찌할바를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은 이 액체는 냄새도 없고, 무해한 그냥 액체입니다. 그런데 설명을 냄새가 많이 난다고 한거예요. 굉장할거라고, 지독할거라고,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주안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분에게는 어떠한 어려움도 우리에게 필요한 어려움이고, 또 어려움은 얼마든지 이겨낼 수 가 있습니다. 또 우리가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은 물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불안은 물질에 대한 불안입니다. 경제에 대한 불안입니다. 성경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염려할 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영적인 염려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하는 겸손한 신앙에 대한 반성과 뉘우침이 언제나 우리를 하나님 앞에 바로 세워서 성경에 있는대로 이러한 염려는 우리를 구원함에 이르게 하고, 건강하게 만든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연습은 우리를 썩어지게 하고, 육체에 대한 염려, 육체에 대한 지나친 고민은 우리의 삶을 부정적으로 파괴하고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어려움을 준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너희는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예수님은 40일동안 금식기도 하시고, 마귀가 와서 이 돌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할 때에 주님이 말씀하셨어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어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하나님이 계심으로 우리는 언제든지 살 수 있는 것이지, 떡이 없어도 살 수 있다라는 거예요. 먹을것이 없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얼마든지 살수있다라는 거예요.
동물은 그렇지 않아요. 먹을것이 없으면 동물은 바로 죽어요. 눈이 많이 오거나 먹을것이 없으면 동물은 민가에까지 내려옵니다. 왜? 동물은 먹는 것이 전부예요. 동물은 몸이 전부예요. 건강이 전부예요. 어느 동물이든지 다리가 하나 부러지면 그 동물은 끝나는 거예요. 공격을 못하니까 살수가 없어요.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아요.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다리가 부러져도 살고, 없어도 살아요. 두 다리가 없어도 살 수 있어요. 그러나 동물은 눈 하나만 없어도 그대로 죽어요. 사자도 그냥 공격을 받아 죽어요.
그러나 사람은 두 눈이 없어도 살아요. 왜 그래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그 마음에 신앙만 굳게 가지면 어떠한 환경도 이겨낼 수 있어요. 동물은 태어나서 어미가 죽으면 새끼들은 자동적으로 죽어요.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아요. 부모가 없어도 고아원에서 얼마든지 훌륭한 인물로 자랄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이에요. 오히려 사람은 건강하므로 잘못되는 일이 더 많아요. 두 눈이 성하고, 두 다리가 성하고, 많이 배우고, IQ가 높고, 건강이 뛰어난데도 파괴되고 실패하고 짐승보다 못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인간에게 귀한 것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잘 믿고, 그를 경외하는 믿음으로 살면 어떠한 악조건도 극복할 수 있고, 육체적 핸디캡도 얼마든지 넘어설 수 있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와 아름다움과 능력은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대를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대를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박국 3장 17절에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의 발을 사슴의 발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주 여호와가 나의 힘이십니다. 어느 것이 있고, 없고가 아닙니다. 풍성하고 가난하고가 아닙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해도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나는 하나님으로 기뻐할 수 있고, 노래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소출이 많아지면 인생도 풍성해 지고, 소출이 적어지면 우리의 삶도 빈곤해 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는 평생동안 하나님 경외하는 이 하나가 힘이 되어서 능력있는 살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찡그리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언론이, 다 나라가 큰일났다 할지라도...
이런일에 정치인은 물론 민감해야 됩니다. 나라에 책임을 진 분들은 민감해야 하지만은 우리 성도들은 담대해야 할 것입니다. 넉넉히 살수가 있고, 이때가 우리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때임을 알고 영적 부흥 운동을 일으켜서 우리의 낮고 때묻고 병든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여 다시 정비하는 기회가 주어져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걱정해야 할 것은 먹는 문제가 아닙니다. 경제 문제가 아닙니다. 도덕적인 문제입니다. 영적인 문제입니다. 인간성의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파괴된 인격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상숭배로 인하여 온 나라가 영적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요사이 점장이들이 잘된다고 하지요, 경제가 어려우니까 어떻게 하면 잘 살수 있는지 점장이들에게 사람들이 몰린다고 합니다. 흥청거린다고 합니다. 점장이도 자기의 길을 몰라서 앉아 있는데.. 거기에 가서 경제를 물으면 어떻게 됩니까?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퇴폐문화, 한 집 건너 한집이 술집이에요. 한 집 건너 한 집이 러브호텔이에요. 온 나라가 술로 흥청거리고, 망청거리고, 음란한 물결이 온 나라를 뒤덮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기꾼들이 득실거리고 폭력배들이 날뛰고 있습니다. 한탕주의가 만연해서 도박판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경마장도 도박이에요.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에 밑바닥에 깔려있는 해이해진 우리의 정신 문제가 이 사회 국가를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속히 제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우리 자신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어린 아이로 부터 노인까지 제 위치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이들은 착하고, 깨끗하고, 순진하게 커야 하고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근로자도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여 주신대로 엿새동안 땀흘려 열심히 일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5일 일하고 먹고 살려고 합니까? 엿새동안 일해도 어려움데요. 하나님의 법칙을 벗어나면 안됩니다. 선생님도 학생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열심히 사랑하고 바로 지도해야 합니다. 전교조가 날뛰면서부터 학교는 더 큰 문제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교실이 무너져 내리는데도 모든 선생님들은 교조를 만들고, 정치세력을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들은 정치하지 말고 가르쳐야 합니다. 머리에 벌건 띠를 두르면 안됩니다. 정치인도 정직과 진실과 순수한 마음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의 자세로 돌아가야 합니다. 허리도 많이 숙이고 했던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야 합니다.
