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33
2월13일[연중 제5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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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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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Z_N4S70zarE
[서울대교구 박민준 가브리엘(월계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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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위대한 모성을 지닌 이방인 어머니!>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의 치유를 위해 자신은 강아지가 되어도 좋다며 예수님 발치 앞에 엎드린 이방인 여인의 모습을 묵상하며, 이제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어린 시절 죽을병에 들린 어떻게든 한번 살려보겠노라며, 당신 등에 업고 이 병원 저 병원 뛰어다니면서 의사 선생님들께 사정사정하셨던 어머니였습니다. 차라리 나를 데려가라시며 병원 성당에서 밤을 지새우며 울부짖으셨습니다.
어머니 영정 사진을 바라보며 언제나 송구스러운 마음과 함께 ‘어머니를 봐서라도 더 잘 살아야 하는데...’ 하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혹시라도 너무나 절박해서 밤새워 기도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때로 너무 간절해서 누군가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간청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결코 만만치 않은 이 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부족한 우리 인간 존재인지라 별의별 상황 앞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너무 기가 차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주님 앞에 부르짖기도 합니다.
‘주님,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제가 뭐 그리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차라리 저한테 그러시지 왜 저 어린것에게, 저 딱한 사람에게 저런 끔찍한 고통과 시련을 주십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이교도 어머니가 그랬습니다. 그녀의 어린 딸이 그만 더러운 영에 들렸습니다. 어머니는 차라리 딸 대신 자신이 악령에 들렸으면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딸은 살고 자신이 대신 죽었으면 했습니다.
위대한 모성을 지닌 이방인 어머니가 주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딸만 살릴 수만 있다면, 자신은 죽어도 좋다, 한 점 먼지가 되어도 좋다, 한 마리 개가 되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딸의 치유를 청했습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 살짝 뜸을 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상관없었습니다. 딸만 낫게 된다면 그 어떤 수모도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아래 있는 강아지들도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런 놀라운 모성 앞에 예수님께서도 두손 두발 다 드신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혹시라도 지금 눈앞에 닥친 불행이 너무 커서 할 말을 잃고 계신가요? 혹시라도 지금 너무나 큰 시련 앞에 일어설 힘조차 없으십니까? 그렇다 할지라도 아직 끝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아직도 마지막 카드가 한 장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딸을 대신해서 기꺼이 한 마리 강아지라도 되겠다는 그 간절한 마음, 딸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대신 죽겠다는 그 각오로, 주님께 간절히 한번 매달려 봐야 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공생활 시기, 그리고 사도들의 활발한 복음선포 기간을 끝으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기적과 치유의 시기는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기적의 시대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직 아닙니다.
우리가 보다 겸손한 자세로 주님 앞에 엎드리고 머리를 조아린다면, 우리가 보다 간절하게 부르짖는다면, 온몸과 마음, 영혼과 정신을 다 바쳐, 성심성의껏 기도드린다면, 자비하신 주님께서 결코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반드시 움직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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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zNXrTE3Iv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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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희망을 품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좋은 청을 곧바로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에 대해 묵상하려 합니다. 마르코 복음 7장 24-30절에서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은 악령에 사로잡힌 딸을 위해 예수님께 간청하지만, 처음에는 거절당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고, 예수님께서는 결국 그 딸을 치유해 주십니다.
이러한 일들은 단순히 시간이 걸리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자라도록 하는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희망을 지속하게 하시는 이유는 결국 ‘하고 싶다’가 ‘할 수 있다’로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믿음이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성장하면, 개인을 넘어 공동체와 세상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희망은 믿음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다. 우리는 그것 없이는 결코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희망이 지속될 때, 그것이 점점 더 깊은 믿음으로 자라나며, 결국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사랑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경험합니다.
사울 왕의 이야기는 믿음과 희망이 부족할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울은 하느님의 명령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여 왕위를 잃게 됩니다. 반면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은 거절당하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간청했고, 결국 믿음이 드러나면서 딸이 치유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희망이 결국 믿음을 키우고, 믿음이 행동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은 처음에는 단순히 감옥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희망을 놓지 않고 준비하며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변화합니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감옥에서 책을 읽고 공부하며 작은 도서관을 확장시킵니다. 도서관을 키우기 위해 교도소장에게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내며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국 교도소장은 이를 허락하게 되고, 죄수들에게 지식을 나눌 기회가 생깁니다.
앤디는 또한 한 죄수의 고등학교 졸업 시험을 도와줌으로써, 희망이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이후 그는 감옥의 방송 시스템을 해킹하여 전 교도소에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틀어주며, 감옥 안의 모든 죄수들에게 자유와 희망의 순간을 선물합니다.
