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Ⅲ-30]되살아나는 ‘오수개 얘기’는 필연(必然)
전라도 오수 땅의 ‘의로운 개’ 이야기를 아시리라. 들어보셨으리라. 21세기 대명천지 ‘AI 세상’에 1천년 전의 오수개 이야기가 좀 뜬금없는가? 뜽금맞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게 글쓴이의 생각이다. 여러 가지 정황상 세상에 뒤늦게 나온 것이 만시지탄이긴 하나, 지난 반 세기 동안 여러 뜻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선각자가 되어 오수개 알리기에 힘을 쏟았다. 나는 이들을 ‘다시 없는 오수의 의인’(獒樹의 義人)이라 부르고 싶다. 그 결과,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고(1970년대 초), 멸실된 오수개의 생물학적 복원에 성공도 했다(2008년). 또한 ‘오수개’가 2024년에는 유엔 FAO에 의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고유견종으로 등재되었으며(하여, 임실군에서는 다시 1천년만에 등재기념비를 세웠다), 천연기념물 지정을 눈앞에 두고 있다(빠르면 연내, 늦어도 내년 상반기).
최소 10명에 가까운 오수 의인들의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자. 이제 ‘마지막 고비’가 숙제처럼 우리의 목을 조이고 있다. 원동산 공원에 1939년에 옮겨 놓은 ‘의견비’는 대체 언제 세워진 것일까? 풀리지 않는 역사의 수수께끼는 잔인하기까지 하다. 뫼비우스의 띠인가? 풀려야 정답인 것을. 이렇게 문명과 과학이 이처럼 발달됐는데, 수수께끼를 푸는 ‘비밀의 열쇠’는 정녕 없는 것일까? 높이 218cm 넓이 상단 98cm 하단 96cm 두께 28cm, 멀리서 보면 제2의 광개토대왕비처럼 보인다. 앞면은 글자 하나 없이 개가 영락없이 거꾸로 승천하는 모습이다. 개발자국 서너 개가 보인다. 뒷면에는 글자가 수마(水磨)로 워낙 마모되어 탁본을 여러 번 해도 판독이 어렵다. 승천하는 개 모습을 뒤집어보라. 2008년 복원 공표한 오수개와 판막이가 아닌가. 이게 어찌 우연이겠는가. 필연인 것을.
2023년 금석문학자 손환일 박사가 ‘획기적으로’ 밝혀낸 게 건립연대의 간지 <壬戌年 三月中>과 두전(頭篆)에 해당되는 듯한 넉 자 중 석 자(樹獒?碑)라지만, 보고 있어도 믿기 어렵다. 그러나 2005년 판독돼 밝혀진, 이 비를 세우는데 추렴을 한 사람들의 이름 80여명은 읽혀진다. 불교용어로 ‘단월’(檀越), 즉 시주자 명단이 2단에 걸쳐 들쭉날쭉 새겨져 있다. 이것만 해도, 이게 어디인가? 큰 수확일 터이나, 그러나 대체 몇 년도에 세웠다는 것인가? 최첨단 촬영기법으로 음각된 글자들을 모두 양각화하시라. 2026년은 응답하라.
일단, 이 비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야기도 흥미롭다. 을축년인 1925년은 20세기를 통틀어 한반도를 강타한 엄청난 홍수가 있었다. 이 재해로 6백여명의 사람이 죽거나 실종됐고, 7만가구가 붕괴 침수, 논 10만 마지기가 유실됐다고 한다. 7월 한 달 강수량이 650-970mm였다니. 장수 팔공산에서 내려오는 오수천이 상리를 지나는데, 그 해 즈음에 모래에 묻혀 있던 의견비가 상리 어느 지점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 오수 사람들은 이 비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천 년 전에 세워진 ‘개비’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봤다고 한다. 비가 발견된 곳의 지척에 살던 새댁(1924년 결혼 김남주)이 훗날(1982년 의견문화제 1회 행사때) 큰아들에게 “그때(아마도 1928년?) 큰 개가 엄청난 바위에 눌려 빠져나오려 끙끙거리던 꿈을 생생하게 꿨다”고 얘기했다. 1921년생 황의학씨도 비가 모래에 묻혀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비를 세우려 하자 대략 5t의 비가 꼼짝을 하지 않아 제물을 차려 고사를 지낸 후에야 움직여 그 곳에 세워놓은 것을 봤다는 것이다(김남주 할머니 목격).
