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청소년문예지 <상띠르>로부터 '나는 문학과 이렇게 만났다'라는 지면에 청탁을 받고 쓴 글입니다. 문학의 꿈을 꾸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어린 시절을 포함하여 나와 문학과의 인연'을 써달라는 청탁 취지에, 맞추어 썼습니다. 방금 썼으니 따끈따끈합니다. 아직 발송은 안했습니다.
동녘은 어떻게 붉어졌는지
1.
고등학교 문예반의 지도교사를 하면서, 학년 초에 신입생 회원 모집을 할 때면 나는 그곳에 찾아온 아이들에게 묻곤 한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상처받으며 살아온 편이냐? 조실부모나 신체불구까지는 아니더라도 잦은 이사나 부모의 실직 같은 이력들에 대해서. 아니면 아버지가 바람을 피웠거나 어머니를 자주 때린다든지, 그도 아니라면 아파트촌이라도 좋으니 눈물겨운 고향의 모습이랍시고 간직할 기억은 있는지. 학교 때려치우고 입산해 버리고 싶었던 적이라도……. 만일 결손 가정에서 태어나 상처와 결핍만을 운명처럼 떠안고 자라온 아이라면 대환영이었을 테지만, 글쎄 그런 아이를 만났던 기억은 별로 없다. 유복하지는 않더라도 부족함이 없이 자라온 요즘 아이들은 그럴 때마다 뜨악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들에게 힘겹게 말했을 것이다. 취미 활동이라면 다른 것도 많지 않니.
두말 할 나위 없이, 아침의 동녘 하늘은 힘차고 아름답다. 예비 문청들이 주요 독자층일 청소년문예지 <상띠르>로부터 ‘나는 문학과 이렇게 만났다’라는 지면에 청탁을 받고 글을 쓰려 하는 이 순간, 나는 머리를 긁적인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는 함부로 얘기했으면서, 나의 동녘에는 과연 밑불이란 게 있기나 했을까. 동녘이 어떻게 붉어졌는지 따져 물은 적도 없이 떠오른 햇빛의 근사함에만 취해 있지는 않았는지.
2.
어머니는 연달아 딸만 셋을 낳으셨다. 네 번째 아이가 또 딸이라면, 시집에서 쫓겨나기 전에 스스로 방죽에 몸을 던질 심산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형을 어머니는 생명의 은인처럼 여기셨다. 나는 다섯째로, 또 딸이었어도 상관없었을 그런 집안의 막내였다.
어린 시절에 나는 아버지가 근무하셨던 광주대성초등학교의 관사에서 살았다. 운동장이 마당이었고 교정이 정원이었다. 농촌의 정서는 익히지 못했을지라도 도회의 복판이거나 주택가 골목집이 아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학교는 어린 나에게 많은 것들을 보여주었다. 철따라 풍경이 달라졌으며 꽃들이 피고 졌다.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면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 먼지가 일렁이는 운동장을 바라보다가 쐐기가 내 머리에 떨어지는 것도 몰랐던 적이 있었다. 목덜미가 벌겋게 부어올랐지만 풍금 소리와 함께 들려온 노래를 찾기 위해 누나들의 음악책을 뒤적였고 그걸 따라 불렀다.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겠다는 관상대가 있었지만 어느 틈엔가 그 자리를 쓸어버리고 강원도에서 무장간첩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어떤 어린이의 동상을 세웠다. 국민교육헌장을 일등으로 외워 맨 먼저 하교했는데 해가 질 때까지 집에 돌아가지 못한 친구도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 문학과 만났을까를 굳이 따져본다면 어쩔 수 없이 누나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백일장에서 입상한 둘째 누나가 지방 신문에 난 적이 있었다. 그 일로 누나는 아버지께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다. ‘찌그러진 세숫대야’ 란 제목의 시였는데, 엄마 아빠가 대판 싸우시더니 결국 싸움의 결과로 우물가에 있던 세숫대야가 찌그러지고 말았다는 내용이었다. 딸아이의 왕성한 창작열로 인하여 가정사가 노출된 탓에 동료교사들에게 놀림을 당하신 아버지의 울화를 그때인들 어찌 알았으랴.
