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백일사/고구려본기
사로(신라의 옛 이름)의 시조(박혁거세거서간)는 선도산의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제실의 딸 파소가 있었는데, 남편없이 아이를 뱄으므로 사람들의 의심을 받아 눈수로부터 도망쳐 동옥저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의 나을촌에 와 닿았다. 때에 소벌도리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가서 집에 데려다 거두어길렀다. 나이 13세에 이르자 지혜는 빼어나고 숙성하며 성덕이 있는 지라, 진한 6부의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여 거서간이 되니 도읍을 서라벌에 세우고 나라를 진한으로 하고 또한 사로라고도 하였다.
성호사설
《삼국사(三國史)》에 《북사(北史)》의 말을 인용했는데, “고구려에는 신사(神祠)가 둘이 있었다. 첫째는 부여신(扶餘神)인데 이는 나무를 깎아 부인상(婦人像)으로 만들었고, 둘째는 고등신(高登神)인데 이는 시조 부여신의 아들로서 대개 하백(河伯)의 딸과 주몽(朱蒙)이다.” 하였다. 또 “정화(政和) 무렵에 송(宋) 나라로 들어가 우신관(佑神館)에 나아가서 한 여선상(女仙像)을 보았다. 관반학사(館伴學士) 왕보(王黼)가 이르기를, ‘이는 귀국(貴國)의 신인데 알겠습니까? 옛날 제실(帝室)의 딸이 있었는데 남편이 없이 아기를 배자 남에게 의심을 받고 바다로 떠서 도망을 쳐서 얼마 후 진한(辰韓)에 이르러 아들을 낳았는데, 이가 해동(海東)의 시주(始主)가 되었답니다. 제(帝)의 딸은 지선(地仙)이 되어 선도산(仙桃山)에 있었는데 이것이 그의 초상(肖像)이랍니다.’ 했다.” 하였다.
또 대송(大宋) 신사(信使) 왕양(王襄)이 동해성모(東海聖母)에게 드린 제문(祭文)을 보니, “어진 사람을 배어 나라를 처음 세웠다.” 하는 글귀가 있으므로 이 동신(東神)이 바로 선도산 신성(仙桃山神聖)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두 말이 서로 비슷하니 우리나라에 어찌 이런 두 여선(女仙)이 있어 시조로 되었던 것일까?
이는 반드시 전하는 말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이미 믿을 수 없는 허황한 말로 되었는데 저 상국(上國)까지 전해져서 그를 높여 제사까지 지내게 되었으니 웃을 만한 일이 이와 같다.
삼국유사/선도성모 수희불사
진평왕(眞平王) 때 지혜(智惠)라는 비구니(比丘尼)가 있어 어진 행실이 많았다. 안흥사(安興寺)에 살았는데 새로 불전(佛殿)을 수리하려 했지만 힘이 모자랐다. 어느날 꿈에 모양이 아름답고 구슬로 머리를 장식한 한 선녀가 와서 그를 위로해 말했다. "나는 바로 선도산(仙桃山) 신모(神母)인데 네게 불전을 수리하려 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여 금 10근을 주어 돕고자 한다. 내가 있는 자리 밑에서 금을 꺼내서 주존(主尊) 삼상(三像)을 장식하고 벽 위에는 오삼불(五三佛) 육류성중(六類聖衆) 및 모든 천신(天神)과 오악(五岳)의 신군(神君; 신라 때의 오악五岳은 東의 토함산吐含山, 南의 지리산智異山, 西의 계룡산鷄龍山, 北의 태백산太伯山, 중앙中央의 부악父岳, 또는 공산公山이다)을 그리고, 해마다 봄과 가을의 10일에 남녀 신도들을 많이 모아 널리 모든 함령(含靈)을 위해서 점찰법회(占擦法會)를 베푸는 것으로써 일정한 규정을 삼도록 하라(본조本朝 굴암지屈弗池의 용이 황제皇帝의 꿈에 나타나 영취산靈鷲山에 낙사도장樂師道場을 영구히 열어 바닷길이 편안할 것을 청한 일이 있는데 그 일도 역시 이와 같다).
