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벽 / 신서영
아파트 상가에 개업한 가게는 가던 걸음을 멈추게 한다. 마네킹이 입고 있는 소털 색 모직 코트에 눈길이 간다. 윤기가 자르르한 질감에 어떤 장식도 없는 심플한 디자인이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길이라서 허리에 끈만 살짝 묶어도 아주 멋스러울 것 같다. 어깨를 감싼 베이지색 머플러와 진갈색 부츠까지 색상 매치가 환상적이다. 진열장에 포개놓은 캐시미어 가디건과 독특한 모양의 소품들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가게 안은 한겨울 풍경이다.
입동立冬이다. 날씨도 절기를 아는지 올해 들어 가장 기온이 내려간다는 기상 예보다. 종일 비가 내리고 세찬 바람이 나뭇가지를 마구 흔들어댄다. 배롱나무 가지 끝에 몇 송이 달려있던 붉은 꽃도 다 떨어져 바닥에 나뒹군다. 차가운 날씨보다 마음이 더 시리다. 나도 모르게 쇼윈도 앞에서 서성거린다. 뭔가 꼭 필요한 물건도 아닌데 어떤 순간에는 호기심으로 끌릴 때가 있다. 설사 마음이 내켜 저 옷을 산다고 해도 정작 겨울이 오면 몇 번을 입을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날씨 탓이라며 허전한 마음을 달래고 발길을 돌린다.
욕망의 분출구랄까. 거리의 상점들은 커다란 통유리로 소비를 부추긴다. 밝은 조명 아래 내부의 상품들을 볼 수 있게끔 진열해 놓고 고객의 심리를 자극한다. 큰 상점일수록 쇼윈도에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한단다. 전문 디자인 업체에 인테리어와 상품 전시를 맡기는 것도 다 그러한 까닭에서다. 무심코 지나다니는 그 찰나에도 행인들의 관심을 끌어내야만 하리라. 이동 동선은 물론 시선의 각도까지 세심하게 계산해서 상품을 진열한다니 이쯤 되면 상술도 전쟁이다. 모든 물품이 한눈에 들어오고, 평범한 것도 멋있어 보이는 것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음이다. 겨울로 접어드는 이 스산한 계절에 한 번쯤은 내 마음이 끌리고 설레는 것도 그들의 상술에 현혹되는지도 알 수 없다.
서로 허물없이 지내던 친구가 있었다. 그녀와의 관계는 모든 과거와 현재를 공유하는 가족 같았다고나 할까. 삶이 버거울 때 아픈 속내를 사심 없이 털어놓기도 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따뜻하게 보듬어주며 그 힘든 시간을 잘 견뎌냈다. 하지만 자녀들이 커가고 생활환경이 바뀌면서 생각도 조금씩 방향을 달리했다.
어느 날 사소한 말 한마디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두텁고 매끈한 유리에 조그만 파편이 튀어도 이내 쩍 갈라지듯이 그랬다. 금이 간 마음자락에 단단한 테이프를 붙이고 무탈하기만을 바랐다. 관계가 불안할수록 몇 배의 노력과 조심성이 뒤따랐으며 거리를 두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부부간에 약간의 다툼이 있어도 얼마간의 침묵이 필요하듯이 무관심이 약이라고 믿고 싶었다.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로 인해 사건은 더 커져만 갔다. 설마 하다가 한순간에 와장창 깨져버린 유리처럼 말이다. 사방으로 튀는 유리 파편은 순식간에 날카로운 흉기로 변했다. 미처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그 파편으로 나는 큰 상처를 입었다. 몸에 난 상처는 병원에서 치료하면 언젠가는 회복이 되지만, 마음의 생채기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오만가지 생각에 한동안 밤잠을 설치는 날도 많았다. 지나온 날들은 생각하니 그녀와 나는 통유리창 너머의 상품처럼 너무 노출하며 살았던 것 같다. 서로 적당히 드러내고 감췄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도 많이 했다.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산소도 필요하지만, 산호초와 수초 사이에 잠시 몸을 숨길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잘 자라듯이 말이다.
이제 그녀와 나 사이에도 말간 통유리창이 아닌 정갈하고 웅숭깊은 하얀 창호지 문을 달고 싶다. 격자무늬에 한지를 새로 바르면 북통처럼 팽팽하리라. 늦가을 건들바람은 북채를 들고 북을 치며 지나갈 것이다. 그림자가 스며 실루엣으로 얼비치는 지창에 그녀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할 테다. 그래! 맞아, 그건 다 오해였다고. 많은 시간이 지나고서야 우리는 화해했다. 그리고 서로 침묵하며 기다려 준 날들에 감사했다.
문득 그녀와 함께 소꿉놀이했던 시골집이 생각났다. 순수했던 그때로 돌아가야겠다. 작은 실수로 속절없이 지창에 구멍이 뚫리면 그녀는 창호지를 오려 틈을 메우고, 나는 찬바람이 들지 않게 문풍지를 달아야지. 달빛에 젖은 감나무 그림자가 창문 가득히 수묵화를 그리고, 안마당에 낙엽 구르는 소리가 들리는 밤에는 그녀와 나는 밤이 이슥하도록 도란도란 옛정을 나누리라. 그러는 동안 유리 파편에 난 생채기도 까맣게 딱지가 앉고, 그 딱지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 분홍빛 새살이 차오르면 흉터도 감쪽같이 사라질 것이다. 세월이 약이라 했던가. 적잖은 나이 탓에 몸도 두루뭉술해지고, 예민했던 감정도 조약돌처럼 둥글어져 어디든 부딪치지 않고 잘 구르겠다.
우리는 저마다 가슴에 유리벽을 세우고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 불안하고 삭막하다. 밝은 조명 아래 상품들은 마냥 아름답고 멋있게 보이지만, 하늘하늘 얼비치는 레이스 커튼으로 안온하게 가리는 곳도 있어야 마음이 편안하다. 쇼윈도 부부처럼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이미지를 관리하듯 사람의 마음도 다 드러나 보이지는 않는다. 거대한 아파트 유리벽도 쪽창이 있어 그 문을 열면 언제나 바깥 공기가 통과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의 벽은 서로의 관계가 원만치 않는 한 바람 한 점 드나들 수가 없다. 조금은 흉허물이 있더라도 진실한 마음만이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해 나갈 것이리라.
맞은편 상가 통유리에 노을빛이 주홍으로 물든다. 감각적이고 모던한 실내는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있다. 머리에 무스로 한껏 멋을 부린 앳된 남자가 커피를 내린다. 가끔 보던 모습인데도 오늘따라 색다르게 보인다. 유리벽 너머로 향긋하고 쌉싸름한 커피 향이 나를 유혹한다. 문득 그녀가 생각나 전화를 건다.
"친구야, 카페라떼 한잔 할래?"
첫댓글 짝짝! 공감 100%..카페라테 한잔하려 제가 달려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