앤디는 말합니다. “희망은 좋은 것이고, 아마도 가장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좋은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이는 희망이 단순히 개인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변까지 밝히는 힘이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마더 데레사 또한 처음에는 한 명의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싶다는 작은 희망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녀는 거리에서 굶주린 이들을 보며 돕고 싶었고, 이 작은 희망이 그녀의 믿음으로 이어졌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를 가난한 이들로 가득 채우고 싶다.”라는 희망으로 출발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한 사람에게 밖에 사랑을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할 수는 없지만, 작은 일을 위대한 사랑으로 할 수 있습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와 함께하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수도회를 세우게 되었고, 그녀의 봉사는 전 세계로 확산하였습니다. 그녀의 희망이 믿음으로 변화되었고, 그 믿음은 결국 사랑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사명에 동참하며 함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헬렌 켈러의 이야기는 작은 희망이 어떻게 믿음이 되고, 믿음이 결국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녀는 어릴 적 시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작은 희망을 품었습니다. 설리번 선생님의 끊임없는 노력과 그녀의 불굴의 의지는 결국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변화하였고, 헬렌 켈러는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위대한 교육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희망을 품는 순간 우리는 이미 변화를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개인적인 극복을 넘어서 장애인을 위한 교육과 인권운동을 펼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는 희망이 믿음이 되고, 믿음이 행동으로 이어져 사랑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는 성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믿음, 희망,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사랑입니다.”(1코린토 13,13)
베드로 사도는 희망했습니다. 물 위를 걷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잘 안되었습니다.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믿음을 성장시켰습니다. 결과적으로 이것을 본 다른 사도들을 변화시키는 선한 영향을 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끝까지 희망하기를 바라시며, 그 이유는 믿음을 성장시켜 결국 세상을 더 밝히는 사랑으로 나아가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희망이 믿음이 되고, 믿음이 사랑으로 성장하여 세상을 밝히는 존재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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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헌법재판소에서 비상계엄이 관련된 심문이 있었습니다. 명령을 받았던 군인들은 대통령이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총을 쏴서라도 문을 열고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는 경찰청장, 특전사 사령관, 방첩사 사령관의 일치된 증언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은 그런 지시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군인들은 자신들이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지 못한 점을 부끄러워하였습니다.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대통령은 포고령의 내용도 몰랐다고 합니다. 단순히 겁주기 위해서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 결의가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탄핵과 권한 대행 체제로 정부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대통령 탄핵을 찬성하는 사람들의 시위가 있었고,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시위도 있습니다. 법원에 난입해서 집기를 부수고, 경찰을 폭행하고, 판사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공정과 정의, 법과 원칙을 떠나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부끄러움은 동물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동물들은 본능에 따라서 생존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부끄러움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는 ‘숨’을 넣어 주셨고 그 숨은 인간의 양심이기 때문입니다.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옳지 않은 일을 부끄러워하는 마음, 즉 불의를 거부하는 양심을 뜻합니다. 이는 유교에서 인간의 본성 중 하나로 간주하지만, 사실 성경과 신앙의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죄를 범한 후, 벌거벗었음을 깨닫고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이는 인간이 죄를 지을 때 본능적으로 느끼는 수치심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이 수치심은 단순히 부끄러움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여는 초대장이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숨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찾으시며, 죄 안에서도 사랑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느님께 진심으로 회개하며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 그의 회개는 수오지심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가 다시 하느님께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수오지심은 죄를 깨닫고 회개로 나아가는 출발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후, 예수님의 시선을 마주하고 밖에 나가 통곡했습니다. 그의 눈물은 수오지심에서 나온 것이었고, 이는 그가 진정한 제자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회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많은 경우 수오지심을 잃어버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6장 15절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혐오스러운 짓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얼굴을 붉히지도 않는다.” 우리는 종종 잘못을 저지르고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거나, 죄를 합리화하려는 태도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수오지심은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입니다. 예를 들어, 환경 파괴, 사회적 불의, 그리고 인간의 탐욕은 모두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들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께서는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서 인간이 환경을 파괴한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며, 회개하고 창조 세계를 돌보아야 한다고 강력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이러한 세상 속에서 도덕적 나침반을 잃지 않고 수오지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수오지심은 단순한 도덕적 감정에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수오지심은 십자가의 신비 안에서 구체화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수치를 대신 짊어지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성찬례에서도 우리는 수오지심을 고백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는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느끼는 겸손한 수오지심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하며 용서와 회복을 청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부끄러움을 희망으로 바꿔 주십니다. 수오지심은 회개와 변화로 이어질 때 진정한 의미를 갖습니다. 매일 자신을 돌아보며 양심 성찰을 통해 하느님께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사회적 불의와 잘못된 구조를 부끄러워하며, 하느님의 정의를 이루는 데 앞장서면 좋겠습니다.
수오지심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며, 성화로 나아가는 초대입니다. 우리의 부끄러움은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통로가 됩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겸손과 순결을 본받아, 우리의 수오지심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살아갑시다. “보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렇듯 복을 받으리라. 주님은 시온에서 너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너는 한평생 모든 날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리라.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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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딸들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오늘 창조 이야기는 며칠 전 들은 사제계 전승의 창조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와 전개 방식을 보입니다. 야훼계 전승에 따른 이 창조 이야기에서는 인간 창조, 특히 여자의 창조 이야기가 두드러집니다.