지금 생각해 보면, 누나들이나 형에 비해 글 쓰는 재주로 치면 턱없이 모자랐던 내가 지금은 소설가가 되어 있다는 게 민망하기만 하다. 크고 작은 백일장에 나가기만 하면 반드시 상을 받아왔던 누나들이나 형 밑에 살면서, 그들의 일기장이나 노트 따위를 훔쳐보며 그걸 흉내 내기 시작했던 것이 내가 문학과 만났던 씨앗이었다고 고백한다면 어디 납득이나 될 말인가.
글은 큰누나가 제일 잘 썼다. 지금은 대학 교수를 하고 있지만 정작 고등학교를 졸업할 당시에는 대학을 가지 못했다. 전남여중과 전남여고를 나온 재원이었어도 아버지는 대학에 보내지 않았다. 오직 딸이라는 이유였다. 가난한 살림 때문에 딸들은 고등학교만 나오면 빨리 돈을 벌어 시집갈 밑천도 장만하고 남동생들 뒷바라지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알아서 긴다고, 둘째와 셋째 누나는 아예 여상고를 찾아 진학했다. 서울의 명문 여대에서 주최한 백일장에 장원을 했던 탓에 장학생으로 갈 수 있다면서 대학에 보내달라고 울부짖던 큰누나의 눈물을 기억하면, 지금도 가슴 한편이 저려온다.
집이 없어서 학교 관사에서 얹혀사는 처지가 부모님으로서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겠지만 아무 것도 몰랐던 나에게는 그리 불행한 것만은 아니었다. 긴 복도를 가로질러 아무 때나 도서실을 출입할 수 있었고 밤이 되어 교무실에 가면 당직 선생님과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볼 수 있었다. 강소천 아동문학독본은 여러 권이었는데 하도 많이 읽어서 그때는 외우다시피 할 정도였다. ‘꿈을 찍는 사진관’을 읽으며 사진관에서 찍을 수 있는 것이 사람만이 아니란 사실을 알았고 이주홍의 ‘못나도 울엄마’를 읽고서는 나 같은 얼빠진 녀석이 책속에도 똑같이 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원수나 마해송도 좋았지만 책이 귀했던 시대에 도서관에서 가장 흔하게 널려있던 책이 ‘박정희 전기문’이었다.
관사의 지붕 처마가 함석이었으므로 비가 오면 비 떨어지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소나기가 내리는 날 무릎을 오므리고 앉아 오래도록 빗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큰누나의 노트에서 훔쳐본 정지용의 시를 읽고 ‘산새 걸음걸이’와 ‘갈갈이 손가락 펴고’ 라는 해괴한 말들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흙 마당에 수직으로 떨어지는 빗줄기와 빗물이 떨어진 땅에 순식간에 퍼지는 물살을 비유한 것이라고 손짓을 보태 가르쳐주던 큰누나는 지금 돌이켜 봐도 내 문학의 첫 스승임이 분명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관사를 나와서 이사를 했다. 아버지의 전근 때문이었는데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목포에서 일곱 시간을 배를 타고 가야한다는 낙월도로 떠나버렸다. 부모님은 한 달에 한 번씩 오셨지만 아버지의 편지는 한 달에 두 번씩 왔다. 편지가 올 때마다 실질적인 소녀 가장이 되어버린 큰누나가 동생들을 방바닥에 앉혀놓고 아버지의 편지를 소리 내어 읽었다. 보고 싶은 내 아들 딸들아.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과 괭이갈매기의 울음소리 사이로 너희의 얼굴을 떠올리며…… 편지를 읽다 말고 울기 시작하는 큰누나를 필두로 스스로 가엾어진 남매들은 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울음을 터뜨렸다. 가장 크고 긴 울음을 우는 사람은 당연히 막내인 나였다. 이윽고 울음이 잦아들면 우리 남매들은 옹기종기 모여앉아 부모님께 보낼 편지를 썼다. 엄마, 보고 싶어. 썼다가 지우고 또 다시 써야 했다. 곁눈질로 훔쳐본 누나들의 편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오늘 하루도 너무나 보고 싶은 엄마. 입 밖으로 솟구치는 말이라고 해서 그대로 쓸 수만은 없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리움을 어떻게든 말로써 표현해 내야 한다는 무게감이 어린 가슴팍을 내리눌렀다.