모든 공무원이 뇌물 받아먹지 말고, 제자리만 잘 지키면 이렇게 온갖 죄악이 날뛸 수가 없습니다. 교회도 제자리로 돌아가고 어머니도 제자리로 돌아가고 목사도 제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양떼를 위하여 기도하고 눈물로 매어 달리고, 모두모두 제자리로만 돌아가면 다 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우니까, 하나님을 믿으니까, 소망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길을 인도하시고, 은혜와 진리가 되시는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 모두 제자리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위에 굳게 서면 우리는 무엇이라도 감당할 수 있고, 이길 수 있고, 넉넉히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은 큰 것입니다. 믿음은 힘이 있습니다. 나도 살고, 나라도 살리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까?
다윗은 물매돌로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전쟁을 하면 온 나라가 다 달려들어 싸우는 것이 아니고 구약시대의 싸움은 각 나라의 장군이 일대일로 나와서 싸움에 지면 전쟁을 끝내버리고, 그냥 온 나라가 항복하는 이런 전쟁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다윗의 부하들, 요압을 비롯하여 열명이 나오고, 사울의 부하들 열명이 나와서 대표가 싸워서 지면 항복을 하는 것입니다. 다 죽게 되니까, 일대 일, 몇대 몇으로, 나가 싸울 것을 말합니다. 40일 동안 조석으로 늘 나와서 소리를 지른 것은 나라 전체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일대 일로 싸우자 라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내보낼 장군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골리앗의 어마어마한 힘 앞에 모두 다 겁을 내고, 전쟁에 참여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이제 블레셋에 항복하고, 종이 되고, 속국이 될 수 밖에 없을 때 누가 나옵니까? 다윗이 나옵니다. 아주 어린 목동이 나옵니다. 전쟁을 해 본 일도 물론 없습니다. 싸움을 해본일도 없습니다. 군복을 입어본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나갑니다.
처음에는 사울의 군복을 입고, 창을 들고 나가려 했는데 어린 다윗은 그 창을 두 손으로고 들 수가 없습니다. 옷을 입으니 상의가 다리까지 내려갑니다. 다윗은 그 옷을 벗습니다. 창을 버려두고 갑니다. 무엇만을 들고 갑니까? 물매돌 다섯 개를 들고 갑니다. 제가 다윗이 싸우던 그 곳에 가서 물매돌 다섯 개를 가져온 일이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그 곳에 가시거든 돌을 주어오길 바랍니다. 이것을 가지고 골리앗에게로 나아갑니다. 골리앗이 보니 군인도 아니고, 어린아이가 나오니 너희 나라에는 그렇게도 사람이 없느냐? 개가 먹이는 저런 아이가 나와 싸우려고 왔느냐? 소리를 지릅니다. 그럴 때 다윗이 말합니다. 너는 창을 의지하고 칼을 의지하고 너의 힘은 너의 몸에 있지 너는 너의 힘으로 내게 나아온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창조자,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네게 나아간다. 나는 네가 가진 그런 것 없지만은 은과 금도 없고 능력도 없지만은 이 물매돌 속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던졌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이 이긴 것 아닙니다. 물매돌이 이긴 것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이기게 한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자는 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 믿음이 있는데 어떤 믿음 입니까? 살아있는 믿음 굳센 믿음,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요동치 않는 믿음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병들면 고쳐 주실줄로 믿는 믿음, 어려운 일이 오면 이길 수 있는 믿음, 나의 앞에 어떤 장애물이 온다할지라도 만국의 하나님 함께 하시니 넉넉히 이기리라는 확신이 있는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한 가지 인 것 같지만은 만가지를 해결하는 능력인것입니다. 어떤 환경에도 거기에 맞는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빌리그레함 목사님은 믿음은 마치 자동차 밧데리와 같다고 했습니다. 밧데리 하나로 난방도, 냉방도, 음악, TV도 나옵니다. 요즈음은 어느 곳이 막히든지 몇km가 남았는지도 알려 줍니다. 그런 역할까지도 다 해주더라구요. 밧데리만 있으면, 오늘 내 안에 영적인 시동을 걸어주는 생명이 있으면 믿음은 생명입니다. 이것 있으면 우리는 어디든지 갈 줄로 믿습니다. 밤이 와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장애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추운 곳에 갈지라도 염려하지 않고 더운곳에 가도 염려하지 아니하는 것은 밧데리가 있는 한 밧데리가 건강한 한 우리는 주 안에서 언제든지 승리할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습니까? 그냥 믿는 믿음입니까? 맹목적입니까? 모든 것을 믿는 다원주의적인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삶이 아닙니다. 정령론적인 아무데나 다 신이 있다는 그런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온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고, 신이 육의 몸을 입고, 아기가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어요.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셨어요. 영원하신 자가 이 땅에 오셨어요. 거룩하신 자가 오셨어요. 거룩, 거룩하신 자가 죄악 많은 이 땅에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어요. 우리의 구세주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어요. 공자, 석가, 맹자, 이 세상에 모든 지도자도 주님이 보내셨어요. 그 분들에게는 진리가 없어요. 진리를 몰라요. 진리를 평생동안 찾은 분들이에요. 예수님은 모든 진리가 가득찬, 진리가 되시는 분이에요. 우리 인간이 찾는 모든 질문을 다 대답하고 모든 길을 다 안내해 주고, 모든 짐을 다 져주시는 능력이 주님이에요.