먼저 여자가 창조된 동기와 그 과정을 눈여겨봅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세 2,18)라고 말씀하시며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고자 하십니다. 알맞은 협력자는 종속된 자도 아니고 지배하는 자도 아닌 동등한 관계로서, 히브리 말로는 ‘말 없는 대화로도 가능한 직접적 관계’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흙으로 만든 온갖 짐승과 새들은 사람에게 알맞은 협력자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서 그와 동등한 존재를 만들어 그에게 데려다주십니다. 결국 동등한 남자 사람의 뼈로 지어진 여자는 흙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존재인 셈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가정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만드신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015년 필라델피아 세계 가정 대회) 이는 인간이 혼자서는 온전한 피조물이 아니고 다른 인간과 맺는 협력 관계 안에서, 곧 친교 안에서만 온전한 인간일 수 있음을 뜻합니다. ‘인간’(人間)의 한자 말이 이를 잘 보여 줍니다. 서로 기대고 있는 두 사람의 관계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말의 깊은 의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상호 관계 안에서만 참으로 인간이 되는 친교의 신비가 성삼위의 친교를 닮았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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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7,24-30: 강아지도 빵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티로 지방으로 가신다. 예수님은 마귀 들린 어린 딸을 둔 시리아 페니키아의 한 어머니를 만나 그 간청을 들으신다. 마귀 들려 고생하는 자기의 딸을 고쳐달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27절) 당시 희랍인들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여인을 개라고 불렀고,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을 경멸하는 말로 개라는 표현을 하였다. 예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말을 사용하셨던 것 같다. 이것은 그 여인의 믿음을 보려고 하셨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여인의 대답은 어떠했는가? 그런 말씀에 하나도 섭섭함이 없이 오히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8절) 한다. 얼마나 여유 있고 부드러운 마음의 태도인가? 마치 유다인이 다른 민족들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 같이 말하고 있다.
그 여자는 은총을 얻기 위하여 강아지라는 칭호마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어머니로서 딸을 위하여서는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는 자세로 예수님께 간청하고 있다. 이것이 또한 어머니의 사랑이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태도를 칭찬하셨고 딸을 치유해 주신다.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감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29절) 하셨다. 이 여인의 자세, 이것이 우리가 주님 앞에, 우리의 이웃 앞에 갖추어야 할 기도의 자세이며, 신앙인의 자세다. 우리 자신이 이제는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른 종교의 신자들을 업신여긴다든지, 무시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는 귀중한 사람들이며, 그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주님을 믿고 따르며 참으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사는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로 주님께 나아가며, 주님을 이웃에게 전해줄 수 있는 우리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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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미신과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은 마귀 편에 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마르 7,24-30)
1) 이 이야기는, 어떤 우상 숭배자를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시켜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티로 지역, 이교도,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 강아지들”이라는 말들은, 이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가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이방인’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신다는 소문일 것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은총을 우상 숭배자들에게 줄 수는 없다.”라는 뜻입니다. ‘자녀들’은 ‘하느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고, ‘강아지들’은 ‘우상 숭배자들’입니다. <이 말씀은, “너는 지금 우상을 숭배하고 있으니 하느님께 은총을 청할 자격이 없다.”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산상 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이 말씀에서, ‘개들, 돼지들’은 우상 숭배자들을 뜻합니다. ‘거룩한 것, 진주’는 하느님의 은총, 예수님의 복음, 성사 등을 뜻합니다.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라는 말씀은, 우상 숭배자들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우상 숭배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하는 ‘개들’은 떠돌아다니는 ‘들개’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강아지’는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입니다. 여자를 배려하기 위해서 표현을 조금 바꾸신 것 같습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먼저 자녀가 되어라.”로 해석됩니다. <“자녀들의 빵을 먹고 싶다면 먼저 자녀가 되어라. 강아지인 채로는 그 빵을 먹을 수 없다.”입니다. 즉 “하느님께 은총을 청하려면 먼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라.”입니다. 우상 숭배를 버리지 않은 상태에서 하느님께 은총을 청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2) 여자 입장에서는 예수님 말씀이 ‘거절’로 들릴 수도 있었고, 자존심이 상하는 말씀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절박한 심정’ 때문에 물러서지 않고 끈질기게 간청했습니다. <자존심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는 말은,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라고 간청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자신이 ‘강아지’ 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제부터는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강아지’ 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여자를 변화시키기 위한 충격 요법과 같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상 숭배가 얼마나 헛되고 어리석은 일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한 충격 요법. 예수님과 여자 사이에 더 많은 대화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어떻든 여자는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잘 따라와서 변화되었고, 올바른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간청한 은총도 주셨고, 청하지 않았던 은총도 주셨습니다. 여자가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된 일은, 여자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고, 청하지 않았던 은총인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낸 것보다 더 큰 은총입니다.>
3) ‘우상 숭배’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이 무엇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우상이 무엇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사람들이 바치는 제물은 하느님이 아니라 마귀들에게 바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마귀들과 상종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잔도 마시고 마귀들의 잔도 마실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식탁에도 참여하고 마귀들의 식탁에도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1코린 10,19ㄴ-21) 우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지만, 우상 숭배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니라, 마귀들을 섬기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등지고 마귀들을 따라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게 소원을 빌고, 앞일을 물어보는 것은 주님을 배반하는 ‘큰 죄’를 짓는 일이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미신과 우상 숭배로 규정하는 일들에 대해서, ‘미신이 아니라 과학적인 통계다. 학문이다.’ 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렇게 주장하는 것 자체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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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 가는 쪽>
