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경은 대한제국 학부 안에 차린 국문연구소 위원으로 참여했으나 그 연구소에는 일본인도 있었으며 윤치오, 지석영과 다른 조선인들은 우리말을 우리 글자로만 적는 말글살이가 참된 국어독립이라는 주시경 뜻과 같지 않았다. 그래서 국어연구소에서 일을 하면서도 제 뜻을 펴려고 그의 뜻을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1908년에 ‘국어연구학회’를 만들었다. 이 학회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든 말글학회이며 세계 최초 언어학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1910년에 나라를 일본에 완전히 빼앗기니 우리말을 ‘국어’라고 할 수 없어서 1911년에 그 모임 이름을 우리 토박이말로 ‘배달말글몯음’이라고 했다가 1913년에 다시 ‘한글모’로 바꾸고 활동을 이어갔다. ▲ 오른쪽은 국어연구학회 이름을 ‘한글모’로, 조선어강습원은 ‘한글배곧’으로 바꾸고 연혁(죽보기)을 적은 책. 왼쪽은 일제 강점기 조선어학회가 전국순회 한글강좌를 하고 찍은 기념 사진. © 리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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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회장을 맡았던 주시경이 일본 감시가 심해서 1914년에 중국으로 망명을 준비하다가 갑자기 숨을 거두게 되면서 이 모임이 위기를 맞게 된다. 그렇지만 주시경의 제자들은 스승의 뜻을 이어서 한글을 가르치는 일과 우리 말모이와 말본 만드는 일을 계속한다. 그러다가 1915년에 최현배가 일본 유학을 가고. 김두봉이 1919년 3.1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중국으로 망명하게 되니 활동이 좀 시들해지는 듯 했다, 그러나 1921년에 주시경 제자 권덕규, 장지영, 신명균, 임경재, 최두선 들을 중심으로 조선어연구회란 이름으로 명칭을 바꾸고 다시 활발하게 활동을 시작한다. 그 때 우리 토박이말 이름을 버리고 한자말 이름으로 바꾼 것은 일본의 감시를 피하려는 뜻으로 보인다. 이렇게 일본에 나라는 빼앗겼지만 우리 겨레 말글을 지키고 갈고 닦는 일은 멈출 수 없었기 에 1926년에는 가갸날(한글날)을 만들고 그 날마다 우리 말글 독립을 다짐하고 겨레와 겨레말을 사랑하는 이들이 뭉친다. 1927년에는 학술 연구지 ‘한글’을 창간하고, 1929년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고 우리말 말광 만들기에 힘쓰고. 1931년에는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19933년에 한글맞춤법을 제정한다. 그리고 전국을 돌면서 조선어강습회를 열고 우리말과 한글을 알리는 일과 연구를 한다. 1936년에 표준말을 정하고 1938년에 외래어표기법을 완성한다. 1940년에 오랫동안 만들던 조선어사전 출판허가를 받고 1942년 출판을 준비하다가 일제가 조작한 조선어학회 사건에 학회 간부들이 함흥 경찰서에 끌려가 옥살이를 한다. 이 모두 우리 겨레말 독립운동이면서 우리겨레 독립운동이었다. 그리고 나라를 다시 찾아 세울 준비였으며 광복운동이었다. 조선어학회가 일제가 감시가 심한 나라 안에서 이 운동을 착실하게 잘 진행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잘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회원들이 외국유학을 다녀온 훌륭한 인물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저만 잘 살려면 얼마든지 일본 관리가 되어 잘 살 수 있는 길이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둘째, 국어학자와 애국지사들이 똘똘 뭉쳐서 함께 일했다. 최현배, 김윤경, 이윤재 같은 국어학자들이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이우식, 장현식 같은 이는 학회에 재정을 지원했고. 안재홍, 이인, 김도연 같은 민족독립 운동가들이 함께 했기에 된 일이다. ▲ 왼쪽은 표준말 사정위원들이 회의를 하고 현충사를 방문했던 기념 찍그림인데 앞줄 한복을 입은 이가 장세권, 오른쪽은 일제 강점기 장세권이 조선어학회에 기증한 화동 사무실 터. © 리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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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서울 종로에 일본식 가옥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한옥을 지어 돈을 많이 번 장세권은 표준어 사정위원으로 참여했지만 학회가 변변한 사무실도 없이 애쓰는 것이 안타까워 학회에 집을 지어주고 재정지원도 했다. 오늘날 재벌이나 부자들은 우리말 독립을 방해하고 영어와 한자 섬기기에 나서는 것과 견주면 그 때 돈 많은 분들은 참으로 훌륭했다. 그리고 학회 간사장을 맡은 이극로의 정치력이 남달랐다. 그는 독일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하고 박사 학위까지 받았지만 나라 말 독립이 독립운동 가운데 가장 먼저 할 일이고 그러려면 말광이 있어야 한다고 조선어사전편찬회를 만들고 학회 간사장을 맡은 뒤 일본 감시를 피하려고 일제와 잘 통하는 동아일보 김성수 사장과도 가깝게 지냈다. 이 밖에도 많은 애국지사들이 조선어학회가 만든 한글날을 중심으로 뭉치고 함께했기에 학회가 한글맞춤법을 만들고 표준말과 로마자표기법을 제정하면서 우리말 말광을 만들 수 있었고 광복 뒤에 우리 말글로 교과서도 만들고 공문서도 쓸 수 있었다. 오늘날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일본 식민지 교육으로 길든 일본 한자말을 일본처럼 한자로 쓰자는 이들 편을 들면서 우리말을 한글로만 적는 말글살이를 하자는 한글학회와 한글을 못살게 굴지만 1920년 창간했을 때부터 1930년대 초까지는 학회와 함께 한글교육에도 힘쓰고 학회를 도왔다. 오늘에도 이 두 신문과 언론이 우리말과 한글을 좀 더 사랑하고 바르게 써서 우리말 독립을 돕고 이 일에 이바지하면 좋겠다. 1926년 ‘가갸날’을 처음 만들었을 때에 동아일보가 실었던 한용운이 쓴 ‘가갸날’이라는 시와 1930년에 동아일보가 한글날 특집을 내면서 실었던 조중현이 쓴 “한말과 한글”이라는 시를 읽으면서 한글을 살리고 지킨 조선어학회와 애국지사들 고마움을 되새겨보자. ▲왼쪽은 1926년에 한용운이 쓴 ‘가갸날’ 오른쪽은 1930년 조중현이 쓴 ‘한말과 한글’이라는 시. 한용운은 영어나 한자말보다 우리말이 훌륭함을, 조중현은 우리말과 글자 이름을 알려주면서 우리 말글 사랑을 외쳤다. 이 두 분은 불교인이었고 조중현은 조정래의 아버지다 © 리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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