할렐루야! 주님이 오셨어요. 우리는 오신 주님을 맞이하고 믿고, 영접해야 합니다. 12월 25일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이에요. 우리 모든 성도들은 우리 주님을 기다리면서 바라보면서 거룩하신 주님, 왕의 왕이신 주님, 만왕의 왕이시고, 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이 오신 것을 우리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맞이해야 할 줄 믿습니다.
♬오 거룩한 밤 별빛이 찬란한데 거룩하신 우리 주 나셨네. 오랫동안 죄악에 얽매어서 헤매던 죄인 위해 오셨네. 우리를 위해 속죄하시려는 영광의 아침 동이 터 온다. 경배하라 천사의 기쁜 소리 오 거룩한 밤, 주 예수 나신 밤, 거룩한 밤, 거룩 거룩한 밤...♬
거룩한 밤입니다. 거룩하신 분이 오셨어요. 이 땅에 오셨어요. 큰 빛으로 오셨어요. 기독교는 환영하는 거예요. 그 분을 맞이할 때 우리 인간의 참 의미와 영적인 가치와 부흥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오신 2000년 전에 오신 주님을 맞이하는 새로운 영적인 회복을 이 민족이 이룩해야 할 줄 믿습니다.
영적으로 죽으면 그 민족은 죽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통일왕국 전후를 기해서 몇 분의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한 분은 엘리입니다. 한 분은 사울입니다. 그 다음은 조금 건너서 여로보암입니다. 이때는 영적으로 어두우니까 그 시대가 어두웠습니다. 전쟁과 환란으로 인하여 백성은 고통에 빠지고 경제적으로 심히 어려운 혼란한 시대에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영적으로 하나님과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있었지만 산 예배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갔지만 형식적이었습니다. 모두 다 절기를 지켰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주의 종이었지만 하나님보다는 자식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을 믿기는 믿었지만 명예욕, 정치욕, 권력욕에 잡혀서 백성들을 자기가 혼자 영원히 다스리려 하고 정적을 몰아내는 일에만 일생동안 40년을 그렇게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여로보암은 어떻습니까? 예배를 경홀히 여기고 제사장을 팔아먹습니다. 선지자를, 제사장을 돈만 주면 그냥 만들어 줍니다. 그때가 영적으로 제일 어두웠던 때입니다. 영적으로 어둡고, 어렵고, 떨어지면 모든 것이 떨어져서 이방 백성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하고 붙들려 가고 백성들은 평안을 잃었습니다.
가장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회복되었을 때는 말할 것 없이 다윗왕 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사랑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이 되심을 믿고, 그를 즐거워하며 온 백성과 함께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예배가 회복되었습니다. 산 예배를 드렸습니다. 산 찬송을 드렸습니다. 찬송을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감격으로 부르느냐가 중요합니다. 기도하느냐, 안 하느냐가 아닙니다. 어떤 기도를 드리느냐가 중요합니다. 예배다운 예배, 기도다운 기도, 찬송다운 찬송을 하나님을 향해드릴 때 영적 부흥이 오면서 그 땅에 하나님은 메마른 땅에 단비를 부어 주듯이 이스라엘에 최고의 부흥과 번영을 가져다 줄 수 있었습니다. 이 나라는 다윗 시대와 같이 복음성가에 있듯이 ♬예배가 회복되고 다윗의 때와 같이, 지금은 엘리야 때와 같이..♬ 할렐루야.
예배다운 예배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가깝다, 멀다, 힘들다,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예배는 어렵게 준비하는 거예요. 힘들게 나와서 핍박받으면서 환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이어야 하는 거예요. 모든 환경이 갖추어져서 환경이 여러분의 예배를 만들어 주는 것 아니에요. 어떤 환경도 넘어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드리는 것이 성도의 삶 인줄로 믿습니다. 이 땅에 예배가 살면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로 모셔 드리면 이 민족은 새로운 힘있는 나라가 될 줄 믿습니다. 오늘 이 나라의 문제가 정체성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의 위치를 모르는 거예요. Self Identity 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문제점이 여기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왜 결혼하는지, 왜 사업하는지, 왜 돈버는지, 왜 공부하는지 모르는 거예요.
어제 뉴스에 27살 청년이 자살하려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하는 거예요. 17살 소년에게 부탁을 했더니 죽여주겠다고 해서 지갑에 백 만원은 네가 가져라하고 소년은 칼로 죽였어요. 또 22살의 청년과 27살 청년이 자살하려고 인터넷으로 만났어요.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 의논하고 강원도 여관으로 가서 자살해 죽었어요. 허무주의입니다. 가정은 깨어지고 있습니다. 자살은 늘어나고 있습니다. 범죄는 늘어나고 있습니다. 있는 사람도 왜 있는지 모르고, 없는 사람도 왜 없는지 모르고, 배운 사람도 왜 배웠는지 모르는, 모두가 인생이 무엇인지 내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니까 전부가 방황하는 거예요.