부모님이 오신다는 날에는 형과 함께 대창주유소 앞까지 나가 하염없이 기다렸다. 마침내 돌아오신 아버지의 가방은 내 키보다 더 컸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조차 없는 그 가방을 열어보면 칠산 바다에서 잡아온 굴비가 아니라 큼지막한 검정 돌멩이들뿐이었다. 아버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그 돌들을 정성스럽게 닦아 머리맡에 두셨다. 그렇게 돌아오신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동네 대폿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함께 막걸리를 마셨다. 코를 훌쩍거리며 앉아 있는 나를 힐끔거리더니 콩물국수를 시켜줬는데 맛있게 먹긴 했으나 배탈이 나서 사흘간 꼼짝없이 누워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지금까지도 콩물 국수를 먹지 못한다.
이사를 간 뒤로 충장로 동해물약국 2층에 있는 강은서예원을 다녔고 중학교 때는 당시 남동성당에 있었던 학정서실로 문하를 옮겼다. 먹을 갈고 서안을 마주하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심신이 편안했다. 글씨를 쓴다는 것이 차분해지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었으므로 몇 시간이고 한 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다. 한 글자나 심지어는 한 획을 가지고 며칠 동안 반복해서 써야 했던 그 짓을 고등학교 때 잠깐 빼고는 군대 갔다 와서까지 했다. 글씨 쓰기에 몰입할 즈음에는 흰 종이에 씌어져 있던 점획결구가 꿈속에까지 나타나서 기어이 나를 쓰러뜨렸다. 백일장에 나가서 입상하는 것보다 미술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은 것이 많았던 나로서는 훗날 ‘글’을 써야 할 것인지 ‘글씨’를 써야 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상황을 맞기도 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둘 다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꼴이 되고 말았지만.
3.
사춘기는 내게도 있었으리라. 어머니는 여전히 아버지를 따라 임지에 계셨기 때문에 성장기의 나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시집 간 큰누나를 생각하며 눈물을 찔끔거리다가 무작정 밖으로 나가 막무가내로 싸돌아 다녔다. 공부는 뒷전인 채 불량기 있는 티를 내기 시작하면서 기타를 배웠다. 혼자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기타 연주는 거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랬던 어느 날, 딱 하루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2학년 봄 독일어 시간이었는데, 노트에 끼적거려놓은 시를 지금은 조선대에 계시는 윤영범 선생님께서 소리 내어 읽어주시고 칭찬도 해주셨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을 텐데 그 사이에 세상은 전혀 다른 모양과 빛깔로 다가오기 시작했고, 마침내 나는 문학을 해야겠다는 터무니없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갖고 있던 모든 책과 노트의 속표지에다가 ‘하늘과 땅, 그 맞닿은 선에 내 가난한 시는 그렇게 잔잔히 수를 놓았다.’ 라는 글씨를 흘림체로 써놓았더니 그게 멋지게 보였던지 촌스런 친구들이 자기 책에도 똑같이 써달라고 졸라댔다.