마르코 7,24-30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믿음)
그때에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그 가는 쪽>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하느님께서
기꺼이 사람이
되어 오시고
아픈 딸 고치고픈 부인이
한갓 강아지라도
되고자 하니
사랑은
아래를 향한다
사람을 오롯이
하느님 닮게
올리시고
더러운 영 쫓겨난 딸
품은 어머니로
새로 나니
희망은
위를 향한다
낮추시는 하느님과
낮추는 사람이
서로에게서
올리시는 사람과
오르는 사람이
서로에게서
서로를 애틋이 보고
서로를 오롯이 느끼고
서로를 따뜻하게 품으니
믿음은
서로를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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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
어떤 생선 장수가 마을에 가게를 내고 간판을 달았습니다. “이곳에서 신선한 생선을 팝니다.” 한 사람이 들어와서 말했습니다. “‘신선한’은 빼시오. 다 신선한 생선 아니오?” “그렇군요.” 그래서 “신선한”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이곳에서”는 빼도 되지 않을까요? 다 알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그래서 그 글자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팝니다.’라는 말도 빼야지요. 거저 주는 것이 아니니까요.” 듣고 보니 그래서 그 글자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생선’이라는 글자도 필요 없습니다. 근처에 오기만 해도 생선 냄새가 나니까요.” 그래서 간판 없는 생선가게가 되었답니다. 결국 고객들은 그 사람이 생선 장사를 하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것이 옳은 것 같고, 저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 그 사람의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지는 않되 흔들리지 않는 주관과 소신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이교도 부인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하고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아이에게서 마귀는 떠나갔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선적인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은총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헛배가 불러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억지로 음식을 권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결국, 믿음을 가진 이교도에게도 구원의 혜택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구원의 혜택은 유다인 또는 이교도라는 외적인 관계보다 철저한 믿음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이교도 여인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강아지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여인이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청하며 기대하는 자세는 예수님에 관한 그녀의 신뢰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미천하고 부정한 사람임을 인정한 여인의 마음을 믿음으로 받아주셨습니다. 당신의 일차적인 사명은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을 다시 불러 모으는 데에 두셨지만, 감동적인 믿음 앞에서는 당신의 원칙을 고집하지 않으십니다.(손희송)
그리하여 마침내 딸에게서 더러운 영이 떠나갔습니다. 믿음은 바로 하느님께서 나를 외면하고 감추어 계신 분처럼 보일 때 더 큰 신뢰로 자신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주님의 능력은 드러납니다. “그분은 우리 앞에 있는 험한 산을 치워주지는 않으시지만, 그 산을 넘을 힘과 용기를 주는 분”이십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 5,6) 바리사이들의 경건과 신앙이 ‘표면적’ 믿음이었다면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 이교도의 믿음은 ‘속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헛배가 부른 신앙인이 아니라 떨어뜨린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으려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믿음, 그리고 그 안에 주님의 능력이 역사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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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과 이방 여인의 만남에, ‘만약’이라는 가정을 해 봅니다. 만약 이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지 못하였다면, 만약 예수님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만약 자신의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예수님께 청하지 않았다면, 만약 예수님께 들은 모욕적인 말에 기분이 상하여서 예수님을 바로 떠났다면 어떠하였을까요.
네 번의 ‘만약’ 가운데 하나라도 이루어졌다면, 그녀는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한 번도 아닌, 네 번에 걸친 ‘만약’이라는 관문을 이 여인은 통과합니다. 네 번의 관문은 그것이 진행될수록 점점 견디기 어려워집니다. 적극적으로 찾아 듣지 않아도 소문은 들려옵니다. 철저하게 수동적인 자세입니다.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갈 때부터 능동적인 행동이 됩니다. 얼마나 먼 거리를 걸어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인이 이방인 남자인 예수님을 찾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찾아간 곳에서 예수님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청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관문은 절정을 향하여 갑니다. 자신을 강아지에 비유하는 예수님의 모욕이 남았습니다. 점점 어려워지는 관문이었지만, 그 여자는 예수님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이것을 통과합니다.
이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가 보여 준 것처럼, 예수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길에도 ‘만약’이라는 관문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앞에 놓인 관문을 이겨 낼 수 있을 만큼 견고한가요? 아니면 나의 귀찮음과 불편함 때문에, 또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드는 모욕감 때문에, 예수님을 향한 여정을 쉽게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몇 개의 관문이 우리 앞에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놓인 ‘만약’의 관문을 넘어서야만 우리는 예수님과 진실된 만남을, 아울러 그분께서 선사하시는 구원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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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창세기 야훼계 저자는 아담과 하와를 짝 지워 주시는 광경을 동화 같은 이야기를 통하여 봅니다. 아담이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동물들에게서 그 협력자를 찾지 못하자 아담을 깊게 잠들게 하신 후 그의 옆구리에서 빼낸 갈빗대를 가지고 여자를 지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와를 아담에게 데려오시자 그는 외칩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창세기 2,23) 창세기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기 2장 24절)
세상 사람들 중에 “여자도 하느님께서 남자와 동등하게 ‘흙의 먼지’(창세기 2,7)로 만드시지, 웬 남자의 갈빗대에서란 말인가?”라고 질문하는 여인들이 있습니다. 글쎄요? 우리야 하느님 속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부부가 ‘한 몸’이라는 사실 때문이 아닐까요? 남녀가 서로 만나 이룩한 가정이 세상에 살아가는 힘의 원천입니다.
우리는 실제의 이웃 사람들의 모습에서 또는 드라마나 영화의 한 이야기에서 가족 때문에 숱한 어려움을 견디는 경우를 이야기를 봅니다. 그만큼 가정은 이 세상의 난관을 극복하며 살아 갈 수 있는 울타리이며 버팀목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내가 가족 때문에 참는’라는 말을 직장에서 나 자신도 할 때가 있지만 동료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 중에 하나이지요. 거기다가 가정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내와 어머니의 자리가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동반자이면서도 보금자리가 되어 주지요. 그래서 사랑의 아내와 어머니가 있는 가정은 든든한 성채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구약 성경의 잠언 저자는 남편보다는 아내와 관련시켜서 재미있는 표현을 하는 것을 봅니다. 그 만큼 가정에서 아내의 자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지요.