예수를 믿으면 그가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고 그가 우리의 삶을 가치있게 만들어 주셔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서 위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땅에 사는 날 동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영화롭게 하는 것, 우리 인간의 가장 가치있고, 생명이 되는 가장 귀한 길 인줄 믿습니다. 일년동안 사람을 만나고, 유명한 사람 만나고 하는 것 얼마나 허무합니까? 연말이 되어 재미있는 곳 찾아도 얼마나 허무합니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성전에서 봉사하는 일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될 수 있는것입니다. 너무 아름다운 발걸음들이었습니다. 인생의 황혼이 올 때 모든 것 다 허무하겠지만 주님을 잘 섬긴 일은 영원히 저와 여러분 자자손손 축복이 될 줄 믿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봉사하세요. 일 하세요. 은혜와 진리 되시는 주님이 만 배나 갚아 주실 줄 믿습니다.
제가 어제들은 이야기인데 초등학교 4학년 책에 하나님께서 개와 닭과 돼지를 좋은 일 하라고 이 땅에 보냈대요. 일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왔어요. 너는 무엇을 했느냐? 닭에게 물으니 네, 저는 늘 주인에게 시간을 알려 주었습니다. 아침마다 '꼬끼오'하고 일어나 일하라고 시간을 알려 주었습니다. 잘했구나, 착하구나하고 머리에 벼슬을 달아 주었대요. 그 다음 개한테 물었어요. 너는 무엇을 했느냐, 네 저는 늘 주인을 사랑하고 순종하고, 주인의 집을 잘 지켜드렸습니다. 착하구나 하고 원래 개는 다리가 3개였는데 다리를 하나 더 달아 주었대요. 그래서 개가 소변을 볼 때마다 다리를 드는 것은 원래 3개였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돼지를 보고 물었어요. 너는 무엇을 했느냐? 예, 저는 할 일이 없어 먹다가 왔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화를 내면서 코를 잘라서 코가 납작해졌대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먹는 것만 아닙니다. 주 예수 잘 믿고, 믿음으로 사는 것, 하나님 잘 경외하면서 좋은 일 하는 것, 그 안에 주님의 은총이 있을 줄 믿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 1:1-14 / 이성우 목사
오늘은 성서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성서 주일을 정하여 지키는 것은 생명의 말씀이요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우고, 그 말씀이 기록된 성서의 편찬과 보급을 위해서 헌신하며 사역하는 대한성서공회 및 다른 기관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후원함으로 이 사역이 더욱 활기차게 이루어져 나감으로써 지구상에 있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성서가 보급되어 읽혀지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은 특별히 이러한 사역을 위해서 헌신하는 기관들과 사역자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성서주일은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지켜지고 있기 때문에 한때는 ‘만국성서주일’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성서주일이 지켜진 것은 오늘날과 같이 12월 둘째 주일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에서 성서주일은 ‘성서공회주일(Bible Society Sunday)’이란 이름으로 1899년 5월 성령강림주일에 처음 지켜졌습니다.
성서주일이 시작된 1899년은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시기여서 교회의 자립정도가 매우 미약했습니다. 성서주일을 한국에서 처음 주창한 영국성서공회 조선지부 책임자 켄뮤어 씨는 모금을 통해서 조선인 스스로 성서를 보급하길 바란 것보다는 서구 기독교의 아름다운 전통,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이웃에게 성서를 보급하고자 하는 정신을 한국성도들에게도 심어주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서주일은 한국교인들의 성경반포에 대한 관심 때문에 계속 발전해 갔고, ‘성서공회주일’은「신약젼셔」가 발간된 1900년을 기점으로 점차 정착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하여지면서 영국과 미국 등, 여러 나라의 도움으로 국내에 성경을 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보급하고 또한 전도지와 단편과 같은 전도용 성서를 많이 공급하여 기독교 성장에 큰 몫을 담당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교회가 성장하고 또한 경제의 발전과 함께 해외에 성경을 공급하는 일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싶어도 성경이 없어서 읽지 못하는 세계 여러 나라에 성경을 제작하여 공급하는 새로운 사명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979년 경제적으로 자립하면서 이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게 되었고 보다 적극적으로 세계를 향한 문서선교에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대한성서공회는 국내와 해외에 성경을 무상으로 공급하기도 하지만, 해마다 100여 개의 언어로 제작된 400-500만 부의 성경을 제작하여 140여 나라에 공급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소중한 대한성서공회의 과업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비록 제작비를 지불받고 수출하는 것이지만 제작 가격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가격으로 공급하고 있어 이 성경을 저렴한 가격으로 받아가는 가난한 나라에서는 보물과도 같은 성경이 되는 것입니다. 100여 년 전 우리가 처해 있는 형편을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한성서공회는 성도들의 기도와 헌금으로 유지되는, 한국교회의 기관입니다. 이 기관을 통하여 전 세계 성경의 15%를 공급하는, 세계에서 가장 성경을 많이 제작하는 나라로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엄청난 은총에 대한 조그마한 보답이며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대한성서공회가 이 사명을 우리들을 대신하여 잘 감당해 나갈 수 있도록 기도와 후원으로 아름답게 협력해 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책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인쇄술의 놀라운 발전과 함께 오늘도 하루에 수도 없는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정말 책의 홍수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수많은 책의 출판은 사람들의 지식수준을 높이고 인류 문화의 발전을 가져오는데 대단한 기여를 하게 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류의 책들 가운데서 오직 유일하게 성서만이 우리 생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으며, 인류의 영원한 숙제인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과 그 결과로 인해서 주어지게 되는 인간의 구원과 영생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많은 문학 작품들이 성서를 배경으로, 혹은 기독교적인 신앙을 배경으로 쓰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직접적으로 앞서 말씀드린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은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책입니다.