또 한 분의 증언을 최근에 들었다. 금암리에 사시는 85세 할머니가 어릴 적 들은 얘기에 의하면, 고사를 지내며 무당이 굿을 했다는 것과 이 무거운 비를 300여m 떨어진 원동산공원으로 황소 두 마리가 앞에서 끌고 둥글대를 비 앞부분에 받쳐 가면서 옮겼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당시 동아일보는 1938년 2월 16일자, 1940년 5월 14일자에 관련 기사를 실었다<사진 참조>. 이전계획은 오수 토박이 선천정길(船川定吉·후나카와 사다키치)의 발의에 의한 것인데, 전라선 개설공사와 오수천 호안공사 때문에라도 옮길 수 밖에 없었다한다. 아무튼, 이 할머니는 해마다 원동산 노거수에 막걸리를 먹여왔는데, 엄마나무 2그루, 아빠나무 1그루, 나머지는 새끼나무라고 했다. 증언을 듣던 날, 막걸리를 3만원어치 사다가 할머니가 나무 밑둥이에 막걸리를 따라주는 모습을 영상으로 촬영해 놓았다. 신령스런 분위기로 주위가 숙연해지기도 했다. 신포집 양주(兩主) 부부가 삼복지절이 되면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게 하고 의견비 앞에 제물을 차려놓고 고사(?)를 지냈다는 또다른 증언도 덤으로 들었다.
‘오수 의인’의 한 분인 오수번영회장 심병국(1924-1984) 선생은 “일제 때(1924년)에도 보통학교 조선어독본에서 실린 ‘의구 이야기’가 우리 교과서에 수록돼야 한다”며 그 당위성을 문교부에 건의하고, 가람 이병기 박사의 고증(견분곡 관련)을 받는 등 역사적 유물인 오수설화의 객관적 가치를 주장했으며, 그의 아들 봉무씨의 헌신적인 노력도 뒤따랐다고 한다. 심지어는 "인구 소멸 위기에 빠진 오수가 앞으로 먹고 살 길은 '오수개'를 팔아 먹고 사는 방법 밖에 없다"고 했다던가. 1971년 전라북도 민속자료 1호 지정. 한편 세계적인 반려동물의 성지로 거듭나기 위해 애쓰는 오수반려문화도시추진협 심재석(1957-) 회장의 의견비 보존, 홍보, 문화적-사회적 가치 제고를 위한 헌신적인 노력과 41회째 진행된 오수의견문화제 등에 대한 오수 주민들의 호응 그리고 임실군의 효율적인 문화정책으로 반려동물을 의인시(疑人視)하는 친반려문화의 전통이 전승, 발전되고 있다고 하겠다.
졸문의 제목 '되살아나는 오수개 얘기는 필연(必然)'은 구전으로 1천년 동안 내려온 오수개 설화가 실제 발생한 실화였으며, 조선 중기 아니면 구한말까지도 의견비와 의견묘가 엄존했고, 어떠한 자연재해로 비가 묻히고 묘는 유실된 듯한데, 발견 당시의 주민 증언 등이 어찌 우연(偶然)이겠느냐는 차원에서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는 필연(必然)의 당위성을 강조한 것이다. 필연이 아니라면, 일제까지도 보통학교 교과서에 ‘의구’(義狗)라는 제목으로 이 미담을 실었겠으며, 필연이 아니라면 두 할머니의 고사와 황소 두 마리 등 에피소드 증언을 지금 와서 들을 수 있었겠는가? 필연이 아니라면 심병국 선생이 외롭게 교과서 싣기 운동이나 의견문화제가 세세년년 주민들의 힘으로 지속 전개되었을까? 또한 필연이 아니라면 청년지도자 심재석 회장이 복원과 홍보 등 사업 전개를 줄기차게 전개해 오늘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망각하는 역사는 어떠한 의미도 없다’는 것을 증명이나 하듯, 오수개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살아 숨쉬는 까닭은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는 필연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