“아내를 얻은 이는 행복을 얻었고 주님에게서 호의를 입었다.”(잠언 18,22) 그런데 좀 더 개인적인 표현을 쓰기도 하지요. “훌륭한 아내는 남편의 면류관이지만 수치스러운 여자는 남편 뼈의 염증과 같다.”(잠언 12,4) 또는 “지혜로운 여자는 집을 짓고 미련한 여자는 제 손으로 집을 허문다.”(잠언 14,1) 고약한 아내에 대해서는 이런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다투기 좋아하는 아내와 한집에 사는 것보다 옥상 한구석에서 사는 것이 낫다.”(잠언 21,9)
그러나 잠언저자는 성경 끝자리에 ‘훌륭한 아내’(잠언 31,10-31)라는 내용으로 마감하는 것을 보면 아내의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 한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모성은 어떠한 세상의 어떤 힘보다 강하고 어떠한 희생보다도 높지요.
처녀시절에는 그렇게 멋 부리고 연약하게 보이던 아가씨가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으면 그 전 모습은 어디로 가고 펑퍼짐한 엄마의 모습이 되는 것은 참 신기하기조차 합니다. 왜 그런 말이 있지요? ‘여인은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또는 ‘하느님께서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당신 대신 각자에게 어머니를 보내셨다.’
마르코는 이방인의 도시인 티로에 예수님께서 가신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온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딸을 어머니가 그분 발 앞에 엎드립니다. 그 여인은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지만 예수님께서 병을 잘 고치신다는 명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통 때오는 달리 이방인의 그 여인을 멀리하시는 발언을 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코 7,27) 그 여인으로 보아서는 굉장히 수치감을 줄 수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딸 때문에 다급해진 어머니로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인 것입니다.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그 여인은 주님께 자신을 더 낮추며 대답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마르코 7장 28절)
마음이 약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주님께서는 그 여인의 그런 모습에 감동하십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마르코 7장 29절) 마르코는 그 시간에 딸에게서 마귀가 떠났음을 설명합니다.
이 세상에 아내가 없는 가정을 생각할 수 없고 어머니가 없는 가정 또한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사랑에는 위에 아래 자리가 없습니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자본주의가 사람의 가치를 떨구다 보니 부부들에게서도 서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 색채가 짙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엄마의 바쁜 일과 몸매를 위해서 아기에게 젖을 물리지 않고 대신 소젖을 당연히 입에 물리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도 자녀들이 거친 소가 안 된 것만으로도 다행이지요.
그래서 세상이 삭막하다고 하는데 바람막이가 없이 살아야 하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더 외롭고 설 자리가 넓지가 않나봅니다. 다르게 말하면 정이 메마른 세상, 사막 같은 세상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그런 틈새에서도 어진 아내가 있고 훌륭한 어머니가 있어서 황량한 세상에서 오아시스의 가정,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는 것이지요.
생면부지의 남남인 부부가 만나서 늘 매끄럽게 살 수는 없겠지요. 딱딱한 벽돌이 큰 건물을 이루기 위해서는 부드러운 시멘트 반죽이 그 사이사이에 있어야 하듯 개성이 강한 부부에게도 사랑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지요. 부모가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고 위해주는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은 또 그런 가정을 꾸려 나가며 행복한 삶을 살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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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 오늘 제1독서에서 창세기 저자는 마치 하느님의 마음을 읽고 써 내려가는 듯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세상과 그 안의 많은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보시니 좋았다.”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정반대의 표현을 보고 있습니다. 히브리 말은 이 뚜렷한 대조를 더 쉽게 드러냅니다.(키-토브/로-토브) 사람은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이 곁에 있음에도 고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눈에 사람의 고독과 외로움이 보였고 그분께서는 이것을 해결하려 나서십니다.
우리말로 “협력자”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 ‘에제르’는 성경에서 죽음의 위협에서 누군가를 구해 주고자 개입하는 데 사용되는 말로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표현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협력자를 선물로 주셨다는 뜻입니다.