다른 종교의 경전이나 철학자들의 고민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인 철학서적들이 수없이 많이 존재하지만 그런 책들 속에는 그 어떤 책도 앞서 말씀드린 이 두 가지 문제를 속 시원히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책은 하나도 없으며 오직 유일하게 성서만이 이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고 하는 사실에서 성서의 중요성과 귀중성이 다시 한 번 분명해 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서 놀라운 발전을 가져온 인쇄술의 도움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올바른 번역과 편찬 및 발간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이 일에 기꺼이 헌신하는 사역자들의 수고와 땀 흘린 결과로 인해서 우리에게는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손에 들려지게 된 것은 한국 민족을 향하신 대단한 은혜요 축복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로써, 하나님은 이미 이런 일들을 통해서 우리 민족에게 복음에 대한 열정을 먼저 갖게 하셨으며, 지구상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남다르게 헌신하도록 사명을 주신 것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구약 성경은 말씀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신약성경은 육신을 입으시고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대칭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을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말씀으로 모든 생명을 이 땅에 존재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존재하심이나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 몸을 던지시면서 일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존재하심이 하나라고 하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깨우쳐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성경은 맨 처음 성경인 창세기부터 하나님의 활동이 말씀으로 시작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사실을 기록하면서 그의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말씀으로 이루어졌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자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 중에 있던 이 세상은 질서의 세상으로 바꿔지게 되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빛이 있게 되는 일부터 시작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존재하게 되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이 세상을 다스려나가시는 하나님께서 동방의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그 안에서 맨 처음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함께 거닐면서 대화할 수 있도록 하시면서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창세기 2장 16-17절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을 받고는 하나님께서 엄하게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된 것이며, 이것은 곧 인간이 최초에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으로 그 유형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제 멋대로 그 말씀을 해석하고는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게 된 것임을 창세기 3장 2-3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겨서 그 말씀을 무시하고 거역한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마음가짐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모든 범죄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말은 곧 그 사람의 인격 전체를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을 거역한다고 하는 것은 곧 그 말을 하는 사람을 무시하고 거역하는 처사로 받아들여져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옛적부터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불효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것이며, 부모님을 향한 효도 가운데 빠지지 않는 것은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는 것을 중요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말씀으로 이 세상을 다스려 나가셨는데, 이 세상에 죄악이 관영함으로 홍수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도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이었던 노아에게 방주를 짓는 것과 그 안에 들어갈 것들을 자세하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 소리에도 불구하고 방주를 짓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들과 함께 방주에 들어가서 홍수 심판이 끝나기까지 머물게 됨으로 이 세상에 생명들이 존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곧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홍수 심판이후 구약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들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복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과 함께 불순종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되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성경적인 예가 바로 아브라함의 생애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고 후손들에 의해서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게 되기까지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그의 믿음을 드러내 보여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대의 경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가 이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비참했던 망국의 역사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곧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그 말씀을 거역한 결과로 주어지게 된 심판이었음을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1장 1-14절까지의 말씀은 사도 요한이 영원 전부터 말씀으로 계셨던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사 인간 구원의 역사를 성취하게 되셨음을 증거하고 있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 곧 말씀으로서의 예수님을 주제로 삼고 있는데, 이 예수님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세상이 창조될 때 하나님과 함께 일하셨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죄로 인해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친히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고 하는 성육신 사건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마지막 구절인 14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도 요한은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오심에 대해서 참 빛으로 오신 분이심을 증거하고 있으며, 그 빛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빛이라고 말씀하면서 그 빛으로 인해서 어두움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정복당하게 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 빛 안에 생명이 있듯이 예수님 안에는 참된 생명이 있어서 이제까지 하나님을 떠나서 어두움의 죄악 가운데 살던 사람들이 그 사망의 그늘에서 비로소 새로운 생명을 얻어 구원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세 가지 핵심 단어는 ‘말씀’, ‘생명’, ‘믿음’입니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생명은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재창조의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고, 믿음은 새로운 생명을 얻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한 유일한 길로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본문 12-13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누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서 새로운 생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영원한 삶을 살게 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 다른 표현으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은혜요 축복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의 구원자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3년 동안의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 곧 천국 복음을 전파하심으로써 그 말씀을 전하고 있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셨으며, 가시는 곳마다 놀라운 표적을 행하심으로써 예수님 자신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증거 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말과는 분명히 다른 권위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능력을 동반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생명의 역사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게 되었음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신, 구약 성경 전체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행하신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태초부터 말씀으로 활동하시던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음을 증거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이 바로 그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기 위한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기 위하여 요한복음을 기록했다고 하는 기록 목적을 요한복음 20장 30-31절에서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성서주일을 지키면서 이아침에 주신 말씀을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인류의 구원, 곧 재창조의 거룩한 생명의 역사를 위해서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한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고 고백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보호와 축복 가운데 살아가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라며, 이 은혜와 복을 세상 만민에게 전하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요 1:1-18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전체의 서문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본문 속에는 요한복음이 말하려고 하는 가장 중요한 것들 대부분이 압축되어 들어있습니다. 본문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에 맞춰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무슨 말로 그의 복음서를 시작합니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선언하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태초”라는 말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을 가리킵니다. 