그해 가을에는 처음으로 소설이란 걸 써보았다. ‘노을’ 이라는 제목이었는데 폐결핵을 앓는 한 여학생이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각혈을 하고 쓰러지는 결말 부분에서 화폭에 그려진 것이 붉은 물감으로 그린 노을인지 소녀의 입에서 나온 피인 지 분간할 수 없었다는 내용이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더라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 소설을 읽어본 한 아이가 다가와서는, 이제부터는 서로 친구를 하자고 제안을 해서 깜짝 놀랐다. 그는 복학생이어서 모두들 형이라고 부르던 차였다. 그걸 계기로 그가 신춘문예에 투고하겠다고 쓴 소설을 읽어보게 되었고 학교를 파한 뒤 그를 따라 화정동에 있던 포장마차에 갔다.
소주를 마시며 그가 말하길, 시를 쓰고 싶다는 아이들이 몇이 있는데 일단 규합을 하고 후배들을 불러 모아서 아예 문학 써클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신설 학교였던 탓에, 다른 학교에서는 흔하게 있던 문예반조차 없었던 설움을 일거에 날려버릴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며칠 가지도 못하고 교무실을 들락거리며 문초를 받다가 끝내 그 써클은 결단이 나버렸다. 모름지기 문학 써클이라면 국어 선생님을 찾아다녔어야 했는데 써클의 이름 때문이었는지 폭력 써클로 오인 받아 학생과 선생님에게 매운 빳따를 맞아야 했다. 아무리 문학의 길이 멀고 험하다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써클의 이름은 ‘소용돌이’였다.
고등학교 3학년 봄에 개교기념 체육대회를 했다. 농구 경기를 치르고 학교 후문 앞 부식가게에서 소주를 마셨다. 운동장에 돌아와 보니 아이들이 스크럼을 짜고 교문을 나서려고 했다. 학교 민주화를 시켜달라는 구호를 외쳤는데 선생님들이 패륜아 운운하시며 교문을 막아섰다. 아이들이 선생님들이 막아선 교문을 향해 돌을 던졌을 때 비로소 술기운이 올라와 하늘이 노래졌다.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이 되어 학교에 나가보니 1교시도 시작하기 전에 담임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왔다. 여러분. 살아서 꼭 다시 만나야 합니다. 난데없는 종례였지만 그 말에 매달린 가늠할 수 없는 공포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날이 80년 5월 19일이었다.
휴교령이 내려진 사나흘 후였던가. 너무나 답답하여 동네의 친구 집에 갔다가 며칠 째 귀가하지 않는다는 전남대생인 친구 형을 찾으러 나섰다. 광주공원을 거쳐 금남로로 갔다. 도청 앞 상무관에서 시신들의 확인이 이루어지고 있다 하여 그곳을 찾아갔지만 친구 형은 찾을 수 없었다. 해가 저물어 집에 돌아온 나를 붙잡고 어머니는 대성통곡을 하셨다.
4.
대학에 진학해 보니 문학은 조금 더 가까운 곳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랬지만,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면 할수록 나의 무능과 한계에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그때를 고백하건대, 부끄럽고도 뻔뻔스러운 얼치기 문청 시절이었다. 날마다 금남로 전일빌딩에 있는 학정서실에 가서 글씨를 썼던 것은 그럴 수 있다 치지만 기타를 치며 그룹사운드를 기웃거렸던 것이나 구시청 사거리에 있던 음악감상실에서 DJ알바를 했던 것은 문학도가 할 짓은 아니었으리라. 나는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손에 잡힐 듯 어른거렸을 뿐 정작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혼자서만 할 수 있는 일. 그게 나와 맞았다. 만일 문예 창작이 영화나 연극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이루어지는 일이었다면 언감생심, 아예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신춘문예에 시를 투고했지만 최종심에도 오르지 못했다. 동인지에 시를 내거나 시화전을 통해 시를 보여줬어도 그럴싸한 호응 한 마디도 듣지 못했을 때 늘 그랬던 것처럼 다시금 머리를 싸매고 돌아앉았다. 정녕 시 쓰기는 내 인생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선언하고 군 입대를 결심했다. 입대 직전 마지막으로 대학문학상에 시와 소설을 나란히 투고했는데 그렇게 열심히 습작해 오던 시는 떨어지고 그다지 공력도 들이지 않고 그럭저럭 써서 투고한 소설이 덜컥 당선되고 말았다.