루카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이야기에 등장하는 ‘라자로’와, 요한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친구 ‘라자로’는 창세기의 ‘에제르’와 같은 어원을 지닌 말로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어 여자를 만드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아담의 갈빗대’는 성경에서 쓰인 본뜻과 조금 다릅니다. 이 낱말은 계약 궤의 한 면, 천막의 한 쪽 면, 성전의 옆 면, 산의 다른 한 쪽 면, 두 쪽으로 나뉜 문의 나머지 한 쪽을 가리킬 때 쓰인 말입니다.(탈출 25,12; 26,20; 1열왕 6,34 참조)
히브리 말 성경을 그리스 말로 옮긴 최초의 번역 성경 ‘칠십인 역’에는 ‘갈빗대’라는 말이 없고 ‘몸의 한 면’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한 면으로 여인을 만드셨다는 표현은 남녀가 어느 한 쪽만으로는 결코 완전하지 않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남자와 여자, 이 둘은 본성이 같으면서도 엄연히 구별됩니다. 히브리 말은 둘의 본성이 같다는 것과 함께, 서로 구별된다는 점을 공통 어원을 지닌 다른 말을 사용하여 분명히 표현합니다.(잇시/잇샤)
다름이 서로의 부족한 면을 채워 나아가도록 서로를 위하여 ‘알맞은 협력자’를 보내 주신 좋으신 하느님의 뜻을 곰곰이 새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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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의 주제를 붙여보라고 한다면 저는 이렇게 붙여보고 싶습니다. “믿음의 힘”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유명한 내용입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자녀를 위해 청하는 이방인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말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이 우리에게 매몰차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님의 말씀에 여인은 겸손과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이 여인의 겸손과 믿음은 주님의 기적과 은총을 만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렇게 믿음의 고백만으로 여인의 딸은 구원되고 해방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주님의 은총을 만나게 할 것입니다. 흔들리지 말고 항구한 믿음을 고백하십시오. 주님께서 그대 앞에 계십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주님께 청하며 살아갑니다. 오늘의 여인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믿음 위에 봉헌된 우리의 청원을 주님께서는 늘 듣고 계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겸손과 믿음의 옷을 입고 하늘로 봉헌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주님께서 우리가 청하는 바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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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이교도 부인이 보여준 말씀의 빵에 대한 갈망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주님의 말씀은 부인과 마귀가 들린 딸의 삶을 온전하게 바꾸어 놓습니다.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처럼 작은 말씀이라도 원하는 부인의 갈망을 주님께서 보셨습니다.
비록 이교도였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과 기적을 듣고서 믿은 부인은 딸의 치유를 맛보았습니다. 말씀의 빵을 갈망하는 만큼 우리의 삶은 온전하게 변화됩니다. 말씀은 우리를 치유해 주시고 변화시켜 주시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듣는 사람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저 공허한 메아리일 뿐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받아들일 우리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만큼 우리를 치유해 주십니다. 들을 수 있는 역량만큼 말씀의 빵은 우리 삶에 의미를 주게 됩니다.
필리핀에서 어느날 치유 프로그램에 참석하면서 그룹에서 말다툼을 벌이던 나와 다른 동료 한 명을 한참 동안 듣고 있던 지도자가 우리 두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두 분의 입장 모두 인간적으로 다 이해가 되는데, 거기에 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순간 우리는 서로의 다툼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주님의 현존을 잊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인간적인 자신의 사고에 집착하며 시시비비를 가리고 있는 모습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만 있었고 주님의 현존에 대한 믿음은 없었던 것입니다.
상아래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는 강아지처럼 자신을 낯추며 더러운 영이 든 딸의 치유를 위해 말씀의 빵을 얻기 위한 여인의 갈망은 우리의 갈망이어야 합니다. 말씀은 단순한 글이나 언어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현존하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갈망하는 우리의 기도를 주님께서는 언젠가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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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초등학교 3학년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서울에서 천안까지 100km라 생각했을 때, 시속 20km로 날아가는 비둘기는 서울에서 천안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답은 어떻게 될까요? 그러자 철수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6시간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에 선생님께서는 한숨을 내쉬며 “틀렸지. 100을 20으로 나누니 5시간이 정답이지. 이렇게 쉬운 것도 틀리면 어떻게 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철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비둘기도 서울에서 천안까지 날아가려면 중간에 한 시간 정도는 쉬어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선생님 5시간이 정답일까요? 아니면 아이의 6시간이 정답일까요? 아이의 상상력이 더한 대답이 더 정답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의 대답을 보면서, 눈에 보이는 것만 바라보는 세상의 지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귀로 듣는 것만 진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는 인간의 눈과 귀를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만 하느님의 지혜 안에 머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을 예수님 소문을 듣고 찾아옵니다. 어떤 사람도 외면하지 않으셨고, 또 사랑을 강조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부인을 외면합니다. 단순히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수치심을 일으킬 수 있는 말도 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어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
이 부인은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교도로 무시하고, 개로 비유하며 멸시하던 민족 출신의 여인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했던 대로 예수님도 그대로 하신 것입니다. 아마 이 부인 역시 이런 무시와 냉대를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곧바로 이렇게 대답하지요.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예수님의 숨은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부인의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간절히 주님께 매달릴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만약 사랑이 없다면 주님께 굳이 매달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체면만을 생각했다면 모욕적인 수치심에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사랑이 믿음을 만들어 하느님 안에 머물게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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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겐네사렛 지방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정결법’에 대한 시비와 논쟁이 있은 뒤에, 그곳을 떠나 티로라는 이방인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이방인 시리아페니키아의 한 어머니를 만나게 됩니다. 이 이방인 어머니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자녀들을 배줄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고 박절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자녀를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리는 어머니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참으로 매정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는 그냥 거절한 것이 아니라, ‘개’로 취급되는 지독한 모욕과 경멸감을 느끼게까지 합니다.
참으로 당혹스럽고 난감한 순간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간청이 단순히 거절당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멸시와 모욕을 당하고 배신감마저 들면, 말할 수 없는 큰 상처와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이 흔들리고 좌절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뢰와 믿음을 깊은 곳으로 이끌어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순간, 이 어머니는 더 간절한 마음으로 간청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박절한 냉대와 무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간절하게 청하는 이 어머니의 ‘겸손’과 ‘끈기’와 ‘믿음’은 참으로 속이 저미어 옵니다. 이 어머니는 자신을 “개”로 취급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진정으로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개” 취급을 받는 이방인이지만, 그래서 메시아가 베푸는 구원과 생명의 식탁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주님의 무한한 자비의 부스러기를 입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한층 더 간절한 마음으로 자비를 간청합니다. 마치 백인대장이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마태 8,8)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믿음으로 겸손하게 자비를 청합니다. 그것은 마땅한 권리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구원의 손길이 이방인에게로 번져갑니다.