즉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아무 것도 없던 때에 말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14절의 말씀을 통해 곧바로 확인하고 갈 것은 그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입니다. 14절을 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놀랍고 중요한 진리를 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곧 영원 전부터 계셨던 그 말씀이시라는 진리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한 것이 그것을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8절도 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아버지 하나님 품속에 계시던 그 유일하신 아들이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게 오신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뒤따르는 1절 하반절 또한 놀랍고 중요한 진리의 선언입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말씀과 아버지 하나님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어서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 한 것은 말씀과 하나님은 분리될 수 없는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 달리 말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각각 참 하나님으로서 서로 혼합될 수도 없고 혼동되어서도 안 되지만 또한 나뉠 수 없는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와 같이 참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그와 함께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성령도 같은 논리로 이해되고 추가되어 확정된 삼위일체교리의 기초를 이루는 말씀인 것입니다. 삼위일체교리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모두 영원 전부터 계시는, 서로 혼합되지 않고 구별되는, 참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라 오직 한 분이시라는 신비스런 진리입니다. 참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지만 그 하나님은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세 존재양식으로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더 이상 사람의 생각으로 이해하고 사람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 진리인 것입니다. 본문 1절의 요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참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2-3절은 아들 하나님께서 행하신 천지창조의 사역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이셨지만 우리같이 피조물의 일부가 아니고 만유의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처럼 피조물에 속하신 이가 아니라 우주만물의 주인이 되시는 근거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4절 상반절에서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안에 생명을 품고 계십니다. 아니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그 자신 영원한 생명이시고 모든 생명의 산출자이시며 모든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모든 생명은 그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참 하나님이시기에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요5:26에 보면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생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를 통하여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을 주기도 하시고 죽은 생명을 살리기도 하시며 또 영원히 살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4절 하반절에서는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합니다. 빛은 생명을 낳는 힘입니다. 빛은 진리이고 소망이며 위로를 뜻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며 진리를 깨닫게 해주고 소망과 위로가 되어줍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를 우리에게 보내주셨다는 사실보다 더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을 살리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보다 더 값진 진리도 없습니다. 그보다 더 큰 위로와 소망을 주는 일도 없습니다. 그 생명과 진리와 위로와 소망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보다 더 당신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증명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본문 14절은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은혜와 진리”는 당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당신의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속에 계시던 아들이 세상에 오셨으므로 그 영광은 더할 나위 없이 빛나는 영광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오셨으니 그보다 더 큰 은혜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보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더 잘 알게 하실 분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의 품속에 계시던 바로 그 아들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18절을 다시 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아들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신 사실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 잘 드러내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가장 크고 은혜로운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알게 하시는 계시의 절정이며 그 완성입니다. 16절에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한 것은 진리이건 은혜이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는 것보다 더 완전한 것은 생각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골2:9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다 주어졌고 은혜와 진리는 더 바랄 것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주어진 것입니다. 17절을 봅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따라서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보다 우리에게 더 큰 위로와 소망과 힘과 지혜가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대단히 심오하고 난해하게까지 여겨질 수 있으나 아주 간결하고 명백한 진리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요 위로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만이 우리에게, 아니 모든 사람에게 소망이 되고 위로가 되며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이시며 만유의 주인이시고,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으며, 그리고 그가 친히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 가운데, 내 속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에 보면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했습니다. 어둠은 죄와 죽음을 가리킵니다. 죄와 죽음 가운데 있는 자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안에 주어진 은혜와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9-11절에서도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합니다. 12-13절을 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의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또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시고 무슨 일을 하려고 오셨으며 그로 인해 우리가 누리게 되는 것이 무엇일지에 관한 그 자신의 증언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열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3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사람의 뜻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가 누구이시고 무슨 일을 하려고 오셨으며 그로 인해 우리가 누리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이며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복음의 소식입니다. 이 복음 안에서 우리의 모든 위로와 소망과 기쁨과 지혜와 새 힘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믿지도 영접하지도 않는 세상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부인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교회를 핍박하는 반역의 무리들이 날뛰는 세상입니다. 생명이 없는 세상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죄와 죽음 아래 놓여 어둠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의 세상입니다. 진리가 죽고 참 기쁨이 사라졌으며 참된 위로와 소망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는 채 흘러가는 세상입니다. 빛을 싫어하고 빛을 소멸시키려고 발악하는 세상입니다. 이 생명이 없고, 진리는 실종되었으며, 죄와 절망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자칫 잘못하면 우리도 함께 어둠의 자녀처럼 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를 믿으며 그를 영접하고 사는 우리는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를 이미 유업으로 받았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받아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그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저버리거나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국민이 외면하고 부정하는 정치인들이 국민 앞에 진정한 반성은 하지 않고 기회주의적인 탈당과 기만적인 간판 바꾸기로 국민을 우롱하며 국민의 분노와 짜증과 혐오감을 증폭시키고 있는 한편 생명 없는 재집권계략 세우기에만 분주한 것을 지켜보며 살맛이 안 난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의 후보로 뽑히기만 하면 대통령이 되는 것은 따 놓은 당상인 줄로 알고 무엇이 진실인지도 알 수 없게 만드는 폭로전과 비방전에 목숨을 걸고 집안싸움을 일삼으며 국민에게 신선한 비전과 가슴 벅찬 희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불안과 불쾌감만 커가는 이때라 할지라도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핵과 미사일로 우리의 신경을 건드리고 받아낼 것은 다 받아내면서도 이행해야 할 국제적 협약은 지키지 않는 북한과 그런 북한에게 퍼주지 못해 안달하며 저자세로 일관하는 정권 때문에 속이 뒤틀린다 할지라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정쩡한 타협 속에 재개정된 사립학교법 때문에 개운치 않은 기분이 든다 할지라도 헌법정신에 합치하는 완전한 선교의 자유와 교육의 자율권이라는 궁극적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또 인내하며 투쟁의 의지를 내던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의 큰소리에도 불구하고 동계올림픽을 유치하지 못하게 되어 안타깝다 하더라도 너무 속상해 하며 포기할 것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사업이 잘 진척되지 않거나 경제적인 압박을 받거나 자녀문제로 근심이 생기거나 인간관계가 틀어져서 어려움을 겪는 일이 있더라도 기쁨과 감사를 잃지 맙시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와 영원히 복된 삶이라는 가장 큰 보화를 차지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오시고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도 생명을 되찾고 진리를 소유하며 그로 인해서 항상 위로와 기쁨과 소망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말씀이 육신되어 오신 예수님
요 1:1-5 / 김영대 목사
오늘은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 다같이 앞 뒤 좌우에 앉으신 분들과 인사하겠는데 오늘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했던 좀 특별한 인사말을 가지고 인사하겠습니다. "마라나타" 이 뜻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또한 오늘은 모든 교회가 함께 지키는 '성서주일'입니다. 그럼 성서주일과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절과 무슨 관계가 있어서 이 대림절기 중간에 성서주일이 들어있는 것입니까? 예! 아주 특별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르켜 전문적인 신학용어로 '성육신'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 '말씀'이라는 말은 곧 '예수님'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라는 말 대신에 거기에 '예수님'을 대입시켜 1절부터 4절까지를 읽어보면 더욱 그 뜻이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2절부터는 "그"라는 대명사로 되어있는데 이것 역시 예수님으로 바꾸어 읽어보겠습니다.