지혜가 놀라 꿈에서 깨어 무리들을 데리고 신사(神祀) 자리 밑에 가서, 황금 160냥을 파내어 불전 수리하는 일을 완성했으니, 이는 모두 신모(神母)가 시키는 대로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적은 남아 있지만 법사(法事)는 폐지되었다. 신모는 본래 중국 제실(帝室)의 딸이며, 이름은 사소(娑蘇)였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術法)을 배워 해동(海東)에 와서 머물러 오랫동안 돌아 가지 않았다. 이에 부황(父皇)이 소리개 발에 매달아 그에게 보낸 편지에 말했다. "소리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지으라." 사소는 편지를 보고 소리개를 놓아 보내니, 이 선도산(仙桃山)으로 날아와서 멈추므로 드디어 거기에 살아 지선(地仙)이 되었다. 때문에 산 이름은 서연산(西鳶山)이라고 했다. 신모는 오랫동안 이 산에서 살면서 나라를 진호(鎭護)하니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매우 많았다. 때문에 나라가 세워진 뒤로 항상 삼사(三祀)의 하나로 삼았고, 그 차례도 여러 망(望)의 위에 있었다.
제 54대 경명왕(景明王)이 매사냥을 좋아하여 일찍이 여기에 올라가서 매를 놓았다가 잃어버렸다. 이 일로 해서 신모에게 기도했다. "만일 매를 찾게 된다면 마땅히 성모(聖母)께 작(爵)을 봉해 드리겠습니다." 이윽고 매가 날아와서 책상 위에 앉으므로 성모를 대왕(大王)에 봉작(封爵)하였다. 그가 처음 신한(辰韓)에 와서 성자(聖子)를 낳아 동국(東國)의 처음 임금이 되었으니 필경 혁거세(赫居世)와 알영(閼英)의 두 성군(聖君)을 낳았을 것이다. 때문에 계룡(鷄龍)ㆍ계림(鷄林)ㆍ백마(白馬) 등으로 일컬으니 이는 닭이 서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성모는 일찍이 제천(諸天)의 선녀에게 비단을 짜게 해서 붉은빛으로 물들여 조복(朝服)을 만들어 남편에게 주었으니, 나라 사람들은 이 때문에 비로소 신비스러운 영험을 알게 되었다.
또 <국사(國史)>에 보면, 사신(史臣)이 말했다. "김부식(金富軾)이 정화(政和) 연간에 일찍이 사신으로 송나라에 들어가 우신관(佑神館)에 나갔더니 한 당(堂)에 여선(女仙)의 상(像)이 모셔져 있었다. 관반학사(館伴學士) 왕보(王보)가 말하기를, '이것은 귀국의 신인데 공은 알고 있습니까' 했다. 그리고 이어 말하기를, '옛날에 어떤 중국 제실(帝室)의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辰韓)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더니 그가 해동의 시조가 되었고, 또 그 여인은 지선(地仙)이 되어 길이 선도산(仙桃山)에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여인의 상입니다. 했다."
또 송나라 사신 왕양(王襄)이 우리 조정에 와서 동신성모(東神聖母)를 제사지낼 때에 그 제문에, "어진 사람을 낳아 비로소 나라를 세웠다."는 글귀가 있었다. 성모가 이제 황금을 주어 부처를 받들게 하고, 중생을 위해서 향화법회(香火法會)를 열어 진량(津梁)을 만들었으니 어찌 다만 오래 사는 술법(術法)만 배워서 저 아득한 속에만 사로잡힐 것이랴.
→ 환단고기에서는 선도산 성모를 부여 제실의 딸이라 하였고 환단고기를 제외한 여타 사서에서는 선도산 성모 사소(혹은 파소)부인을 중국 제실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속단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선도산 성모 사소부인은 환단고기에 기록된 것에 따라 부여제실의 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환단고기를 제외한 여타 사서에서 선도산 성모가 중국 제실로 기록되어 있는 까닭은 신라왕실에서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왕실세계를 고려왕실 처럼 중국(당)과 연계되있는 것으로 위조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만일 환단고기의 기록이 맞다면 선도산 성모는 눈수(흑룡강?)에서 지금의 동옥저(함경도)로 온 후 그곳에서 배타고 진한으로 왔다는 말인데, 선도산 성모의 자세한 도망루트와 당시 함경도에 배를 움직일 수 있는 항구가 있었을지 궁금합니다.
첫댓글 함경도에 배를 움직일 수 있는 항구라면 당시 항구를 쓸 수 있는 부족연맹체라고는 해 봐야 옥저 정도가 아닐까 하겠습니다. 동예는 안변평야와 강원도 북부에 걸친데다가 내륙방면으로 치우쳤고 (남해차차웅 당시 신라를 구해준 나라가 맥국인데 이 나라가 동예의 한 소국이며 현 강원도 춘천방면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옥저의 영역이 함경산맥과 마천령산맥 부근의 해안지대라 본다면 아마 수성천이나 원산만 북부에 있지 않을까라고 추측이 가능합니다. 물론 저 개인의 추측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