사실, 이는 어마어마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유대인들이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개’로 여기던 선민사상을 파괴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가히 혁명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두고, 20세기를 빛낸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하느님의 진정한 뜻이 드러난 계시사건”이라 말합니다. 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감히 하느님의 백성을 죄인과 의인으로 나눈 것에 대한 일침을 가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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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주님!
거절당할 때, 꼬인 문제가 더 꼬여갈 때, 원망하지 않게 하소서.
무시당했다고 여겨질 때, 배신감이 들 때, 실망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 냉대와 무시에도 겸손과 끈기와 믿음으로 오히려 간절하게 하소서.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자비를 믿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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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참 좋은 파트너가 됩시다>
-겸손한 믿음과 사랑으로-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시편128,1)
반가운 소식의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새벽 일어나 무심코 휴대폰을 열었을 때, 한눈에 들어온 고무적인 뉴스였습니다. 포보스가 최근 2025년 “리더십, 경제적 영향력, 정치적 힘, 국제 동맹 군사력 종합 고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10개 나라”를 발표했습니다.
“1위 미국, 2위 중국, 3위 러시아, 4위 영국, 5위 독일, 6위 한국, 7위 프랑스, 8위 일본, 9위 사우디아라비아, 10위 이스라엘” 순서였습니다. 밖에서 평가하는 객관적 대한민국의 위상입니다. 전화위복입니다. 대한민국의 저력은 늘 함께 하는, 천운(天運)과 더불어 작금의 위기와 혼란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다시 민주공화국으로, 문화강국으로, 세계의 선도국가로 우뚝 설 것을 믿습니다.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다신 한번 외쳐 보는 만세 기도입니다. 교황님의 어제 베드로 광장에서의 일반 알현 강론을 요약한, “교황은 가톨릭신자들에게 날마다 평화를 위해 기도할 것을 요청하다”란 말마디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정말 평화보다 절박한 요구도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부각된 말마디는 ‘파트너(partner)’였습니다. 창세기에서는 협력자로 되었는데 원래 영어인 파트너가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애당초 혼자서는 사람이 못되고 구원도 없습니다. 더불어의 사람이고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이미 사람 ‘인(人)’자 안에 더불어의 인간 존재임이 밝혀집니다. 예전 섬에서 살았던 세 은수자들의 삶을 표현한 짧은 영어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They loved and supported each other(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떠받치며 살았다)”
더불어 버팀목의 파트너들이 된 한몸 공동체 삶에 대한 간략한 묘사입니다. 바로 파트너의 절대적 필요성입니다. 파트너는 이미 우리 말로도 많이 쓰입니다. 인터넷 사전을 찾아 봤더니, ‘짝을 이루는 상대를 이루는 영어단어로 애인, 연인, 부인 등 다양한 동반자를 포괄한다’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협력자, 동반자, 반려자 역시 파트너를 설명하기엔 미흡합니다. 한겨레 신문 일면도 ‘관세 폭탄 막을 트럼프와 담판, 한국엔 파트너가 없다’라는 제하의 기사였습니다.
오늘 창세기에서 사람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지만 자기에게 알맞은 파트너를 찾지 못합니다. 모든 생물을 식별하고 지배할 수 있는 책임적 존재가 되었지만 정말 필요한 파트너 짝이 없었던 것입니다. 협력자. 동반자, 반려자보다는 ‘짝’이 적절하다 싶습니다. 한짝이 없어 무용지물이 된 하나이면서 둘인 양말, 장갑, 신발을 보면 즉각 이해됩니다.
아무리 애완동물, 반려동물, 반려식물이라 애지중지하지만 서로 소통하고 일치하는 파트너가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파트너를, 자기의 짝을 만났을 때, 사람에게서 저절로 터져나오는 환호입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그러므로 남자는 아내인 여자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둘은 알몸이면서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니 그대로 에덴동산에서의 순수한 부부일치의 모범입니다. 성경의 시편들은 일상적으로 하느님을 이스라엘 계약의 파트너로 부릅니다. 그러니 오늘 남자의 파트너가 된 여자는 존엄한 평등 관계의 상징도 됩니다. 결코 일방적인 주종관계가 아니라 상호존중과 상호섬김의 대등한 파트너가 된 아내입니다.
오늘 복음은 참으로 영예롭고 자랑스럽게도 예수님의 파트너가 된 이교도 여자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여자를 만납니다. 도저히 예수님의 파트너가 될 수 없는 처지인데 이방 여자의 참으로 놀라운 탄력좋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항복을 받아냄으로 격상되어 주님의 파트너가 된 것입니다. 이 여자의 마귀들린 딸에 대한 모성애의 사랑은 간절한 믿음의 기도로 표현됩니다. 이교도인 여자는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간청합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교도 여자의 유우머 감각과 재치는 그대로 절실하고 원숙한, 겸손한 믿음의 절정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위축되거나 밀리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님을 압도하여 말문을 막아버립니다. 정말 탄력좋은, 겸손한 믿음에 감동한 예수님의 기분좋은 항복선언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예수님의 파트너가 된 겸손한 믿음의 여자는 참으로 우리 수도자는 물론 신자들의 빛나는 모범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수님의 탄력 좋은, 겸손한 믿음의 파트너가 되게 하시고, 파트너 예수님은 물론 동료 파트너들 간에도 우정을 날로 깊게 하십니다. 참으로 주님이 영원한 파트너가 됐을 때 다음 제 소원을 노래한 시 중 “당신”같은 정주의 삶도 가능하겠습니다.