(요 1:1-4) "태초에 예수님이 계시니라. 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예수님이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아멘.
어때요. 뜻이 분명하지요.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 바로 그 분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가 어떻게 이 땅에서 사셨는지, 그 분이 이루신 일이 무엇인지, 그 분의 우리를 향한 뜻이 무엇인지 잘 알고자 하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육신으로 오셨던 예수님은 33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만 이 땅에 머물다가 다시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대에 말씀이신 하나님, 말씀이신 예수님을 바로 알고, 깊이 알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글로 쓰여진 말씀인 성경을 읽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선포되는 말씀인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이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때 그 말씀 속에 있는 생명이 우리 속으로 들어오게 되어 우리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신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1절을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즉, 예수님은 ①태초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태초'라는 말은 창1:1 말씀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시간의 시작 이전을 말합니다. 이것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부터 스스로 계신 자존하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즉, 어떤 시점부터 어떤 시점까지만 계시는 시간의 한계 속에 계신 분이 아니라, 시간의 시작과 끝의 주인 되시는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은 시간의 제한을 받는 분이 아니라 시간을 만드신 분이시고 그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시간, 지구의 시간은 태양계의 움직임, 곧 지구와 태양의 자전과 공전에 의해 시간이 정해지는데 예수님은 그 ②태양계와 우주를 만드신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절에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시간에 제한되는 분이 아니라 시간을 지배하시는 분이시며 모든 피조물에게는 시작과 끝을 지정해 주시는 분입니다. 인간의 생명뿐만 아니라 태양계와 우주의 시작과 끝을 지배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나아가서 4절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신 동시에 ③모든 존재에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원천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생명 때문에 오늘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만물이 소생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신이 생명을 지탱하는 것도, 우리 영혼이 영원토록 살 수 있게 된 것도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님을 통해 흘러나오는 그 생명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피조물인 육체 안에서 제한되는 생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는 시간이나 질병이 지배하지 못하는 영원한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정말 주시기를 원하시는 생명은 육체의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 마지막 부분에 이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0-31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경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죽음이나 질병, 시간이 제한하지 못하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한 말씀, 로고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이 생명을 모르고 땅에 속한 생명, 시간에 제한된 생명, 끝이 있는 생명에만 집착하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관심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제가 너무 광범위해 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읽지 않았지만 10절-11절을 보면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그를 영접하지 아니했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특별히 맹인,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눈을 뜬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하는 것은 단순한 육체적인 눈을 뜨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보아야 할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눈을 뜨고 있기 때문에 본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빛이 있기 때문에 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빛이 없으면 볼 수 없습니다. 육체의 눈은 태양의 빛이나 전등이든 촛불이든 빛이 있어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식의 눈이 있어야 글을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식의 빛이 없이는 육체의 눈을 가지고 책을 보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문맹이라 합니다. 요즘은 '컴맹'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는데 컴퓨터를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물론 눈으로야 책상 위에 놓인 컴퓨터를 보지만 컴퓨터와 이 사람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식적인 맹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맹인들도 있습니다. 관점을 제대로 갖지 못해 보아도 제대로 판단치 못하는 사람, 긍정적인 것은 보지 못하고 늘 부정적인 쪽으로만 보는 사람, 전체는 보지 못하고 부분만을 보는 사람, 다른 사람은 잘 판단하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판단할 줄 모르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바로 정신적인 맹인 혹은 색맹인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영적인 세계에 대하여 무지하고 캄캄한 사람들입니다. 5절 말씀에 있는 바와 같이 빛이 비치되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탄식한 것과 같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영적인 소경들입니다. 이런 영적인 소경의 상태에서 우리 모두는 눈을 떠야 합니다. 아니 먼저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 속에 들어오도록 내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빛이신 하나님이 내 삶 속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불신과 편견, 아집과 선입견, 겉치레와 체면, 이러한 것들을 우선 벗어 던지면 하나님의 빛이 내 삶 속에 조명되기 시작됩니다. 서서히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땅만 보던 사람이 위를 바라보게 됩니다. 사람만 보던 눈이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나만 보던 존재가 남을 의식하게 됩니다. 물질의 사람이 영적인 사람으로 바꾸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영원한 세계를 보게 해주는 생명의 빛입니다. 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요, 예수님 자신입니다. 또한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성도들조차도 참 생명을 주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는데 게으르고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약동함이 그 속에 없는 것입니다.