임진강의 칼바람이 몰아치던 파주에서의 군 생활은 그야말로 킬링타임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고참병이 되면서부터는 내 안에서 열망하고 있던 소설 쓰기를 조심스럽게 다독일 수 있었다. ‘국어사전’을 곁에 둘 수 있었고 ‘소설작법’이나 ‘문학용어사전’ 같은 책을 노트에 필사해가며 정리해 나갔다. 제대를 하고 복학을 앞두면서는 제법 많은 습작을 할 수 있었는데 집에서 가까웠던 사직공원의 남루한 여관에서 석 달 동안 기숙을 하며 집중적으로 소설을 썼다. 지금 생각해 봐도 우스운 일이지만, 원고지를 쌓아놓고 만년필로 또박또박 빈칸을 채워나가다가 맘에 들지 않으면 북 찢어서 방바닥으로 집어던져버리는 식의 치기어린 행동이었다.
나는 왜 이 짓을 하고 있나. 그럴 때마다 들었던 회의는 깊고 단단했다. '글은 왜 쓰는가' 하고 강호의 저 명망 있는 작가들에게 묻는다면 '살아있음의 확인' 이라고 서슴없이 답하는 분들이 있다 했으나 그 무렵의 나와는 거리가 먼 얘기였다. 존재의 서슬 퍼런 확인이라는 팻말을 걸었다면 그거야 자신의 작업을 미화시킬 수 있는 방편일 수는 있겠지만 쓰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그래서 글을 쓰는 행위가 무슨 업보나 운명쯤으로 내세우고자 하는 치장이기엔, 나의 현실은 한심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 말았다. 그래봤자 그때와 별반 달라진 것도 없이 여전히 나의 문학은 허덕이고만 있다. 나의 내부에서, 소설이 써지지 않아서 겪는 괴로움은 차츰 잦아들고 내 안에서 숙성되고 육화될 때까지의 기다림만은 갖은 핑계를 대며 기를 쓰고 일어선다. 당장에 소설 쓰기를 그만 둘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가장 오랫동안 해온 일이므로 앞으로도 군소리 없이 해야 한다면, 별 도리 없지 않은가.
/ 전남 영광 출생. 1987년 '오월문학상'에 소설 『타히티의 신앙』당선. 198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암행』당선. 1994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소설 『거인의 반쪽 귀』당선. '전남일보'에 소설 『외등은 작고 외롭다』연재. 장편소설 『신․ 열하일기』
첫댓글 화이트헤드는 반복되는 모험의 과정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보이지않는 축적이 이루어진다는 뜻이겠지요 축하드립니다
나도 박정희전기문 읽었네요. 우리 아부지는 얼라는 너이나 낳아 놓구선 왜 얼라들 읽을 책은 하나도 안 사주셨는지. 가끔 큰아부지 집에 가면 책이 있었는데(초딩4학년때) 방바닥에 큰아부지 읽던 책을 집어 들고 처마밑에 쪼그리고 앉아 읽은 그책이 바로 박정희 전기였네요. 편지도 습작의 한 부분이란 걸 나는 공감합니다. 편지는 백지를 대했을때 두려움 없이 당당해 질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줘요 힛.
마져요!....초딩 때 음악 선생님한테 편지를 썻다 지웠다....그게.......
괴얌님 기억력 대단해요~ 아니 다복다복 쟁여진 내공이라 해야겠다
잔잔한 고백, 괴얌의 진솔한 글에는 정이 있고 물기가 있고 거기에 재미도 있으니 더 이를 데가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