“산이
산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늘 깊은 산이예요
강이
강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늘 맑게 흐르는 강이예요
바다가
바다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늘 깊고 넓은 바다예요
하늘이
하늘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늘 높고 푸른 하늘이예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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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자극을 받고,, 보고 배우라고.>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복음을 읽을 때마다 이 말씀을 주님께서 하신 것이 맞을까? 맞는다면 주님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맞을지라도 복음사가들이 이 복음은 빼고 전해주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 복음을 그대로 전해준 뜻은 뭘까? 실제로 이방인을 상대로 쓴 루카 복음은 이 얘기를 빼고 전해주지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신 뜻은 무슨 뜻일까요?
오늘 저는 ‘먼저’라는 말에 처음으로 눈길이 갔습니다. 지금까지 이 복음을 정말로 여러 차례 읽었지만 실로 처음으로 ‘먼저’라는 말이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방인들을 먹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유대인들을 먼저 먹이시겠다는 뜻이고, 그런 다음 이방인들도 먹이시겠다는 뜻입니다.
저희 식당을 예로 들면 봉사자들이 손님보다 먼저 식사합니다. 그것은 먼저 먹고 봉사하라는 뜻이고 먼저 먹고 힘을 내어 봉사하라는 뜻이지요.
그러니 주님께서도 유대인을 편애한 것이 아니고, 이방인을 홀대한 것이 틀림없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강아지 운운한 것은 너무 모욕적인 것이 아닐까요? 이것도 모욕주신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고 그렇게 믿어야 할까요?
그리 믿어야겠지요. 주님의 깊은 뜻이 있다고 믿어야겠지요.
어떤 깊은 뜻이?
그것은 여인의 참 겸손과 큰 믿음을 꿰뚫어 보신 주님께서 그의 참 겸손과 큰 믿음을 드러내시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당시 이교도 여인이 유대 남자를 지나가다가 만난 것이 아니라 찾아와서 만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지요.
그러므로 그녀의 겸손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각오했던 것이고 주님의 모욕도 감수하게 하였던 것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하는데, 소문만 듣고도 예수님을 외간 남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믿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사랑을 믿었을 겁니다. 자기의 청을 지나치시지 않을 분이라고 말입니다.
아무튼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강아지라고 하는 이교도 여인의 이런 겸손과 믿음을 하느님의 선민으로 자처하는 유대인들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으셨을 것이고 누구보다도 제자들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사가도 후대의 우리에게도 여인의 이런 겸손과 믿음을 드러내 보이고 싶었을 겁니다.
자극을 받으라고.
보고서 배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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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감사와 기도와 겸손의 보화!>
오늘 복음(마르7,24-30)은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믿음'입니다.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는 '유다인들이 멀리했던 이방인 여자'입니다. 예수님께서 티로라는 이방인 지역에 가셨을 때,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이 여자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리고 이어진 예수님과의 대화는 이렇습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마르 7,27)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마르 7,29)
오늘 복음은 '이방인 여자의 믿음, 이방인 여자의 간절한 믿음과 겸손이 만들어낸 기적'입니다.
어제 이성효 리노 주교님의 마산교구장 착좌식이 많은 분들의 기도 속에서 있었습니다. 주교님께서 강론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먼저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하신 말씀을 언급하시면서, "착한 양들 안에서 착한 목자가 나온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친정집(수원교구)에서 마산교구 교구장으로 오시면서, "감사의 보화, 기도의 보화, 겸손의 보화를 갖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먼저 '감사'드려야 합니다. 죄와 허물이 많은 이방인, 그런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시고, 땀 흘리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크고 완전한 하느님의 사랑을 늘 기억하고, 이 사랑 안에 머무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이런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마귀들(마르7,21-22 참조)을 '감사의 보화, 기도의 보화, 겸손의 보화'로 쫓아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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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 28)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없습니다.
소중함이
있을 뿐입니다.
부스러기같은
작은 것들이
만들어가는
소중한
세상입니다.
단지
부스러기의
마음을
받아들였을
뿐인데
먹고사는 일이
거룩한
성체성사처럼
거룩하게
다가옵니다.
이방인
한 여인의
간절한 믿음이
딸아이를
온전하게
되돌려놓습니다.
겸손한
부스러기의
믿음은
과장되지
않습니다.
셀 수 없는
부스러기의
믿음으로
우리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믿음의 역사는
부스러기의
역사입니다.
큰 것에만
길들여진
우리를
부스러기의
겸손함이
계속해서
믿음으로
우리를
초대하며
참된 믿음을
일깨워줍니다.
부스러기는
예수님으로부터
가까이 있습니다.
부스러기조차
버리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시각의 변화이며
부스러기의
일상이 모여
따뜻한 사랑의
일상이 됩니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안 보려 하기에
못 보는 것입니다.
부스러기까지
다 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에게는
부스러기까지
다 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은총의
부스러기와
함께 주님의
겸손과
사랑을 배우는
은총의 오늘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부스러기의
믿음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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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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