(일사천리 신앙부흥운동)에 열심히 동참하십시다.
특별히 이 대림절에 말씀이시며 하나님이신 예수님, 우리와 똑 같은 육체를 가지시고 사셨던 그 분의 삶을 본 받아 살아야 합니다.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신 그 분이 어떤 분인지를 가장 잘 나타내 보여주는 곳이 바로 빌립보서 2:5-11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우리가 따르고 본 받아야 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 한번 찾아서 읽도록 하겠습니다.(신약성경 318면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아멘
대림절은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그 분을 닮기 위하여 말씀 읽는데 더욱 힘쓰는 기간입니다. 예수님이 살아가신 대로 본 받아 실천하는데 힘쓰는 기간입니다. 바울은 회심하여 예수를 만난 이후 일생을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오늘 본문 5절에서 이렇게 호소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마음을 품으십시오.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말씀이 육신되어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신 분"(6절)이십니다. 여기 "취한다"는 말은 움켜잡는다, 놓치지 않으려고 꽉 붙잡는다는 뜻입니다. 자기주장을 강하게 고집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권리를 기꺼이 양보하고 포기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자기 권리를 결코 양보하지 않습니다. 요즘은 자기 주장이 너무나 강한 시대입니다. 봉사는 열심히 하지만 자기주장이 너무 강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예수님처럼 내 자아가 주장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자아를 마음의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그 권좌에 합당하신 분인 예수님께 그 자리를 내어드리는 훈련을 하는 이 대림절기로 삼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자기를 비우신 분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주장하지 않으려면 결국 자기 마음을 비워야합니다. 그래서 본문 7절은 좀더 근원적으로 전개되어 나갑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여기 자기를 비운다는 말은 "케노운(kenoun)"인데 통을 쏟아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다 비우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고집, 편견, 아집, 교만을 버려야 참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적인 가치관과 욕심을 비워야 합니다. 재물이나 명예에 눈이 멀어 있으면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욕심을 버리십시오. 그래야 그 빈속에 예수님의 생명을 채울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세상것으로 만족을 삼으려고 창고를 헐고 새로 크게 지으려 하지 말고, 오히려 창고 열어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므로 창고를 비우는 사람들이 되어야 참 생명을 얻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대림절기에 나 자신을 비우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자기를 낮추는 분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자기의 마음을 비우는데서, 낮추는 데로 더 낮아지십니다. 그래서 7절과 8절은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여기 종의 형체를 가졌다는 말은 "취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낮아지신 것입니다. 의인이 죄인이 되신 것이요, 주인이 종이 되신 것이요, 영광을 버리고 부끄러움을 입으신 것이요, 창조주가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주님은 하늘로부터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위로 올라가려고만 합니다.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과, 더 우뚝 높아지려는 명예욕, 세상 위에 군림하려는 교만 …. 그래서 세상은 싸움터가 되었습니다. 요즘 나의 마음가짐과 태도에 있어서 얼마나 겸손함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대림절 기간동안 우리가 잊어버린 겸손을 되찾는 은혜를 회복시키십니다. 이 대림절 기간이 낮아지는 은혜를 경험하는 축복의 절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4. 자기를 희생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고난을 감내하신 분이 아니라, 기꺼이 희생을 치르신 분이십니다. 본문 8절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희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누리게 된 구원은 우리편에서는 값없는 선물인 은혜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나무에 매달려 죽게 하신 엄청난 희생을 치르신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희생의 정신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마스는 낭만적인 절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으러 오신 날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하늘 나라의 모든 특권을 포기하신 그 예수님! 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희생의 삶을 배우는 대림절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5. 하나님이 높여주신 분입니다.
자기를 비워 낮아지시고, 자기를 희생하신 예수님! 복종하지 아니할 수 있는 분이 복종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분입니다. 겸손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높이셔서 만왕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요, 망한 사람 같았지만 결국 하나님이 높여 주셔서 천하만민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고, 모든 사람들이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역설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시면 이 예수님의 인격을 우리도 가질 수 있습니다. 겸손할 수 있습니다. 낮아질 수 있습니다. 순종할 수 있습니다. 희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삶을 쓰여진 글로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 곧 성경입니다. 이 대림절기에 말씀이신 예수님을 여러분의 삶 속에 온전히 모셔들이시기를 바랍니다.
17세기에 살았던 안젤루스 실레시우스(Angelus Silesius, 1624- 1677)는 그리스도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천 번을 나셨다고 해도, 내 안에서 나신 바 되지 않으면 나는 여전히 잃어버린 자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 안에 2,000년 전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느끼는 경험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중에 교회는 다니지만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의 생명을 소유하지 못한 분들이 계십니까? 여러분 가운데 영적으로 병을 앓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마음이 몹시 지쳐있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여러분의 삶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모든 영적인 질병이 치유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새 힘을 얻습니다. 세상을 이기지 못해서 진흙 탕 속에서 계속 씨름하는 분이 계십니까? 죄를 거역하지 못해서 마음이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분이 계십니까?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그 말씀이 여러분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죄를 능히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 속에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